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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삶의 의미에 대해 신비주의와 허무주의의 거품을 거두고
최대한 논리와 증거만을 바탕으로 명료하게 대답하기
2010년 가을, 하버드 대학에서 한 사내가 권총 자살한다. 자신의 자발적 죽음을 정당화하는 총 1,900여 장에 이르는 철학적 유서를 남긴 채. 이 유서의 제목은 ‘자살노트’였고, 모든 것은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단 한마디, 즉 허무주의로 압축된다고 썼다.
삶의 부조리함과 그 논리적 귀결로서의 철학적 자살의 가능성을 제기했던 선구자는 알베르 카뮈다. 이 책은 카뮈로 상징되는 허무주의 논리의 타당성을 시지프스 신화의 모티프를 통해 철학적으로 탐색하는 책이다. 아무런 목적도 성과도 없이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원초적 무의미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삶의 의미가 생겨날 수 있는지 흥미진진한 철학적 사고실험을 통해 따져본다. 저자는 로버트 노직, 리처드 테일러, 피터 싱어, 토머스 네이글, 테리 이글턴 등 현대 영어권 철학자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최신 논의를 바탕으로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 인생에 의미는 없다는 사고, 삶의 의미는 알 수 없다는 막연한 주장들을 논박한다. 그리고 도덕적 당위나 종교적 편견 없이, 논리와 증거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개념의 지도를 명료하게 그려낸다.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믿는 사람들,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통찰과 읽는 재미, 뜻밖의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에서 어렵다고 지적된 ‘의미의 의미’ 부분을 좀더 쉽게 풀어썼고, ‘삶의 의미’라는 개념의 역사에 대한 최신 연구를 반영하였다.
🏫 저자 소개
이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개인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삶의 의미를 다룬 책들을 번역, 집필하고 있다. 《개소리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등을 옮겼고, 《비트겐슈타인의 인생노트》를 편역했다. 공역으로 《비트겐슈타인 회상록》, 《빅 퀘스천》, 《종교 본능》이 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철학과에 들어갔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졸업 후에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그동안 잊고 지내던 인생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시 대학원을 가기 위해 철학과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주제로 논문을 지도할 교수를 찾기가 마땅치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방향을 모색하던 중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을 번역하면서 영미철학계에서 1980년대 이후 삶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관련 논문과 단행본들을 읽어나가며 탐구하고 궁리한 결실이 이 책, 《굿바이 카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알 듯 말 듯한 모호한 대답으로 마무리하거나, 인생의 의미는 개인이 각자 깨닫는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을 피하고자 했다.
📜 목차
프롤로그
1 인생은 과연 무의미할까?
1. 카뮈_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2. 시지프스_원초적 무의미
3. 시지프스의 삶 vs 인간의 삶
4.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한 이유는?
2 시지프스 구하기
1. 객관적 가치
2. 주관적 만족
3. 생명의 풍경_삶의 의미는 삶 자체일까?
4. 사라진다는 것
5. 영원한 권태
6. 본능의 시지프스
7. 욕구의 주체성
3 무엇이 삶의 의미인가?
1. 무의미와 관점의 문제
2. 냉동인간과 마크로풀로스
3. 벌레의 관점, 인간의 관점, 우주적 관점
4. 내부의 관점과 외부의 관점
5. 부조리에 대응하는 자세_아이러니
6. 아이러니의 전략
7. 천국과 지옥
4 더 커다란 의미를 위하여
1. 객관적 가치를 통한 주관적 만족
2. 변화와 성장
3. 시지프스 vs 라인홀트 메스너
4. 자기완성
5. 시지프스에게 사회가 있다면?
6. 우리 모두는 시지프스다_공동체
7. 자아실현에서 존재의 완성으로
5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서
1. 인생의 의미를 묻는 까닭은?
2. 의미의 세 단계
3. 의미의 의미
4. 한계의 초월
5. 의미와 가치
6. 의미의 북극_무한을 향해
7. 인생은 정말 무의미할까?
8. 무의미한 삶이란?
