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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1. 혁명이 낳은 영웅, 또는 괴물 | 2. 나폴레옹의 전성기 |
3. 제국의 불안 | 4. 유럽의 양쪽 끝 |
5. 독수리는 내리다 | 6. 세계사의 행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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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불과 연기와 비명과 총성으로 뒤덮였다. “부르봉 군주체제의 잔혹한 폭압”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이 감옥의 실체는 고작 7명의 죄수를, 그것도 별로 잔인하지 않은 식으로 감금해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분노한 대중이 총칼에 맞서 일어난 이 사건은 프랑스를, 나아가 전 세계를 뒤바꿔 놓게 된다.
프랑스는 본래 유럽의 최강자 후보에서 거의 항상 1순위였다. 너무 변두리에 있고 황야가 대부분인 러시아를 제외하면 가장 영토가 넓었고, 인구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아서 역시 러시아만이 상대가 되었다. 또 19세기에 접어들기까지도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독일, 이탈리아와 대조적으로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1494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샤를 8세부터 쉴 새 없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루이 14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프랑스 왕들은 ‘샤를마뉴의 계승자’로서 유럽 대륙의 패권국가가 되기를 꿈꿔왔다. 또한 이 나라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면해 있었기에, 멀리 바다로 나가 해외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일에도 흥미가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를 두고 계속해서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가 유럽과 그 밖의 세계에서 모두 심각한 일격을 당하고 만 7년 전쟁을 계기로 그런 ‘두 방향의 야망’이 한풀 꺾이기는 했어도, 프랑스의 저력과 팽창 가능성은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주변 국가들의 꾸준한 경계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합법적으로 즉위한 국왕이 혁명정부에 의해 목이 잘리는 사태가 빚어지자, 유럽 열강은 손을 잡고 프랑스를 공격할 명분과 이해관계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국왕 살해범”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혁명을 싹부터 짓밟으며, 프랑스의 야심 또한 억누르고자 1793년부터 181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전쟁은 그러한 ‘혁명 프랑스 대 구체제 유럽’ 사이의 전쟁의 후반부라고 볼 수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이라는 관점에서는 1337년~1453년의 백년 전쟁을 잇는, 수 백년 동안 거듭된 싸움의 최종 국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했던 관점이다. 그는 혁명 프랑스와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프랑스 최고통치자의 지위까지 이르렀고, 자신이 비록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전통에만 의지하는 구체제 유럽의 왕조 군주들과는 달리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영국을 배제한 유럽 대륙을 혁명 정신 아래 하나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유럽공동체 비슷한 체제로 재구성하는 것이며, 그 어느 전장에서도 궁극적인 적은 영국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나는 영국의 과두제 지배자들의 음모 때문에, 더 살 수 있는데도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
나폴레옹은 1769년에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지방귀족 샤를 보나파르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본래 이탈리아의 일부였으며,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제노바가 프랑스에 팔아치움으로써 비로소 프랑스 땅이 된 섬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졌고, 나폴레옹도 소년 시절에는 그 이상에 공감하며 대표적인 독립투사, 파올리를 존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게릴라가 되는 대신 프랑스의 사관생도가 되었으며, 프랑스 생도들에게 차별도 많이 받았으나 ‘나는 장차 너희 프랑스인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그는 특별히 월등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수학과 역사만은 뛰어났다. 1785년, 16세의 그는 수학 쪽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이었다.
그는 1793년 9월에 대프랑스 동맹군과 툴롱에서 첫 전투를 치렀는데, 그는 포병 대위에 불과했지만 프랑스군의 포대가 효과적 사격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고 고치도록 하여 적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다음, 사실상 총사령관을 제치고 전투를 주도하여 승리함으로써 일약 명성을 얻는다. 나폴레옹의 포술 지식과 리더십, 그리고 혁명기의 경직되지 않은 군 위계질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시작된 ‘국민의 전쟁 영웅’ 나폴레옹의 신화는 1796~1797의 이탈리아 원정, 1798~1799의 이집트 원정을 통해 점점 더 빛을 발했다.
그런 나폴레옹의 인기는 혁명 이후 최악이었던 총재 정부의 평판과 맞물리며 이 코르시카 출신의 ‘꼬마 하사관’에게 권력의 무게중심이 쏠리는 상황을 몰고 갔다. 정부는 이를 경계했으며 이집트 원정은 사실 그를 파리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는 속셈도 작용한 것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라인 강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밀리고 있으며 총재 정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비밀리에 귀국한다. 그리고 1799년 브뤼메르(11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1800년 5월에 다시 한 번 이탈리아를 제압하려 알프스 산맥의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었다. 험준한 지형과 보급 문제, 바드 요새를 비롯한 철통 같은 요새지를 근거로 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직면한 그는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퍼붓는 빗속에서 몸소 대포를 설치하고 사격하는 등의 분전 끝에,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를 점령했다. 그리고 6월 14일의 마렝고 전투에서는 하마터면 패배할 뻔 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탈리아 북부를 탈환하려던 오스트리아의 의지를 꺾고 파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를 거듭 쳐부순 다음 뤼네빌 조약을 맺어 이탈리아 북부는 물론 라인강 연안과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손에 넣었다. 그는 점령한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어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만들고, 스스로 그 대통령(나중에는 왕)을 겸임했다.
왕조 시대 이래 이처럼 국세가 떨친 적이 없던 프랑스에서는 더욱 국민적 인기가 높아진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만큼 그를 의심하고 반대하는 무리도 많아져서 암살 시도가 잇달았다. 이는 나폴레옹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가 후계자 없이 갑자기 죽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1802년, 영국 등과 아미앵 조약을 맺어 일시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종신 통령이 된 다음, 1804년 5월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12월 2일에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세습 군주가 됨으로써 후계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제2의 샤를마뉴가 되어 유럽의 지배자가 된다는 개인적 망상을 충족하려는 데서 나온 결정이었다.
이제 코르시카의 촌뜨기 군인에 지나지 않았던 자가 겨우 10년여 만에 프랑스의 새 왕조 건설자가 되고, 헤겔이 “말을 탄 세계정신”이라 부른 사람은 그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그러나 과연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인가?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구체제 군주들은 자국 국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황제를 인정할 수 없었다. 대혁명이 ‘말뼈다귀들’이 왕의 목을 자를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이 코르시카인은 그런 말뼈다귀 중 하나가 자신들과 같은 지위에 설 수도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으니까. 잠시 숨을 고르던 그들은 다시금 말고삐를 잡고, 프랑스를 무찌르려는 동맹군의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황제는 말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아미앵 조약에 따른 영국과의 평화는 처음부터 불안 요인을 품고 있었다. 그 내용에 따라 프랑스는 혁명 이후 획득한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따라서 그 중 영국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영토에서는 영국군이 지체 없이 물러나야 했는데 몰타에서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 명백한 조약 위반을 계속 항의했으나 영국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폴레옹이 아미앵 조약 직후 튀르크와 맺은 평화협정이 인도 및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 덴마크 등 북방 국가들이 영국에 맞서 동맹을 결성했고, 거기에는 나폴레옹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심이 다분했다. 나폴레옹은 신대륙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영국을 압박하려고 했다. 상실했던 루이지애나를 1800년에 스페인에게서 되찾고, 1802년에는 처남인 샤를 르클레르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보내 아이티와 뉴올리언스를 점령하도록 했다(하지만 이 원정은 실패했으며, 곧 영국과의 전쟁이 재개되면서 자금의 압박과 미국이 영국과 합세할 위험 때문에 1803년에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버리게 된다).
