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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오늘의 역사
2024년 국민여가수 방실이(61) 뇌경색으로 사망
2023년 미국 바읻든 대통령 러시아와 전쟁중인 우크라 방문 5억불 군사지원 약속
2021년 미국 30년만의 한파 텍사스 20명 등 60여명 사망 텍사스에 중대재난 선포
2018년 청주대 제자들 배우 조민기의 성폭력 폭로, 조민기 검찰 소환 앞두고 3월 9일 자살
2014년 우크라이나 경찰특공대 반정부시위대에 발포 사망 100여 명 부상 500여 명
2014년 3년 4개월 만에 금강산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2.25까지)
2012년 일본 폭설 사망 103명 부상 663명
2009년 사브 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미국 GM자동차의 자회사인 스웨덴 자동차 메이커 사브(Saab)가 2009년 2월 20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사브자동차는 이날 스웨덴 법원에 한국의 법정관리에 해당하는 ‘회사재건(reorganization)’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회사재건은 파산위기에 직면한 기업이 채무 지급중지 조치를 통해 시간을 번 다음 회생여부를 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얀-아케 욘슨 사브 CEO는 “추가 자금조달이나 매각 등 모든 회생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GM은 최근 스웨덴 정부에 사브에 대한 지급보증 등을 요청했으나, 스웨덴 정부는 이를 거절했었다. 사브는 연간 차량생산대수 13만대 정도에 종업원수는 4100여명, 관련 하청업체 직원수는 1만명이 넘는다.
2007년 ‘키다리 미스터 김’ 가수 이금희씨 별세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로 일컬어지는 ‘키다리 미스터 김’의 가수 이금희(본명 이대금.68)씨가 2007년 2월 20일 오전 1시 15분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에서 별세했다.
이씨의 딸 민윤정(38)씨는 “지난 2005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병상에서 지내오다 최근 합병증으로 폐렴이 왔는데 호흡곤란이 심해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1959년 데뷔한 고인은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1966년 발표한 ‘키다리 미스터 김’을 화려한 춤과 함께 선보이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씨는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바리톤 오현명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교 시절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자, 생계를 위해 대중가수의 길을 걸었다. ‘용꿈’, ‘그것 참 별꼴이야’, ‘작은 새’ 등의 히트곡을 남겼던 고인은 결혼 후 두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줄여나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복음성가 가수로 다시 활발한 모습을 보였으며 1998년에는 옛 히트곡과 팝송 번안곡 ‘다이애나’ 등을 담은 음반 ‘웃기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2000년대부터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딸 윤정씨와 함께 모녀 복음성가 가수로 무대에 섰다.
2007년 석유화학업계 11년 담합 소비자피해 1조5600억원
2007년 2월 20일 정재찬 공정거래위원회 카르텔조사단장은 “SK,LG화학,대림산업,효성,대한유화 등 10개 석유화학업체들이 1994년 4월부터 2005년 4월까지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폴리프로필렌(PP) 등 합성수지 가격을 담합한 사실을 적발, 105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고 발표했다.
10개 석유화학 업체들이 지난 11년간 플라스틱 용기, 랩, 비닐 봉지, 우유 용기 등에 쓰이는 합성수지 가격을 담합, 소비자들로 하여금 이들 제품을 비싼 가격에 구입하도록 한 것이다.
공정위는 석유화학 업체가 가격 담합을 통해 소비자에게 끼친 피해는 1조56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으며, 이에 따라 앞으로 이들 제품의 소비자 가격이 내려갈 것으로 전망했다.
이 과징금 액수는 2001년 군납 유류 입찰 담합(1211억원), 2005년 시내전화사업자 담합(1152억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들이 정기적으로 사장단회의, 영업 임원·팀장회의 등을 통해 판매 기준 가격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업체별 과징금은 SK가 238억원으로 가장 많고, 대한유화(212억원),LG화학(131억원) 순이다. SK,LG화학,대림산업,효성,대한유화 등 5개 업체는 검찰에도 고발됐다. 그러나 업계 1위인 호남석유화학(롯데그룹 계열)은 ‘첫 자진신고자’라는 이유로 과징금을 면제받았다.
