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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전쟁
최 극 (외교국방연구소이사)
<gchoi@hanmail.net>
6.25전쟁, 민족 최대의 불행했던 이 비극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군이 당시의 남북 분단선인 38도 선을 일제히 넘어 한국을 기습 침공함으로 시작 되었다. 공산군은 소련제 T34-탱크를 선두로 노도처럼 처 내려와 침공 3일 만에 서울이 함락 되었다.
당시 단 1대의 전차도 없었던 열세한 우리 국군은 한강을 넘어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불법한 공산군의 침략행위를 유엔 안전보장회의는 불법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즉각 유엔 국제연합군을 창설하기로 결의 하였다.
이 결의로 먼저 미국을 위시하여 16개국이 UN의 기아래 결집하고 먼저 일본에 주동하고 있던 미군부대를 한국전선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지형과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고 전투경험의 미숙으로 승승장구 하는 북한 침략군을 제지 할 수 없었다.
최초로 일본 “규슈”에서 파견되었던 미제24사단은 1950년 7월 1일부터 22일 까지 의 전투에서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딘” 사단장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얼마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 되어 있던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전세 속에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고, 부산 교두보 작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낙동강 전선은 쌍방의 모든 전투력이 동원된 격전지가 되었고 일진일퇴를 거듭한 치열한 공방전이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각 전선에서 작전 주도권을 장학한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로 적의 배후를 찌른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수도 서울은 탈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최후의 방어 작전을 하던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 반격작전을 전게하여 적을 격멸하고 진격하였다.
한국군과 UN군은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여 전 전선에서 북진을 게시 10월 9일, 38선을 돌파하고 단시일 내에 적의 수도 평양을 위시하여 원산, 함흥, 등 이북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 중 일부는 압록강에 도달 하여, 바야흐로 민족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꿈이 실현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항미원조”라는 구실을 내새워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엄청난 병력을 전 전선에 투입하여 전쟁에 개입했다. UN군과 중국 공산군이 최초로 전투 한 것은 1950년 10월 25일 운산, 온정리 일대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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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은 중공군의 1차 공세에 이어 30개 사단으로 증강된 2차 공세에 밀려 후퇴를 계속,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마침내 지평리-원주 선에서 반격을 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 하였다. 그 후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 반격에 나서 6월 중순까지 임진강-철원-화천-간성선을 화보하였다.
전투는 중동부 산악 지대에서 버러지고 중공군은 이때부터 방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쌍방이 모두 군사작전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1951년 7월 10일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군사분계선이 설정, 포로 송환 문제에 합의 하기 위하여 20개월의 긴 회담을 거쳤다. 그 동안 전선에서는 쌍방의 휴전 전략과 연결되어 고지 쟁탈전이 거듭 되었으나 전선의 큰 변화는 없었으며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발효되어 전쟁은 끝이 났다.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 6.25전쟁은 3년여 동안 많은 재산과 인명의 손실을 가져왔다.
* 그 후 정부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의 인적 피해는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 37만 3599명, 부상자 22만 9652명, 행방불명 38만 7744명, 한국군 전사자 14만 9005명 부상자 71만 7083명, 포로 9634명, UN군 전사자 3만 7639명, 부상자 11만 5083명, 포로 6267명 (이중 미군 전사자 3만 3642명) 인민군전사자 29만 4000명, 부상자 22만 6000명, 중국군 전사자 18만 4000명, 부상자 71만 6000명, 북한의 민간인 희생자들도 사망, 부상, 행방불명자 모두 합쳐서 270만을 넘었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나는 1950년 6.25전쟁이 이러났을 때 충남 대전시에 있는 대전중학교 6학년에 제학중인 학생이었다. 그리고 학도 호국단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전국학련 대전지구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대전에서는 좌우 학생들의 이념 대립으로 충돌이 잦았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공산당이 합법 활동을 하고 있었고 남로당 민청, 등이 학원까지 침투하여 교내에는 붉은 기 가 걸리고 혁명가를 부르며 동맹 휴학을 일삼았다. 우리는 이 소동을 막고 학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교뿐만 아니고 일반 사회에서도 좌우의 대립은 격심 하였다. 그 절정이 찬탁, 반탁의 충돌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8월 15일 이었으나 건국 전후 국내의 조선 공산당, 남로당 등에 의해 갖은 만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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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적 혼란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 하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군이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하였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수 만은 국민들이 전란을 피해 피난에 길에 올랐다. 정부도 대전으로 내려오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호국단 간부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학교에 나와 있었다. 오지수, 박찬문 이현덕 조항구, 간부들이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전세는 절망적이었고 공산군은 천안을 넘었다. 바야흐로 대한만국이 쓸어져 가는 운명에 놓였다. 이때 우리는 모두가 군에 지원해서 나라를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시내는 공산군에 밀려 후퇴하는 병력과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독안이었다.