결국 1803년 5월, 영국은 선전포고 없이 프랑스 선박을 나포함으로써 조약을 깨고 전쟁을 재개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 시점을 어디로 볼 것인지는 역사의 난제 중 하나인데, 대체로 이 때를 잡고 있다. 그러나 이후 약 2년 동안은 이렇다 할 전개가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이미 여러 번 당한 대륙 국가들이 사태를 관망하는 한편, 영국은 독자적으로 프랑스를 침공할 육군이, 프랑스는 영국 해군에 맞설 해군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의 참패에다 대혁명 시기에 많은 장교들의 망명, 처형, 병사들의 훈련 부족 등이 겹치며 도저히 영국을 넘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1805년에 이탈리아의 왕이 됨으로써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자극, 끝내 1805년 8월에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지게끔 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자신만만했다. 2년 이상의 유예 기간 동안 루이지애나를 팔아 받은 돈을 포함한 거액의 군비를 퍼부으며 전력 증강에 힘썼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존 풀턴이 제안했던 증기선, 잠수함, 어뢰 등의 개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불로뉴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영국 침공 작전을 총지휘했다. 해군도 이제는 영국과 맞서볼만 하다고 여겨졌지만, 그래도 진짜 승부는 육군으로 걸 수밖에 없다고 본 그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유인하여 붙들어두는 동안 10만의 육군을 영국에 상륙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빌뇌브(Pierre Villeneuve, 1763~1806)가 이끄는 함대는 1805년 봄, 영국 함대를 찾아 대서양을 헤매고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후 대프랑스 동맹 결성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일단 포기하고는 불로뉴를 떠나 동쪽으로 갔는데, 그 사이에 빌뇌브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과 격돌했다.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기를 꺾었던 호레이쇼 넬슨은 프랑스 해군이 남부 이탈리아 쪽으로 항진하고 있음을 알고 출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쪽의 트라팔가 곶 앞에서 두 함대는 만났다. 넬슨의 함대는 27척, 프랑스 함대는 33척이었다. 당시의 해전은 아직 갑판에서의 백병전이 남아 있기는 해도 함포 사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군함의 급수에 큰 차이가 없는 이상 더 많은 배를 보유한 쪽이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넬슨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열을 지어 항진해 오는 빌뇌브 함대의 측면 두 곳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프랑스군은 열심히 포를 쏘았으나, 한 줄로 서서 바람을 한껏 받으며 전속력으로 다가오는 영국 배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지 못했다. 영국 함대는 곧 프랑스 함대를 세 토막으로 잘라버렸고, 이어서 재빠르게 기동하며 분단된 프랑스 함대를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프랑스군은 포술과 실전 경험에서의 열세에다 당황함까지 겹치며 파멸했고, 영국 함대는 단 1척도 잃지 않으며 적선 22척을 격침 또는 나포했다. 비록 넬슨이 난전 중에 저격당해 쓰러졌지만, 이 해전은 영국이 나폴레옹의 군화에 짓밟힐 위험을 뿌리뽑았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이제 영국 상륙작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을 말려 죽인다는 전략으로 생각을 바꾸고, 이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스페인,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바다에서는 좌절했지만, 육지에서는 나폴레옹의 영광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1805년 9월,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바이에른, 티롤의 세 방향에서 약 17만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해안에 주둔시켰던 22만의 병력(이는 ‘대육군(La Grande Armee)’이라 불렸다)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세 병력이 합치고, 러시아군과도 합세하기 전에 격파할 참이었다.
바이에른으로 침공해온 오스트리아군 7만 2천 명은 나폴레옹의 효과적인 기만 전술과 빠른 기동, 그리고 훨씬 앞서는 전투력에 밀려 울름 전투에서 약 6만이 쓰러져 버렸다. 이로써 무방비 상태가 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11월 11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프란츠 황제(Franz II, 1768~1835)가 이끄는 나머지 오스트리아군은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1777~1825)의 러시아군과 합류에 성공했고, 그리하여 9만 명의 규모가 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앞에서 당장 움직일 병력이 7만에 불과했던 나폴레옹은 트라팔가의 패전과 파리의 소요, 그리고 프로이센마저 적진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잘못하다가는 파멸할지도 모를 위기에서 나폴레옹은 기만전술을 썼다. 일부러 자기 군대의 우익을 약화된 듯 보이고는, 이를 무너뜨리려 덤벼드는 적을 아우스터리츠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12월 1일, 아우스터리츠 평야에 도착한 연합군은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플라첸 고지에 진을 쳤다. 그것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내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 저들은 내게 굴복할 거야”라고 말했으며, 그 말대로 되었다. 적을 고지에서 끌어내리고 분열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본 그는 다시 허허실실의 계략을 써서 자신의 우익이 불안해 보이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계략에 걸려든 러시아군이 고지에서 내려와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약해 보이던 프랑스군의 우익은 완강히 저항했을 뿐 아니라, 거꾸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분쇄해 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술트 장군이 이끄는 주력군에게 플라첸 고지로 진격을 명했다. 아침 8시 경,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계속 먹구름 낀 날씨였던 하늘에서 서광이 비치고,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찬란히 빛났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 사이로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지 위로 돌격했고, 허를 찔린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했다. 고지를 빼앗으며 적군을 둘로 분단시키고, 다시 이들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이중 포위 작전. 그것이야말로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카를 12세가 프라우슈타트에서 본보기를 보였으며 얼마 전에는 바로 넬슨이 나폴레옹군을 상대로 트라팔가에서 성공한 작전이었다.
전투는 오전 내내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나, 오후 들어서는 이미 승패는 결정되고, 연합군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도망치느냐만 남아 있었다. 남쪽 길로 달아나던 병사들은 얼어붙은 호수를 뛰어서 건넜는데, 이를 본 프랑스군의 대포가 불을 뿜자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병사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남은 병사들은 줄줄이 항복해 버렸다. 연합군 사상자 2만 6천, 프랑스군 사상자 8천 5백. 완전히 기가 죽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는 강화를 요청하려 나폴레옹을 찾아왔으며, 알렉산드르는 돌아가도 좋다는 나폴레옹의 말에 얼른 꽁무니를 빼버렸다. ‘세 황제의 대결’은 이렇게 끝났으며, 평생 거둔 승리 중에도 가장 빛나는 승리에 만족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이여, 짐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고 연설했다.
