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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익산성지, 두동 교회, 나바위 성당
1. 왜 하필 여기?
사실 방학에 꼭 전라도를 한 번 내려갔다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이지만 그래서 더 끌렸다.
충청도에서 출생, 경상도에서 유년기,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보내서 그런지 묘하게 모험심이 솟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방학계획이 그렇듯,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를 갈지 정하진 않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알바나 계속 하다가 복학하겠지, 뭐.’라며 나의 귀찮음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종교문화유산답사”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인터넷에 ‘종교문화유산’을 키워드로 검색했다.
웬걸, 첫 번째로 보이는 게 익산시 공식 블로그의 “익산만 가진 4대 종교, 문화유산 순례”1라는 게시물이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이거다 싶었다.
익산시 공식 블로그가 자랑하는 4대 종교 문화유산은
불교의 미륵사지 석탑, 원불교 익산성지, 천주교의 나바위 성당, 개신교의 두동교회였다.
이거 네 개 다 가면 한 번 가서 무성의하게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더 다양한 지역의 종교문화유산을 답사할 기회를 잃는 것 같아 하나는 빼기로 했다.
무엇보다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네 개 다 가면
익산 전 지역을 훑는 모양새가 되어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은 빼기로 했다.
그곳에는 왠지 사람들이 많이 갔을 거 같은데,
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걸 싫어하는, 결벽적인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하필 익산의 세 곳을 선택한 이유가 되겠다.
그리고 남쪽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원불교 익산성지라서 그곳부터 가기로 했다.
2. 사전조사
➀ 원불교? 익산성지?
그런데 원불교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민족종교 타이틀을 달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원불교 익산성지를 가기 전에는 그래도 ‘원불교’가 뭔지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에서부터 헤매봤다.
원불교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이 다년간 도를 닦다가 창시한 종교다.
그들은 자기들 종교가 창시된 날을 1916년 4월 28일로 잡는다.
그런데 두산백과를 보면 이 날은 그냥 소태산이 대각을 한 날이다.
뒤르껭처럼 공동체를 종교의 성립 요건으로 놓는다면 단을 조직한 1917년 9월을 정확한 개교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2
원불교학자들은 특이하게 “개교동기론”이라는 걸 깊이 탐구한다.
말 그대로 원불교가 세워진 동기(動機)를 말이다.
그거 뭐 어려운 일인가 싶은데 신순철이 논문3에서 인용한 자료들을 보니
원불교의 개교동기에 대한 논문이 수두룩 빽빽한 거 같았다.
신순철의 논문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향기가 폴폴 나는데,
그는 원불교가 일본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모순에 따른 민중의 고난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원불교가 왜 “원불교”인지는 찾기가 힘들었다.
원불교 조직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4하는 논문도 보고
원불교의 중심사상을 훑어주는 논문까지 봤건만
원불교가 왜 ‘원(圓)’불교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특히 김성관은 그의 논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원불교는 새로운 불교로서의 새로운 종교”라고 말하지만, 내용은 죄다 대승불교 얘기다.
내가 찾아본 자료는 이런 식이라 원불교의 ‘원’, 즉 동그라미가 의미하는 게 대체 뭔지도 모르겠고,
불교랑 원불교를 구분시켜주는 교리 상의 차이는 또 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생활불교’라고 내건 걸 보면 기존 불교보다 현세를 중시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하다.
사실적 도덕을 내세우며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정사를 잡은 관리도 선을 할 수 있으며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고 집에서도 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5라고 하니
뭔가 장자의 냄새도 나는 게 나로서는 끌리는 구석도 있다.
더군다나 내가 즐겨하는 SNS, 페이스북에는 ‘원불교는 치킨 먹어도 됨’6이라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 페이지의 활동도 꽤 흥미롭다.
불교와 달리 페이지 제목부터 게시물까지 청년층을 정확히 노리며 포교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그 특성이 궁금하다.
그러므로 나는 익산성지를 둘러보며 사찰과 차이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익산성지에 대해서 따로 수행된 연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인터넷을 뒤져봐야 했다.
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179호로 지정된 익산성지는
뭐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문화재로 지정된 게 아니라 건물 8동과 두 개의 탑이 통째로 지정됐다.
