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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민 9:15-23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민 9:15-23 / [길을 인도하는 구름] 성막을 세우던 날 성막 곧 계약궤를 모셔 놓은 증거의 장막을 구름이 온통 뒤덮었다. 저녁때에는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이 될 때까지 성막을 환히 비추었다. 16) 그 구름은 늘 낮에는 성막을 덮고 있다가 밤에는 불같이 보이는 구름으로 변하여 성막을 비추었다.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진영을 거두어 길을 떠났고 구름이 머무르는 곳에서는 그들도 진을 쳤다. 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여호와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을 치기도 하고 길을 떠나 행진하기도 하였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진을 친 곳에 머물렀다. 19) 구름이 성막 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때에는 그들도 계속 머물렀으며 20) 때때로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 밖에 머물러 있지 않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기도 하고 행진하기도 하였다. 21) 구름이 저녁때부터 아침까지만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떠나면 곧 그곳을 떠나 진을 움직였다. 22) 하지만 이틀이든 한 달이든 일년이든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나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즉시 그곳을 떠나 행진하였다. 23)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하여 지시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거나 행진하였다.
구름이 회막 위에 나타나고 광야 여정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합니다. 이것은 생생한 시각적 신호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15-18) 애굽을 떠나 1년이 지나고 구름 기둥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후 바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진을 치고, 떠오를 때에는 떠나야 했습니다. 회막을 짓기 전에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있었지만, 회막을 다 지었을 때는 증거의 성막을 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막을 중심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었고 밤에는 온기와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떠나야 되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어떤 곳에 머물러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했다는 말은 구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순종(19-23)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있으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머물러야 합니다. 잠시 머물 때도 있었고 오래 머물 때도 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밤이든지 낮이든지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무는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하루든지 이틀이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경이 가라고 하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머무는 곳에 머물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무는 동안이나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고 광야를 행진하면서도 여호와께서 맡겨주신 직임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으면서 맡겨주신 직임을 지켰다고 했는데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먹고 마시면서 맡겨주신 직임을 감당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명을 감당하며 살고 계십니까?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빛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은 바로 어둠의 터널입니다. 비록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그 끝에 기다리는 것 또한 무엇인지 불확실하지만 중요한 건 그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은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터널 안에 계신 분이 있나요? 당신이 먼저 따뜻한 격려 한마디를 해 준다면 그분도 좀 더 빨리 터널을 벗어나서 빛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을 선택 할 수 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친절한 인사, 도움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 헨리 나우웬
< 설 교 >
불과 구름기둥으로
민 9:15-23 / 남수연 목사
출애굽기에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애굽과 가나안땅은 바로 이웃나라가 아닙니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600킬로가 넘습니다.
그 사이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드넓은 광야지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네게브광야만 해도 강원도 크기의 광대한 면적입니다.
저는 비교적 좁은 이스라엘 쪽 유대광야만 가보았는데 삭막한 암석산이 끝이 안보이게 굽이굽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막엔 간간이 쉬어 갈만한 오아시스지역이 있지만 집을 짓고 살 곳은 못됩니다.
이런 곳에서 음식도 없이 2백만명이 40년을 거주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에 이런 게 들어가야 맞는 것이죠.
오늘 본문성경의 제목 민수기는 백성들의 수를 세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민수기 서두에 애굽을 탈출한 인구수를 조사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히브리 성경의 원제목은 ‘민수기’가 아니라 ‘광야에서’입니다.
민수기 내용들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광야생활 40년을 기록한 것이 민수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지날 수밖에 없었던 광야는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삶이 정말 광야같이 힘들지 않은가요?
겨우 나무 밑에서 숨을 돌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체온보다 더 뜨거운 모래바람이 훅 불어오죠.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 삶에 눈물흘리며 다니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광야생활을 안전하게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에서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이 광야여정을 들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오늘 말씀에서 깨우쳐 주실 말씀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또 지난 한 주 여러 가지 시험으로 피곤하고, 먹고 사는 일에 고단했던 모든 성도님들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구름과 불기둥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시간적으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났고, 장소는 시내산입니다.
그 사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국가의 법을 제정했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구름 기둥은 이미 일 년 전 애굽을 탈출해 광야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나타나 백성들의 위에서 인도해 왔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입니다.
구름은 단순히 보호 기능만을 위한 기적현상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4장2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하나님이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보셨다고 하죠.
민수기12장5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하나님이 구름 기둥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름과 불기둥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성막을 세운 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을 덮었다고 합니다.
백성들 가운데로 더 가까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은혜로운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오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73편에서 그 깨달음을 전하잖아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런데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함께 하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게 많잖아요?
청소년부는 하나님보다는 친구하고 같이 있는 게 더 좋겠죠.
스마트폰은 너무 좋아서 아예 손에서 내려놓고 싶지도 않죠?
청년들은 사랑하는 연인과 더 함께 하고 싶겠고 부모라면 대개는 자식을 곁에 두길 원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할까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할까요?
당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더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자식과 늘 함께 하고 싶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나이가 먹고 철이 들수록 노부모께 전화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찾아뵙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과 더 친밀하게 매일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정답이 나왔죠?
자식이 부모를 덜 사랑하듯 우리가 하나님을 덜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막을 지으라고 하고 더 가까이 내려오셨습니까?
더 사랑하셔서죠.
신앙의 철이 들어가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조금씩 하나님께 다가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이 좋아서 따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일단 주님이 좋았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좋지 않았다면 삼년동안이나 그렇게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진노하시다 모세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빠지시겠다고 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 모세는 강력하게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면 자기도 안 가겠다고 합니다.
다윗도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벅찬 기쁨이 시편에 생생히 드러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만 안다면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더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정말 하나님을 더 좋아하며 기쁘게 따르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더 가까이 오고 싶어 진영 한 가운데 성막까지 오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에서 임마누엘이 무슨 뜻인지 번역해 줍니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성자하나님은 실제 사람 사는 가운데 내려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로 인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게 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8장20절에서 말씀하셨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교회 중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성막 위 구름 기둥 속에 계셨지만 신약시대엔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시죠.
요한복음 14장1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이 정말 나와 동행한다는 사실은 잘 못 느끼겠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성경을 우리에게 남기심은 지금도 우리와 그렇게 함께 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도 천국도 다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바울사도가 말씀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우리는 창조의 순간부터 항상 곁에 계시고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신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보고 복되게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오직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또 점점 더 사랑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구름과 불기둥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보호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오만의 아라비아사막을 횡단하는 예능프로가 방영되고 있죠.
아라비아사막에서 아라비아해까지 42킬로 거리를 걸어서 3박4일에 횡단하는 프로입니다.
지진희씨가 대장으로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들이 나오더군요.
촬영 중 낮기온이 최고 51도까지 올랐었다는 이 장정을 마친 뒤 PD는 살아 돌아온 게 기쁘다고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을 보면 정말 사막에서 생존하려면 그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오전 10시만 넘어도 그 태양아래 걷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탐험대원들이 그걸 하루 만에 깨닫고 다음날은 해 뜨기 전에 많이 걸어 놓으려고 새벽4시에 일어나 행군을 시작하더군요.