12월 20일에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기존의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포기할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와 나폴리까지 포기했으며, 독일 지역에서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을 독립시키고 나폴레옹의 영향권에 들도록 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프란츠 이후까지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데도 합의했다(1806년, 그가 신성로마 황제에서 퇴위함으로써 마침내 천 년 역사의 신성로마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러시아도 뒤이은 조약에서 시칠리아가 프랑스의 영향권에 드는 데 동의했다. 영국에서는 반나폴레옹주의자 윌리엄 피트 수상이 사망하고 나폴레옹 숭배자로 알려진 폭스가 내각을 맡았다. 이로써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나폴레옹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최강의 적, 영국이 아직 바다 건너에 버티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도 새로운 적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전통의 육군강국 프로이센이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는 프로이센도 참여하여 영국 왕실의 발원지인 하노버를 차지하며, 대신 뇌샤텔과 클레베를 나폴레옹에게 넘기는 조건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국과의 원치 않던 대립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영토 확장 면에서도 최선이었는지 의문이 남던 가운데, 1806년 7월에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을 비롯한 친프랑스적인 남서부 독일의 16개 공국이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을 동맹의 맹주로 추대하자 베를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8월에 프로이센은 영국과 손을 잡고는 서쪽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여기에 러시아와 스웨덴, 작센도 가담함으로써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항해 16만의 대육군을 이끌고 나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과 산발적인 전투 후, 10월 24일 예나에서 본격적인 격돌을 했다. 프로이센군은 세 갈래로 병력을 운용한 반면, 나폴레옹은 여섯 갈래로 운용하면서 훨씬 빠르고 다양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미리 고지에 집결시켜 둔 대포들이 프로이센군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불을 뿜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은 후방의 아우어슈타트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프랑스군에게 가로막혔다. 프로이센군 7만이 쓰러지고 1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장군 1명(브라운슈바이크)이 전사했다. 이로써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에게 프랑스군이 겪었던 치욕은 깨끗이 청산되었고,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이 나폴레옹에게 떨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을 방문한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계셨다면 우리는 여기 얼씬도 할 수 없었을 거라네.”라고 말했다.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대담한 기동전술에 능하며, 솔선수범하는 자세와 검소함으로 얻은 병사들의 신뢰를 또 다른 무기 삼아 더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곤 했던 프리드리히를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존경하며 본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전략적 판단에서는 프리드리히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
프로이센이 손을 들자 작센이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으며, 북독일의 여러 공국들도 프랑스 편에 붙었다.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였다. 두 군대는 서로의 힘을 조심하며 틈을 엿보다가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격돌했는데, 1807년 2월 7일~8일의 아일라우 전투는 악천후 속에서 양 쪽 다 큰 사상자를 낸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로써 잘 하면 나폴레옹도 무찌를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군은 아우스터리츠를 전후한 신중한 자세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나섰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밀어붙이면 그 자체로 영광일 뿐 아니라, 주저앉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6월 14일, 나폴레옹은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를 참패시켰다. 2만 5천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는 기가 껶였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의 타협을 결심했다. 6월 25일, 두 사람은 틸지트에서 만나 반영국 동맹을 맺고 유럽의 서쪽은 프랑스가,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써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분할되어 있던 폴란드 는 러시아에 떼어준 일부를 제외하고는 ‘바르샤바 대공국’으로 독립하면서 또 하나의 프랑스 위성국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거액의 배상금과 상당한 영토 상실을 강요당하여, 한동안 중부 유럽의 강국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 제국’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오직 칼 한 자루로 세운 제국, 근대세계 최대 최후의 정복국가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군대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대혁명 이후 형성된 ‘국민의 군대’가 가진 저력을 들 수 있다.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대였던 프랑스의 인구는 그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전에는 26만이었던 것이 혁명으로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후로는 1백만이 넘는 병력이 가능해졌다. 양적인 면에서만 충실해진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소수의 상비군만 유지하고 대규모 전쟁은 용병을 모집해서 치르곤 했는데, 애국심이 전혀 없는 용병은 봉급 지급이 늦거나 조금만 전황이 불리해지면 탈주하곤 했다. 그러나 국민의 군대는 내 나라, 내 고향을 지킨다는 신념에 불탈 수 있었다. 또한 문벌 귀족에만 장교를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재능과 출세욕이 충만한 인재가 속속 나타났다. 나폴레옹 자신도 그런 예였으며, 그를 보좌한 18명의 원수들 상당수가 평민 출신이었다. 가령 란(Jean Lannes, 1769~1809)은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상황이 어렵자 “나는 일개 척탄병이었다가 원수까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병사로서 싸우고 있다!”고 외침으로써 단숨에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 다음으로 7년 전쟁에서 고배를 마신 프랑스가 이후 시도한 여러 군사개혁 성과를 나폴레옹이 계승하고, 확충했음을 들 수 있다. 먼저 ‘사단’이라는 새로운 편제가 개발되었는데, 종전의 군대가 동원된 지역별 또는 기병, 보병 등 각 병과 별로 부대를 이루고 있던 반면 이 사단은 기병, 보병, 포병, 지원병과 등이 하나로 묶여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하도록 한 단위였다. 국방개혁가 기베르(Guibert de Nogent, 1053~1124, 나폴레옹은 청소년 시절 그의 책을 탐독했다)가 1772년에 처음 제시하고, 총재정부의 카르노(Lazare Nicolas Marguerite Carnot, 1753~1823)가 1794년에 편성 계획을 세웠는데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된 것은 1796년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였다. 사단은 군대를 여러 갈래로 운용하면서도 독자적 작전이 가능하기에 군대의 한 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이 분전하면 역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한 병과가 완전히 격파, 차단됨으로써(가령 포병대나 병참지원대) 전체 군대의 작전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되는 일도 방지했다.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 규모가 커지면서 1804년 이후 여러 사단을 통합한 군단 편제를 신설했다.
