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팔의 신호
민 10:1-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3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5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6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
7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8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10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민 10:1-10 / [신호 나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은을 망치로 두들겨서 나팔 두 개를 만들어라. 그 나팔을 불어 공동체 사람들을 불러 모으거나 쳐놓은 진영을 거두어 행진케 하는 신호로 사용하여라. 3) 나팔 두 개를 한꺼번에 길게 불면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이 만남의 장막문 앞으로 모여야 하고 4) 나팔 하나를 불 때에는 이스라엘 각 씨족 우두머리들이 네 앞으로 모여야 한다. 5) 나팔 소리가 짧게 한번 울리면 동쪽에 진을 친 지파들이 출발하라는 신호요 6) 나팔 소리가 짧게 두 번 울리면 남쪽에 진을 친 지파들이 출발하라는 신호이다. 이렇게 나팔을 짧게 불면 진영을 철수하고 출발하라는 신호이다. 7) 그러나 나팔을 길게 불면 이스라엘 백성이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는 신호이다. 8) 이 나팔은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불어야 한다. 이 규정은 너희가 대대로 지켜야 한다. 9) 이다음에 너희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 살 때에 적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치러 나갈 경우에도 나팔로 짧게 비상 나팔을 불어라. 그러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희를 잊지 않고 생각하여 적들에게서 너희를 구해 주리라. 10) 또 절기 때에나 초하루 잔치를 벌이는 흥겨운 날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릴 때에도 나팔을 불어라. 그때에도 내가 너희를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세는 은 나팔 두 개를 만듭니다. 이 나팔의 소리는 백성들을 모이게도 하고, 행진하게도 하는 신호의 나팔이 됩니다.
은 나팔 둘을 만들되(1-2)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시내 산이었습니다.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시내 산에서의 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째 목적지이자, 최종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라고 명령합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 나팔은 한 규빗 정도 되는 길이에 끝이 넓은 나팔이었다고 합니다. 두들겨 만들었기에 다소 투박하였으며, 당시에는 대제사장 아론 외에 제사장은 두 명(이다말과 엘르아살) 밖에 없었기에 나팔을 두 개 만들었을 것입니다. 후에 솔로몬 시대에는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기도 하였습니다(대하 5:12).
나팔을 불 때에는(3-10)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약속이었으며, 명령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나팔 소리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백성들을 소집하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진행을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나팔 두 개를 동시에 불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성막에 모으는 것이었고, 하나만 불 때에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막으로 모여야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나팔 소리를 듣고 행진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에서 예배나 전쟁 등을 알리는 영원한 율례가 되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백성을 소집할 때에는 나팔을 길게 한 번 불었으며, 행진 시에는 나팔을 짧게 세 번 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질서정연하게 시내 산을 출발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금송아지(출 32장) 앞에서 어지럽게 뛰놀던 때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질서와 순종을 가져다주게 된 것입니다.
적용: 광야 여행 중에 나팔 소리에 대한 관심과 식별은 필수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는 어떤 소리로 들리고 있나요?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순종하며 모이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히 11:6-7; 벧전 5:8).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내가 오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목사님께서 나를 알아주실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실까?’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바로 그런 분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당신과 동일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작은 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큰 자를 쫓아 아첨하지 않고, 작은 자를 소중히 여겨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 설 교 >
이제 출발합니다!
민 10:1-13 / 길승민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시내산에 1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 1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떠나서 나머지 39년간 광야를 걸었던 기록이 민수기이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지난 40년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광야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에게 가르친 것이 신명기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의 성경을 모세의 권위를 담아서 통상적으로 모세오경(五經)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첫 시작이 어땠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성경의 맨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 한 사람으로 시작된 출발의 역사가 기록되었다면 민수기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출발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떠남과 공동체의 떠남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혼자 여행할 때와 소수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그 준비와 여정, 여행경비와 경험하는 깊이와 수준도 달라집니다. 함께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내산에서 말씀 훈련 잘 받은 히브리 민족이 이제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1년간 정들었던, 1년간 그나마 사람답게 살았던 터전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광야는 말씀 훈련받은 것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정은 장밋빛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힘든 일이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발 전에 몇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개강성찬감사예배를 드리므로 2019년 가을학기를 출발하고자 합니다. 힘든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당부했던 말씀을 다시 듣고자 합니다.