일단 길을 나서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늘이 될 만한 나무를 찾기까지는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멈추면 타 죽는 거죠.
그렇게 무려 13킬로를 걸어서야 간신히 나무 한그루를 발견하고 거기서 잠시 쉬는 걸 보았습니다.
시편105편39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타죽지 않으려면 거대한 구름덮개 아래 모여야만 합니다.
구름을 벗어나면 실제로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광야에서 사람이 못사는 것이죠.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을 시작했고 구름이 성막 위에 다시 머무르면 행진을 멈췄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름을 벗어나면 타 죽으니 구름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요.
때로 왜 하나님이 우리를 꼼짝 못할 광야에 두시고 구름만 따라다니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 우리가 살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어쩌다 푸른 초지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살만하면 사람들이 다 뛰쳐 나가잖아요?
광야의 삶에선 초지일관 하나님의 날개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32장 2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 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얼마나 완벽하게 예언해 놓으셨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우리는 삽니다.
지난 주 뉴스에 기가 막힌 사고 소식이 있더군요.
할아버지가 세 살 먹은 손자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을 데려다 주려다 깜빡 잊고 그냥 문을 잠그고 회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네 시간 만에 생각이 나서 달려갔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차 안에서 손자는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가족들의 남은 삶이 각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면 정말 할 말을 잃게 합니다.
정말 끔찍하고 고약스런 일을 만난 것이죠.
불뱀과 전갈과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타오르는 태양과 목마름과 쉴 곳이 없는 게 광야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상문명, 하나님 없는 인생 다 신기루입니다.
신기루를 좇다 사람들은 기진해서 쓰러져 가는 것이죠.
저기만 넘어가면 좀 살만할 텐데, 온 힘을 다해 가보지만 능선 너머는 여전히 광야인 것입니다.
저 너머에도 여전히 질병이 있고 사람관계의 고통이 있습니다.
어디가나 생활고가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만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실제 하나님이 우리가 당할 재앙에서 열 개 중 아홉 개는 피하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한 개는 피할 수 없는 우리 잘못이거나 그걸 통해 무언가 교육하실 목적이시겠죠.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살기에 우리 걸음이 광야에서도 견고한 것입니다.
지난 주 김연자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가게에서 보고 있으면 교회 다니는 분들은 걸음걸이가 똑바르다는거예요.
제가 집사님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좀 놀랐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광야 너머에 있는 가나안 땅, 천국을 확신하며 걸어가기에 그 걸음이 분명할 수 밖에요.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를 믿으시고 더욱 무릎을 강하게 하고 힘을 내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교훈은, 광야에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을까요?
구름이 떠오르면 천막을 거두고 행진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멈춰 성막 위에 다시 덮이면 그 곳에 다시 천막을 치고 머물라는 것입니다.
밤에 구름이 덮여 짐을 풀었는데 다음 날 다시 구름기둥이 떠오른다면 피곤해도 다시 짐을 꾸려 진행해야 합니다.
구름이 여전히 성막을 덮고 있으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그곳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을 칠 장소를 인도하시는 것도 구름기둥이고, 거기서 얼마나 머물지 정해주는 것도 구름기둥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40년 생활에서 42곳의 장소에서 장막을 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균 1년에 한번 정도 움직인 것이죠.
그런데 그 장소들을 보면 다 좋은 장소만은 아닙니다.
‘마라’라는 곳에서는 샘물이 쓴 물이었다고 합니다.
구름이 멈춰서 장막을 치고 보니 샘의 수질이 나빠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식수도 없는 곳에 2백만명을 풀어 놓으면 어쩌라는 것입니까?
그 많은 입들이 다 불평을 쏟아내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르쳐 주시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게 됩니다.
목표를 향해 가다보면 최적지가 아니어도 머물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대책을 생각하셨겠죠.
그것은 인도자의 문제입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죠?’
하나님은 광야의 문제에서 한번도 해결책을 내지 못하신 적이 없습니다.
양식이 떨어지자 만나를 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단 물로 바꿔주셨고, 아예 물이 없었던 므리바에선 반석을 쪼개어 암반수를 터뜨려 맑은 물로 아예 시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가 사는 것도 모든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마음에 쏙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노정 전체를 아시고,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왜 저 푸르러 보이는 동산으로 날 데려가지 않으셨냐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거기는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리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인도하신 이곳이 되돌아 보면 가장 안전하고 바른 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백성들이 성막 위 구름을 봐야 했듯이 우리도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름네비게이션인 말씀을 따라 가야 합니다.
‘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 하셨지’
‘이 문제는 정직하게 처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지’
이렇게 말씀의 인도를 따르면 오늘 하루가 안전합니다.
때로 마라와 같이 마실 물이 없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해결책을 구해야 합니다.
좋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선 피치 못하게 마라와 같은 장소도 거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마라와 같이 마음 상했던 장소를 떠난 뒤 만나 곳은 엘림이었습니다.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샘물이 열 둘이라니요!
광야에서 칠십그루의 나무는 굉장한 오아시스입니다.
오늘 삶의 풍요가 없는 고단한 광야를 걷고 있다면 내일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오아시스에서 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실까 현실감이 들지 않는 것이죠.
그것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가나안땅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사실을 의심하고 가나안 입국을 믿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다 죽었던 것입니다.
그 자식들만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통한 약속의 자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막을 세운 뒤 불구름이 내려와 덮이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야 상징 중에 중요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언약궤가 있고, 속죄하는 시은소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가운데 살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하루하루 예수님께서 가이드해주신 말씀과 계명을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실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서운 광야에서도 쉴만한 오아시스로 인도받고 이 생의 끝에서 아름다운 가나안땅, 우리의 본향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전진하는 곳, 머무는 곳
민 9:15-23 / 엄기호 목사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고, 필리핀의 속담에는 “태어나는 것은 쉽지만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다”라고 했으며, 파스칼은 “인생의 최고 불행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사고의 능력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입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아담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왔습니다. 원시적인 돌이나 나무나 철로, 무기를 만들었던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 핵무기, 레이저 광선, 우주선, 유전공학을 만들어내었고, 이제는 인간 베아를 복제하는 단계에까지 왔습니다.