맺음말
후기
해제: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이현우(로쟈)
주
참고문헌
📖 책 속으로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같은 방식으로 형벌을 내리지만, 약간 생각을 바꿔서 ‘변태적으로’ 자비롭게도 그에게 어떤 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충동, 즉 바위를 굴려 올리는 본능을 심어놓는다고 가정하자. 이것을 변태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 자체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합리적 이유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는 그러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그 본능은 바위를 굴려 올림으로써만 충족되므로, 그는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고, 바위가 굴러 내리자마자 쉬지도 않고 또 굴려 올린다. 그것도 기꺼이, 매우 즐거워하면서 말이다.”
이 덧칠한 그림에서 신들이 시지프스가 원하는 것을 형벌로 준 것인지, 아니면 형벌의 내용을 소원하도록 그의 머리를 살짝 돌게 만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 이제 더 이상 그의 삶은 예전처럼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할 수 없다. 바위 굴리기는 기쁨의 원천이며, 그는 평생, 아니 영원히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꿈에도 바라는 지상천국의 모습이 아닐까?(26~27쪽)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초은하계 정부에서는 지구인이야 알든 말든 상관없이, 수백만 년 전부터 지구의 공전 궤도가 새로운 은하계 여행 도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구를 철거한다는 계획을 공고하고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를 기해 지구라는 행성과 그 위의 80억 인류와 생명체는 은하계에서 마치 개미집이 철거되듯 순식간에 소멸하게 된다. … 인간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고 보는 허무주의의 관점은 더 큰 존재가 외부로부터 작은 것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드러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일면적인시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부조리하고 허무하다고만 본다면 그것은 외부의 일면적 시선을 마치 전면적 시선인 양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78~80쪽)
우리는 앞에서 어떤 것을 내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가치 있고 중요하게 나타나는 반면,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하찮고 무의미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자들이 의미를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은 의미를 내부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다. 반면 현자가 의미를 중요한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은 의미를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데까지는 성공하여 삶의 의미(또는 무의미)를 인식하는 데까지는 도달했지만, 삶의 의미의 외부로까지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133쪽)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는 20대에 쓰여졌다. 그래서 아직은 사춘기의 느낌이 묻어난다. 인간의 의미 요구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우주에 절망하는 카뮈의 모습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얻지 못해 좌절한 소년의 어리광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년기에 이른 사람이 여전히 카뮈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나이착오적’이다. 앞에서 보았듯 카뮈보다 훨씬 앞서 우주의 냉정함天地不仁을 깨달은 노자의 경우를 보면 노인네다운 담담한 관조로 무심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각 단계에 맞게 기어 변속이 필요한 것이다.(138쪽)
우리는 이처럼 객관적 가치와 주관적 만족을 통한 자기완성이라는 귀납적 기준과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의 자기초월이라는 연역적 기준을 통해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해 그 의미의 상대적 크기를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삶과 죽음을 비교해보면, 삶은 죽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삶은 객관적 가치 생산을 통한 주관적 만족이라는 귀납적 의미 기준을 충족할 가능성이 있지만, 죽음은 그 가능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죽음은 삶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가치 기준에서 볼 때 삶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다. 결국 헤스먼이 말하는 인생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죽음
은 삶보다 더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카뮈의 말대로 인생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부조리한 삶이 조리 있는 죽음보다 가치 있다.(185~186쪽)
🖋 출판사 서평
인생의 의미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면승부하기
카뮈는 일찍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 문제라는 것. 하지만 인생의 무의미함을 절절히 묘사했던 카뮈 자신은 자살하지 않았고, 풍부한 삶을 즐기다가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0년 가을, 하버드 대학에서 한 사내가 총 1,900여 장에 이르는 철학적 유서를 남긴 채 권총 자살한다. 자신의 허무주의 논증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인생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이 책은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는 물음, 즉 “인생은 과연 무의미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전반부는 실천윤리학자 리처드 테일러가 시지프스의 신화를 모티프로 전개한 독창적이고 기발한 사고실험을 인용하여, 원초적 무의미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삶의 의미가 생겨날 수 있는지를 귀납적으로 탐색한다. 후반부는 로버트 노직이 전개한 의미의 개념 분석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 구조를 연역적으로 밝혀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귀납적 탐색과 연역적 탐색이 동일한 결론으로 이어짐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의미를 논증해낸다.
