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가
서울대 총장에 임명된단다!!!
네티즌여러분!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독립투사분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의 심정은 일제시대보다
더 큰 치욕이 될수도 있는것입니다.
민족을 기만했던 자의 후손이 서울대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의 총장이라는 것이 말이됩니까!
이제 대통령의 임명절차만 남았습니다.
7월11일 국무회의를 거치기만 하면 끝이 납니다.
아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메일주소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이 바른 정신이 돌아올수 있도록
"이장무교수 서울대총장 임명반대"요구를 올립시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메일을!!!!
이장무 교수 서울대 총장 임명 반대!
http://www.president.go.kr/cwd/kr/president/send_mail.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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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총장후보 이장무교수 임명제청" 2006.7.3
[동아일보]
교육인적자원부는 서울대 총장후보 선거에서 1위를 한 이장무(61·사진) 공대 교수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하기로 결정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2일 “지난달 27일 국립대 총장 임명을 위한 교육공무원인사위원회를 열어 이 교수와 2위를 한 조동성(57) 서울대 경영대 교수 가운데 이 교수를 단수로 임명 제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일부 단체가 이 교수의 조부인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년) 박사의 친일 행위에 대해 문제를 삼았지만 이 교수의 총장 직 수행에 결격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울대 구성원들이 친일 논란을 알고 투표했고 신원조회에서도 별다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다”면서 “대학 구성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역대 서울대 총장의 후보 선출에서 임명까지 걸린 기간은 △이수성 전 총장 31일 △선우중호 전 총장 10일 △이기준 전 총장 20일 △정운찬 총장 26일 등이었다. 이 교수의 경우 총장 후보로 선출된 이후 임명 제청 결정까지 49일이 걸렸다.
교육부 관계자는 “정 총장의 임기가 19일 끝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며 “11일 국무회의가 의결로써 임명을 정식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2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부에서 그런(조부의 친일행위) 주장을 하지만 (한 대학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총장으로 임명되면 취임사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설명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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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1927 '조선사편수회'로 국사 연구 시작
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
1945∼62 서울대 문리대 교수
1955∼82 국사편찬위원
1960 문교부 장관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 민족상 수상
●일제 학풍의 잔존과 국사학계 대부 이병도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게는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민족사의 구축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일제 침략하에서 침윤되었던 식민사학의 모든 악폐-예컨대 정체성론, 타율성사관, 지리적 결정론,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를 일소하고 전통 문화와 민족 발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인식시켜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에 가졌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학풍이 바로 그것이다. 1930년대에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국사 연구를 했던 민족주의 사학의 안재홍과 정인보는 다른 많은 독립투사와 같이 학계를 거의 떠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던 실증사학풍의 학자들, 즉 이병도를 주축으로 한 사학자들은 학계에 그대로 남았다.
더욱이 한국전댕을 계기로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 연구 학풍이 구축되고 실증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 전에 이미 많은 유물사관론자들이 연구의 장을 달리한데다가, 한국전쟁때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거의 10여 년간의 남한의 국사학계는 주체 부재, 민족 상실의 침체기를 맞았고, 특히 동서 냉전 체제의 강화로 민족주의의 금기와 구미문화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심화되면서 민족주의적 국사 연구는 상실되고, 일제가 남겨놓은 식민사관을 뿌리로 하는 국사 연구가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실증학풍은 그 형성 시기인 1930∼40년대 일제의 탄압 강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민족 운동의 예봉마저 꺾인 상태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식민사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증사학이 개별적 사실의 고증에 치우쳐 있었으며 개별적 사실의 고증이 전체 사회에 어떤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으로 연결되는지, 일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지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1970년대 후반에야 일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주요학자인 이병도, 신석호 등은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사편수회에서 다년간의 '수학'한 후 '국사편찬위원회' 핵심으로 들어앉았다. 특히 조선사편수회 등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해 지도되고 성장한 이병도의 경우 국사학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그로 인해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가 창립되었을 때 진단학회 회원들이 서울대 교수로 대거 진출함으로써 국사학계의 주요 인맥을 형성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는 진단학회 주요 멤버였고 와세다 대학 출신인 이병도와 경성제대 출신의 이인영(李仁榮)에 의해서 재건, 창설되었다. 동국대학 사학과는 불교학과·국문학과와 더불어 가장 먼저 설립되었는데 이병도는 초기부터 국사 강의를 맡았다.
한편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계속 이끌면서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1955년에는 우리 나라 정치기구의 역사적 고찰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 일부분이 서울대학 논문집에 발표된 '남당고'였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독립투사를 존경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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