또한 ‘참모부’가 새로 만들어졌다. 참모부는 징병에서 군사훈련, 병력 운용, 무기 생산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으로, 전시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존재하면서 전쟁을 준비함으로써 충실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에서는 1776년에 처음 특별참모부가 편성되고, 17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발전했는데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때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1815)를 참모장으로 하는 일반참모부를 설치한 후 계속 운영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에 나폴레옹에게 참패를 당한 다음 군사개혁에 절치부심했는데, 그 일환으로 창설한 일반참모부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병참 부문에도 개혁이 있었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보급 문제는 장거리 원정에 항상 따르는 골칫거리였다. 병사들이 각자 식량을 휴대하게 하면 행군 속도가 느려졌고, 보급대를 따로 두면 적에게 보급로가 끊기거나 보급대가 뒤쳐져 버릴 위험이 있었으며, 현지 약탈에 의존할 경우 군기가 문란해지고 주민의 저항이 완강해졌다. 나폴레옹은 병참 임무를 각 군단 및 사단에게 분배하고, 기본적으로 현지 조달에 의존하되 약탈이 아니라 ‘일단 징발해서 사용하고, 그 대금을 나중에 지불한다’는 방식을 채택했다. 덕택에 그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면서 보급로 차단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여기에는 기술 쪽의 개혁도 힘을 보탰다. 나폴레옹은 1800년에 프랑스 최고의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산업장려협회’를 세우고 전쟁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도록 했는데, 거기서 나온 가장 성공적인 혁신이 쉽게 부패하는 식품을 오랫동안 보존시키는 병조림, 오늘날의 통조림의 원조였다. 또한 대포 관련 기술도 발전하여, 그리보발(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1715~1789)이 1780년대에 개발한 더 가볍고 정확하며 기동력이 좋은 대포가 표준 장비로 채택되고, 기마포병대, 근위포병대 등 여러 병과에 의해 일반포탄 말고도 산탄, 유탄, 유산탄 등 여러 기능의 포탄을 쏘는 세계 최강의 포병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작전능력을 들 수 있다. “내가 만나본 어떤 인물도 그를 따라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최근 1천 년 동안 최고의 천재였다”고 회상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erigord, 1754~1838, 비록 그는 자신과 프랑스의 이익을 내세워 그를 배신하지만)의 말대로,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그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의 군대는 한 번 사기가 진작되면 무섭게 싸우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억지로 끌려나왔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용병보다 못할 수도 있는데, 나폴레옹은 약졸을 강병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전쟁을 전력 대 전력의 승부로 보지 않고,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 적의 싸울 의지를 꺾는 게임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동력을 발휘해 적진을 갈라놓은 다음, 적 전력의 중심지를 찾아내 그 한 점에 전력을 집중하는 식으로 싸웠다. 말하자면 격투기에서 나비처럼 날며, 상대의 급소를 벌처럼 찌르는 식이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상대도 무릎꿇릴 수 있는 것이다. 병사들에게 120퍼센트의 힘을 내게 하는 카리스마,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동력과 집중력의 발휘, 그것은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명장의 자질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들보다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지휘했고, 병력을 둘이나 셋이 아니라 여섯, 일곱으로 나눈 다음 적시에 하나로 모아 타격하는 신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였다. 그런 능력을 극대화하고자 그는 포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보병을 종전의 횡대 편성 대신 종대 편성으로 바꾸었는데, 앞 대열은 적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있어도 기동력이 향상되고 죽기로 결심하고 싸우는 감투정신이 북돋아졌기에 더 빠르고 강한 돌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대승을 거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점은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구체제 왕국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일 수밖에 없는데, 나폴레옹은 적을 전멸시키기보다는 주전력만을 격파함으로써 당장의 싸울 의지를 꺾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따라서 적은 일단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진력을 얻어’ 다시 일어나 싸움을 걸고는 했다. 또한 그런 나폴레옹의 싸움 방식은 대규모 승부 자체를 피하면서 게릴라전과 청야전술로 압박해 오는 적, 러시아나 스페인 같은 적을 상대로는 효과적일 수 없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 지역만을 전장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반면, 그는 스웨덴의 카를 12세처럼 사방팔방 멀리까지 원정을 다녔으며 따라서 아무리 풍부한 전력이라도 결국 한계에 이르고, 끝날 줄 모르는 전쟁에 국내의 인내심도 바닥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그리고 본래의 장점을 갈수록 살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결국 몰락한다.
“왜 1807년의 강력한 제국으로 머물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무기력해졌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에게 복종하고 파리를 수도로 섬겼다. (......) 이제 이 인물은 끝없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어 새로운 승리를 얻지 않고는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게 되었다. 매년 새로운 정복과 날로 더 대담한 시도를 해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평전]을 쓴 조르주 보르도노브는 이렇게 한탄했지만, 사실 나폴레옹도 틸지트 조약 이후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달래기 위해 1808년에 에어푸르트에서 메테르니히와 회담했고, 이듬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오스트리아를 격퇴한 다음에는 조세핀 황후(Josephine de Beauharnais, 1763~1814)와 이혼하고 1810년 3월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 루이즈(Maria Luisa, 1791~1847)와 재혼했다. 조세핀이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점이 기본 문제였고 본래는 러시아 황실에서 신부를 얻으려던 것이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의 사위가 됨으로써 ‘말뼈다귀’로서의 자신의 평가를 개선하고 오스트리아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근본적인 적대자, 영국과는 화해할 뜻이 없었다. 1806년 점령한 베를린에서 발표한 칙령에 따른 대륙봉쇄령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각국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다. 프랑스에서도 상공업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높아졌으며, 봉쇄령을 뚫고 밀무역이 무성해지자 1809년에는 영국과 특별히 무역할 수 있게 해주는 특허장을 발행했는데 그것이 프랑스 상인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여 나머지 유럽의 분을 돋우었다. 그런 대륙봉쇄령 강요의 연장선상에서 1807년 영국의 동맹자 포르투갈을 제압한 다음, 스페인까지 노려 친형 조세프(Joseph Bonaparte, 1768~1844)를 스페인 왕으로 앉히고, 이에 반발하는 스페인인들을 제압하고자 1808년부터 ‘반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포르투갈에 상륙하며 반도 전쟁에 끼어들고,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호응함으로써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의 나폴레옹은 병력을 대거 스페인으로 보낸 상태라서 오스트리아와 싸우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의 오판 등을 이용해 서전에서 힘겨운 승리를 계속 거두고 다시 한 번 빈을 점령했다. 그러나 5월 22일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다뉴브 강이 범람하여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병력이 양분된 상황에서 적의 맹공을 받아 한때 패색이 짙었으나, 가까스로 무승부를 만들 수 있었다. 한편 티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도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상황이라 전망은 한때 매우 어두웠다.