인간은 유희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 자체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레저 붐을 일으키고 환락을 즐깁니다. 또한 인간은 부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아니오”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를 연발한다면 큰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아니오”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한다면 자신에게는 큰 불행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희망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만이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게 합니다. 짐승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생각하고 도구를 만들고 생을 즐기고 자유를 구가하면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세계에는 문제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각하면 할수록, 도구를 만들면 만들어 나아갈수록, 불안이나 절망이 앞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핵무기, 중성자탄, 레이저광선, 유전공학, 반도체, 원자로 등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들은 인간 자신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신앙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색을 한다고, 도구를 제작해 본다고, 환락을 즐겨본다고 해서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고독, 절망, 고통, 실패, 불안 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전진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머물기도 했다는 본문 속에서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야웨의 명을 좇아 행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목적지인 가나안 땅까지 가는데는 40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블레셋 땅을 통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1주일 정도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묵인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른 길은 시내 반도를 거쳐, 마라와 엘림과 신광야와 르비딤과 시내산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는 길입니다. 이 길도 블레셋 땅을 통과하는데 비하면 먼 길이지만 곧장 행군한다면 한 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코스였습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라면 40~50분 거리이고, 자동차라면 7~8시간 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40년 간을 돌고 돌았습니다. 길고도 지루한 40년의 여정을 보낸 것은,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인 채로 있으면 이스라엘은 행군을 중단한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구름이 떠오르면 행군을 계속했으며, 구름을 따라 행군하다가 구름이 머무는 곳에는 다시 진을 치고, 그곳에서 한 달이건 일 년이건 머물러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35에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야웨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했으며, 출애굽기 40장 38에는 “낮에는 야웨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주심을 받는 자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받는 비결은 본문의 “야웨의 명을 좇아”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진행도, 머무는 것도, 진을 치는 것도, 전쟁을 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나고 싶어도 명령이 없으면 못 떠나고, 앉아있고 싶어도 명령이 내리면 떠나야 했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행군명령이 내리면 행군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의 명을 쫓아 행동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진행하였습니다.
본문 17절에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18절에 “야웨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20절 23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행이란 희망과 기대를 의미하고 성공과 성취와 발전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은 확실히 희망찬 일이며 기대에 부푼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희망과 성공과 발전과 목적이 약속되고 선한 것이라고 하여도 자기 멋대로 전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떠났고 명령이 떨어지면 떠났습니다.
경주장에 선수가 제 아무리 잘 달리는 선수라도 출발 총성이 울려야 떠날 수 있습니다. 조급한 나머지 출발 총성도 울리지 않았는데 출발을 하게 되면 제자리로 다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허리를 들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가 총성과 함께 쏜살같이 뛰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명령이 떨어지면 떠났습니다. 일단 명령만 내리면 그 어떤 것도 저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난 행군 길은 원수도, 자연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총사령관이 되셔서 직접 진두지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전진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래를 잃어 버렸습니까?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자식도 훌륭하게 다 키웠지만 기쁨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감사를 잃어버리고, 찬송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혼자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동행자와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는 길이라면 밤이 깊고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구름이 머무르면 머물렀습니다.
18절 하반절에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라고 했고, 19절은 “구름이 오래 머물 때에는 진행치 아니하였다”, 22절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으면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직선코스로 일 주일이면 가는 길이요, 돌아가도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 걸렸다면 지루한 행군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행군해서 목적지에 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구름이 떠 일 년이나 혹은 그 이상 진을 진 채 세월을 낭비해야 하였을까요?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떠들고 소리치고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구름”이 떠오르니 않는 한, 이스라엘은 머물러야 했습니다.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뒤로 물러서거나 머물러 있는 것은 힘을 축적하여 보다 더 큰 전진의 계기를 삼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광과 승리를 위해서 십자가도 참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다리고 참고 머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릴 때 속상하고, 참느라 몸져눕기도 하고, 물러서느라 굴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진하려면 기다리고 참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삶이란 항상 전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항상 후퇴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성공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항상 실패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진이 있으면 후퇴도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기쁘고 명랑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하고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면 능력도 잃어버리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다면 그들 모두는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구름이 옮겨가면 그들도 갔으며, 기거하는 곳이 아무리 편하더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동했듯이 성도들은 자신의 안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행하는 곳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머무는 곳에도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순종은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순종합시다. 환경을 초월하여 순종합시다. 그리고 구름 아래서도 그 너머에 있는 밝은 태양을 바라봅시다. 이 같은 전천후 신앙이 바로 여러분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라
민 9:15-23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웨슬리 형제를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웨슬리목사가 했던 세 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군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특히 셋째의 것은 웨슬리에게 힘을 주던 말씀인데 그는 임종을 맞아 죽기 직전에 팔을 높이 들고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quot;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구름기둥이 앞으로 나가면 백성도 앞으로 나가고, 구름이 머무르면 백성들도 머물렀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온전히 동행하였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자상하신 하나님
먼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 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미숙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노예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성숙한 정치의식이 없었습니다. 눈치를 보며 매가 무서워 움직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정치적으로 조직을 하고 지도자를 세우고 또 권위를 인정하며 따르는 수준에 이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가 지도자로 세워져 있으나 통솔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직접 임재하시고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동행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도 미숙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우상숭배에 젖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거의 잊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시사하는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언제나 저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미숙하고 어린 형편을 아신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입니다.
그리고 자상하신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반도는 사막지대입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사막지대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크게 관심 갖고 배려하셨습니다. 사막의 낮은 무척 뜨겁습니다. 그러나 습도가 낮기 때문에 구름만 가리면 시원해집니다. 그러므로 낮에 구름기둥으로 임재 하셨다는 것은 백성들의 형편을 잘 아시고 형편에 맞춰 배려하신 것입니다. 또 사막의 밤은 무척 춥습니다. 그러한 밤에 불기둥으로 임재하셨으니 얼마나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백성들의 어렵고 곤고한 형편을 잘 아시고 배려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은혜의 중심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 불기둥이 성막 위에 세워지고 그리고 퍼져서 백성들을 덮었습니다. 그 모양을 큰 우산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우산의 기둥이 성막 위에 세워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막이 은총의 중심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봉독한 민수기에는 구름기둥, 불기둥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아멘.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성막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 위에 계실 뿐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가시적인 장소로 성막을 택하셨습니다. 성막은 오늘날의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막에 임재하셨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세상에 오셔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하셨으며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계속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이 은혜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의 중심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 하여 신앙생활 하였듯이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떠나서 혼자 신앙생활 하기는 어렵습니다. 혼자 산 속에 들어가 수도나 하면 모를까 유혹 많은 세상에 살면서 혼자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설령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은혜 있는 신앙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느 청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엄마는요, 교회에 안나가도 하나님을 믿어요." 그랬더니 제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물론 교회를 안 다녀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능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될 수 없어.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로 은혜가 쌓인 교회에 나와서 함께 할 때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거야." 그제야 청년은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나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가 은혜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따름
17∼19절의 말씀을 봉독 하십시다. "구름이 성막 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유진 하였고..." 아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이동하면 함께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르면 언제까지라도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보다 앞서도 안되고 뒤쳐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보조를 맞추고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가 최선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사정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좋은 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적절한 시기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인도하실 때 홍해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길을 아는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려면 지금의 스웨즈 운하가 있는 육지 길로 가야 하는데 홍해로 가니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신 데에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육지 길로 인도하여 지중해 해안 길로 가게 할 경우 전쟁이 있으면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홍해로 인도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고 애굽과의 완전한 결별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속뜻이 얼마나 깊습니까? 백성들은 미처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가 되면 아멘 하고 따르십시오. 혹시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따르십시오.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형편에 맞는 최선의 길을 아십니다. 무조건이라도 따르십시오. 필경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옳았다고 고백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사소한 것까지 온전히 따름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데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소한 것까지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다. "혹시 구름이 장막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 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진행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소한 징후까지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녁 때 구름이 머물렀다고 합시다. 그들은 곧 하나님의 뜻대로 진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다시 구름이 행진하면 다시 진을 거두고 행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가 수시로 바뀔 때 온전히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소한 징후의 인도까지도 온전히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사소한 인도까지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큰 것은 잘 지킵니다. 분명한 말씀들은 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사소한 것들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교통신호도 분명한 것은 잘 지킵니다. 그런데 사소한 것을 무시하고 지나치다가 큰 사고를 일으키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한번쯤이야, 하는 순간에 큰 일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이 큰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박센데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언뜻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에 큰 일들이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사소한 것들을 위하여 성실하면 하늘의 유업이 주어진다. 반대로 그것을 무시하고 죄를 지을 때 지옥의 저주가 주어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작다가 무시하다 보면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성도들이 큰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분명한 죄는 짓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불신자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이 큰 명령은 지키고 있는데 사소한 명령들에 무관심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잘 지키다가도 사소한 것 한 가지에 죄인이 됩니다. 모든 것을 잘 지키는데 한번쯤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지켰어도 한번의 범죄가 죄인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소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놓치지 말고 하나님이 명령을 온전히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민 9:15-23 / 피영민 목사