2007년 1600년만에 깨어난 백제 금동관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센터장 이훈)는 2007년 2월 20일 공주 수촌리 1호 고분에서 2003년 발굴한 백제 최고(最古) 금동관을 보존 처리한 뒤 공개했다. 서기 4세기 후반~5세기 초 것으로 한국·일본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관 10점 중 가장 오래됐다. 밑지름 14.7㎝, 높이 15㎝.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용이 14마리 투조(透彫)됐다. 용이 가장 많이 장식된 백제 금동관이다. 연꽃봉오리 장식은 삭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훈 센터장과 이한상 동양대 박물관장은 “한성에 도읍했던 백제가 남쪽 지역 수장들에게 하사한 위세품”이라며 “백제 금동관 중 가장 정교한 명품”이라고 했다.
2007년 철인 3총사, 111일만에 사하라 횡단
찰리 잉글(Engle.44.미국), 레이 자합(Zahab.38.캐나다), 케빈 린(Lin.30.대만) 등 3인은 지난해 11월 1일 아프리카 서쪽 끝 세네갈의 항구도시를 출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2007년 2월 20일 아프리카 동북단의 수에즈해협에 도착했다. 이들이 지나간 나라만 세네갈, 모리타니, 말리, 니제르, 리비아, 이집트 등 6개국이다.
팀의 리더인 잉글은 TV프로듀서이자 모험가로 익스트림(극한) 스포츠계에선 유명한 인물. 이미 중앙아시아 고비 사막과 아마존·보르네오정글을 가로질렀다. 승마기수 출신인 자합과 아시아의 젊은 모험가 린 또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횡단 등의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부터 달리기 시작, 밤 9시30분에 하루 일정이 끝나는 강행군을 치러냈다. 낮 더위는 섭씨 38도까지 올랐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졌다. 숨쉬기 힘들 정도의 모래바람, 피부병, 무릎 부상 등이 이들을 괴롭혔다. 이들의 장정은 매일 마라톤 정규 코스를 2차례씩 111일 동안 치른 것에 해당한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들이 함께 달린 목적 중의 하나는 비영리 국제구호단체 ‘H₂O 아프리카’가 주도하는 아프리카의 식수 부족 문제에 대한 세계의 관심 촉구와 기금 마련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이들의 행적은 배우 맷 데이먼의 해설과 함께 ‘사하라를 달린다’는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2007년 제이유 주수도 회장 징역12년 선고
불법 다단계영업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1조8000억원의 사기(詐欺) 피해를 입히고 회삿돈 284억을 횡령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던 주수도(51) 제이유(JU)그룹 회장이 2007년 2월 20일 열린 1심 공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서울 동부지법 형사11부(최규홍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제이유 영업은 먼저 사기당한 사람이 친인척을 끌어들이는 등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고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함은 물론 피해자들의 고통이 대물림 되는 등 사회에 끼친 해악이 커서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이 영업 실패의 책임을 수사 기관과 언론에 떠넘기고 재판 과정에서도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등 태도마저 불량하다”고 밝혔다.
윤덕환 제이유그룹 상임정책위원장과 오세원 상임정책위원은 각각 징역 6년,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피해 금액과 피해자 숫자가 막대하고, 제이유그룹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도 속속 나오는데 주수도 회장에게 내린 징역 12년 형은 너무 가볍다”고 항의했다.
2006년 마닐라 대통령 궁내 폭발사건 발생
2003년 美 나이트클럽 화재 210여명 사상
2003년 2월 20일 밤,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 서부 웨스트 워릭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헤비메탈 그룹 `그레이트 화이트` 공연 도중 대형화재가 발생해 최소 50여명이 숨지고 160여명이 다쳤다.
`록 미(Rock Me)` 등 히트곡을 낸 1980년대 헤비메탈 그룹 그레이트 화이트가 로드 아일랜드주 서부 웨스트 워릭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하면서 불꽃시연을 보인게 화근이었다.