그러나 7월 5일의 바그람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분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양은 아우스터리츠와 비슷하게 고지에 포대를 설치하고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때보다 프랑스군의 결집력은 약했고(모자란 병력을 이탈리아나 독일의 병사들로 채운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전투력은 강했다. 나폴레옹은 결국 불세출의 카리스마까지 동원해 승리할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이 전장에서 저 전장으로, 조금만 불리해 보이는 지점이면 직접 달려가 저격당할 위험도 무릅쓰며 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했던 것이다. 아무튼 값을 많이 치른 승리였다. 오스트리아군 3만 5천을 쓰러트렸지만 프랑스군의 사상자도 2만에 달했다. 란과 라잘 원수가 전사했다. 나폴레옹의 옛 연인인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고, 그 덕에 원수까지 오른 셈이던 베르나도트(Jean Bernadotte, 1818~1844)는 전투 중에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후퇴했다. 그를 용서한 나폴레옹은 얼마 후 그를 스웨덴 왕으로 앉혀 주기까지 했으나, 베르나도트는 곧바로 칼을 거꾸로 쥐고 반 나폴레옹 전선에 가담했다. 스페인의 전쟁은 끝이 안 보이고, 티롤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곧 재발했으며, 독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되었다. 프랑스 국내에서조차도 암살 시도와 쿠데타 시도가 적발되고, 탈레랑과 푸셰는 물밑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의 새신랑이 된 나폴레옹은 신혼의 단꿈에 잠길 처지가 아니었다.
1808년부터 시작된 ‘반도 전쟁’을 본래 나폴레옹은 별 것 아닌, 변방의 소규모 분쟁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 본인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1814년까지 이어지면서 나폴레옹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스페인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와 함께 영국과 싸웠을 만큼 1795년 이후 나폴레옹의 충실한 동맹자였다. 카를로스 4세의 총신이자 왕비의 애인이던 고도이(Manuel de Godoy, 1767~1851)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국정을 개혁하는 한편 포르투갈을 손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주도해 맺은 1807년의 퐁텐블로 조약이 대륙봉쇄령을 강화하는 한편 포르투갈 공략을 빌미로 프랑스군을 스페인에 들이는 결과를 낳자,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는 날로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1808년 3월 17일의 아랑후에스 반란으로 고도이는 실각하고, 카를로스 4세는 페르난도 왕자(페르난도 7세)에게 양위했다.
5월 2일에는 마드리드에서 반 프랑스 민중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군인들이 살해되었는데, 현지의 프랑스군은 잔혹한 진압에 나서 민중을 학살하고 포로들을 무더기로 총살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반란 진압의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해 아랑후에스를 점령하더니, 페르난도와 카를로스를 가둬 버리고, 꼭두각시 의회를 소집하여 조세프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스페인인들은 바야흐로 민족주의의 불길에 휩싸였다. 스페인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타도와 페르난도 복위를 부르짖었다. 프랑스인은 반도 전쟁으로, 스페인인은 ‘해방 전쟁’으로 부르는 전란의 시작이었다.
봉기에 참여한 스페인의 정규군은 군사력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들과 합세한 민중의 지칠 줄 모르는 게릴라전과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은 이 전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도록 했다. 7월에는 뒤퐁 장군이 2만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항복하고(나폴레옹의 군대가 항복한 일은 사상 처음이었다), 조세프는 마드리드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결국 나폴레옹이 10월에 20만의 병력을 끌고 직접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는 몇 주 만에 스페인군을 쓸어버렸고, 영국군도 밀어붙여 바다로 다시 내몰았다.
하지만 몇몇 전투에서 이긴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진 적 병사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고, 프랑스나 중부유럽과 달리 비포장 도로였던 스페인의 길로는 빠른 기동이 어려웠다. 일교차가 극단적으로 큰 날씨도 병사들을 진력나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현지 조달식의 보급이 곤란하다는 게 문제였다. ‘선 징발 후 지불’식으로 하려 해도 민족감정에 불타는 현지 주민의 협조를 얻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징발할 만한 물자 자체가 별로 없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야만적인 약탈로 배를 채우려 했으며, 학살과 강간이 잇달았다. 이는 저항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하는 땔감이 되었다. 스페인 사제들은 “프랑스인과의 싸움은 성전이다. 프랑스군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가혹행위는 증오가 증오를 낳으며 점점 심해졌다. 어느 마을에 들어선 영국군은 강간당한 뒤 사지가 잘린 여자들의 시체로 우물이 가득 메워져 있는 광경을 보았다. 다른 마을에는 프랑스 병사들이 토막난 채로 벽에 못박혀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상대하기 위해 1809년 2월에 20만의 군대를 남긴 채 파리로 돌아갔으며, 1810년부터 웰링턴의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오면서부터 정규 전투에서도 스페인 쪽이 이기기 시작했다. 1812년 7월에는 마드리드가 웰링턴에게 떨어졌고, 1813년 6월의 비토리아 전투로 ‘스페인 해방’은 결정적이 되었다. 조세프는 맨몸으로 허겁지겁 달아났으며, 페르난도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10월에는 웰링턴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돌입했다.
반도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끝없이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며, 어느 땅에서나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전투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민족주의로 국민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면, 마찬가지로 스페인인이나 독일인, 러시아인도 민족주의에 불타 그에게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열이면 열, 전쟁사가들은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을 나폴레옹 몰락의 직접 원인으로 꼽는다. 서쪽에서 영국, 스페인과 전쟁하고 있으면서 동쪽에서도 광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원정을 감행한 일은 무모했으며, 오만과 과대망상이 빚은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저력을 부담스러워 했으며, 틸지트 이전부터도 늘 러시아와 화친하고 영국하고 싸운다는 방침을 전략의 기본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화해했다가도 어느새 조약을 어기고 공격해오는 러시아에게,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를, 예나에서 프로이센을 잠재운 것처럼 한번 결정적으로 본때를 보임으로써 러시아의 도발을 장기적으로 예방해야겠다는 생각도 품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러시아를 무릎꿇리고, 영국과의 전쟁에 전념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1807년에서 1810년까지는 북쪽에서 스웨덴, 남쪽에서 튀르크와 싸우느라 프랑스를 돌아볼 틈이 없었고, 영국과도 명목적으로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고 영국, 튀르크와의 싸움도 멈추면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기던 나폴레옹은 1810년에 영국이 대규모의 선단을 발트 해에 출입시키며 대륙봉쇄를 농락하자 분노하며 그 지역 일대를 무력 점령했는데, 그 중에는 러시아 황실과 막 사돈이 된 올덴부르크도 있었다. 여기에 분노한 알렉산드르 1세는 올덴부르크와 기타 독일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통보했고, 나폴레옹이 불응하자 더 이상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1812년 4월, 영국, 스웨덴과 더불어 대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대육군 35만에 동맹국 및 위성국들이 보낸 32만(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각각 3만, 2만을 보냈다)을 더하여 총 67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러시아로 출발했다. 러시아에는 100만여 병력이 있었으나, 전국에 흩어져 있음을 감안하면 병력 면에서 별로 우위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1812년 6월에 니멘 강을 건너며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2개월이 되도록 전투다운 전투를 해볼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집결하여 자웅을 겨루기보다 후퇴하며 청야전술로 집과 밭을 불태우기만 했다. 보급대의 식량은 몇 주 만에 거덜났고, 현지 조달이 어려운 점은 스페인 이상이었다. 말먹이도 없어서 군마가 들판의 풀을 뜯다가 중독사하는 일까지 생겼다.
