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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우문에 현답을 해주신 스따브로긴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스따님 의견에 공감하고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작은 용기를 내어 부탁드렸는데,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문학성과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에 대해 설명하시는 부분에서,
스따님이 글을 대할 때 느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랐고 기뻤습니다.
저 역시 문학성에 있어 '문제제기'의 중요성과 '재미'있는 글쓰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스따님께서 얘기하신 주제에 대해 언급하신 순서대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볼게요.
- 문학성은 일종의 허구이자 답 없는 문제제기
'남는' 게 있느냐 없느냐 한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소설에서 문제를 모두 해소시켜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일종의 글쓴이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방향 제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말해서 해피엔딩이나'현실적'이지 않은 끝맺음으로 그 문학성을 잃고 남는 게 없는 작품들도 많겠으나 비극이나 통쾌한(재미를 떠난 곱씹게 만드는) 반전의 글맺음과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열려진 결말이 자칫 작가의 무책임으로 연결되거나 독자를 어안벙벙하게 만들어 읽는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역시 지양되어야겠지요. 걔 중에는 글쓴이 자신도 도대체 처음에 내가 무엇을 말하고 전달하려 했던가 잊어버린 채 성급히 끝맺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편 봤는데 끝이 영 어설프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이해가 안되고 허무하여 극장을 나서면서 괜히 영화봤다며 돈 아까워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글을 쓸 때 모호한 결말이나 열린 엔딩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작가가 의도한 주제여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다른 의미에서 '남는' 게 없는 작품이 되고 말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 문학성이 소설이 획득해야하는 지고의 가치는 아니다. 재미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재밌고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
스따님께서 말씀하시는 '문학성'이라는 것을 '예술성'으로 그대로 말을 바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문학 뿐 아니라 영화나 음악 미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백남준씨는 '예술은 고급 사기'라고까지 표현하셨다는데 일종의 허구이면서 남는 게 있어야 하고 재미 역시 놓쳐선 안된다는 것이 모두 공통되겠지요. 작가주의 영화 VS 대중 영화 혹은 클래식 VS 팝송 등의 대결 구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지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도 안 되고 깊게 볼 때 '좋은', '훌륭한' 작품은 3박자(작품성, 재미, 볼거리)를 모두 갖춘, 여러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입니다. 스따님이나 저를 예술의 세계로 이끈 작품들은 모두 재밌고 감동을 줬던, 오래오래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 것들이지요. 그것이 어릴 때 우리가 봤던 동화이든 명작 만화이든, 혹은 귀신 영화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저역시 스따님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제게 능력이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스따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재밌으면서 감동적인 글을 쓰실 것입니다. 김용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김용과는 다른 색깔로, 독특한 맛의 소설을 쓸 것입니다. 순수문학보다 더 재미나고 감동적이고 가슴에 오래 남는, 그런 멋진 작품을 스따님께서 만드실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제가 스따님의 글에서 느낀, 고심의 흔적과 노력의 열정은 언젠가 자신의 작품들을 바라보며 흐뭇해 할 미래의 스따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믿어 의심치 않고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아울러 저도 힘을 얻구요.
- 기존의 판타지라기 보단 환상문학
괜히 우문현답이 아닌 것이, 판타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을 하지 않은 상태로 스따님께 질문을 던졌는데, 이를 가늠해서 분명한 선을 그어 설명해 주시고 좋은 작품들을 추천까지 해 주셔서 감동 받았습니다.
사실 관련 작품들을 많이 읽어 본 것이 아니라서 따로 추천해 드릴 만한 책은 알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 경우는 원래 철학과 영화를 공부하다가 뒤늦게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케이스이기에 정말이지 제 독서 경험이 일천하여 도움을 못 드려 맘이 아픕니다. 언급해 주신 이문열이나 이외수 씨의 작품과 25시 등은 읽어 봤는데 모두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이문열씨가 가끔 무협소설도 읽고 한다는 사실은 몰랐는데 새롭네요. 주제와 소재 선택, 문장력에 있어 확실히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스따님과 마찬가지로 녹정기를 참 즐겁게 봤고 많은 김용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김용의 작품 중 저만의 베스트를 꼽으라면 신조협려와 소오강호를 뽑습니다. 그리고 아직 안보셨다면 몇년마다 새로운 버젼으로 나오는 사십여부작의 중국 김용 무협드라마도 꼭 보시길 바랍니다. 참 재밌는 것이 같은 내용이고 줄거리 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연출했느냐, 어떻게 구성하고 각색했으며 누가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또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예술도 마찬가지겠지요. 시나리오에 있어서도 우리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이미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나왔던 패턴들이 반복되거나 섞이는 것이 다라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늘 새로운 작품을 접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같은 춘향전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본 줄거리는 바뀌지 않으나 그것이 임권택이 연출하느냐 3류 감독이 연출하느냐, 혹은 같은 사람이 만들더라도 그 시대와 스케일이 달라짐에 따라 또 다른 맛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무협의 경우 사람의 목숨을 너무 쉽게 다루고 '허구적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참으로 안터까우나, 걔 중에는 우리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 이를테면 김용의 작품과 같은 수준높은 판타지가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습니다.