우리는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봉착 하고 있을 때 방관 할 수 없었다. 학교 호국단 간부들 가운데 배광석,(예비역 육군소장)과 송석인 동문이 태극기에 대한민국 만세라는 혈서를 써가지고 왔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호국단 간부들이 이 태극기에 혈서로 각자 서명하고 우리 모두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싸우자고 결의 하여 학도의용군을 조직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국방부 정훈국을 찾아가 우리의 결의를 전달하였다.
이선근 정훈국장은 우리를 맞아 크게 감격하고 나에게 학도의용군 인솔 증명서(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음)를 발급하면서 대구에 있는 보병 제 25연대에 입대하라고 하였다. 이때 대전사범학교 학도호국단에서도 배정도 (예비역 유군소장) 단장이 학도의용군을 조직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최초의학도의용군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대구 동부국민하교에 있는 육군 제 25연대에 입대하였다. 훈련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학도지원병들이 검은 재복을 입은 채로 집총 교련을 받았다. 어느 날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훈련소를 방문하시였다. 그리고 훈련 받던 학도병들을 찾아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격려하여주시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매 인다.
학도병들은 겨우 소총이나 조작 할 수 있는 10여 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무더위가 한참이었단 1950년 8월 초순, 학도병들은 전투가 격렬하였던 포항 전투에 나갔다. 포항 전선은 부산 교두보의 동측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한국군 제 3사단이 인민군 제 5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버리고 있었다. 특히 포항 시가전은 격렬하여 우리 군이 반격해서 탈환 하면 즉시 적의 맹공을 받아 여지없이 후퇴를 당하였다.
그리고 점령, 후퇴, 반격, 탈환이 수 없이 반복되었다. 이 전투에서 많은 학도병들이 장렬이 전사하여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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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포항 시외에는 군번조차 없었던 학도병 1394위의 충혼탑이 새워져 있다.
38도선을 넘어 북진 그리고 흥남 철수
다행이도 나는 포항전투에서 살아남아 제3사단 포병대의 관측반에 배치되었다. 포병 관측반은 보병의 선두와 함께 있다. 9월 중순으로부터 시작된 총 반격에서는 북진대열의 선봉에 설수 있었다. 재3사단은 포항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진을 개시하였는데 영덕, 울진을 지날 때 적치 하에 고생하던 주민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우리를 화영 하였다. 길가의 부락은 많이 파괴되었고 아직 빈집이 많았다. 우리가 삼척에 이르자 만세를 부르며 우리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주민들이 빨리 경찰서를 해방 시켜달라고 소리를 쳤다.
삼척 경찰서 들어 닥치니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 수백명이 감금되고 있었다. 적 치하에 그들에 협조하지 않았던 지방유지 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쇠창살을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목청껏 불었다.
북진은 계속되어 곧 이어 간성 을 거처 10월 1일에는 전군에서 처음으로 38도선을 돌파하였다. 이것을 기념해서 10월 1일은 “국군의 날”로 재정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을 압두고 안변에서 패주하던 적이 탱크로 반격을 하여 한동안 교전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교전하는 동안 원산 시내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왜치며 시가를 매우고 있었다. 이 기세에 늘려 얼마 안 되던 인민군도 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원산을 점령한 제 3사단은 곧 이어 함흥과 청진을 점령하고 함경북도 갑산에 도달하였다.
말로만 듣던 산수 갑산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온이 급속히 내려가 10월 중순인데도 밤에는 영하 30여도 가 되어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동사하던 일이 있었다. 나도 너무 추워 눈썹과 입주변이 하얗게 얼어 붓고 손이 동상으로 감각이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진격을 계속하여 압록 강변 해산진 까지는 40여키로 되는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우리가 그 토록 염원 하던 남북통일이 눈앞에 닥 아선 기쁨이 가슴을 매웠다.