본 론
① 신호를 들어야 승리합니다.
먼저 승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 정리를 하겠습니다. 기독교신앙에서 승리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CCM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김명식 씨의 승리라는 노래의 가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 주님 평안 내 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는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승리는 그 과정을 주님과 함께 어떻게 보냈는가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광야길을 가는 모든 성도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목적지에 잘 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우리에게 신호를 잘 들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신호를 듣는다는 것은 신호 주시는 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출발 신호, 전쟁 신호, 예배 신호 등 각각의 신호가 떨어질 때 그 신호를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이 특별한 신호를 위해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게 하셨습니다.(2절) 그 나팔은 반드시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즉, 구별된 자들만 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8절) 그리고 각 상황에 맞게 각각 다른 소리를 내게 하시므로 백성들은 그 신호를 알아들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또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신호를 듣는다는 것은 신호를 분별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3절에서 나팔 두 개를 불 때가 있었고, 4절에서는 하나만 불 때가 있었습니다. 5절에서는 크게 불었고, 7절에서는 회중을 소집할 때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서 불었고, 9절에서 대적을 치러 나갈 때는 크게 불었습니다. 심지어 10절을 보면 하나님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릴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소리를 들으며 이게 무슨 명령인지 그 뜻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 저거 나팔 소리네’ 이건 신호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다양한 소리들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단은 배워야합니다. 즉,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13:14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래서는 안됩니다. 들으면 알고, 보면 깨달아야지요. 그래서 성경을 배우는 시간을 확보해야합니다.
그리고 신호가 들리는지 늘 귀를 쫑끗 세워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깨끗한 화면으로 보려면 유선방송국에 돈을 따로 내야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보통은 안테나를 달고 보았는데 이 안테나라는게 전파와 방향이 잘 맞으면 나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지직거립니다. 어떨 때는 사람 손으로 안테나를 붙잡고 있으면 화면이 잘 나와서 안테나 붙잡는 사람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호가 날아오는 방향에 맞춰서 안테나를 얼라인먼트(alignment) 한 방향 정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멈춰야하는지 천천히 가는지 빠른 속도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신호를 따라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② 함께 가는 것이 사명입니다.
나팔을 불어 신호를 주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 두 사람이면 굳이 나팔을 불 필요가 없습니다. 2절에서 “그것(나팔)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3절에서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4절에서도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팔 신호가 모두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가고, 함께 하고, 함께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가장 중요한 영적 원리가 바로 ‘함께’입니다. 시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적은 수라도 함께 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적은 수라도 그들이 함께 할 때 하나님은 그 모임 가운데 사명과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가야합니다. 사실 함께 가는 것은 혼자 갈 때보다 비효율적이고, 목적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오히려 장애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것만큼이나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번 가을에 우리가 함께 가는 훈련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가려면 일단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잘 따라가고 있는지, 넘어진 사람은 없는지, 속상한 일은 없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손을 내밀고, 같이 좀 머물러 주고, 함께 울어주는 겁니다.
‘함께’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함께’야 말로 기독교다운 것이며, 하나님적인 것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서로 함께 하고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본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교회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행2:44-47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함께’의 가치를 위해 실제로 함께 했더니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더라는 겁니다. 교회가 영광을 누리고,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과 함께 한 1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당시 연탄가스 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사고력과 인지능력이 떨어진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저희 어머니께서 ‘오늘부터 이분이 우리집에서 함께 살거다’하시는겁니다. 사실 그때 우리집이 얼마나 좁았는지 제 방도 따로 없었고, 온 식구가 한방에서 잠을 잘 때였습니다. 화장실도 집밖에 있어서 원래 불편한 집이었는데, 이분이 들어오시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닌겁니다.