서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의 교회를 예표 하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서 광야 교회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광야교회는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적인 불평불만의 위협도 대단히 큰 것이었고, 또 외부적인 적들과의 전쟁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큰 위험이었습니다. 낮의 해도 위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낮에 광야에서 해를 쐬게 되면 일사병에 걸릴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의 해도 위험이요, 밤의 달조차 위험입니다. 밤에 뜨는 달은 대단히 요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의 유혹으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거기다가 밤이 되면 추위를 견디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교회는 편안한 요소보다 위험한 요인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러한 광야교회에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주셨습니다. 낮의 구름기둥은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햇빛을 가려주어서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따듯함을 주는 고마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임재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는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내부적인 위험도 있고, 외부적인 위험도 존재합니다. 더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사상적인 차이가 교회의 위험요소로 추가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지령문에는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침투해서 교회를 파괴하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이모저모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인천에 가서 연합집회를 인도했는데 목회를 오래하신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순한 양, 어린 양 같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넘어가니까 이제는 천지가 개벽을 해도 끄덕하지 않는 선수가 됐습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순한 양이었는데, 목회의 여러 가지 위험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이리 당하고 저리 당하고 하다 보니까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려러니’ 하고 견디는 선수가 됐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저는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내가 어린 양이었다”는 말에 아주웃음이 터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교회를 돌보시고 계신가? 하나님은 이런 위험에 처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하나님은 과연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가? 이 질문들을 던져보고, 이 질문들에 대해서 ‘그렇다’하는 확신만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성도들은 아무런 근심도, 아무런 염려도 없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는 어떤 골짜기를 가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자꾸 “아버지 점심은 주실 겁니까? 저녁은 주실 겁니까? 아버지가 지금 나를 안전한데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자꾸 왜 이렇게 험한 데로 끌고 가십니까?”라고 말하면서 걱정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아버지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고 있는데도 자꾸 걱정한다면 그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겁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인도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걱정, 근심이 많으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실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기둥이 장막, 즉 성막 위에 머물러 있다가 떠오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하! 하나님께서 진행하라고 하시는구나”하고 그 구름을 따라서 진행했습니다. 그 구름이 여러 달 머물게 되면 그대로 그 자리에 유진해서 머물러 있었고, 그 구름이 떠올라서 가게 되면 하루가 될지언정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름을 따라서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육신의 눈으로,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인 이방 나라 사람들도 “아하! 저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백성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별도의 믿음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광야의 인도를 마친 후에는, 구름기둥도 사라지고, 불기둥도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지은 성전이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제 1성전 시대에는 성소 안에서만 구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구름이 성소 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성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에 보면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구름이 성소 안에 가득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지은 제 2성전 시대에는 구름이 완전히 걷히게 되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인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학개서 2장 9절에는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비록 규모도 작고 영광도 덜 찬란하지만, 그 스룹바벨 성전에는 만국의 보배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서게 되실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스룹바벨 성전에 헤롯 대왕이 개축해서 헤롯 성전이라 이름 붙인 그 곳에 발을 붙이시고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름기둥의 실체요, 불기둥의 실체로서 그 성전에 서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실체이셨기 때문에 복음서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를 근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in us’, 그리고 ‘among us’ 우리 가운데도 거하시고 우리 안에도 거하심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구름기둥이 되시고 우리의 불기둥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의 인도는 구약시대처럼 가시적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불가시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가시적인 것은 믿음으로 바라봐야 됩니다. 가시적인 것은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시적인 존재를 바라보는 데에는 우리에 두가지 믿음이 요구됩니다.
2.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믿음
첫째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임재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한마디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됩니다. 우리의 언행심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안에서 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인도해주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광야의 길이 막막할지라도, 때로는 험한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마음에 불평이 일어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늘 떠나지 않고 그들을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혜사 성령께서도 오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에 임재해계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실까요? 구약 시대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방식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3. 인도하심의 네 가지 특징
첫 번째로 하나님은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구름기둥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안 듣는데 왜 말씀하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이리로 가라 하시는데 안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왜 상관하시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구름기둥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보면 구름기둥이 처음으로 나타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구름기둥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민수기 9장에 구름기둥이 두 번째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13장과 민수기 9장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난 후에 구름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은 첫 번째 유월절, 민수기 9장은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키고 난 후에 구름기둥이 그들에게 임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월절을 순종하여 지킬 때, 어린 양을 1월 10일에 준비해두었다가 1월 14일이 되면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어린양 고기를 먹고, 쓴나물을 먹으며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먹으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여 유월절을 지키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구름기둥의 인도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 반대 사건으로도 입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이 떠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해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어떤 직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지도자요, 아론은 모세의 형이지만 모세의 말을 듣는 대변인이며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지만 아무런 직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이 모세와 같이 다니다 보니까 자기도 모세와 똑같다고 생각하였거나, 아니면 모세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찌하여 구스 여인과 결혼하느냐?”면서 모세를 비방한 것이지요.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단순한 비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계질서와 인도하심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에 들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이 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수기 12장 10절을 보면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려 눈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칠일후에 고쳐주겠다(12:10) 말씀하셨습니다. 미리암이 진 밖에 쫓겨나 일주일 동안 문둥병을 앓았고,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그 때서야 깨달아 하나님의 치료로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름도 다시 일주일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 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신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마음을 정해놓고 인도를 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슨 뜻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인도를 구할 때에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는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헷갈리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에 수증기를 조금 피웠다가 누가 볼까봐 무서워서 싹 없애고는 “야! 내가 인도해줬는데 봤냐? 못 봤냐?”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낮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누구라도 볼 수 있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멀리서도 볼 수 있고,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잘 안보여서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방향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 한순간도 애굽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입니다. 이 광야교회에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파워가 대단히 강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러분. 애굽은 죄의 땅이요, 노예의 땅이요, 마귀가 지배하는 땅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돌이켜 그 땅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땅으로 후퇴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말씀과 일치합니다. 오늘 본문에 세 번이나 반복된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18절)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20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23절).” 여기서 공통적인 내용은 여호와의 명을 좇아 언제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는 언제나 여호와의 명령과 일치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부남인데 성가대를 지휘하다가 예쁜 성가대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여자가 제 이상형인데 함께 살아도 됩니까?” 그랬더니 기도 중에 유리창에 “그래”하는 답이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응답은 유리창이 아니라 TV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하고 평생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성가대의 예쁜 여자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면 예언은사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예언이든, 환상이든, 꿈이든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과 어긋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닙니다. 이사야서 8장 19-20절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 원리를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 아무리 신접한 자와 마술사가 듣기 좋은 예언을 해도 말씀과 맞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들이 생명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도 이 원리를 강조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묘한 일(Secret things)입니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셨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알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지 나타난 일(Revealed things)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계시된 일을 배우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계시된 뜻도 모르고 행치 아니하면서 미래 일을 구하는 것은 미신적입니다. 우리가 계시된 말씀을 모르고 미래의 일을 점치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점쟁이한테 가시지 마세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지 그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오묘한 일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오직 나타난 일은 우리와 후손에게 영원히 속한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개인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중요한 포인트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에는 공동체의 뜻을 중요시 여겨야 됩니다. 잠언 15장 22절에도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를 교회회의를 통해서 결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회의를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던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결정은 성령과 우리가 공동으로 내렸다.”