1924년 9월 익산총부라는 게 지어지면서 본원실이 생겼고,
1927년 소태산의 집인 금강원, 언제 지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있는 대각전, 공회당, 정신원, 구정원, 봉원실, 종법실이 있다.
또 특이한 게 원불교는 이제 겨우 100년 됐는데 성지가 참 많다.
영산근원성지, 변산제법성지, 익산전법성지, 성주성지, 만덕성지, 화해제우지, 연화봉초당터가 있다.
그러나 이 중 성지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건 익산성지가 유일하다.
이 유일성에 신기함을 더해주는 건 교조인 소태산이 열반에 들 때 있었던 곳이 바로 익산성지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영산에서 태어나 개교하고 변산에서 교법을 만들어 익산에서 전하며 교세 확장에 주력하다가 열반에 들었는데,
그 끝만이 국가적으로 채택된 건 왜일까?
원불교 홈페이지에서는 원불교의 교리, 조직 등을 소개하며 원불교 성지도 소개하는데, 그 소개가 매우 자세하다.
익산에서 엿을 팔아 교단의 기틀을 다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보다 보면 되게 자세해서 좋긴 한데,
왠지 개신교랑 겹쳐 보인다.
뭔가 요새 주류 개신교 교회에서 보이는 성장주의의 선두주자 같은 면모가 보이는 건 단순히 삐딱한 내 시선 탓일까?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불확실한 소문은 익산시에서 원불교의 입김이 세다고 한다.7
익산에서 단숨에 원불교 건물을 확충하면서 초기에 저축조합이라는 것도 만들었던 걸 보면
‘왜 그렇게까지 부동산을 늘리려고 한 걸까?’하는 의문이 든다.
소태산은 과연 성스러운 인물일까, 상(商)스러운 인물일까?
➁ 두동 교회? ㄱ자형 교회?
익산성지는 2005년에 문화재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붙어 있는 반면,
2002년에 전북문화재자료 제 179호로 지정된 두동 교회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달리 설명을 안 한다.
그래서 찾는데 꽤나 헤맨 익산시 홈페이지의 문화관광 카테고리에서 관광지에 대한 개요를 참고했다.
이 건물은 ‘ㄱ’자형 평면의 한옥교회로 함석지붕에 홑처마 우진각 형태이다.
1923년 선교사 해리슨의 전도로 처음 설립되었으나
1929년 무렵 지금의 ‘ㄱ’자형 교회를 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전통이 무너져가는 1920년대에 ‘ㄱ’자형 교회 건립으로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 했다.
‘ㄱ’자형 교회는 토착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개신교와 전통이 결합하면서 나타난 한국 교회건축의 독특한 유형이다.
당시 사회의 상황과 건축적 특성을 나타낸 초기 개신교 교회건축물로
한국 기독교 전파과정의 이해와 교회 건축연구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이 설명을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기로 광주세대에게도 교회라는 게
여남 간 만남의 광장 구실을 해왔는데 저렇게 지어놨다니.’라는 감상이었다.
이어 그냥 ‘ㄱ’자의 공간이 두동교회의 단 하나의 유별난 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대체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무엇이고,
해리슨 선교사는 무슨 교파기에 현대에 비해 이런 비극적 공간을 창출해낸 것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지금도 여남 따로 앉을까? 예배를 하긴 할까?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관리단체가 ‘두동교회 재단’으로 명시되어 있어 예배를 할 거 같긴 했다.
‘만약 ㄱ자형 교회가 유교적 전통과 개신교의 습합에 의한 것이라면
과연 그런 교회가 한국에 두동 교회 하나 뿐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ㄱ자형 교회를 검색어로
논문 DB를 뒤져보니 역시나 두 편의 문헌8이 나왔다. 역시나 꽤 많았다.
소래교회,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중앙교회 등등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로 북쪽이다. 황해 지역에서부터 건축된 ㄱ자형 교회는 차츰 사방으로 확산됐다.
함흥에서부터 전주, 김제까지 ㄱ자형 교회가 퍼졌다. 이런 교회는 대부분 장로교 소속이었다고 한다.