자기 통제가 잘 되지 않으시니 행동이 서툴러서 뭘 자꾸 부딪히고 깨뜨립니다. 드시는 것도 많이 드시고, 또 자주 몸을 씻겨드려야 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아린 제 마음에는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하지만 결코 겉으로 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그냥 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였고, 제가 가장 잘 따르던 동네 형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이상형으로 삼았을 정도로 곱고 예뻤던 누나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날 연탄가스 사고로 그 누나 그 형이 죽었습니다. 하던 중국집 사업은 망했습니다. 저는 그 집에 자주 놀러갔고, 짜장면 늘 돈도 내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집이 망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불편하다고 힘들다고 불평할 수 있었겠습니까?
재미있는 건, 제가 결혼하고 신호이었을 땐데 아내가 친한 언니가 오갈데가 없으니 우리 집에 좀 있어도 되냐 하길래 제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분과 넉달인가 함께 있었습니다. 화장실 사용에서부터, 편하게 집에서 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하나도 그걸 이상하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생각해보니 그거 저의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냥 어려서부터 함께 하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집에 오겠다고 하시진 마세요.^^
결 론
보통의 부모는 남의 자식에게는 기대하지 않는 것을 자기 자식에게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녀이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영적 안테나를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을 향해 출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가을 승리하시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팔을 불라
민 10:1-10 / 박봉수 목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여행준비일 것입니다. 준비가 잘 됐을 때 그 여행은 여유롭고 편안하고 유쾌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미흡할 때는 그 여행은 늘 무엇엔가 쫓기고, 불안하고, 힘이 듭니다.
여행 준비에는 어느 여행에서나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통편, 숙박, 옷가지, 세면도구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본준비 외에 그 여행을 위해서 특별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등산이면 등산장비, 낚시면 낚시 용구, 공무출장이면 공무에 필요한 서류 같은 것들입니다.
저는 내일부터 일행과 함께 5박 6일 동안의 중국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아직 자잘한 준비는 더 해야 하지만 기본 준비는 대충 마무리됐습니다. 늘 가던 곳이고 잘 아는 상황이지만 여행준비는 늘 마음이 쓰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한 가지 잊지 않고 준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선교여행을 위한 특별한 준비입니다.
저는 선교여행은 다른 여행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늘 체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생깁니다. 많은 경우 여기서는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될 때가 있습니다. 미루고 나중에 결정해서는 안 될 일들이 생깁니다. 그 때 다급하게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선교여행에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뜻에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지혜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선교여행을 떠날 때면 더욱 긴장이 됩니다. 두렵고 떨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여행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지 두 달 만에 시내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무려 11개월 5일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본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 저들이 출애굽한 이듬해 2월 20일에 시내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 1장에서 오늘 본문까지는 여행 준비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다른 여행과 달리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만들라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으로 나팔 둘을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히 은 나팔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왜 은 나팔을 만들라고 명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본문의 바로 앞부분 민 9장 15-23절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시내 광야까지 왔습니다. 시내광야에서 성막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제 구름이 이 성막 위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성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지런히 짐을 싸서 행군을 해야 할 것이고, 구름이 머물면 그 자리에 성막을 세우고 이 성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들이 진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시내광야에 오기 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 나팔을 만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점이 시내광야에 오기 전과 시내광야를 떠날 때와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구름을 보고 행군했는데, 이제부터는 나팔 소리를 듣고 행군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구름이 떠오르면 저마다 짐을 싸서 출발을 했지만, 이제는 구름이 떠올라도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년 가까이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 저들은 하나님의 군사로 새롭게 태어나게 됐습니다. 더 이상 과거 노예티를 벗지 못하던 오합지졸들이 아닙니다. 은 나팔은 이렇게 훈련받은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주신 새로운 명령전달 도구인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달리 나팔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개도 훈련 받기 전과 훈련 받고 난 뒤가 다릅니다. 