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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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1968년 1.21일 북한군 특수부대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날이다. 실패하고 北上하는 이들의 退路를 차단하고 生捕하거나 射殺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전을 수행했다. 영하 20도 넘는 추위속에 매복하여 북상하는 일당중 우리 부대가 1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작전 당시 병사들은 한파 속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경계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을 지휘한 중대장으로서 1.21사태는 6.25이후 15년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포된 김신조의 조사가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이 훈련할때 “우리는 자신감이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하면서 교관들은 동무들은 세계최강의 용사라고 하며 국방군들이 동무들을 비행기로도 못 쫒아오게 만들어준다“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우리의 군대는 어떤 현실이었나? 군대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집단이다. 평소에 부단이 싸움(전쟁) 연습인 군사훈련을 해야 한다. 현실은 병사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지도 못하고 훈련은 형식에 그치고 있었다. 군복은 기워서 입고 겨울철에 나무뿌리를 케서 페치카를 덮혀 난방을 했다. 보리밥에 국은 멀겠다. 나라가 가난하여 국방예산이 부족하였지만 집행하는 군 관련자들의 행태를 목격한 전방의 소대장으로서 분노마저 느꼈다.
24개월의 ROTC 군복무는 1,21사태로 전역이 4개월 연장되었다. 예비군이 결성되고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방에서 병사들의 교육훈련이 강화되는 것을 보면서 전역을 했다. 전역후 직장에 다니면서도 전우들과 교분을 나눴다.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실세 권력자도 있었다. 그중에 S장군은 참 군인이고 강군 육성에 기여할 인물이었는데 김영삼 정권에서 강제 전역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며칠전 김정은이 한국을 남한 괴뢰도당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호칭했다. 이는 같은 민족이 아닌 敵國으로 언제든지 대한민국을 공격할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과 맛짱 뜰정도의 핵무기를 완성한 자신감인지 虛勢인지 알수는 없다. 우크라이나가 쏘련의 공격을 받은 것은 핵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세계 10위 경제력을 가진 국가의 안보를 미국의 지원과 배려, 국제기구의 조정으로 해결하려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일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 굴욕적인 9,19남북 군사합의서를 체결했다. 전쟁 없는 평화가 좋다고 선동할 때 힘없는 보수 야당은 속수무책이었다. 현재는 보수정권이 칼자루를 쥐었으니 안보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과단성을 보여야한다. 우리의 경제력으로 내부의 힘을 기르고 그 힘을 적절히 안배해서 사용할 수 있을 때 강한 국가로서 나라를 지킬수 있다.
앞으로 핵무장의 공론화, 비핵화 폐기, NTP탈퇴 등등.. 어떠한 불이익도 감내할 의지가 있음을 對內外에 천명해야 한다. 대만과 일본은 결심만 서면 즉각 핵무기를 만들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원자력 산업을 볼 때 핵개발에 필요한 플루토늄 생산을 미국의 반대하는 것은 외교력을 총동원해서 막아야 한다.
군복무를 하면서 병사들과 함께한 시간과 국가에 봉사했던 자부심은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는 군가처럼 짧은 군생활을 통해 확실한 국가관과 충성심을 갖게된 점은 젊은 시절의 큰 보람이었다. 그러나 1,21사태 65년을 맞이하여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된 우리의 불안한 현실을 어떻게 헤처나가야 할지 걱정이다.
<高村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