익산시 홈페이지에서 등장하는 ‘네비우스’ 정책을 편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 역시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였다.9
해리슨(W. B. Harrison) 선교사 역시 유니온신학교를 나온 남장로교인이다.10
별개의 이야기지만, 아이러니한 게 평양이 그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서 한국 개신교의 수도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ㄱ자형 교회인 장대현 교회는 이름날 정도로 대형 교회였다.
그런데 지금은 평양에서 개신교는 아마 기도 못 펼 것 같고,
서울은 여의도순복음 교회, 소망 교회, 사랑의 교회, 우리 동네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등
대형 교회 건축물들이 꽤나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100년 남짓한 시간인데 평양과 서울이 서로 사맛디 아니하니
이 조선 땅의 종교사는 참 역동적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➂ 나바위 성당
다음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조선 헌종 11년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주교, 다블뤼신부와 함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다. 1906년 베르모레르 신부가 감독과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지었다. 당시에는 목조건축으로 앞면 5칸, 옆면 13칸이었는데, 1916년 건물을 고치면서 일부분을 벽돌로 바꿨으며, 그 뒤 다시 2차례 수리를 하였다. 2층 건물과 비슷하여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천장은 판자로 처리했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았다.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며 한국 전통양식과 서양 양식이 합쳐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르모레르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있다. 문화재 명칭은 화산 천주교회→익산 나바위성당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일단 내 눈에 굉장하게 보이는 건 근현대사 책에서 본 거 같은 ‘김대건’이라는 이름이다.
찾아보니 김대건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었고, 그 집안의 순교자가 열 명이나 된다.
김대건은 어릴 때부터(물론 순교할 당시도 늙었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지만) 자기 집안의 전통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야말로 진성 카톨릭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중국에서 신학 공부하다가 서품 받고 천신만고 끝에 1845년에 조선에 선교하러 온다.
그때 육지에 닿았던 때가 나바위인데, 딱히 여기서 뭐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배 타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 넘기면서도 조선에 들어오기 힘들었는데 한 번 성공했으니까 그거 기념하는 것 같다.
그는 나바위에 도착했다가 거의 바로 서울로 올라가 사역했다.
함께 온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서품을 준 사람이고 다블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보조였던 듯하다.11
베르모레르 신부는 누군지 잘 안 나온다. 그러나 1907년에 익산의 그 촌구석에 중국인 기술자까지 불러들여 묘한 건축물을 만들어 낸 걸 보면,
삼국 합작의 사업을 주도할 만큼 추진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겠다.
왠지 더 궁금한 건 안 생기고 가서 어떻게 생겼는지 둘러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번 익산 여정에 있어서 마지막 목적지라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에 갔을 때,
얼마나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될지가 솔직히 조금 더 기대되기도 했다.
3. 솔직히 사전에 짜진 않았지만 갔다 와서 생각해보니까 짰어야 했고, 다음부터 확실히 구체적으로 짤 사전계획
이태원 쪽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실직한 카페알바로동자 친구도 위로하기 위해 여정을 빠르게 진행했다.
7월 21일에서 22일, 1박 2일로 다녀오기로 했다.
그 친구가 실직한 상황이니 나의 일정만 고려하면 됐다.
나는 알바 로동을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하고
토요일에는 저녁 여섯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한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바로 익산으로 떠나 금요일 점심~저녁쯤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자전거를 싣고 갈 예정이라 고속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익산터미널까지 두 시간 사십 분, 삯은 편도로 17500원이었다.
교통비는 왕복으로 35000원쯤 되고 답사 기간 동안 밥은
당일 저녁, 다음 날 아침, 점심, 여의치 않으면 저녁까지 해결하면 될 거 같았다.
자세히 계산하지 않고 6만원을 예상경비로 잡았다.
밤 열 시쯤 도착해서 홍어에 막걸리를 먹고 (그러면 안 되지만 돈 없는 대학생인 관계로)
찜질방에서 자고 일어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원불교 익산성지, 두동교회, 나바위 성당 순으로 가기로 했다.
4. 갔다 와서
첫 단추부터 참 불길했다. 나는 다음 근무자가 와야 퇴근을 할 수 있는 체계에서 일한다.