훈련 받기 전에는 먹을 것이 있으면 주인이 뭐라고 하던 상관없이 먹습니다. 주인이 못 먹게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런데 훈련받고 나면 달라집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먹고 싶어도 주인의 명령이 떨어져야 먹습니다. 주인이 명하기 전에는 음식이 앞에 놓여있어도 기다립니다. 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일사분란하게 순종할 수 있는 훈련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또 하나님의 명령이 내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팔 소리를 기다릴 줄 알고, 나팔 소리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팔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나팔 소리 형태가 다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나팔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둘을 동시에 불면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으로 모여야 했고, 하나만 불면 지도자들만 모여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나팔소리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소리를 울려 불면 행군하라는 명령이고, 울리지 말고 불면 모이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나팔 소리의 순서에 다라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나는 소리면 동편 진이 행군하고, 두 번째 나는 소리면 남편 진이 행군하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나팔 소리가 나면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나팔 한 개 소리인지 두개 소리인지, 그것이 울려서 나는 소리인지 그냥 나는 소리인지, 그것이 첫 번째 소리인지, 두 번째 소리인지……. 잘 들어야 자기들이 언제 회막 문에 모여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들어야 자기들이 행진할 때인지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저 가나안으로 여행하듯이 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과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나그네 인생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천국 여행을 잘하려면 나팔 소리를 잘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나팔소리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움직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천국여행에서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팔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팔소리와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자기 필요에 따라 움직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팔소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 알아듣고 움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들을 귀가 열리시기 바랍니다. 나팔 소리를 귀담아 잘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어 행군하라고 하시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목적지도, 여행 스케줄도, 그리고 여행 경로로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으로의 여행은 스케줄도 경로도 모르고 가는 여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만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 소리에 순종하며 따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으로의 여행은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을 통해 들려주시는 나팔 소리를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나팔을 불라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찌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이 말씀은 나팔은 아무나 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팔은 오직 제사장들만 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제사장에게만 나팔을 불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제사장 직분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속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제사장은 나팔수이고, 백성 편에서 보면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주의 종의 영적 리더십(leadership)이 굳건하게 세워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팔을 불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 리더십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반권위주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최종적인 권위를 어떤 지도자에게 두지 않습니다. 대신 최종적인 권위를 각 개인에게 두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거나 지도를 받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반권위주의적 분위기는 회의주의를 불러일으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가? 과연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인가? 그와 내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반권위주의적 분위기는 냉소주의를 불러일으킵니다. 주의 종의 결정이나 판단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주의 종이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의견이나 판단으로 폄하합니다. 때로는 비판하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반권위주의적인 시대에 왜 당신만 나팔을 불어야 하느냐고 도전하는 일들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 내에 영적 리더십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이 세대교체를 통해서 교회의 리더로 세워졌을 때 그들의 리더십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들의 손에 나팔이 제대로 들려지지 못합니다. 나팔을 분다고 해도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끊임없는 잡음이 들리고, 일사불란한 어떤 영적 행군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리더십이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영적 리더십이 든든하게 세워져야 우리 교회가 제대로 앞으로 행군할 수 있습니다.
나팔을 잘 불어야 한다.