유명한 네비게이토선교회를 창시한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뇌와 상식을 주셨을 때에는 벌써 우리를 상당히 인도하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뇌로 생각하고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단히 많이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다수가 믿음으로 생각하고, 다수가 믿음으로 판단하는 것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결 론
구약의 광야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인도하셨듯이 신약교회, 즉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어갑니다.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은 죄와 마귀의 노예 된 곳입니다. 우리의 나갈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나가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건전성은 계시된 말씀을 높이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신령한 것을 좆아 다닌다고 해서 신앙의 건전성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말씀을 중요시여기고 사랑하며,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다보면 신령한 현상도, 성령님의 인도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에 나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에 성령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임하여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년도에 붙잡아야 할 세 가지 원칙
민 9:15-23 / 조상호 목사
포루투칼의 ‘로가’라는 곳은 매우 유명한 지역입니다. 이 로가라는 지역은 서경 9도 30분에 위치하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서쪽 끝입니다. 그곳에 가면 해변가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온 데아 테라세 아카바 이오마르 코메사”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글을 보고 “아 여기가 끝이구나. 이젠 바다야, 희망이 없구나!”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 글을 보고 "아, 여기에서 드디어 바다가 시작되는구나. 얼마나 설레는가! 이 큰 바다가 나를 부르는 구나!“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똑같이 "여기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글을 읽으면서도 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며 절망하는데 반해, 또 다른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면 희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2006년도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다른 반응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한 해가 시작되었어. 아이구, 이런 불경기에 어떻게 먹고 살까?”라고 말하며 부정적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야 드디어 내가 달려갈 새해가 시작되었군. 까짓것 한 번 해보지.”라고 말하며 긍정적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종류의 사람입니까? 절망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2006년도를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많은 것들을 바꿉니다. 어떤 사람은 가구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집안을 새로운 페인트로 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외적인 것을 변화시킨다고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기관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와 또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무려 90%가 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100명 중, 90명은 “다시 결혼한다면 지금의 남편이나 이내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를 읽은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교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와 또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런 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주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혹시 할머니가 착각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되어 “할머니,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과 또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라고 다시 한 번 질문했더니, 그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 그 눔이 그 눔이여~~.”
저는 그 할머니가 대답한 이 말이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외부 환경을 바꾸어봐야 그것이 그것입니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가 v“사람의 일생은 자기 생각 그대로 되게 마련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외부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인 줄로 믿습니다. 외부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잠언 23장 7절에서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자세로 2006년도를 시작해야 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새해 첫 주일예배에서 2006년도에 붙잡아야 할 세 가지 원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I) 하나님을 인도자로 삼으라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이 광야는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와 전혀 다른 곳입니다. 낮에는 최고 40도 이상 올라가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곳이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비추는데다가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물조차 없었습니다. 밤에는 영상 1~2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로 변하기 때문에 광야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광야를 거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광야행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민수기 2장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항상 앞세우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멈추게 되었을 때는 항상 성막을 정중앙에 배치하고 동서남북으로 한 방향에 3 지파씩, 12 지파가 그 성막을 에워 쌓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때도, 한 곳에 머무를 때도,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006년도를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인도자로 삼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야훼,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렘33:2). 또 시편 127장 1절에서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사화복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고, 인간의 흥망성쇄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자주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을 자기가 인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인기 등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와 바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글에서 깊이 깨달아지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여보세요” “예 수철인데요”“그래 너 잘 있었니? 아버지 계시나?” “예, 계십니다.” “그럼 아버지 바꿔라.” “아버지 못 바꿉니다.” “왜, 어디 아프냐?” “아니에요.” “그럼 화장실 갔나?” “아니에요” “그러면, 아버지 바꿔” “아버지는 못 바꿉니다.” “너 어른과 장난치는 거냐!” “아니에요.” “그럼 왜 안 바꿔, 빨리 아버지 바꿔” “안 됩니다.” “이놈이, 고약한 놈이네. 빨리 바꿔!” “죽어도 아버지는 못 바꾼단 말이에요.” “뭐가 어째, 못 바꾼다고” “예,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바꾼단 말이에요.... ” 그 사람은 그제서야 ‘전화기를 바꾸라’고 해야 하는데, ‘아버지를 바꾸라’고,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전화기를 바꾸면 되는데 아버지를 바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나 제도나 관습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바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를 바꾸면 되는데, 어리석게도 하나님 아버지를 바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해 세상의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바꾸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바꾸는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도에는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를 의지하기 보다는 참된 인도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자기들 멋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했습니다. 마치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는 군인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다같이 1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여호와의 명을 쫓아'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18절에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총 몇 번이나 반복되어 언급되었는지 한 번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18절에서 두 번 언급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 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쫓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쫓아 진행하였으며." 계속해서 23절을 보겠습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쫓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쫓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오늘 본문 18절부터 21절까지 총 몇 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까? 총 8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름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길을 떠났습니다. 설령 피곤하여 더 눌러 있고 싶어도 그들은 구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구름만 보고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구름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1주일 전, Fendalton Rd와 Hagley 공원 앞에 있는 Deans Ave에 있는 신호등에서 큰 사고를 당할 뻔 했습니다. 제가 집에서 교회에 오려고 Fendalton Rd쪽 신호등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녹색 신호등이 켜져서 앞으로 서서히 나아가는데, Deans Ave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자동차가 갑자기 제 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제 차 바로 앞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습니다. 저와 제 뒤에 있는 자동차들이 녹색 신호등을 받고 앞으로 나아갔고, Deans Ave에서 신호를 받은 차량이 다 멈춰있는 가운데 그 자동차만 앞으로 나온 것을 보면, 그 차의 운전자가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제가 조금만 빠르게 앞으로 나았더라면 그 곳에서 충돌하여 큰 사고가 났을 텐데, 신호 대기선의 제일 앞에 서있던 제가 서서히 움직였기에 간신히 충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간신히 사고를 피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조목사야, 봤지? 신호등 지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 대형 사고가 난단다. 신호등을 지키는 것이 안전 운전의 지름길인 것처럼, 내 뜻을 지키는 것이 네가 사는 비결이란다. 새로운 2006년도에는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을 따라 나아가도록 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호등이 빨강색에서 녹색으로 바뀔 때, 움직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보다 하나님보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6년도에는 움직이기 전에,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멈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기도 했지만,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항상 앞으로 나아간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1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여기 ‘유진했다’는 말은 ‘제 자리에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막에 구름이 머무르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제 자리에 머무르라는 싸인으로 알고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성막 위에 오랫동안 머물 경우에도, 구름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따랐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22절을 보겠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구름이 이틀이나 한 달, 혹은 일년씩 계속해서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진을 진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름이 떠올라 앞으로 움직일 때에만 앞으로 나아갔을 뿐,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일 때까지 제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상상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루 이틀 머무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1주일이나 2주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 혹은 일 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기약도 없이 제 자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제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올 때, ‘매장지가 없어 여기에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따지기도 하고, 물이 없을 때,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다’고 하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고기 먹고 싶다고 떼를 쓰며 하나님께 불평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 하는 등, 여러 가지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멈추었습니다. 