마침내 8월 17일에 스몰렌스크 공방전이, 9월 7일에 보로디노 전투가 벌어졌다. 보로디노 전투는 모스크바까지 빼앗기면 안 된다는 러시아군의 생각에서 치러졌는데, 대포의 일제 사격을 중심으로 한 살육전 끝에 프랑스가 승리했지만 병이 심했던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적군을 쫓을 기력이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은 상당한 전력을 보전했는데, 숙의 끝에 더 이상의 결전을 하지 않고 청야전술과 동장군의 영향을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9월 15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다음 날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걸 보고 얼이 빠졌다. 그는 러시아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마침내 ‘본때를 보여줬는데’ 강화 교섭에 나서기는커녕 자신들의 손으로 소중한 도시를 불사른단 말인가? 그는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서 한 달이나 머물며 알렉산드르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10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그때 나폴레옹의 군대는 14만 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고난은 그때부터였다. 스페인에서처럼 러시아 농민과 병사들이 게릴라전을 벌이며 숙영 중인 병사들을 습격해 죽였다. 잠을 잘 수도 없다. 상상도 못해본 추위에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떨어져 나간다. 식량은 언제나 부족하다. 병사들은 크렘린에서 노획한 금은보화를 몸에 지고 어그적거리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었다. 좀비처럼 휘청대며 걷는 그들의 동료들에게는 언덕 위에서 코사크들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전염병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최소한 6만 이상이 발진티푸스로 끝없는 설사를 하다가 죽어갔다. 11월 말에는 베레지나 강을 건너기 위해 공병대가 3개의 다리를 건설했는데, 가슴팍까지 얼음장 같은 물 속에 잠겨 하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었다 싶자 러시아군이 공격해 왔다. 네(Ney) 장군과 빅토르 장군이 후위를 맡아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끝에 도하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도 강추위와 산발적인 습격은 그칠 줄 몰랐다. 12월 5일, 파리에서 쿠데타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은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혼자서 황급히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뒤에 남겨진 병사들은 “황제는 우리를 버렸다!”며 통곡했다. 그 숫자는 5만. 러시아로 진입할 때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베빈 알렉산더(Bevin Alexander)는 예나 전투 이후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이 ‘나는 어떤 야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전처럼 기동전과 기습전에 의존하지 않고 병력과 화포 사격에만 의존해 전쟁을 치렀다고 보았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의 시점에는 이미 전과 같은 병력 운용은 불가능했다. 끝없는 전쟁으로 대육군이 많이 소모되어 신병이나 타국 병사들을 데리고 싸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훈련 수준과 사기가 훨씬 떨어지는 집단을 자유롭게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전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스페인에서 불필요한 전쟁을 치르고, 그 교훈을 러시아에서 살리지 못했으며, 근본적으로 영국과 일정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끝내 전쟁을 고집한 점이 그의 전략적 실책이었다.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1813년부터, 나를 비쳐 주던 별이 빛을 잃었다. 고삐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고 회상했다.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은 사라져 버렸으며, 그 기회를 놓칠 유럽 제국이 아니었다. 1813년 2월,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빼앗긴 프로이센 동부를 점령했다. 영국, 스페인이 가담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졌고,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낸 오스트리아는 일단 중재를 맡았으나 나폴레옹이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동맹에 합류해 버렸다. 라인 동맹의 친프랑스 독일 공국들도 속속 동맹에서 빠져 대프랑스 동맹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일부 병력을 불러들이고 제국의 구석구석에서 병력을 긁어모아 24만의 병력을 마련했으나 옛 대육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18명의 원수들도 대부분 죽거나, 배신하거나,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에 대항하는 동맹군은 50만이 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약점을 최대한 노리는 식으로 공격해 왔다. 즉 병력을 하나로 모아 정면승부를 하기보다 여러 전선에서 번갈아 공격하며 나폴레옹의 병력을 소모시켜 나갔다. 이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는 힘빼기식 공격에도 쩔쩔매는 부하들 때문에 나폴레옹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직접 방어를 해야 했다. 예전처럼 나폴레옹이 적들을 각개격파하지 못하고, 거꾸로 적들이 나폴레옹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포기하지 않고, 라이프치히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베를린이 위험해지면 동맹군이 결전을 시도하리라 본 것이다. 그 생각은 맞아떨어져서 10월 15일부터 ‘제국민의 전쟁’이라 불리게 될 라이프치히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바르샤바, 작센, 뷔르템부르크군은 약 20만,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군은 약 43만이었는데 작센과 뷔르템부르크는 전투 도중에 동맹군 편에 붙었다. 18일까지 전투가 이어지자, 프랑스 편에 남은 병력은 6만에 지나지 않았다. 수없이 죽고, 도망치고, 배신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싸웠다. 그러나 졌다. 그는 19일에 라인 강을 건너 후퇴했고, 라인 강 동쪽은 다시는 프랑스의 땅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로 퇴각한 나폴레옹의 손에 남은 병력은 8만이 전부였다. 이미 남서부는 웰링턴군에게 유린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징병을 해보려 했으나, 1812년에서 1814년까지 100만의 병력을 잃은 프랑스 국민은 이번만은 황제를 따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된 나폴레옹을 두고 이번에는 동맹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프랑스를 사정없이 짓밟기를 바랐던 반면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은 온건책을 주장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완전히 무너질 경우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오스트리아는 마리 루이즈의 입장을 고려했으며 스웨덴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서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심산이었다. 이들은 결국 라인 강과 알프스,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하는 ‘자연 국경’으로 프랑스의 국토를 축소하는 선에서 강화하자고 나폴레옹에게 통보했으나, 나폴레옹은 거절했다. 나중에서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바꾸었지만, 그 사이에 이미 동맹군 측에서는 강경론이 대세를 잡았다.
프로이센과 영국은 네덜란드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로 진입했으며 러시아와 나머지 병력은 라인 강을 건넜다. 18원수 중 하나로 나폴리 왕위에 앉아 있던 뮈라가 배신했고, 덴마크도 그 뒤를 따랐다. 파리에서는 탈레랑이 영국에 있던 루이 18세를 모셔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직접 이끄는 병력도 전투력이 불충분했다. 2월 1일의 라로티에르 전투에서 마몽 장군은 병사들이 소총을 쏘지 않고 들고만 있는 걸 보고 왜 그러느냐고 하니, 소총 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전선에 끌려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전투는 나폴레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날 뻔 한 것을 마침 불어닥친 거센 눈보라가 막아주었다. 그래도 이 불세출의 장군은 2월 14일의 보샹 전투, 3월 13일의 랭스 전투 등에서 프로이센군 수 만 명을 쓰러트리는 등 불꽃을 튀겼지만,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운 채였다.