영적 리더십이 바로 세워지려면 먼저 제사장은 나팔을 잘 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이 나팔을 어떻게 불었을까요? 모든 악기에는 악보가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 그 악보를 따라 연주하게 되어있습니다. 본문의 나팔을 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제 멋대로 불어서는 안 됩니다. 길게 불든, 울려서 불든, 한 번 불든, 두 번 불든 악보를 따라 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그 악보는 무엇일까요? 바로 구름입니다. 성막 위의 구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구름에 어떤 상징을 보이십니다. 그러면 그 상징을 보고 그 상징의 뜻을 깨닫고 거기에 맞추어서 나팔을 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구름에 나타난 상징을 늘 예민한 감각으로 살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나팔을 불 때 확실하게 불어야 합니다. 주저하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의식하고 사람들 눈치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라고 하시면 순종하면서 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해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불라시면 담대하게 불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이 불어달라고 청한다고 해서 불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나팔을 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한다고 해서 불면 안 됩니다. 이 나팔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실 때만 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도들은 제사장이 나팔을 잘 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먼저 제사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민한 감각으로 구름에 나타난 상징을 읽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그 상징을 읽어낼 수 있도록 늘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성도들은 제사장이 부는 나팔 소리에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9절을 보겠습니다. “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말씀했습니다. 위기상황을 만났을 때 제사장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 나팔로 하나님께 SOS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10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화목제를 드릴 때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바로 찬양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도중에 나팔을 불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팔을 불 뿐 아니라 하나님께 나팔을 불라는 말씀입니다. 위급할 때 이 나팔로 기도하고, 제사를 드릴 때 이 나팔로 찬양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잘 불려면 먼저 백성들을 향해 나팔을 잘 불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나팔을 잘 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저 천국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남달리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나팔 소리를 들을 귀입니다. 들려주시는 나팔 소리를 잘 듣고 순종하며 힘차게 행군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찬 402장 1이 생각이 납니다.
“행군나팔 소리로 주의 호령 났으니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나가세”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행군나팔이 이미 울리고 있습니다. 잘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제사장들입니다. 벧 2:9에 보면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나팔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 기도 / 나팔 소리를 잘 듣게 하옵소서. 나팔 소리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세상에 대해 나팔을 불게 하옵소서.
은나팔 소리의 의미
민 10:1-10 / 피영민 목사
서론
“이스라엘 자손은 중다한 잡족과 섞여서 남자만 60만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게 되면 족히 200만이나 되는데, 이 200만이나 되는 대군이 어떻게 광야에서 일사분란하게 지휘체계를 갖추고 행진을 할 수가 있었을까?”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게 되면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마이크도 없었고, 200만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도 없었을텐데, 어떻게 200만 대군이 그렇게 질서를 유지하며 광야를 행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신 분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의문을 다 해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교육방식은 참 진보된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시각도 사용하시고, 청각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해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시각을 사용하셨습니다. 구름기둥이 장막 위에 있다가 올라가면서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름기둥을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각을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예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시각에 장애를 가진 분들도 있기 때문에 청각을 사용하는 것이 유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귀로도 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규례를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귀로 들어서 “아하! 떠날 때가 되었구나. 아하! 이제 전쟁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사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빈틈이 없고 세심하신 하나님이십니까?
1. 은나팔 규례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받은 규례 가운데 마지막 규례입니다. 마지막 규례이면서 아마 가장 작은 규례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나팔규례’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머무르면서 십계명과 각종 제사법을 받았습니다. 성막을 짓는 법, 사회법 같은 큰 법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으로 받은 규례가 바로 이 ‘은나팔규례’입니다. 가장 작은 규례이며, 가장 마지막 규례입니다. 그러나 이 은나팔 규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교훈도 풍부한 규례입니다. 물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진할 때를 알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00만을 지휘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북소리를 내볼까? 둥둥둥둥. 네 번 두드리면 집합이다. 둥둥둥둥둥둥. 여섯 번 두드리면 행진이다.’ 이런 식으로 고안해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옛날 우리나라에서처럼 파발마 같은, 소식을 전하는 일꾼들을 두어서 소식을 증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심한 부분까지 분명한 규례를 주셨기 때문에 인도하신 그대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민수기 10장 1절부터 10절까지에 기록된 은나팔 규례의 내용과 그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 은나팔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