그런데 다음 근무자가 늦게 오는 바람에 늦게 퇴근해서 여덟 시에야 서울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익산에 열 시 사십 분쯤 도착했다.
미리 찾아본 막걸리 집을 갔는데 영업시간이 열한 시까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절망했을 때, 시간은 열한 시 오십구 분이었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맥주 한 잔 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맥주 한 잔 하고 24시간 한다는 찜질방을 갔는데 문을 닫았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한 십 분 정도 더 올라가서 찜질방을 찾았는데 거기도 닫혀 있었다.
결국 주변 여관에 들어가 잤다.
술값과 숙박비는 내가 냈으니, 그 친구한테 아침밥을 얻어먹으려 했는데 그 친구의 카드로 결제가 안 됐다.
결국 내가 또 냈다. 생각할수록 화나는 건 순대국을 먹었는데
안에 순대는 없고 죄다 곱창만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과제에 들이는 나의 노고를 생색내는 말이다.
근데 이 글에서 아마 자주 생색낼 거 같다.
➀ 원불교 익산성지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원불교 익산성지에 도착했다.
원광대를 지나가다 원광대 서쪽으로 빠져나가니 바로 길 건너편에 정문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진이 있었다.
12년에 철학과 비대위에서 구조조정 반대 활동을 했던 나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웠다.
그것도 자기들 뿌리가 되는 성지 앞에 버젓이 걸어놓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원불교를 조사하며 얻은 내 문제의식이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소태산은 상스러운 인물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정문 오른쪽에 은밀한 느낌으로 마련된 카페였다.
물론 미숫가루를 판다고 써 붙여서 다 둘러보고 꼭 들러 마시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성지’라고 이름붙이는 곳에 이런 공간이 마련돼 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개신교의 교회나 속세 속의 작은 불당, 혹은 성당에서 자그마하게 카페를 운영하는 것도 봤지만,
‘성지’에 카페를 운영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뭔가 원리주의자 같다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다.
사실 요즘 많은 종교 시설들이 카페 운영을 겸하는 경우가 잠재적 신자들이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차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지’에서 장사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미숫가루를 혹시나 싸게 파나, 혹은 불우이웃을 돕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수익금을 쓰나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성지 전체를 다 둘러보고 나가는 길에 들른 그 카페에서, 미숫가루는 한 잔에 4500원이었고, 수익금이 특별한 용도로 쓰인다는 안내도 없었다.
프라임 사업에 관한 선전물과 카페를 본 후, 삐딱한 생각을 안고 처음 본 게 ‘대각전’이었다. 다른 7동의 건물과 탑 두 기와는 약간 동떨어져 높은 곳에 있었다. 일단 바로 든 생각은 ‘불교랑 같은 게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었다. 완전히 목조 건축이었던 것도 아니고, 불당에서처럼 현란한 불상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명한 절들처럼 색채가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얼핏 보면 이소룡 영화나 최배달이라는 가라데의 무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본 일본식 도장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안에서는 왠지 호구를 착용한 수련생들이 죽도를 휘두를 것처럼 보인다.
대각전의 문은 이렇게 두 개로 나있다. 이는 유교적 관습에 따라 여남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갈 ㄱ자형 교회, 두동 교회를 사전조사했던 것도 자연히 생각났다.
그 시절의 여남관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바위 성당의 건축에도 그런 걸 함유시켰을지 하는 작은 궁금증이 또 생겼다.
그러고 보면 문이 두 개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여성이 들어가는 문, 남성이 들어가는 문으로 나눈다는 게 문제지. 우리 집은 문이 하나다.
우리 집과 재벌 회장의 으리으리한 집과 비교해도 나오는 공통점이 문이 하나라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면 옛날 집은 문이 여러 개였던 게 많은 것 같다.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연주암에 가서 봐도 대웅전 같은 건물의 문은 삼방으로 뚫려 있다.
대문은 물론이고. 문의 개수를 통해 외부에 대해 열려 있는 정도를 미루어볼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 대각전은 꽤 열린 구조를 갖췄다고 할 수 있겠다.
내부의 모습은 앞에 놓인 위패 빼고는 어릴 적 수련회로 기도원 가서 본 풍경이랑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이후로 본 건 다 비슷비슷한 건물이었다.