나폴레옹이 파리 외곽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동맹군은 파리를 급습했고, 3월 31일의 몽마르트르 전투 이후 방어를 맡고 있던 마몽은 항복해 버렸다. 15만의 동맹군 병력이 파리로 물밀 듯 몰려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다시 파리 탈환 작전을 짜려 했다. 그러나 4월 3일에 네와 베르티에를 비롯한 원수들이 명령 불복종을 표명하자,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를 선언했다. 4월 12일, 동맹군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의 영주로 임명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보유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매년 연금을 받도록 한다는 결정을 통보했다. 그 다음 날, 나폴레옹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약효가 떨어진 독약은 심한 고통만 주고 끝났다. 독약에게조차 버림받은 나폴레옹은 4월 20일에 근위대를 열병하고, 마차에 올라 엘바 섬으로 떠났다.
노병은 사라졌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병이 나폴레옹일 경우에는,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야망을 접은 듯 고향인 코르시카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엘바를 다스리며 회고록을 쓰는 일에 전념하는 듯 했다.그러나 한때 전 유럽을 뛰어다닌 맹장, 전 유럽을 호령했던 최고통치자인 그가 이제 45세의 나이로 은둔 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굴욕적인 평화는 그에게 더없는 고문이었다.
결국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배를 타고 엘바 섬을 빠져나와 3월 1일에 프랑스에 상륙했다. 여기서 일종의 음모론이 있는데, 영국이 일부러 나폴레옹의 탈출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2월 23일에 엘바 섬의 감시자였던 영국의 캠벨 대령이 자리를 비웠고, 작은 나룻배도 아니고 120명이나 승선할 수 있는 여러 척의 범선인데 출항 준비를 하는 동안 들키거나 저지받지 않았으며, 엘바에서 프랑스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국은 프랑스를 다시 한 번 ‘합법적으로’ 유린하기를 바랐으며 따라서 나폴레옹을 이용했다는 해석이다.
어찌됐든 나폴레옹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를 막으려 군대를 보냈지만, 가는 족족 옛 상관이자 주군이던 나폴레옹 앞에 고개를 숙이고 총을 거꾸로 잡았다. 그 사이에 동맹군에게 당한 수모, 그리고 복위한 루이 18세가 저지른 실정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여, 파리 시민들도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3월 19일에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달아났으며, 그 다음 날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했다. ‘백일천하’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망상을 품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독재적으로 프랑스를 다스릴 수도 없고, 예전처럼 유럽을 벌벌 떨게 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권한을 줄이고 여러 정파의 입장을 적당히 받아들인 새 헌법 부가조항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으며, 유럽 제국에게는 ‘전처럼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고, 위성국을 거느릴 생각은 없다. 다만 합법적인 프랑스 통치권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라며 화해와 타협을 표명했다. 좀 더 일찍 그런 온건한 자세를 보였던들!
그러나 당연히 유럽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빈에서 회담하여 나폴레옹을 “세계 평화의 적”으로 낙인찍고, 그를 타도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나폴레옹은 징집령을 내렸다. 60만을 목표로 했지만 어림도 없었고, 그럭저럭 24만이 모였다. 동맹군의 선봉은 영국의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과 프로이센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ucher, 1742~1819)였다. 그들은 각각 9만, 11만의 병력을 갖고 벨기에에 주둔 중이었다. 나머지 유럽 군대는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았지만, 80만이 넘을 것으로 보였다. 나폴레옹은 선제공격으로 웰링턴과 블뤼허를 격파하여 위력을 과시하고, 러시아-오스트리아와 협상하든지 계속 공격하든지 하기로 결정했다. 그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판단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이끄는 병력이 옛날처럼 과감한 작전을 펼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조차 전보다 자신감이 없었고, 건강도 눈에 보이게 나빠져서 툭하면 휴식을 취하곤 했다. 죽지 않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노병은 노병이었다.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은 리니와 카트르브라 두 곳에서 적을 공격했다. 리니의 블뤼허와 카트르브라의 웰링턴은 패퇴했다. 이로써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적을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투가 끝나고 보니 17만으로 출발한 나폴레옹군은 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전사도 많았으나 도망자가 더 많았다. 부르몽 장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블뤼허에게 항복했다. 반면 적들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물러났다.
이 때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도 있었을 기회가 두 차례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그것을 모두 놓쳐 버렸다는 분석이 있다. 첫째는 웰링턴이 카트르브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자신은 혼자 브뤼셀의 무도회에 가서 한껏 놀다 들어왔는데, 그때 바로 지척까지 진군해 있던 나폴레옹군이 야습을 했다면 웰링턴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블뤼허를 리니에서 끝까지 추격하여 전멸시킬 수 있었고, 그랬더라면 웰링턴만으로는 워털루에서 버틸 수 없었을 터인데,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망설임으로 절호의 기회를 흘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차 하면 전투의 승패가 바뀔 수 있었으나 작은 우연이나 판단 착오로 그리되지 않은 예는 아우스터리츠에서도, 예나에서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상 밖의 변수가 나타나더라도, 웬만해서는 큰 흐름은 바뀌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웰링턴을 털어 버렸다 해도, 다음이나 다음 다음 전투에서 똑같은 운명이 그를 맞이했으리라.
나폴레옹은 브뤼셀로 진군하여 그곳의 웰링턴을 무찌르고 브뤼셀을 점령하고자 했다. 그러나 블뤼허가 끼어들지 않도록 그루쉬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뒤를 쫓게 했다. 그래서 자신은 7만여 병력으로 폭우를 뚫고 브뤼셀로 행군해 갔다. 마침내 6월 17일, 워털루에 태양이 떠올랐다. 본래는 태양이 뜨기 무섭게 나폴레옹의 대포 포탄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영국군 진지로 날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침묵. 간밤의 폭우 때문에 대포가 진창에 빠지기 때문에 해가 나고 땅이 굳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격 시점이 오전 아홉시로 정해졌는데, 그 때에도 포격은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지칠 대로 지친 나폴레옹이 잠깐 낮잠에 들었다가 그만 너무 많이 자 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첫 포격은 열한시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이 몇 시간 동안 블뤼허는 그루쉬를 일부 병력으로 붙잡아둔 뒤 전속력으로 워털루로 달려오고 있었다.