그런데 이때 누구도 짐작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압록강 건너 중국이 만주로 도망간 김일성을 도우려 “항미원조”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수십만의 대군을 몰고 압록강을 건 너 전쟁에 적극 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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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동부에 깊숙이 진입했던 국군과 미 제1해병사단은 후퇴를 거듭하여 50년 12월 중순, 그 유명한 흥남 철수 작전을 하게 된다.
제 110박격포대 홍천으로 이동
1951년 봄, 유엔군의 총반격이 다시 시작되어 서울이 수복 되었다. 그동안 각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워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대부분 부산 근교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약 3개월의 기본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최 일선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의 고지에서 소대장들은 일명 소모품소위로 적의 공격이 있으면 많은 전사자들을 냈다. 하루살이 소위라는 말도 들었다.
육군종합학교는 전시 임시사관학교로 1950년 8월 15일부터 51년 8월 18일까지 모두 7288명의 육군 소위를 배출하여 전선에 보냈다. 그중 전사자 921명, 전상자 2257명, 으로 임관된 수의 45%가 나라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했다.
나는 1951년 4월 28일 육군 포병소위로 임관되어 4.2인치 박격포 소대장으로 중동부의 험준한 산악 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제 110 박격포병대였다.
제 110 박격포병대는 중대 규모의 독립부대로 중부전선의 요충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홍천 강변에 진지를 잡고 맹훈련에 들어갔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은 연일 계속 되었다. 훈령중인 어느 날 제1분대에 있던 김종만 이라는 나이 많은 병사가 강변에서 맛났다며 12살의 고아 소년을 나에게 데리고 왔다.
이름은 백성학 이라고 하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떨어진 신발을 신고 내 앞에 서있는 소년은 눈이 맑고 똑똑하게 보였다. 백 소년은 50년 12월 중순 흥남철수 때, 원산에서 부두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배에 올라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 왔다고 하였다. 피난선에서 불의 의 고아가된 소년은 어머니를 부르며 목이 터지도록 울고불고 하였으나 배는 얼마 후 묵고 항에 도착하여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이들을 따라 내린 소년은 경주까지 갔다가 유엔군이 다시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걷고 타고 하여 이곳 홍천까지 왔다고 했다. 그러나 홍천 시가지는 비어 있고 밥을 먹을 길이 없어 몇 일식 굶고, 때로는 미군이 버린 쓰레기에서 먹을 것을 찾아 먹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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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 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린 동생들의 생각이 났다. 전쟁이 저질러 놓은 비극의 하나이다. 나는 백 소년을 측은이 여겨 우리 소대에 같이 있도록 하고 김종만 일병에게 잘 보살피도록 하였다.
부대에 있으면 최소한 주먹밥이래도 같이 먹을 수 있어서이다. 백 소년은 소대에서 틈이 나면 강가에 가서 병사들의 작업복을 세탁도 하여주고 더러는 근처 미군부대에 가서 먹을 것을 조달하여 와서 병사들과 나누어 먹기도 하여서 소대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펀치볼” 전투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있으며 일명, 만대리 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복 전에는 이 북 땅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분지로 분지 네에는 광활한 넓은 평야가 있다. 또 논 밭이 500핵터 가 넘는 곡창 지대였다. 분지를 이루고 있는 둘레의 산들은 마치나 병풍같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들이다.
미군들은 이 고지를 하와이에 있는 펀치볼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 분지를 펀치볼이라고 이름을 부 쳤다. 이 펀치볼을 중심으로 서쪽에 대우산 (표고 1178), 서 북쪽에 가칠봉 (1242), 또 북쪽에 924고지와 1026고지 ( 이번 전투에서 김일성 고지라고 불렀다) 또 동북쪽에 월산령(807), 동쪽으로 792고지가 있다. 남쪽으로 907고지와 도솔산이 있다.
이런 산 봉오리들이 연이어 있으면서 분지를 한바귀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51년 무더운 여름, 그동안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던 전선은 8월 22일 휴전회담이 중단 되자 갑자기 활발해지면서 긴장이 고조 되어 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제 10군단의 항공 정찰도 계속되었다. 정찰 결과 군단 전면에 적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탐지되었다. 그것은 펀치볼 (해안분지) 동쪽의 최고봉인 간무봉 일대에 상당한 대 병력이 펀치볼을 향하여 남침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 병력을 분석한 결과 인민군 제 3군단 산하의 제 1 사단으로 판명되었다.