무대 커튼과 천장에 튄 불꽃은 순식간에 화마로 변해 사람들을 덮쳤다. 클럽은 곧바로 공포의 도가니로 빠졌다. 수용인원이 300명에 불과할 정도로 협소한 클럽 전체가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클럽의 비상구 4개는 열려있었지만 `살인 가스`에 당황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문쪽으로 달려나갔고 이에 앞다퉈 나가려는 사람들에 밟혀서 압사당하거나 질식사하거나 건물붕괴 등으로 화를 당했다.
한편 나이트 클럽 건물은 사고 발생 한 해 전인 2002년 12월 31일 사소한 위반을 시정조치한 뒤 소방검사에 통과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사의 화근이었던 밴드의 불꽃시연이 합법적이었는지에 대해 클럽 주인은 "밴드가 폭죽을 사용할줄 몰랐다"고 해명했으나 리드 싱어인 러셀은 "우리 투어 매니저가 클럽측과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이 날의 참사는 1942년 보스턴의 나이트클럽 화재참사로 492명이 숨진데이어 1977년 켄터키주의 비버리힐스 슈퍼클럽에서 발생한 화재참사로 164명이 숨진이후 최악의 나이트클럽 화재 참사로 기록됐다.
2001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 딴 남승룡씨 별세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옹이 2001년 2월 20일 별세했다. 남옹은 손기정옹과 함께 일본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 금메달을 딴 손기정옹과 함께 한국민족의 기개를 높였다.
‘조선남아 의기충천!’ 조선일보는 1936년 8월 10일자 호외를 통해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동메달을 딴 손기정옹과 남승룡옹의 쾌거를 그렇게 전했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이들의 기개는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조선인’ 들에게 무한한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줬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남옹은 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신궁대회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양정고보를 거쳐 일본 아사부중학으로 전학한 남옹은 메이지대학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선발전에서 양정고보 1년 후배 손기정옹을 제치고 1위를 차지, 대표로 뽑혔다. 당시 일본 육상연맹은 3명의 대표 중 조선인이 두 명씩이나 포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제외시키는 시도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손옹과 함께 대표가 된 남옹은 레이스 중 20여명을 추월하는 뒷심을 과시하며 2시간31분42초의 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남승룡의 존재는 곧바로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의 화려함에 가려져 희미해졌다. 그래도 마라톤에 대한 애정을 접지 않았던 남옹은 광복 뒤인 1947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태극마크를 붙이고 미국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해 10위를 차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2001년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 별세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씨가 2001년 2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였다. 송남헌씨는 해방 정국의 산증인이자 분단 극복운동에 몸을 던진 행동가였다. 8.15 직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통일협상을 주도한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한 우사 김규식 박사를 수행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 나오면서 옥고도 여러 차례 치렀다. 해방 직전인 1943년,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방송사건으로 체포된 게 시작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보내는 단파 라디오 뉴스를 수신,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해주는 다리역을 맡았었다. 1949년에는 통일추진협의기구를 만들자는 북측 특사를 만났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불고지죄) 위반으로 구속됐고, 5.16 직후에는 혁신계 인사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현실 정치에서 물러난 송씨는 현대사 연구로 방향을 선회한다. 해방정국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방 3년사` 등을 잇달아 펴내면서 연구자로 변신했다. 우사 연구회장과 민족통일촉진회, 민족정기회 회장을 지냈다.
1992년 이스라엘 남부 레바논 침공, 국경서 5km점령 지중해쪽 진격
탱크와 병력수송용 장갑차 등 30여대를 앞세운 이스라엘군들이 1992년 2월 20일 코브라헬리콥터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레바논남부의 4개 마을로 진격, 이 지역의 회교시아파 헤즈볼라 게릴라들과 전투에 돌입함으로써 중동에 이스라엘-레바논간 전면전 위기가 고조됐다. 이스라엘군의 이번 공세는 지난 1989년 6월의 남레바논 진격작전이래 최대규모이며, 레바논 국방부는 이날 성명을 발표,현역 및 예비군들에 대한 비상령을 선포했다.