위 사진의 정신원 말고도 공회당, 구정원, 본원실, 종법실, 금강원, 청하원의 사진들을 다 찍었는데 다 비슷했다.
정갈하고 단출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물이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이라 건물의 풀 샷을 찍기도 무척 힘들었는데,
규모가 이 정도인 걸 보면 세계종교로 거듭나고자 했던 야심에 비해서는
진짜 알뜰살뜰하게 종교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원실이나 공회당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왠지 보령에 있는 할아버지 댁과 비슷해서 더욱 그랬다.
이 생각했는데 진짜 여행 갔다 온 바로 다음 날 할아버지께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소태산 대종사 성탑
탑 역시 딱히 좋아하는 구조물도 아니어서 별 감흥이 없었다.
중간에 저 둥근 모양도 ‘아~ 원이라는 상징을 엄청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하는 생각뿐이었다.
다만 탑 옆에 있는 ‘송대’라는 구조물에서 받은 감흥이 조금 더 신기했다.
원불교 익산성지에 들어서서 구조물들 중에서 탑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 공간에서 불교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송대에서 그런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송대는 소태산이 말년에 휴양과 글을 쓰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갔을 때, 그 곳에서는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송대는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조가 말년을 보낸 곳이라면 성소로 보존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러나 거기서 누군가 목탁을 치며 수행하고 있었다.
꽤 무거운 의미를 지닐 그곳에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돌아섰다.
원불교 익산성지에서 거의 마지막 발걸음에 들려온 목탁 소리가 참 날 복잡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그 안에 있는 구조물들에서는 불교의 색채라고는 찾기가 힘들었다.
원음각이라고 종각도 있었고 탑도 두 기나 있었지만,
원불교에 ‘불교’가 왜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같은 게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목탁 소리는 원불교가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뒤이어 떠오르는 게 두 개의 문이 달린 대각전이었다.
원불교는 다시 내게서 애매한 종교가 돼버렸다.
그러나 원불교 익산성지에서의 답사를 마무리하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미숫가루를 다 마시고 나서 생각해봤을 때,
원불교의 애매함, 더 나아가 꽤나 상업적인 모습을 조금은 애처롭게 바라보게 됐다.
나는 현재 어떤 동아리를 만들었다. 물론 중앙 동아리는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생회 간부들이 이상한 권위를 앞세워 일반 학생들에게 뭔가를 강요한다거나
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을 때, 이를 즉각 문제 삼을 수 있는 동아리다.
이런 뜻을 주변인들에게 밝히면 더욱 날 부추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가 뭐하고 싶은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지금 나도 애매모호한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온통 이 동아리에 대한 생각뿐이라 그런지 원불교에 대해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런 동질감을 갖고 보니 다르게 보였다.
원불교의 개교가 의미하는 건 혼란한 시국에서 종교마저 뒤틀리고 있을 때,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다양하게 충족하려는 하나의 방도를 마련하는 차원이 아니었을까?
프라임 사업 유치를 자랑스럽게 내거는 원광대, 그리고 원불교는 분명히 아직까지도 현실을 표류하고 있는 듯 보인다.
표류하는 원불교는 굴곡진 근대사, 그리고 여전히 굴곡진 오늘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원불교사에 있어서 찬란한 뭔가가 있었나 싶다.
웬만한 종교처럼 ‘저항’의 역사를 가진 적도 없었던 거 같고.
애달픈 대한민국사와 함께 한 원불교가 어딘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특히 원불교 익산성지를 답사한 경험을
이번에 듣는 ‘자본주의문화와 종교’ 수업에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➁ 두동 교회
두동교회에 가는 길부터는 정말 만만치 않았다.
22일 익산 바로 남동쪽에 있는 전주의 최고 기온은 34도였다.
아스팔트가 마치 프라이팬 같았다.
그래도 ‘나’라는 달걀 프라이가 학문적으로 익어가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묵묵히 페달을 밟았다.
무엇보다 순대는 없지만 맛있는 순대국의 기운이 함께 해서 그런지,
혹은 내가 가는 좁은 길 옆에 넓게 펼쳐진 푸른 논 때문에 그런지 자전거 타는 맛도 쏠쏠했다.