이 무렵 미 제 10군단은 한국군 제 8사단, 제 5사단, 제 7사단, 그리고 미 제2사단 등 4개 사단으로 펀치볼 동북쪽에 있는 ‘노전평’, 가칠봉 (1242고지), 단장의 능선, 백석산을 있는 선에서 고지 쟁탈전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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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소속해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 제1연대, 제 5연대, 제 7연대, 제 11연대, 한국 해병연대)은 지난 6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군단 예비대가 되어 군단 CP가 있는 가원도 홍천 지역으로 물러나 한달 동안 예비 사단으로 있었다. 사단은 이 기간 동안 연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맹훈련 하면서 전투력을 배양 증강하고 다음 작전에 임할 태세를 가추고 대기중에 있었다.
이 당시 해병사단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신화를 남긴 한국 해병대의 도솔산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중천하고 있었다. 이 도솔산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는 작전 개시 19여일 만에 대암산과 도솔산 일대의 크고 작은 24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여 펀치볼 남쪽 벽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해병대도 도솔산을 점령 한 후 이 지역을 미 제2사단에 넘겨주고 이곳 홍천에서 군단 예비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홍천에 내려온 후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다음 작전을 위해 피나는 맹훈련을 쌓고 있었다.
한편 작은 독립 포병 부대로 이 사단에 배속된 제 110포병대도 역시 이 기간 동안 그들과 함께 실제 포탄을 발사 하면서 맹훈련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총공격
8월 27일 오전, 드디어 출동 명령이 내렸다. 그날 밤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은 쏟아지는 폭우 속을 행군하여 출동했다. 사단에 배속된 제 110포병대도 칠흑 같은 밤 속에 목적지를 향하여 사단의 뒤를 따랐다. 작전 명령에 따르면 부대의 행군로는 홍천에서 북쪽 인제 까지로 되어 있었다. 거기서 다시 원통리를 거쳐 편촌이 목적지였다. 28일 아침, 밤새껏 행군 끝에 목적지인 서화리 근방 평촌에 도착 했다. 14시간이 걸린 어둠속을 더듬어 가는 장님 같은 행군이었다.
목적지인 평촌에는 한국해병 제1연대와 미 해병 제 7연대가 이미 전방지휘소를 구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이곳에서 포대본부를 설치하고 대기 하게 되었다. 최전선은 이곳으로 부터 약 5키로 북쪽에 있는 가전리 부근이라는 것이다.
적은 인민군 제3군단 소속인 제1사단으로 펀치볼 북방의 924-1026고지 일대와 그 동북방의 702-602고지 일대, 그리고 간무봉 동남방의 1052-980-812고지 일대에 각 1개연대 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고 진지는 2중 3중으로 지하까지 공고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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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속한 미 해병 제1사단은 펀치볼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또 좌측에 한국군 제5사단, 우측에 한국군 제8사단이 배치돼 사단과 인접해서 좌측에
사단과 인접해서 한국 해병 제1연대가 930-1055-924고지 전면에 배치 되었다. 그리고 중간에 702고지 앞에 미 해병 제7연대, 우측에 한국군 제 8사단이 배치되었다.
새벽의 총 공격
8월 31일 새벽 모든 사병들이 방카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06시를 기하여 사단이 전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간밤에 요란사격으로 적진지를 교란했던 우리 포대는 공격 개시 30분 전에 12문의 106미리 중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적진지와의 거리는 1500미터 의 근접한 거리이다. 05시 30분 직경 100야드의 살상 파괴력을 가지는 박격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1문에 5발식 연속 발사하여 60발의 포탄을 적진에 날려 보냈다. 동시에 후방에서도 105미리, 155미리 곡사포가 공격 지원 사격에 나섰다.
적도 우리의 공격을 사전에 감지 하였는지 맹렬한 포격을 가해와 10여발의 포탄이 우리 포진지에서 폭발 하였다. 순간 포진지는 폭음과 포연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적의 박격포탄이 날라 오는 금속성의 소리를 듣고 잽싸게 그 자리에 엎어져 위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수송부에 한발이 명중되어 김정남 하사가 그 자리에서 전사 하고 병사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나는 즉시 현장으로 뛰어가 김정남 하사를 끓어 안고 나머지 부상병들은 후송하도록 지시했다. 전쟁터에서 하루에도 수 많은 전사자들을 보지만 이렇게 가슴이 매워지고 떨리는 일은 처음이다.