이날 이스라엘군의 레바논진격은 지난 16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빚어진 헤즈볼라 지도자 압바스 무사위의 사망으로 촉발된 양측간의 포격전끝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스라엘군은 이날 공격으로 레바논 영토내 5㎞까지 진출,항구도시 티레 남동쪽의 주요 4개 마을을 장악했다. 이날 전투는 이스라엘군과 헤즈볼라 게릴라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이스라엘군의 진격을 저지하려던 레바논주둔 유엔평화유지군과도 벌어졌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87년 브라질 외채 1080억달러에 대한 지불정지 선언
개발도상국 가운데 대외채무액이 가장 많은 브라질이 1987년 2월 30일 채무액 1080억달러에 대한 금리 지불정지를 선언했다. 채권단인 선진국의 은행들은 브라질에 빌려준 채권액에 대한 연이자 100억달러가 지불정지돼도 도산하진 않지만 멕시코,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의 이웃 중남미국가에까지 영향을 미쳐 총채무액 2850억달러에까지 지불정지선언이 이어진다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돼 경악했다.
브라질은 1982년 멕시코 지불유예 선언의 여파로 외채위기를 경험하면서 IMF 등 국제기관과 민간은행들로부터 긴급융자를 받았다. 이후 IMF의 요구에 따라 긴축정책을 실시해왔으나 정부의 잇따른 경제정책 실패로 또 다시 외채위기를 겪게되자 국민희생을 줄이는 새로운 외채협상을 위해 지불정지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때문에 브라질은 대외신인도가 급격히 추락해 오랫동안 외채협상에 시달리다 1992년 7월 `브래디 플랜`에 따라 외채 원리금을 감면받았다.
1986년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발사
러시아의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가 1986년 2월 20일 소련 연방 카자흐스탄 바이크노루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발사 당시 `우주도시 건설의 서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소련의 자긍심의 상징이었던 미르호는 예정했던 3년보다 5배나 긴 오랜동안의 우주공간에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1999년 8월 우주비행사 3명이 지구에 귀환함으로 사실상의 용도폐기됐다.
미소 우주경쟁사에 상징적인 획을 그었던 미르호는 발사 3주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공중폭발로 사망한 7명의 우주비행사의 용기를 기려 죽은 비행사들의 사진을 우주공간으로 운반,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구소련 우주프로그램의 마지막 `창작물`이었던 미르호는 2001년 3월 23일 지구대기권에 진입하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 잔해는 태평양 심연속으로 빠져 수장됐다. 8만 8,000여 회 지구궤도를 돌았고 36억km를 날면서 '하늘 위의 집'을 갖고 싶어한 인류의 오랜 꿈을 이뤄준 뒤였다.
사실 우주정거장은 인간의 달 착륙이라는 우주개발의 최고 하이라이트를 미국이 선점하자, 이 패배를 만회할 목적으로 소련이 구상한 것이다. 1971년 4월 18일 소련은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이어 미국은 1973년 5월 우주정거장'스카이랩'을 발사해 소련과 2라운드 우주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결국 소련이 미르호를 우주에 안착시킴으로써 우주정거장 경쟁에서는 승리하게 된 것이다.
미르호에서는 여러가지 의미있는 기록들이 수립됐다. 러시아 우주비행사 발레리 폴랴코프는 미르호에서 438일 동안 연속 체류하는 기록을 세웠고, 또 다른 비행사가 3회에 걸쳐 2년 이상 우중에 머무르는 동안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연이어 미르호와 도킹했으며, 12개국 우주인 105명이 이곳에서 1만 6,500여 건의 과학실험을 수행했다.
1986년 한국-레소토 국교 수립
1979년 북한, 평양세계탁구대회에 남북한단일팀 구성제의
1977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제적으로 발효
1974년 일본 패잔병, 30년 만에 필리핀 정글에서 나와
패전 후 30년 만에 투항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명령이 없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29년 4개월을 산속에서 보낸 사람의 첫 마디였다.
1974년 2월 20일 저녁, 필리핀 루방섬에서 그를 찾아나선 한 일본인 청년과 조우했을 때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전 일본 소위의 반응이었다.