첫 번째로 우리는 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모든 작은 면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고 치료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큰일도 다 예비해 주셨습니다. 천국에 가서 거할 집도 예비해 주시고, 또 천국에 들어갈 패스포트(passport)도 이미 준비해 주셨으며, 비자도 이미 발급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입고 들어갈 의의 예복도 이미 다 준비해 주셨습니다. 의의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마치고 이 땅을 떠나게 되면 거할 집도 마련하시고, 비자도 주시며, 입고 들어갈 예복도 주심으로써 천국에서 우리를 맞아주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신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아처럼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격려를 주셔서 이 잠시 잠깐 사는 험한 나그네 세상을 바르게 살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큰 일만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 아주 세심한 면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아실까? 하나님께서 과연 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내 얼굴에 지금 종기가 났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것까지도 아실까? 내가 지금 머리가 아픈데 이런 것도 아시나? 지금 내 마음에 고민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는가? 내 자녀에게 문제가 있어서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도 아시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아시겠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아십니다.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무관심 하시겠습니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서 가장 작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아마 머리카락일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우리 육신의 큰 부분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머리카락을 다 세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머리카락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장 작고 연약하며 세미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주 세심한 부분이라도 하나님께 아뢰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바 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작은 부분까지 돌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 45절 말씀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큰 자와 동일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큰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큰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 스스로를 작은 자라고 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당신을 동일하게 여기시고, 사람이 그들에게 행한 것을 곧 당신에게 행하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내가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목사님께서 나를 알아주실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실까?’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바로 그런 분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당신과 동일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작은 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큰 자를 좆아 다니면서 아첨하지 않고, 작은 자를 소중히 여겨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작은 자를 살피고,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 사람을 향해서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단코’라고 하는 부사는 예수님께서 많이 사용하시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소자를 살피고 물 한잔이라도 건네준 그 사랑과 관심에 관해서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작은 사람, 어려운 사람을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12월, 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려운 사람, 슬픈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살피고 나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들이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많은 것을 맡기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케 하십니다.
저는 공군출신인데요. 공군의 군사훈련은 육군의 훈련에 비해서 작은 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 그러냐면 수십억이나 하는 펜텀 비행기라고 할지라도 나사 하나 잘못 풀리면 비행하다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군사 훈련이 작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초점을 맞춥니다.
일본 사람들은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평론가 이어령씨는 일본을 가리켜서 ‘축소지향주의 국가’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축소지향주의 국가이면서도 세계적인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일본사람들은 작은 일 하나라도 귀중히 여기고 무시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아니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경제적인 대국이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작은 일에도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아뢰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정일이든, 직장일이든, 교회일이든 큰 일만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작은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사람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식당에 가서도 종업원들을 무시하지 마시고 함부로 반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작은 사람들을 대우해 주고, 그들의 인권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영혼들이라 생각하고 작은 자에게 우리의 최선을 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나팔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작은 일, 작은 것, 작은 사람을 돌보시는 위대한 마음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3. 은나팔의 재료