얼마 후 10시경, OP의 관측 장교 이원한 소위로부터 683고지 후방에 적 1개 대대가 집결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가 516고지 및 666고지로 진격중이며 미 해병 제7연대 3대대가 702고지에 대하여 치열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면서 683고지에 대해 집중 포격을 요청해왔다. 이때 미해병 7연대, 좌측의 한국 해병 제1연대는 08시 30분에 적의 924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 했으나 완강한 적의 저항에 부디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고지에서는 육탄전이 벌어지고 총에 맞는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팔과 다리에, 또 머리와 어깨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이 후송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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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저녁 무렵 제7연대는 516고지와 666고지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9월 1일, 제7연대 3대대는 날이 새면서 702고지에 공격을 다시 개시하였다. 제3대대는 참호속에서 수류탄을 투척하며 집요하게 버티고 있는 적과 백병전을 벌려 끝내 그 고지를 점령하였다. 우리도 어제에 이어 하루 종일 적진을 향해 맹포격을 가했다. 각 소대마다 발사판에 금이 가고 포신이 뜨겁게 다라 올라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멀리에서 보니 멀리에서 보니 제1분대에서 김종만 일병과 백성학 소년이 걸레에 물을 적시어 포신을 시키고 있었다.
김종만 일병을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백소년은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 따라와 있었다.
3일째 되는 9월 2일, 미 해병 제7연대 3대대가 602고지를 다시 점령하고 한국 해병연대가 마침내 924고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서방측의 1026고지를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924고지와 1026고지는 천연의 요새로 적은 이곳을 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은 이 두 고지에서 자난 6월초, 한국해병대에 의해 토솔산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곳 이였다. 이 고지를 점령함으로서 피아간에 광활한 펀치볼을 장악하게 되기 때문에 이 전투야 말로 펀치볼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8월 31일 한국해병대는 첫 전투에서 연대장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해병대원들은 이틀 동안이나 8부 능선에서 돌격전과 육박전을 벌렸다. 그 결과 선봉에 섰던 제10중대가 많은 손실을 입어 제1대대 제1중대가 교체되어 최후의 공격을 강행 했다. 진지를 교대한 제1중대는 막강한 포병의 화력지원 아래 적의 참호로 돌진하였다. 돌격의 함성과 함께 적의 방카에서 수류탄을 터트리고 총검을 휘 들며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팔과 다리가 날아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침내, 돌격 개시 4일 만에 난공불락의 이 고지는 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렇게 하여 미해병 제7연대가 가전리 북방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고 또 한국 해병 제 1연대가 김일성고지를 점령하게 되자 우리 포대는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포 사격을 계속하였다.
이 전투에서 꽃다운 나이의 많은 젊으니 들이 피아간에 죄 없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엔군으로 이 땅에 온 미국 병사들, 그리고 젊은 나이의 우리 병사들, 김일성의 남침전쟁으로 끌려나온 북한의 인민군 모두 꽃다운 젊으니 들이다. 그리고 펜을 던지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온 학도병들, 모두가 전쟁의 희생으로 이름 없는 낫선 고지에 뭍인 체 영혼이 되어 슬피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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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위해 울고 있는가, 조국이여, 이 젊은 영혼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주어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이들 용사들에게 영광의 자유와 평화의 훈장을 주어라, 펀치볼 전투에서 전사한 용사들이 이제는 고이 잠들어 영혼이나마 그리운 고향의 부모님 품에 안껴 다오, 나는 머리 숙여 기원했다.
36년만의 해후 홍천에 제110포대 충의비 새우고
한국의 6월은 보훈의 달로 6월 6일을 현충일이다. 서울시네 한강의 남단, 동작동에는 엄숙한 국립묘지가 있다. 45만평의 넓은 경지에는 한국전쟁과 월남 전쟁의 전몰장병, 전몰 학도병, 재일 학도군의용군 전사자, 그리고 조국독립의 투사, 수난을 당한 애국자를 포함해서 16만여명의 순국열사의 영령이 봉안 되고 있다.