2006년도를 출발하는 우리에게 있어, 다른 것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이것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싸인이 없으면 싸인이 있을 때까지 제 자리에 머무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한 여인이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극장 매니저에게 말했습니다. "혹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못 보셨나요? 분명히 엊저녁에 그 극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극장 매니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아직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잠깐만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매니저는 목걸이를 찾기 위해 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매니저가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부인, 찾았습니다." 그러나 전화기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인을 불러봤지만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습니다. 아무리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그 여인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에는 ‘기다림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당장 이삭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행동했습니다.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결국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랍족속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랍과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입니까? 끝없이 싸우는 원수관계가 되어 아브라함 이후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못 먹어도 고(GO)!"라고 외치지만, 우리 성도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 Stop해야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실 뿐 아니라, 때때로 우리를 제 자리에 멈추게 하실 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Stop의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를 되돌아보는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동차에 액셀레이터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으면 대형사고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달리기만 하고 멈추지 않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2006년에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기 보다는 참된 인도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환경을 통해, 말씀을 통해 비추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2006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멈추어 서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목격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진하는 곳 머무는 곳
민 9:15-23 / 엄기호 목사
18세기경 미국의 노예제도가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들은 노예선에 태워져 미국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이때 한 노예선에서 감금되어 붙잡혀가던 노예들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힘을 모아 배를 장악하고 모든 선원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노예 중에 배를 운행할 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서양 한가운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배에 있던 노예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가야 할 길을 바로 안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 제 길을 갈 수 있습니까? 항해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나침반이었습니다. 언제든지 동서남북을 바로 가르쳐주는 나침반으로 인해 배는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도도 항해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항해에 있어 지도와 나침반을 필수 기구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도와 나침반에 덧붙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며, 바른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있을 것이어서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원들을 다 죽고 노예들만 남은 배에도 지도와 나침반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들 중에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구원의 길을 가며 부흥 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바른 방향을 보여주는 지도와 나침반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그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어떤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야훼의 명을 좇아 행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목적지인 가나안 땅까지 가는 데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실제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가는 길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1주일 정도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시내 반도를 거치는 다른 길은 요단강을 건너야 했지만 한 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코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40년간 돌고 돌았습니다. 이들이 길고도 지루한 40년의 여정을 보낸 것은, 야훼의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인 채로 있으면 행군을 중단한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구름이 떠오르면 행군을 계속했으며, 구름을 따라 행군하다가 구름이 머무는 곳에 다시 진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름이 머문 곳에서 한 달이건 일 년이건 머물렀습니다(출 40:34~38).
하나님이 곁에 함께 해주시는 자는 복 있는 자이며, 그 축복을 받으려면 본문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야훼의 명을 좇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야훼의 명을 좇아”라는 말씀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령”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진행도, 머무는 것도, 진을 치는 것도, 전쟁을 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대장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의 명을 쫓아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구름이 떠오르면 진행했습니다.
진행이란 희망과 기대를 의미하고 성공과 성취와 발전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은 확실히 희망찬 일이며 기대에 부푼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희망과 성공과 발전과 목적이 약속되고 선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자기 멋대로 전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구름이 떠오르면 떠났고, 명령이 떨어지면 떠났습니다.
경기장의 선수가 제 아무리 잘 달리는 선수라도 출발 총성이 울려야 떠날 수 있습니다. 조급한 나머지 출발 총성도 울리지 않았는데 출발을 하게 되면 제자리로 다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허리를 들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가 총성과 함께 쏜살같이 뛰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이 약속된 듯하고, 200%의 성공률이 보장되었던 일들이 어이없게 무너지고 좌절하게 되는 것은, 내 힘으로만 뛰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명령이 떨어지면 떠났습니다. 일단 명령만 내리면 그 어떤 것도 저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난 행군 길은 원수도, 자연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θ이 그들의 총사령관이 되셔서 직접 진두지휘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안한 전진이고, 둘째는 용감한 전진입니다. 불안한 전진은 승리의 기약이 없을 때, 언제 어디서 적병의 기습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전진입니다. 그러나 용감한 전진은 승리가 약속되고 보장된 전진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전진은 어떤 전진입니까? 혹시 불안한 전진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진이라면 승리가 약속되고 보장된 전진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함께 전진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용감한 전진을 하십시오.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는 길이라면 밤이 깊고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셋째, 구름이 머무르면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머무르면 행진을 멈췄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직선 코스로 일주일이면 가는 길이고, 돌아가도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나 걸린 지루한 행군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행군해서 목적지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구름을 머무르게 해 일 년이나 혹은 그 이상, 세월을 낭비하게 했을까요? 아마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떠들고 소리치고 대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구름”이 떠오르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답답함과 지루함을 온전히 견뎠습니다. 답답한 것을 답답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아무리 지루해도 이제 그만 장막을 걷고 떠나야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세월이 얼마가 흘러가도, 조바심을 낼 것도,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때로 뒤로 물러서거나 머무르는 것은 힘을 축적해서 보다 더 큰 전진할 수 있게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산에는 몇 십만 분의 일의 오차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막을 치고 머물 때와 거두고 진행할 때를 정확히 알고 지적해 주시며, 가나안 땅에 빨리 가야 좋을 지, 천천히 가야 좋을 지를 결정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진행도 완벽하게 이끄십니다. 주님은 영광과 승리를 위해서 십자가도 참으셨습니다(히 12:2).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다리고 참고 머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참고 물러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 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지시를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다면 그들 모두는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구름이 옮겨가면 그들도 갔으며, 기거하는 곳이 아무리 편하더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동했듯이, 성도들은 자신의 안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행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머무는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었듯이 여러분도 이와 같은 신앙이 되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민 9:15-23 / 문기태 목사
데일 카네기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서로 돕고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사람과 파트너가 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하루에도 여러번씩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은 동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파트너는 삶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 위기를 극복할 에너지를 공급받아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트너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파트너를 잘못 만나 배신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최고 파트너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가는 인생길은 때마다 적절한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은 우리에게 최선의 길을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위험한 처한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인도를 받는 사람은 옳은 길, 거룩한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지 2년 째 되는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과 언약 체결하였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만들어 봉헌을 하였습니다. 이제 노예로서의 과거를 청산하고, 선민이 되어 약속의 땅을 향하여 희망찬 출발을 하려는 시점이었습니다.