은나팔 자체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순은으로 만드는 은나팔은 순수성의 상징입니다. 은나팔의 재료는 은이지만 은이라고 해도 똑같은 은이 아닙니다. 은나팔을 만드는 재료는 100% ‘순은’이어야 합니다. 조금도 불순물이 섞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시편 12편 6절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은은 불을 뗀 흙도가니에 넣어서 일곱 번을 단련해 찌꺼기를 제거해야 순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은나팔은 이 순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는 순수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복잡하고 순수하지 못하며 동기가 불순하다면 주님의 일에 쓰일 수가 없습니다. 불순한 사람은 마귀의 도구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도구는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밥상 위에 금그릇이 있어도 더럽고 순수하지 않다면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 드시겠습니까? 쓰레기가 있는 금그릇을 가져다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99%가 아니라, 언제나 100% 순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영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쳐서 만드는 은나팔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2절) 은나팔은 쳐서 만들어야 합니다. 쳐서 만든다는 것은 은덩어리를 가지고 두드려서 만들라는 뜻입니다. 은나팔 전체는 한 조각으로서 연결부분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2장 21-22절에서 섞거나 붙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헌 옷을 고치는데 새 천 조각을 가져다가 꿰매 놓으면 이것의 신축성 때문에 도리어 옷을 더 못쓰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부대를 버리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낡아서 쭈글쭈글한 부대에 포도주를 넣게 되면 발효현상이 일어나서 결국 부대도 못쓰게 되고 포도주도 쏟아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의 공로는 0.00001%도 섞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전에 택함 받은 것도, 죄악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것도, 회개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 것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도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50%와 인간의 자유의지 50%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는 생베 조각을 낡은 조각에 갖다 붙이는 교리입니다. 은과 은을 덧이어서 나팔을 만드는 것과 같은 교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새기고 100%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 얻은 것에 감사하며 평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나팔수는 나팔 규례를 백성들에게 정확히 교육해야 하며, 또 정확하게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8절). 나팔은 아무나 부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붑니다. 은나팔은 두 개를 만들어서 제사장들이 번갈아 불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8절에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 민수기 10장 4절에서 ‘하나만 불 때에는’이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영어성경에 ‘sound’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sound’의 정확한 의미는 ‘longblast’, 즉 ‘소리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길게 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민수기 10장 5절에 기록된 ‘울려 불 때에는’이라는 구절은 일반적으로 영어성경에 ‘sound the blast’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stacattoblast’, 즉 ‘딱딱 끊어서 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게 부는 나팔(sound/long blast)’은 평온할 때 모임을 갖기 위한 의도로 부는 것이며, ‘딱딱 끊어서 부는 나팔(sound the blast/stacatto blast)’은 긴급한 상황, 즉 전쟁이 나서 인을 소집해야 하거나 진을 옮겨서 행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 것처럼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58:1)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의 말씀 증거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은나팔을 부는 세 가지 경우
본문에 따르면 나팔은 세 가지 경우에 붑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모아 함께 예배드리고자 할 때 부는 나팔입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부는 나팔은 그냥 길게 붑니다. 나팔을 ‘빵~’하고 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하! 예배할 때가 되었구나. 회막문 앞으로 나아가자.’하며 모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 천부장된 족장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천부장 된족장들만 모일 때에는 나팔을 하나만 붑니다. 그런데 3절을 보니까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문 앞에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10절을 읽어봅니다.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 위에와 화목제물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팔이 길게 울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문 앞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오늘날 신약시대의 예배와는 다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흘리고 고기를 불태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나팔수는 번제물과 화목제물 위에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나팔을 불면 그 날은 희락의 날이 됩니다. 나팔이 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예배드릴 때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나팔을 불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까? 10절 후반부에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씀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요 4:24).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의 인생과 가정을 형통케하시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는 형통한 삶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고 업신여기며 바르지 못한 자세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형통치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배 생활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사람은 형통하고 예배를 소홀히 드리는 사람은 형통치 못합니다.