몽생장 농장을 중심으로 본진을 치고 3개 군단을 앞에 세워서 방어전을 벌이는 영국군에 대해 프랑스군은 크게 두 갈래로 돌파에 나섰다. 우구몽 농장과 라에이상트였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산개하여 엎드려 있게 함으로써 포격 피해를 줄이고, 병력을 상황에 따라 이리 보내고 저리 보태고 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11시쯤 시작한 공략이 오후 네 시가 되어서도 먹히지 않자, 격분한 네는 독단적으로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이 무모한 돌격은 진지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영국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오후 다섯 시를 넘어가자 프랑스군의 오른쪽에서 질풍처럼 달려오는 기병대가 일으킨 흙바람이 높이 일었다. 그루쉬인가? 아니었다. 블뤼허였다! 나폴레옹에게 여러 번 패했던 그는 이번에야말로 설욕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무통의 6군단을 강타하는 순간, 사실상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공격받은 웰링턴의 군대도 이젠 기진맥진이 되어 있었다. 방어선의 일각이 허물어지려 했다. 네는 그 기회를 살리고자 마지막 돌격을 위해 근위대 병력을 내달라고 나폴레옹에게 외쳤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이 가장 믿고 아끼는 부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오후 일곱 시가 되어서야 출격을 허락했지만, 너무 늦은데다 무질서한 돌격이었다. 그새 전열을 정비한 영국군은 돌진해오는 근위대를 침착하게 하나씩 쏘아 떨어트렸다. 나폴레옹군 최정예인 근위대까지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공포가 전 병력을 엄습했다. 그들은 황제를 내버려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포탄이 가까이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죽을 각오를 한 듯했다. 장군들이 그를 억지로 붙들어서 간신히 탈출시켰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야망은 끝장이 났다.
노병은 다시 수명을 연장했지만,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번 유배지는 대서양의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헬레나였다. 그리고 전처럼 한 섬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주거지역 밖으로는 출입도 통제되는 명백한 죄수 신분으로서였다. 나폴레옹은 마지막 순간에 도망쳐서 미국으로 망명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4년 7개월 동안 섬에서 살다가, 1821년 5월 5일, 52세의 나이로 숨졌다. “세느강 가에 나를 묻어 주게.” 그 유언은 19년이나 지난 1840년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의 1차 퇴위 이후부터 시작된 빈 회의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이리저리 부딪치는 가운데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도중에 돌아온 나폴레옹이 일종의 해결사 역할을 하여 워털루 전투 직전인 1815년 6월 5일에 ‘최종의정서’가 조인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프랑스와 스페인, 나폴리에서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고, 프랑스의 영토도 혁명 이전 수준으로 축소되며, 폴란드는 그 국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겸임됨으로써 사실상 러시아에게 합병되었다. 한편 교황령이 부활하고,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를 되찾고, 프로이센은 잃었던 영토에 덤까지 얻으며, 그 두 나라를 포함한 독일 35개 군주국과 4개 자유시가 합쳐져 독일연방을 구성하였다. 영국은 몰타와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케이프를 얻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부정하고 그 이전으로 유럽을 되돌린다는 ‘복고 원칙’과 나폴레옹 전쟁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이익을 취하되 앞으로의 분쟁 가능성을 방지한다는 ‘세력균형 원칙’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복고 원칙은 나폴레옹에 대한 구체제 왕조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혁명의 본향, 프랑스에서 그 승리는 길지 않았다. 루이 18세와 그 뒤를 이은 샤를 10세의 부르봉 왕조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국민의 끝없는 요구에 직면해야 했으며, 결국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15년 만에 종식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1820년 스페인의 ‘리에고 혁명’, 1820년 나폴리의 ‘카르보나리 혁명’, 1825년 러시아에서의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등등 민주주의-공화주의 운동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왕조들은 탄압과 함께 일정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세력균형이라는 차원에서 당장의 최대 승자는 러시아인 듯했다. 아무튼 과거에는 변방의 후진국 정도로만 여겨지던 나라가 나폴레옹 타도의 최대 공로자가 되었고, 차르의 군대가 유럽의 심장부를 누비고 다녔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물리치는 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유럽 국제질서를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그래서 트로이 전쟁의 아카이아군 맹주였던 ‘아가멤논’이 그의 별명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1815년에 기독교의 정신을 중심으로 유럽이 하나로 뭉치자는 ‘신성동맹’을 제창하여,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였으며 1818년에는 프랑스까지 동참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자, 진정한 승자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 이래 수립한 제해권을 20세기가 되기까지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비인 체제는 유럽 대륙에서 다시는 나폴레옹 프랑스처럼 강력한 패권국가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안배를 포함했는데, 그것은 영국에 침입하거나 영국의 세계 지배를 위협할 나라가 당분간은 없다는 뜻이었다. 러시아는 그 사실을 크림 전쟁(1853~1856)에 가서야 깨달을 것이며, 영국이 혜택을 누리는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체제는 19세기 후반의 독일, 이탈리아의 통일에 가서야 비로소 깨질 것이었다.
그러면 나폴레옹의 유산은 아무 것도 없었을까? 그가 최고통치자로써 군림한 십여 년은 그냥 세계사의 스쳐가는 한 순간일 뿐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일단 군사적으로 나폴레옹이 선보인 국민개병제, 사단-군단 편제, 일반참모부, 그리고 종대 중심 편성과 심지어 병조림까지 그에게 혼이 났던 각국이 제각기 본받아 자신의 군사력을 다졌다. 또한 그의 군대를 특히 강하게 만들었던 민족주의가 그에게 맞선 나라들에서도 고양되어, 더 이상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충성’이 사회적 미덕으로 강조되었다. 루이 18세조차 나폴레옹을 코르시카 출신의 이민족이라고 비난하고, 그에 비해 프랑스인인 자신이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선전해야 할 상황이었다. 민족 독립-국가 통일의 염원이 물거품이 된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지식인과 예술가, 혁명가들이 끝없이 나타났으며, 그리스에서는 튀르크의 지배에 맞선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대체한다고 할 수 있는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독일의 여러 주권국가들이 공동 문제를 협의하는 느슨한 연합체일 뿐이었지만 독일 통일이라는 꿈이 점차 그 틀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 유럽에, 아니 아메리카에까지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혁명의 이상이 퍼졌다. 가령 동생 덕에 스페인을 잠시 다스린 조세프 보나파르트는 무능한 왕이었지만, 그의 이름으로 도입된 프랑스적인 헌정질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반도 전쟁이 광적으로 치달을 때조차 일부 지식인과 부르주아는 보나파르트를 지지했던 것이다. 또 괴테나 베토벤, 헤겔 같은 지성인들이 자유의 투사로서 한때 나폴레옹을 찬양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병사로서나 그에 맞선 세력의 병사로서, 유럽의 수많은 평민들은 대혁명의 내용과 이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런 자유의 씨앗은 프랑스 7월 혁명과 2월 혁명, 독일의 3월 혁명, 포르투갈 혁명, 리에고 혁명, 사르디니아 혁명, 데카브리스트 반란, 남아메리카 독립 등으로 꽃피며 19세기 전반기를 온통 달구게 될 것이었다.
헤겔의 말처럼, 나폴레옹은 말을 탄 세계정신이었다. 그의 말에 짓밟힌 숱한 사람들에게, 말에서 내리려도 내릴 수가 없었던 나폴레옹 자신에게 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말발굽 아래 낡은 세상은 일부는 빠르게, 일부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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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성생활이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