오노다가 조국을 떠나 멀리 루방섬에 배치된 것은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던 1944년 9월이었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투항하지 말라 는 상관의 명령을 아로새기며 루방섬에 상륙(1945년 3월)한 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40여명만 살아남아 정글로 도주했다.
일본의 항복 사실도 모른 채 항전을 거듭했으나 차츰 패전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부분은 투항했고, 오노다 소위와 3명의 사병만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들었다.
1950년에 1명이 투항하고, 1954년과 1972년에 2명마저 사살되어 혼자가 됐으나 오노다의 의지에는 굽힘이 없었다.
미군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리는 전단을 산속에 뿌리고, 일본 정부와 가족 역시 수차례 현지를 방문해 투항을 권고했지만 오노다는 여전히 일본의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다.
멀리서 가족을 보았을 때도 미군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며 만나지 않았다니 이쯤 되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것이 정상이다.
일본은 오노다의 요구대로 과거 직속상관에게 구(舊) 일본군의 투항명령문을 보내 하산을 유도했다.
오노다는 1974년 3월 10일 필리핀 공군사령관에게 일본도(刀)를 넘겨주며 정식으로 항복했다.
처음 발견 당시 머리는 일본군 규칙에 따라 짧게 깎았고 복장은 단정했으며 소총은 반짝반짝 손질되어 있었다.
항복한 그날 밤 오노다는 30년 동안의 루방섬 정찰 및 전투경과를 과거 상관에게 보고했다.
3월 12일, 22세 청년에서 52세 중년으로 변해버린 오노다가 귀국했을 때 일본 국민은 일본 군인정신의 부활 이라며 열광하고 우익들은 일본 정신, 즉 야마토다마시(大和魂) 를 굳게 지킨 영웅 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1973년 비상각의, 소액심판법, 특가법 개정 등 의결
1973년 라오스 휴전 조인
1969년 일본 교포북송재개 결정
1968년 재일교포 권희로(김희로) 사건 발생
가네오카 야스히로로 불리던 재일한국인 권희로(김희로)씨가 1968년 2월 21일 일본 야쿠자 2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인질로 88시간 동안 300여명의 일본경찰과 대치하는 인질극이 벌어졌다.
사건은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의 한 유흥업소에 일어났다. 야쿠자 조직의 행동대장 소가 유키오로부터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던 그는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한다. 그를 더 격분시킨 것은 ‘조센징 까불지 마, 너는 왜 당해야 하는지 알겠지’라는 말 한마디였다. 그 말은 40년간 응축된 그의 한에 불을 질렀고, 결국 장총을 폭력배들에게 겨누게 한 도화선이 됐다.
1928년 1월1일 부두노동자 권명술씨와 식당 종업원 박득숙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희로가 됐다. 그의 가족에게는 늘 가난이 따라다녔고, 삶은 밝지 못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도 심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폭력에 휘둘려야 했다. 나이가 들어 결혼했지만 그 역시 순탄치 않게 끝났다.
1968년 2월24일, “민족의 명예에 상처를 입히는 ‘조센징 바카야로(한국인 바보)’ 발언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우호와 신뢰로써 발전해야 합니다.”라는 일본 다카마쓰현 경찰서장의 사죄가 NHK방송을 통해 세 차례 흘러나왔다. 김희로씨의 분노는 그제야 걷혔다. 88시간의 인질극 소동 끝에 체포된 그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31년이 지난 1999년 9월7일 가석방돼 어머니의 고향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1968년 국무회의, 향토방위군 설치법 시행령 의결
1965년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1965년 2월20일 굴욕외교라는 야당과 국민들의 거센 반대 속에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시이나 일본 외무장관이 이를 위해 우리 나라에 왔다.
이로써 해방 이후 20년 동안 단절됐던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이 기본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했다.
일본은 또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을 우리 나라에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 배상을 받은데 비해 우리는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자금을 얻어냈다.
