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의 조지 베스트, 웨일스의 라이언 긱스, 라이베리아의 조지 웨아, 페루의 클라우디오 피사로, 캐나다의 토마스 라진스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스타플레이어들이지만 정작 지구촌 축제라 불리는 월드컵에는 초대 받지 못한 비운의 별들이다. 지역예선을 뚫기 벅찬 조국의 현실에 눈물을 쏟아내야 했던 슬픈 사연의 주인공들이다. 축구는 개인이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가르쳐준 이들이기도 하다.
월드컵은 최대의 축구 잔치다. 선수와 팬이 다르지 않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려는 선수와 이를 지켜보면서 환호와 환희를 토해내는 팬의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매 한가지다.
▲ 초대 받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
하지만 월드컵이 축구의 모든 것은 아니다. 월드컵의 규모와 관심이 극히 지대하지만 축구의 전부일 수는 없다. 축구가 모집합이라면 월드컵은 부분집합일 뿐이다. 베스트, 긱스, 웨아, 라진스키가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들의 천부적인 재능과 축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깎아내리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2002월드컵에서 조국 아르헨티나가 조별예선서 탈락하자 ‘최후의 로맨티스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고 말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다.
▲ 역사의 인물로 추억하다
월드컵과는 유독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이 선수가 떠난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앨런 시어러(35) 이야기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소속의 시어러가 왼 무릎 인대 손상으로 4월22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악조건을 딛고 골을 작렬시키는 발군의 감각, 양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슈팅, 수비수들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드는 공포의 헤딩 등 또 한 명의 운명적 스트라이커를 우리는 역사의 인물로 추억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시어러가 월드컵과 아예 인연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다. 98월드컵서 주장으로 16강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에 비한다면 94월드컵 잉글랜드의 지역예선 탈락과 유로2000 이후 클럽에 전념하겠다며 조기에 대표팀을 은퇴한 결정은 아쉬움을 짙게 한다.
▲ 멈추지 않는 아름다운 도전
시어러에 대한 기억이 아름다운 건 그의 멈추지 않는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94-95시즌 이래 3시즌 연속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등 9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절대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고향 뉴캐슬의 별 케빈 키건을 흠모했던 어린 시어러는 뉴캐슬 유스팀 입단을 원했으나 수비 자원이 필요했던 팀 사정상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년은 충격을 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사우스햄튼 유스팀에 재차 도전,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17살, 시어러의 재능이 폭발했다. 시어러는 아스날전을 통해 1부리그에 데뷔, 3골을 성공시키며 30년 이상 깨지지 않던 리그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경신했다. 기존 지미 그리브스를 뛰어넘는, 17세 240일의 나이였다.
▲ 미지의 클럽으로의 이적과 결단
빅 클럽들의 러브콜이 이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중에서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애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맨유의 뜻대로 됐다면 시어러와 박지성이 함께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러는 맨유 등 빅 클럽들의 영입제의를 모두 고사하고 1부 리그에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미지의 클럽 블랙번에 전격 입단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손짓 했지만 시어러는 94-95시즌 34골로 블랙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며 자신의 선택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92년 출범한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은 맨유 아스날 첼시를 제외하고는 블랙번이 유일한데 바로 이 때였다.
이번엔 잉글랜드 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 등 유럽 굴지의 클럽들이 시어러를 영입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또 한번 소신 있는 결단을 내린다. 돈, 명예 등 물질적인 부를 뒤로하고 어릴 적 꿈이었던 고향 클럽 뉴캐슬로 이적한 것이다.
▲ 연고지 이전에 대한 교훈
숨 막힐 듯 한 경쟁의 원리가 휘감고 있는 프로 세계에선 분명 상식 밖의 결정이었다. 개인의 영달을 포기한 채 고향의 향수를 택하면서 프로스포츠의 핵심 운영 원리라 할 수 있는 연고지 주의를 지켜낸 것이었다. 시어러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충성심이 하늘에 닿지 않을 수 없었다. 잦은 연고지 이전으로 논란을 빚는 우리가 곱씹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개인의 성취는 자연스레 뒤따랐다. 고향 팀 뉴캐슬로 이적한 이후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2002년 4월20일 찰튼전 프리미어리그 개인 통산 200골 달성, 2003년 프리미어리그 10주년 국내 최우수 선수상, 특별공로상, 베스트11 선정 등 3부문 석권, 2006년 포츠머스전 잭 밀번의 뉴캐슬 클럽 개인 최다 득점 200골 경신(은퇴 시점 206골) 등 숱한 영예를 안았다.
▲ 애정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 되다
시어러가 피하지 못한 것은 부상이었다. 97년 무릎 부상을 당해 반 년 가까이 필드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2001년 5월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2003년 4월 선더랜드전에선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몰랐고 극복해냈다. 언제나 더 강해진 모습으로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시어러가 애정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정신력,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용기와 결단, 눈앞의 이득에 연연하지 않는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웨인 루니에게 메시지를 던지다
시어러는 월드컵이 축구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월드컵에서 성취를 바라는 선수들이 가슴 속 깊이 새겨야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시어러가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웨인 루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댓글 멋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