성막을 봉헌한 날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막위에 낮에는 구름기둥이 덮었고 밤에는 불기둥이 덮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나타났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이 거룩한 곳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과 늘 동행하시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던 광야는 낮에는 매우 무덥고 밤에는 몹시 추운 곳입니다. 일기차가 매우 심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사막에 항존하고 있는 삶의 두 가지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낮에 구름기둥을 통하여 사막의 뜨거운 더위를 막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밤의 불기둥으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갑자기 몰려오는 추위를 막아주는 난로와 같은 난방장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름에 30도 이상만 되어도 얼마나 힘듭니까? 꼼짝하기도 싫습니다. 그럴 때 시원한 나무 그늘에만 있어도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런데 광야는 한낮에는 40도 이상 기온이 올라갑니다. 나무도 거의 없습니다. 그늘이 거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더운 한낮에 이동하려면 얼마나 지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 덮어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밤이 되면 낮에 언제 그렇게 더웠냐고 비웃듯이 매우 춥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름기둥을 불기둥으로 바꿔서 저들을 따뜻하게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성경 16절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과 언제나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한해 두해만 보호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 동안 항상 저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보호해 주었습니다.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보내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보호하듯이 보호하십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를 악한 영이 노리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이라도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좌절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십니다. 함께 해 주십니다.
◆단3장에 보면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이 동방의 모든 지역을 평정하고 두라 평지에 큰 신상을 세웠습니다. 낙성식에 모든 방백과 수령과 백성들을 참석하게 하여 금 신상에게 절하도록 명령합니다. 절하지 않은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질 것이라 했습니다. 낙성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 엎드리어 절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은 믿는 믿음으로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 불에 던져 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속에 던진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네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몸을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옷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왕은 모든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믿으라.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몸을 쪼갤 것이고 그 집을 거름더미로 삼을 것이다" 바벨론 120도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왕은 세 친구들을 더욱 높은 자리에 봉사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할렐루야!!
◆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니온카바이드 회사에서 유독가스가 유출되어 2천7백 명이 죽고 17만명이 피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가스 회사 건너편에는 2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보팔'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도는 힌두교와 회교가 압도적입니다. 그곳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용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보팔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어느날 가스가 유출되어 골목마다 스며들고 가스가 지나간 곳마다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가스가 건너편에 있는 그 마을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팔 사람들을 보호하셨는지 아십니까? 길 하나만 건너면 가스가 그 마을로 들어가게 될텐데 이상하게도 가스가 길 앞까지 와서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습니다. 고스란히 그 마을 2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구출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데일 키츠맨에 의하여 세상에 밝혀진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예수님 품으로 돌아온 그들 앞에 일어난 기적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33:12"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2.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17절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반드시 인도하시되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가장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택한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과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양이 풀을 먹인 뒤에는 물을 마시기 위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저녁이 되면 울안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자는 양이 언제 어떠한 상황이 있다하여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인도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구름기둥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기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성경말씀을 주셨습니다. 시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되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함께 하십니까?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 주시고 장래일 까지도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저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진행하는 일과 쉬는 일을 구름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구름의 정지 시간이 짧든 길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구름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성막과 각자의 장막을 진치고 걷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머물면 한 달이 지체되던 1년이 지체되던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때로 초조하기도 하고 무력한 시간이었지만 인내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저들은 구름의 지시에 따라 행함으로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트 대학 창설자인 버터필드 박사의 간증입니다. 버터필드가 대학을 세우기 전에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노인 부부 집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노인 부부는 음식솜씨도 신통치 않았고, 집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침대도 낡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제직들은 강사목사님의 숙소가 맘이 안 들어서 걱정을 하다가 숙소를 새로이 마련하여 옮겨가기를 권했습니다. 새로운 숙소는 집도 크고 넓은 정원에다가 부유하게 사는 젊은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버터필드는 숙소를 옮기는 일에 먼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먼저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제직들은 "강사님! 이런 일까지 기도하십니까? 그냥 옮기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버터필드는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젊은 부부가 사는 집으로 옮겨도 됩니까? 아니면 이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잠깐 기도하는 중에 그의 마음속에 누가복음 10장 7절이 떠올랐다. "그 집에 유하여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버터필드목사는 제직들에게 "이미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으므로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 머물겠습니다."하고 숙소를 옮기는 것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5일동안 집회가 계속되고 있는데 옮기려고 하던 젊은 부부의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있는 사람은 1개월 동안 출입금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만약 버터필드목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부흥회도 인도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1개월 동안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그 집에 갇혀서 자기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자 하나님은 버터필드에게 처음에 정한 노인 집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버터필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힘입고 부흥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버터필드는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를 받는 가운데 위대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시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거친 세상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동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모든 일에 간섭하시어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했습니다. 그 중, 2001년 5월 25일 에릭바이엠 메이어 라는 사람의 에베레스트 산 정상 정복을 세계 언론이 탑 뉴스로 다루었는데, 이는 그가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한 그는 밀려오는 두려움과 낙심을 느끼지 못한 채 앞 사람의 배낭에 달린 종소리만 듣고 부지런히 따라가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인도자 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따라간다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갈 때 안전하였습니다.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생각지 않은 두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 낙심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갖고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사 보호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최선의 길을 가르쳐 보이시고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때로 기도응답이 늦어져 의심이 밀려오고, 때로 내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어 답답하게 여겨지나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구름따라 살아가는 백성들
민 9:15-23 / 박용래 목사
▦ 여행을 해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은 좋은 안내자(Guider)를 만나야 여행이 편안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의 교통편 잠자리 식사 등 여행 일체의 편이를 보살펴 주고 길을 안내해 줍니다.