또 일제강점기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사과가 한 마디도 없었고 일제가 강탈해간 우리문화재를 일본소유물로 인정해주고 말았다.
1965년 미국 달 로케트 레인저 8호 고요의 바다에 명중, 달촬영 성공
1963년 ROTC 1기생 2,642명 임관
1963년 2월20일, 702시간의 훈련을 마친 ROTC 1기생 2,642명의 임관식이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열렸다.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ㆍ학생군사훈련단)가 처음 출범한 것은 1961년 6월 1일, 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대 등 전국 16개대학 3,175명이 입소하면서였다. 이에 앞서 1961년 2월28일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27호에 의거해 ‘학도군사훈련단 창설준비위원회’ 가 설치됐고, 4월16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다.
우수한 대학생으로 부족한 초급장교를 충원하고 예비역 장교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창설당시 16개 대학에서 시작된 ROTC는 이후 점진적으로 늘어나 90여개 대학에 이르고 있고 41기를 포함, 총 13만7000여명을 배출했다. 명칭도 창설 초기에는 미국 제도를 본떠 ROTC라 부르다가 5기생부터 학생군사훈련단(학훈단)으로 바뀌었고 1972년부터 다시 ROTC로 돌아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3년 12월 ROTC 1기 출신의 박세환 장군이 처음으로 4성장군에 오른 것은 ROTC 출범 후 맞은 최대 경사였다.
1963년 소련 군축회의서 나토, 바르샤바간 불가침조약 제의
1962년 미국 최초의 유인우주비행 성공
소련이 가가린을 태운 인류최초의 유인(有人)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한지 10개월 만인 1962년 2월 20일, 미국의 유인우주선 ‘프렌드십 7호’가 존 글렌 중령을 태우고 우주를 향해 날았다.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라, 어서 가라(Go, baby. Go)”며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우주선이 지구를 3바퀴 돌고 4시간 56분 만에 대서양 바하마 군도 부근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미국은 우주탐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됐고 이 자신감으로 달착륙을 향한 인류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사실 존 글렌은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아니다. 9개월 전인 1961년 5월 5일에 14분 47초동안 하늘을 날았던 셰퍼드 중령이 ‘최초’의 주인공이었지만 영광은 글렌의 몫이었다. 셰퍼드의 비행은 탄도(彈道)비행이었고 글렌의 비행은 궤도(軌道)비행이었기 때문이다. 탄도란 발사된 탄환이 공중을 날아가 목적물에 이르기까지의 길이나 곡선을 뜻한다. 셰퍼드는 탄도비행의 정점인 185km의 고공을 향해 날았다가 발사 8분 후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해 귀환했다.
한국전에도 참전해 100여차례나 출격했던 글렌은 미국인 최초로 우주궤도비행에 성공했다는 사실 말고도 로스엔젤레스∼뉴욕간을 3시간28분에 돌파(1957년)하는 신기록을 수립하고 77세라는 최고령으로 우주를 비행(1998년 11월)한, 비행에 관한한 기록의 사나이였다.
1961년 신민회 결당(위원장 김도연)
1961년 3.15부정선거 재판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지 열 달이 지난 1961년 2월20일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1차 공판이 열렸다.
최인규 전 내무장관과 이성우 전 내무차관 등 5명이 법정에 섰다.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부정과 폭력을 자행했다.
부정선거를 주도한 최인규 전 내무장관에게는 4월 17일 사형이 언도돼 5.16군사쿠데타 이후 처형됐다
1958년 육군 특무부대, 양이섭(양명산) 사건 발표
1955년 동화백화점 개점(현 신세계백화점)
1952년 나토이사회, 구주군 창설과 서독 참가 승인
1951년 선교사 원한경 사망
1947년 영국, 인도독립 승인
1946년 군정청, 정당등록제 공포
1946년 소련, 사할린과 알류산의 정식 영유 선언
1928년 일본, 중의원선거 첫 실시
1920년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사망
1916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사망. 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1910년 브트로스 가리 이집트 수상 피살
1907년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 사망
1792년 일본, 운젠(雲仙) 화산폭발·쓰나미로 1만5000여명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