년간 600여만명의 시미들이 조국수호의 정신을 기려 그 정신을 숭모하기위하여 이곳을 찾는다.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열사를 비릇한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유훈을 추모 하고있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36년이 되는 1986년 6월 6일 나는 매년의 행사로 동작동의 국군묘지를 참배하였다. 또한 이날은 전쟁에서 생존한 군의 동기생들이 일년에 한번 모이기도 하는 날이다. 1951년의 4월 28일 42명이 포병소위로 임관해서 각지의 전선에 배치되었다. 3년간의 전투로 전사 5명 부상 8명을 내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휴전 당일 전사한 문병길 대위의 묘가 국립묘지에 있다. 그는 대구의 대학생으로 학도병이었다.
아깝게도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그날 적의 포격을 받아 산화 한것이다. 백발이 성성할고 60대에 이른 동기생 15명이 태극기와 생화를 들고 그이 묘지를 참배하였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국립묘지를 참배하여 호국의 영령에 명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6월 25일 전쟁이 이러나서 36년째의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조간신문들의 기사를 보고 있었다. 먼저 정치면을 보고 한국일보의 사회면에 눈을 돌릴 때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떳다.
“ 포화속의 12살 전쟁고아 모자왕이 되어 은인을 찿는다 ” 는 전면기사가 있고, 엽서크기의 사진기사가 실려 있었다. 백성학 소년이 박격포분대장 박흥수씨를 맛나 처절한 전쟁당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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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 이것은 백소년 아닌가, 그리고 키가 큰 박 분대장도 살아있었구나 !
세상에 이런일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신문의 기사를 한줄한줄 찬찬이 읽어 내려갔다. 백 소년이 전쟁 중 어떻게 가족과 이별하고 전선을 발랑 했던 당시부터 시작하여 제110박격포대와 미군부대에서의 생활 이 상세하게 기술되어있었다. 그리고 지금 백성학 사장은 잊을수 없는 인연의 고장, 가원도 홍천에 "백학마을” 이라는 이름의 사회 복지사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만평의 부지위에 공장, 복지시설, 교회. 병원, 을 건립하였다. 9월에 준공 한다. 백소년의 이 꿈이 실현되어 준공식을 하는 그날 꼭 초대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고 하였다. 생명의 은인 미군병사 빌리. 그리고 최석 소대장,과 김종만 일병이다. 그리고 겨우 맛난 박흥수 분대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분대장 이외의 세분은 소식을 모른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이 기사를 눈에 넣고 끝까지 읽은 나는 깊은 감회에 빠졌다.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는 그 세배나 변하는 36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백소년은 나의 성은 최 로 기억하고 있으나 이름은 극 데신 석 으로 기억한다. 그토록 긴 세월이었는데 잊지 않고 나를 찾아 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기뿐 남어지 군에 갔다 온 연주, 연왕, 두 아들을 불러 이 기사를 보였다.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던 아내도 무슨일인가 하고 함께 신문을 들려다 본다. “ 틀림없이 당신이예요, 지리산 공비토벌 때의 이야기, 박달재의 참사, 모두 당신한테 들은 이야기와 꼭 같아요 ” 하고 기사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선거에 몇 번 야당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여 서울시내 무교동에 신민당의 원외 위원장 사무실에 나가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는 지역구를 가자고 있는 동지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바람에 돈이 없어도 하는 일이 많았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 동지들에게 한국일보를 보여주며 설명을 하였더니 모두 기뿐 표정으로 당장에 신문사에 연락해서 백성학씨를 맛나라고 성화를 낸다. 나는 그 사무실에서 그 사회면 기사를 작성한 한국일보의 이계성 기자와 통호를 하였다. 기사에 나와 있는 최석이가 바로 나 라는 것을 알렸다. 다음날 6월 26일 이날은 나의 결혼기념일 이기도 한날이다.
오후 2시 이계성기자의 주선으로 을지로 에 있는 두산빌딩으로 나갔다. 우리 사무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36년이란 긴 공백이 있었으니 세월이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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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슴속은 말할수 없는 흥분에 싸여 있었다. 그 순진한 소년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 50가까운 장년이 되었을것이다. 나는 이기자가 알려준 대로 19층에서 에레베이터를 내려 마로 앞 사무실의 노크하였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대장님 ! 반가운 소리와 함께 튼튼한 장년의 신사가 내 앞에 섰다. 장성한 백성학 소년이다. 그리고 소대장님 ! 하고 또 한사람이 나에게 왔다. 키가 큰 박흥수 분대장 이었다.