안 그래도 사전조사할 때 두동교회에서 여남을 갈랐다는 걸 보며 자기 어릴 적 교회 얘기를 들려준 어머니가 생각났는데,
목사가 설교하는 상 위에 놓인 성경이 1968년생인 걸 보고 좀 신기했다. 우리 어머니랑 나이가 같은 성경이라니.
한창 더울 한 시쯤에 두동교회에 도착해서 들어간 두동교회는 굉장히 시원했다.
더운데 보고서에 어떤 내용을 넣으면 좋을까 생각하느라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자전거 타다가 두동교회 안에 들어가니 다 까먹을 정도였다.
딱히 에어컨이 켜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옥 따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 두동교회는 꽤 크다. 지나오면서 본 시골교회들이 꽤 있는데 익산에서 본 교회들 중 가장 좋아보였다.
그 옆에 조그맣게 있는 구 두동교회는 다른 시골집들과 붙어 있으니 여느 집과 다를 게 별로 없어 보였다.
어쩌면 꽤 웅장한 현 두동교회와의 대비효과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또 원불교 성지에 있었던 여러 건물들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구 두동교회가 그 풍경에서 위화감이 전혀 없는 걸 보면,
그리고 원불교 성지의 그런 집들을 보면서 할아버지 댁이 떠올려지는 걸 보면,
우리나라 시골집은 아직까지 20세기 초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느낌이 의미하는 바는 꽤나 서글플 수 있겠다.
원불교 익산성지가 첫 건물(본원실)이 세워진 게 1924년, ㄱ자형의 두동교회가 세워진 게 1929년이다.
근현대사 시간에 배우기로는 이 시기가 3·1운동 후의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일제의 유화정책을 펼치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종교적 시설을 올망졸망 세워야만 했던 건 종교활동조차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 아닐까?
물론 단순히 돈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에 종교활동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 자체도 결국 일제 탓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두동교회가 정말 의외였던 건 문화재청에 아무 설명도 없는 것에 비해 종이로 된 자료가 두 가지나 비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A4용지 한 장으로 된 유인물은 맘껏 가져가라는 듯이 수백 장이나 비치되어 있었고,
익산의 문화유산을 개괄해주는 책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안에 두동교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다 찍어봤다.
사실 해리슨의 일생을 다룬 논문에서 익산의 두동교회에 대한 얘기는 안 나온다.
익산에서 잠깐 활동을 했다는 것만 나왔다.
그걸로 미루어보아 논문이 묘사하는 해리슨과 두동교회의 해리슨이 동일인물이겠지 했는데 유인물을 보니 동일인물이라는 걸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요새 페미니즘에도 손을 대고 있어서 여남을 가르는 이념을 건축에까지 반영하는 걸 약간 안 좋게 봤다.
그러나 유인물에서는 종교활동에서조차 아예 소외되는 여성들을 위해 그래도 어떤 종교를 접할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그렇게 갈랐다고 설명했다.
그 시절에는 그러는 게 원불교 대각전도 그렇고 그나마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려는 시도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➂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으로 가는 길도 역시 힘들었다. 다만 가는 길에 용안습지공원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 옆으로 금강이 쭉 흐르고, 다른 편으로는 자전거길이 쭉 깔려 있었다. 그 자전거길이 금강 종주 자전거도로라고 하던데, 다른 때 같았으면 모험심이 불타 다음에 꼭 종주해보리라는 결심을 했을지 모르지만, 작열하는 태양이 내 모험심보다 뜨거웠다. 그래도 조금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타다가 도착한 나바위 성당은 날 입교시킬 뻔했다.
여태껏 내부는 뻥 뚫려 있는 곳만 보다가 중간에 기둥이 박혀 있는 건축물을 보니 엄청 웅장해 보였다.
원불교 익산성지의 대각전에서 여남이 다른 문을 썼다는 사실을 접하고,
두동교회도 그랬으니 나바위 성당도 혹시 건축할 때부터 신경 쓴 게 있을까 했는데 그런 거 딱히 없었다.
문도 하나였다. 혹시나 앉을 때 따로 앉고 중간에 천막을 설치했을까? 이건 나중에 또 알아봐야겠다.