국내의 경우 그렇게 좋은 작품이 흔치 않으나 용대운의 '군림천하'는 괜찮더군요. 그 외 여러가지 색다른 시도를 한 것들이 많으나 그렇게 '남는' 것은 몇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꼭 소설책이 아니더라도 혹시 글쓰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라도 말해 볼게요.
애니메이션의 경우, 저는 어릴때부터 죽 좋아햇던 마크로스와 은하영웅전설, 성투사성시, 카우보이 비밥 등을 추천합니다. 은하철도999나 아톰, 코난 같은 명작은 제외하고, 먼저 언급한 것들 중 혹시 안보신 것이 있으시면 극장판 등과 함께 원작들을 구해서 꼭 한번 보세요. 비록 애니지만 그 세계관이나 배경 설정이 참 괜찮습니다.
일본 만화지만 생각난게 있어 적어봅니다. 혹시 '캠퍼스 러브스토리'나 '골든보이', '지뢰진' 등을 보셨는지요. '시마과장' 같은 무거운 것 외에도 재밌으면서도 굉장히 심리적이고 배울 것이 많은 작품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만화방에 가면 나쁜 아이라고 세뇌교육을 받았던 것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군요.
영화는.. 얘기하자면 끝이 없겠네요. 분명 스따님도 많이 섭렵하셨을테고 나름대로 아끼는 작품이 많을 줄 압니다. 제 경우 처음 영화 공부하게 된 가까운 계기가 된 것은 영화 '중경삼림'을 보면서 였습니다. 왕가위 감독 작품 중 당연 수작인 이 작품은 나오는 대사도 시적이지만 그 영상미 역시 예술입니다. 영상으로 시를 썼다고 하면 맞을까요. 시각적 요소로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그 내용, 결말도 훌륭합니다. 이 영화의 OST는 아직도 가지고 있네요.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는 이제는 너무 진부해져서 언급하면 안되겠지요? 헐리우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이면서도 재밌고 두고두고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영화는 참 드물지요. 사람들은 욕하지만 저는 매트릭스 2, 3편 역시 1편 못지 않게 잘 만들었고 철학적으로 얘기해 볼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 한류의 선봉이 됐던 '가을동화'부터 최근의 '네 멋대로 해라',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같은 작품들은 그 극본을 쓴 작가들과 PD이 무척이나 크게 보이더군요. TV드라마라 해서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지요.
소설은 제 경우는 솔직히 학창시절에 읽은 세계 명작 선집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같은 성장 소설, 샤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소설, 그리고 시드니 셀덴의 소설 등이 제 밑바닥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명작의 경우 어릴 때 읽는 것과 나이 들어 읽는 것이 또 다르더군요. 관심 분야만 진지하게 팠기에 그 깊이는 매우 얕으나 각종 철학 서적들이 낮은 확률이지만 제 고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양철학에서는 니체를, 동양철학에서는 초기불교와 명상, 그리고 오쇼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성인들의 책들을 좋아합니다.
우선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봤습니다. 또 계속 생각하면 끊임없이 나올텐데 언젠가 또 얘기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예전에 제가 이 곳 작지 게시판에 영상과 소설의 관계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글이 됐든 영상이 됐든 그 표현 수단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그 근본 주제와 지은이의 자세는 같다고 봅니다.
소설이 됐든 영화가 됐든 만화가 됐든, 예술 작품 하나가 한 개인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지대합니다.
그 소중함을 알기에 지금의 저도 스따님도 앞으로 그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스따님과의 대화(?)가 그동안 제가 접했던 작품들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닐 시절 TV에서 접했던 많은 훌륭한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사춘기 시절의 성장소설, 이후 내면 세계를 확장해준 영화들, 그리고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철학 관련 책들과 잠언록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존재들이 참 많네요. 여기에 살아가면서 얻은 인생경험과 고민들이 앞으로 저의 활동에 단단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스따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미천한 저이지만 감히 지껄여봤습니다.
왠지 스따님과는 언젠가 좋은 자리에서 뵐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걸어온 길이 다르고 나이나 성격도 다르겠지만, 이 넓은 세상에 같은 고민을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재밌고 멋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힘쓸 것을.. 기대하고 약속합니다.
제 섣부른 기대와 감사를 부디 저버리진 말아 주세요.
첫댓글 성실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제 게임은 자제(캐삭하고 아주 접을 수는 차마...)하고 책도 읽고 글도 써야겠습니다. 소개해주신 작품들도 감상해야겠습니다. 알고보면 저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는 다른 직업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글 쓰는 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이번년도에 다시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안되면 그냥 문화소비자가 되는 거겠지요. 사랑니님께서는 꿈을 잃지 마시고 바라시는바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열정과 실천력만 있다면 좋은 글은 시간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