시지프스는 어떻게 무의미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리처드 테일러는 아무런 목적도 결과도 없는, 고통스런 노동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삶이 어떻게 무의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사고실험을 통해 면밀히 따져본다. 시지프스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함께 바위를 굴린다면? 가치없는 바위 대신에 값비싼 보석덩어리를 굴린다면? 무거운 바위 대신에 가벼운 조약돌을 옮긴다면? 올라갈 때마다 바위를 바꿔가며 옮긴다면?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지만 좀처럼 의미는 생겨나지 않는다. 과연 시지프스는 무의미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이리저리 모색한 끝에 마침내 두 가지 후보를 찾아낸다.
“만일 시지프스가 올려놓은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면? 산 위에서 건축되어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테일러가 생각해낸 첫 번째 의미의 원천은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라는 노동의 목적이자 가치의 생산물이다. 산꼭대기에 올려놓자마자 굴러 떨어지는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노동의 구체적 결과물이 나타나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원래의 풍경을 지배하던 무목적성이라는 암울한 안개가 다소 사라지면서 의미의 모습이 서서히 떠오르는 듯하다.
테일러가 두 번째 의미의 원천으로 찾아낸 것은 주관적 만족이다.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같은 방식으로 형벌을 내리지만, 약간 생각을 바꿔서 자비롭게도 그에게 어떤 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충동, 즉 바위를 굴려 올리는 본능을 심어놓는다면?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바위를 굴려 올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시지프스의 형벌이 달라진 것은 없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바위는 끊임없이 올라갔다가 굴러 내릴 것이며, 어떠한 과업도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지프스의 핏줄에 흐르는 본능적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그의 삶은 마치 지상천국에 있는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넘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테일러의 사고 실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더욱 진전시킨다.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라는 객관적 가치도 언젠가는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전이라는 객관적 가치도 단지 천천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불과한 것, 따라서 결국은 허무한 것이 아닐까? 만일 신전이 사라지지 않고 영구불변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권태 속에 빠지지 않겠는가? 본능이 충족되는 주관적 만족에 대해서도 저자는 객관적 가치가 결여된 주관적 만족이 삶의 의미를 보장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테일러 논증의 약점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도대체 어떻게 의미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작별하다
이 책은 저자가 20대 초반부터 궁리해온, 카뮈로 상징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대답이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인터넷 서평가 로쟈가 말했듯 이것은 존재의 이유를 물었던 청춘의 질문에 대한 인생 2라운드에서의 답변이다.
저자는 원초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시지프스의 삶이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반적인 모습과 같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지프스의 삶에서 먼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저자는 바로 이 난제에 도전한다. 그리고는 20여 년 해묵은 문제에 대해 마침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답변을 얻었다고 자평한다.
저자는 삶의 의미에 대해 알듯 말듯한 모호한 대답으로 마무리하는 명상서나, 밑도 끝도 없이 ‘사랑입니다, 희망입니다’를 부르짖는 자기계발서식 해법을 배격한다. 인생의 의미는 개인이 각자 깨닫는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에 이르지도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생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안전한’ 통념을 뒤집고 저자만의 명쾌한 논리와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영미철학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의미론을 종합하여 삶의 의미 체계를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라고 정리한다. 이 의미 기준에 따라 석가모니나 예수 등의 성인들, 간디, 안중근, 스콧 니어링 등의 역사적 인물, 그리고 성철, 노무현, 안철수 등 동시대 인물들의 인생의 의미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문제를 사이비 문제로 진단했던 분석철학이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내놓기 시작한 삶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위로가 아니라 의미를 찾으라
이 책은 현재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거나 한때나마 의문을 품어본 사람을 위한 책이다. 이 의문은 우울증에 걸려 고독과 좌절에 빠진 사람이 던지는 질문과는 다르다. 그것은 큰 병에 걸렸거나, 실직을 했거나, 연애에 실패했거나, 가족을 잃었거나 등의 이런저런 사연 때문에 절망에 빠진 ‘귀납적인’ 허무감이 아니라, 삶이 원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단 하나의 대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연역적인’ 허무감에서 나오는 물음이다.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주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나 종교적 위안은 여기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한 독자,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감성적인 위로가 아니라 이성적 논리를 가지고 탐구하고 싶은 독자,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 열심히는 살지만 왜 사는지는 모르겠다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예기치 않은 깨달음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