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 횡포에 정부·여당 책임론
민노총 앞에서 “택배노조·민노총 해체하라” - 이광기 CJ대한통운집배점협의회장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앞에서 열린 택배대리점주 사망 관련 택배노조 민주노총 규탄 미래대안행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CJ대한통운대리점연합회가 9일 민노총 택배노조에 내용증명을 보내 극단적 선택을 한 김포 대리점주 이모(40)씨 사건과 관련해 “해당 조합원 전원을 노조에서 제명하고, 노조 집행부가 진정한 사과를 하고 총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연합회는 이와 함께 노조가 있는 대리점주 54%가 ‘노조로부터 폭언·폭행·집단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같은 날 오전 택배노조는 일주일 만에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의 한 대리점 소장이 구청에서 만 65세 이상 어르신에게 나눠주는 마스크가 담긴 택배 상자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씨 사건에 대한 사과 없이 대리점주에게 비리 이미지를 덧씌워 국면 전환을 위한 물타기를 하려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사업자 특성 강한데도 노조 인정
정부 내부와 택배업계, 노동계에선 정부와 여당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택배노조를 일방적으로 편들며 택배노조 행태가 안하무인이 되는 데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택배기사는 대리점에 소속돼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사업자 신분이다. 근로자와 사업자 성격이 모두 있는 이른바 ‘특수형태고용 종사자(특고)’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들 특수형태고용 종사자에게 노동 3권을 보장해주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고용부는 2017년 11월 택배노조를 정식 노조로 인정해줬다. 하지만 택배노조를 합법 노조로 인정해줘 파업권을 주는 문제는 애초 논란이 많았던 주제다. ‘월급쟁이’인 일반 근로자와 달리 택배기사는 독자적으로 거래처 영업을 할 수 있고, 본인 밑에 다른 기사를 고용할 수도 있는 등 사용자에 가까운 성격도 강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택배기사는 다른 특고보다도 사용자 성격이 더 강해 일반 근로자와 똑같은 파업권을 주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지금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코로나로 택배 물량이 급증하고 택배기사 과로사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여당은 택배 문제를 집중 조명했다. 문 대통령은 작년 7~9월 “코로나 극복의 주역 택배기사들의 노고를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한다”는 등 택배기사와 관련한 공개 발언을 5차례나 내놨다. 이낙연 당시 민주당 대표도 “택배 노동자의 편에 서서 법안을 조정하고 심의하겠다” 등 최소 5차례의 공개 발언을 내놨다.
◇노조 요구대로 사회적 합의 압박
정부는 작년 11월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작년 12월에는 정부 합동으로 택배기사들이 대리점 등으로부터 갑질을 당하는지 특별 신고를 받았다. 같은 달 여당은 을지로위원회 등이 중심이 돼 ‘택배 노동자 과로사를 막기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출범시켰다. 사회적 합의기구 출범을 요구한 택배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는 광우병 집회를 주도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가 맡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기구는 올해 2월 1차 합의를, 올해 6월 2차 합의를 했다. 핵심 내용은 배송 전 분류 작업을 더 이상 기사에게 맡기지 않고 2022년부터는 택배 회사나 대리점이 처리한다는 것이다. 택배 물건이 택배터미널에 도착하면 배송 구역별로 물건을 분류해야 택배 트럭에 실을 수 있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택배기사가 이 일을 해 왔다. 2010년 대법원은 “택배기사가 분류까지 한다는 압묵적 합의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택배노조는 이 분류 작업이 ‘계약에 없는 공짜 노동’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했고, 사회적 합의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사회적 합의 도출 과정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합의기구에는 여당과 국토부, 고용부, 택배노조, 택배 회사, 대리점연합 등이 참여했다. 명칭은 ‘사회적 합의’였지만 사실상 택배노조의 요구대로 진행됐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일관된 전언이다. 대리점연합을 빼놓고 부속 합의를 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일방적으로 주제를 정하고, 직전 회의에서 합의도 안 됐는데 마치 합의된 것처럼 회의록을 배포하는 일이 반복됐다”고 했다.
올해 6월에는 고용부 산하 준사법행정기관인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을 뒤집고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의 단체 협상을 거부한 것이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직접 계약 관계가 아니라 법리적으로 무리’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CJ대한통운을 택배기사의 실사용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 판정을 두고는 업계와 노동법 학계에서 여전히 “중노위가 업계 사정은 잘 모른 채 택배노조를 약자로만 봤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노조 편을 들어주는 정부 정책이나 결정이 나올 때마다 택배노조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이씨를 숨지게 한 김포지회 노조원들도 올해 6월 중노위 판정을 채팅방에 공유하며 “판정 났습니다. 다음 주 쟁위권(’쟁의권’의 잘못으로 파업할 수 있는 권리) 생깁니다. 뭔지 알고 계시죠?”라며 이씨를 압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