게다가 2층까지 있었다. 뭐 특별한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단이 굉장히 가팔라서 올라가는 재미가 있는 2층이었다.
앞에는 김대건 신부를 그린 그림이 여러 점 놓여 있었다.
근데 저기 중앙에 있는 글씨가 너무 궁금했는데 앞의 넓은 단상에 올라가지 말라는 표시가 있어서 가까이 못 다가가 봤다.
확대해도 안 보이는 저 글씨는 뭐라고 적혀 있는 걸까?
사전조사할 때 베르모레로 신부는 뭐하는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공적비에 꽤 자세하게 업적이 적혀 있었다.
토착지배세력과 무슨 갈등을 겪은 건지는 무척 궁금하고 거기에도 재밌는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또 언제 알 기회가 있을까?
나바위 성당은 동네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과 계단이 없는 길, 두 길로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계단 없는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계단으로 처음 나바위 성당을 봤으면 성당이 풍기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힘들게 올라온 화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을 계단의 중턱에서 보고 계단을 다 올라
나바위성당을 봤으면 아마 나는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하느님. 허벌나게 힘들었습니다. 으아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처음 안에 들어갔을 때, 시원한 바람도 안에서부터 살랑 불었다.
사소하지만 기적 아닐까 싶다.
원래 여름 낮이면 바깥에서 안으로 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안에 사람이 적당히 두 명 있었고.
사진을 찍으려고 들어갔지만 왠지 찰칵 소리를 내면 안 될 거 같아서 일단 다시 나왔다.
계속 있었으면 진짜 회심의 순간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 아플 정도로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그렇게 열심히 달려 도착한 곳이 두동교회와 나바위성당처럼
시원한 곳이라면 한순간에 긴장이 이완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혹시 메카나 메디나가 중동에서 가장 시원한 지역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5. 아쉬움
보통 학습계획 같은 건 예쁘게 짜도 여행 갈 때는 계획을 잘 짜지 않아서 답사 갈 때도 여행 가듯이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갔다.
또 혼자 여행가든 둘이 여행가든 그렇게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마음이 잘 맞는 친구랑 가서 망정이지, 이렇게 소홀한 계획으로 누구한테 같이 가자고 하면 반드시 욕먹을 거 같았다.
게다가 그 무더운 날에 자전거를 같이 타고 다녔으니, 같이 간 친구에게는 무척 고맙다.
무엇보다 돈을 내가 많이 내기도 했고. 그래서 돈을 참 많이 쓴 거 같다.
차비도 3만원쯤, 식비 한 4만 5천원, 숙박비 2만 5천원…….
계산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다.
아, 근데 익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는 표를 할인받을 수 있었는데 대학생도 학생 할인을 해주는 걸 처음 알았다.
내려갈 때는 무인발권기로 해서 할인 못 받아서 아까웠지만 다음 여정에는 꼭 창구에서 발권해야겠다.
찾아보니 『원불교 성지』(서문성, 원불교출판사, 1999)라는 책도 있었다.
근데 우리 대학 도서관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사기도 좀 그래서.
봤으면 보고서를 더 알차게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원불교를 수식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민족종교’다.
그래서 생각이 든 게 뭐 만날 건물만 보러 다니면 지루할지 모르니 굿도 한 번 볼까 하는 것이었다.
종교문화유산에 꼭 유형문화재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찾아보니 지금은 굿 철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굿은 웬만하면 해를 시작할 때 하나보다.
가을굿도 있나본데 인터넷에서는 죄다 풍물놀이만 할 거 같은 행사밖에 안 나온다.
그래도 언젠가 굿을 봐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굳혔다.
교수님의 첨언을 늦게 봐서 세 곳이나 가봤지만 면담을 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근데 사실 전에 이태원 이슬람 사원에서도 내 딴에 엄청난 용기를 내서 이맘, 혹은 이맘 준비하는 사람한테 말을 걸었다.
물론 웬만하면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면 되게 친절하게 알려주니 대화하긴 쉽지만,
그래도 내가 답지 않게 낯을 많이 가려서 힘들다.
그래도 앞으로 갈 때는 있는 숫기, 없는 숫기 다 끌어 모아서 누군가와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눠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