“ 아 아, 살라있었구나 ” “ 성학 아 !” 어느 사이 우리는 서로 끌어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꿈만 같았던 해후였다. 전쟁터에서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 사이가 아닌가, 박흥수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싸이고 싸였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9월 9일, 우리 110포대 진지가 있었던 홍천에서 백학마을 준공식을 하는 날 참석하기로 하고 아쉽게 자리를 떴다.
1986년 9월 9일 한국전쟁 때 중동부 격전지로 알려진 가원도 홍천의 연봉리 에서 “ 백학 마을 ” 준공식이 있었다. 1000여명의 내외 귀빈들이 자리를 가득 매우고 박조준 목사가 축하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온 내빈이 “ 여안 모자가 세계 제일의 모자회사라고 축사를 하였다.
영안 모자의 마크가 YA인데 미국운동선수의 반 이상이 이 YA 마크라고 한다. 연간 생산량 4000만개 한국의 인구와 같은 사람들이 이 모자를 사고 있다. 이탈리의 볼사리노를 능가 하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제일의 모자회사로 성장 했다.
곧이어 백성학 사장의 인사가 있었다. “ 내빈 여러분의 축복 속에 백학마을이 준공 되었습니다. 여기는 제가 12살의 소년으로 참탐한 전쟁에서 굶주림과 허기에 지친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한시도 잊지 안는 페허 위에 여러분의 성원과 염려의 덕으로 이런 복지사업을 하게 되어 실로 감게 무량 합니다. ” 끝으로 그는 36년 전 전쟁고아인 나를 형제의 사랑으로 도와서 오늘의 성공을 이루게 한 몇분의 내빈을 소계 합니다. 하고 먼저 나를 소계 하였다. “ 이분은 당시의 박격포 소대장 최극씨 입니다. 전쟁 속에서 나를 데리고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내빈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였다. 많은 박수를 받았다. 다음은 박흥수 분대장. 그 다음에 키가 큰 미국의 노인 한분이 소게 되었다.
그는 70세에 가까운 부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내빈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름은 데이-비스 씨로 미 제300자주포대대 선임 하사관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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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비리 찾기의 리더즈-다이제스트지를 보고 화상으로 전신을 붕대로 감은 백소년의 사진을 보낸 사람이다. 축하의 식이 성대히 끝나고 내빈들은 백성학 회장이 안내하여 백학마을내의 여러 시설을 도라 보았다. 나는 이 자리를 돌아보면서 36년전 이 근처에 있던 우리 포진지와 전쟁에서 전사한 우리 소대원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백학마을 준공식에 다년온 후 옛날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소대원, 그리고 고귀한 생명을 조국에 바친 우리 병사들을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수 없었다.
나는 백성학 사장을 맛나 이러한 나의 솔직한 심정을 전하고 우리가 홍천에 추모비를 새워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위령재를 올리자고 하였다. 비석은 나의 고향에서 가지고 오고 명필 청암의 필채로 글을 새겼다. 장소는 백성학 사장이 백학마을 입구 오른쪽의 부지를 기증하였다.
1987년 6월 25일, 우리가 36년만에 해후한 일년이 되는 날, 우리포대 생존한 전우 15명과 50여명의 가족들은 홍천 현지부대에서 파견한 의장대의 진혼의 나팔소리에 머리를 숙여 백학마을에서 충의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육군 제 110포대
충의비
우리 여기 강원도 홍천 땅 연봉리 산기슭 옛 전쟁터에 전우들의
정성을 모아 조그마한 돌비석 하나를 세운다
서른 일곱해전 조국이 공산 침략에 의해 황패화되고 있을때
젊고 젊은 나이에 총을 들고 이 산 저 계곡에서 나라를 위한 충성
을 불태웠다.
아 !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해마다 봄이 오면 진달래 붉게
물드리지만 빗발치는 적탄에 산화한 그 전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은다
이제 살아남은 몇 전우들은 먼저 가버린 전우들의 애국심을 길이
간직 하고자 여기에 충의비를 세운다 가신 전우들이 피로서 되찾
은 이 땅에 자유와 평화의 깃발이 나부끼며 애국혼이 해와 달과
별이되어 영원히 살지어다
1987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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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이들 최 극 백성학 이태하 박흥수
양관옥 이원한 조덕래 박소영
장은철 최의섭 강완기 장지봉
글 그때 소대장 최 극 글씨 청암 김덕현 ( g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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