그래서 가이드를 잘못 만나면 그 여행이 무척이나 고달픕니다. 제대로 스케줄에 따라 여행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입맛에 맞지 않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또 현지 가이드를 잘못만나면 그 여행 목적 자체가 엉망이 됩니다. 관광지의 안내를 제대로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관광보다는 선물 사는데 시간을 다 허비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에서 더 힘이 드는 것은 그나마 안내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외롭기도 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다 혼자 챙겨야 하기 때문에 신경도 많이 쓰게 돼서 여행이 무척 힘이 듭니다. 더욱이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 상황이 생기면 경험도 없고 언어도 잘 소통하지 아니하고 대처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불안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로울 때 용기를 줄 수 있고, 위험을 만났을 때 보호해 줄 수 있고, 갈길 몰라 방황할 때 그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안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라고 볼때 좋은 안내자를 만냐야 유익하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인생길을 안내해 줄 진정한 안내자, 참된 인도자를 알려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의 참된 안내자요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안내자로 인도자로 만날 때 행복하고 평안하고 유익한 인생의 여정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출 1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 애급 하는 과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바로가 손을 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을 떠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월절 의식을 거행한 뒤에 드디어 애급을 떠나게 됩니다. 애급에서 430년 살았던 고센 땅 숙곳을 출발해서 첫날 도착한 곳이 에담이라는 곳이었습니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담은 바로 광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땅이 광야라는 뜻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그야말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입니다. 낮에는 작렬하는 태양 광선으로 40도가 넘습니다.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추위를 느낄 정도이고 모래 바람도 일어납니다.
광야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위를 느끼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광야를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하기 짝이 없고, 여러 날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이런 광야였습니다. 그것도 몇 시간 걷고 말 것이 아니고, 몇 날을 걸어야 할 지 아니 몇 년을 걸어야 할 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40년을 그곳에서 살았지만 말입니다.
약 200만 명이나 되는 남녀노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간다는 것은 모두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광야 길에서도 안전하도록 특별한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놀라운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여정을 안내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갖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정말 막연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선지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있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부모에게 유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들었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조차도 불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것입니다.
▶ 오늘날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확신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작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 성경은 곳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의 [다윗]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약속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세워 놓으신 구름기둥과 불기둥 역시 임마누엘의 상징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임마누엘의 신앙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능력 있는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면 힘없고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굳게 믿으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세워져 있는 구름기둥 불기둥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놀라운 증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모세의 인도를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금 자기들을 친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의 육의 눈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요 20:29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남은 한평생 내내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의 상징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맨몸으로 광야 길을 걷는다면 하루도 지나지 못해서 모두가 작렬하는 태양 빛으로 일사병에 걸려 죽고 말 것입니다.
저녁에는 모래 바람으로 추위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정말 놀라운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바로 불기둥입니다.
낮에 구름기둥이었던 것이 밤에는 불기둥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람이 한 둘이면 조그만 난로를 준비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200만 명입니다. 이 사람 모두를 추위로부터 막아주시려고 불기둥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하루도 못살았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라고 하신다고 해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그들이 확인했기 때문에 광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출애굽기 14장에 이스라엘백성과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했을 때 처음 만난 것이 홍해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무서운 세력으로 다가옵니다.
이때 하나님이 시간을 벌기위해서 구름기둥을 보내줍니다. 구름기둥이 생기자 애굽과 이스라엘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없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홍해를 육지같이 갈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홍해를 건넜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따라 오려고 하자 하나님이 불기둥을 보내주셨습니다. 애굽 군대 안에 불기둥을 보내서 애굽 군인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막아 주셔서 일대 혼돈이 생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갖가지 방법으로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맞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불기둥,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름기둥은 방향도 가르쳐줍니다. 위기 때에 하나님은 이 구름기둥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염려입니다. 확률적으로 1%의 가능성 때문에 그 가능성을 가정해 놓고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위험 확률 99%라도 하더라도 1%의 가능성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1%의 가능성을 사용하셔서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독자 아들을 낳은 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 이와 같이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 불기둥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상징이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5,37절)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축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상징입니다.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올라서 진행하면 부지런히 장막을 거두고 채비하여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멈추면 그 곳에 장막을 치고 체류했습니다.
▶ 출 36-40장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멈추는 곳마다 성막을 짓게 명령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순종하여 성막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막이 봉헌되자 하나님께서 성막을 기뻐 받으신다는 표시로 이미 그들에게 허락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이 성막 위에 머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 위에 머무르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제 그 중심을 이 성막 위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 성막이 보이고 그 성막 위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보입니다. 이들은 늘 성막과 그 위에 세워져 있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 중심의 삶을 살기 바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민족이 하나로 엮어질 수 있었습니다.
▶ 그러면 성전중심의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사모하고 늘 성전을 바라볼 때 그들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내 앞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서 멀리 떨어지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부터 멀어지고 구름 그늘의 혜택과 불의 따뜻한 온기의 혜택을 덜 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발걸음이 성전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줄어듭니다.
우리의 영적인 능력이 점점 소멸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수주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에 모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되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특별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처음 밟는 땅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지형도 모를뿐더러 어느 곳에 어떤 장애와 위험이 있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앞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놓아주신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은 '내가 인도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따라 오라'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시니 그 길은 안전하고 정확한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서 늘 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주목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언제라도 떠나라 하시면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있어 두 가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방향'과 '시기'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방향을 보고 바로 따라가야 합니다.
또 가야할 때와 머물러야 할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하나님의 보호는 저절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40년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멈춰있는데 가고 싶다고 나가면 그들은 살수가 없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진행하는데 가고 싶지 않다고 머물면 그들은 죽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유리한 광야의 기후는 낮에는 화씨 120도, 13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50도, 60도까지 내려갑니다. 섭씨로 환원하면 낮에는 영상 50도를 훨씬 넘어가고 밤에는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일기차가 40도가 넘는 그런 날씨인데, 이런 더위와 불볕 속에서는 사람이 단 30분도 행진할 수 없습니다. 다 일사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의 기후는 아무리 더워도 습도가 없어서 일단 그늘 아래 들어가기만 하면 시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 행진을 하는 동안 40년 동안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그늘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40년 간 일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스라엘은 기적 속에 산 것입니다. 또 낮의 기온이 워낙 높기 때문에 밤에는 기온이 10도 밑으로만 내려가도 얼어서 죽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거대한 벽난로가 되게 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아주 따뜻하고 안락한 잠자리에서 편히 쉴 수 있게도 해주셨습니다.
▶ 여기에 소중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신앙생활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말씀대로 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에 실패한 사람들 모두가 말씀대로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름기둥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뜨거운 태양 빛에 일사병으로 죽고 맙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서두르기 때문입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움직여도 게으르고 불순종하여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움직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 안에 머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뿐 아니라,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에게 구름기둥 불기둥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당신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지만 사흘 만에 부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시면 당신을 대신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 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그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할렐루야!
여러분, 성령은 임마누엘이셨던 주님 대신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깨우쳐 가야할 길을 인도하시고, 또한 보혜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이 성령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절)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다. 성령께서 사모하는 우리 안에 임마누엘로 오셔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늘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우리에게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