둘째로 은나팔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진할 것을 명령할 때에 붑니다. 5절 말씀에 “너희가 그것을 울려 불 때에는 동(東)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요 또 제 2차로 울려불 때에는 남(南)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라. 무릇 진행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울려 불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름기둥이 회막문 위에 있다가 떠올라서 이동하면, 동시에 제사장들은 나팔을 붑니다. 1차로 나팔을 불면 유다, 잇사갈, 스불론 세 개의 지파가 있는 동편 집이 진행을 합니다. 그 다음 간격을 두고 2차 나팔소리가 울리면 남쪽에 있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의 남편 진이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또 울리면 서쪽에 있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또 울리면 북쪽에 있는 단, 납달리, 아셀지파가 행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각각 세 개의 지파씩, 4그룹을 구성해서 동, 남, 서, 북의 순서로 진행을 하는 것입니다. 맨 앞에는 법궤가 진행합니다. 그리고 동편 진 다음에는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이 수레에 성막 짓는 기구들을 싣고 진행하며, 그 다음에는 남편 진이, 그 다음으로는 고핫 자손들이 성물을 어깨에 메고 행진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울려 부는 나팔소리는 진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이 나팔소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뒤로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경건생활이나, 예배생활이나, 기도생활이나, 헌신생활이 작년보다 올해가 나아야 하고, 올해보다는 내년이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진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전거와 비슷합니다. 후진기어가 있어서 뒤로 가는 자전거를 보셨습니까? 자전거는 앞으로만 갑니다. 자전거는 정지하고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정지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만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진보를 보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은 언젠가 신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권면의 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여 모든 면에서 진보를 보이십시오. 말하는 것에도 진보를 보이시고, 도덕성에도 진보를 보이시고, 헌신에도 진보를 보이시고, 사역의 능력에도 진보를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지금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내년에는 더욱 진보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은나팔 소리는 전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9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고 있었을 때, 아무에게도 침략을 받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많은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침략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본질적인 3대 원수, 악의 3총사가 있습니다. 마귀와 세상,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욕심, 즉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의 3총사와 매일 매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생활은 전쟁이지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마귀와 싸워야 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과 싸워야 하고,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죄성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 나팔소리는 전쟁에 나가라는 참전의 나팔소리일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는 승리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성도들은 안싸워서 지는 것이지 마귀와 싸우면 반드시 이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싸우면 우리는 반드시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 은나팔 소리는 지금도 주의 일꾼들을 통해서 세계만방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일어나 예배하고, 일어나 행진하며,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나팔소리를 들으면서도 장막에서 졸며, 자며, 놀고, 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귀에는 이 은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결 론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나팔소리를 더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들을 나팔소리요, 림의 나팔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구원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완전한 승리의 날이요, 우리의 원수 마귀는 영영히 타는 불 못에 던져지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피니 목사님이 재림 설교를 하면서 나팔수 하나를 강대상 뒤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나팔로 예수님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할 때에 나팔수가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아이고, 수님 벌써 오십니까?”하면서 다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나팔 소리를 즐거운 소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15절에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에 울리는 나팔소리가 여러분의 귀에는 즐거운 소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그 날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기다렸던 여러분들 모두가 칭찬받는 즐거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나팔을 불 때 입니다
민 10:1-10 / 조상호 목사
몇 달 전에 끝난 남아공 2010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가장 신경을 썼던 문제는 테러 대비였습니다. 남아공이 워낙 치안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주최국인 남아공 정부 뿐 아니라 FIFA(세계축국연맹)에서도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회가 시작된 후 테러는 그런대로 대비를 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 때문에 FIFA에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습니다. ‘부부젤라(vuvuzela)‘라고 불리 우는 나팔 때문에 대회 기간 내내 전세계 축구팬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부부젤라’가 어디서 유래한 단어인지 논란이 많지만, 남아공 최대부족인 줄루족이 사용하는 줄루어로 ‘시끄러운 소리를 만든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 나팔은 길이가 60~150㎝ 정도로 다양한데, 언뜻 들으면 코끼리가 ‘뿌 우~’하며 울부짖는 듯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소음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음 강도를 평가할 때 데시벨(dB) 단위로 표시하는데, ‘부부젤라’는 약 127데시벨이나 된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그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이 악기를 구하기 위해 쇼핑센터를 찾아다녔지만, 일반 가게에서는 팔지 않고 인터넷에서만 판다고 해서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몇 가지 소리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잔디를 깍는 Mower 돌아가는 소리가 90데시벨이고, Electric Sawer(전기톱)이 돌아가는 소리가 100데시벨입니다. 또한 자동차 경적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었을 때 약 110데시벨이고, 기차 소리가 110데시벨이고, 사격장에서 사격하는 소리가 115데시벨입니다. 그런데 그 ‘부부젤라’ 소리가 127데시벨이나 되는데다가,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천, 수만 명이 90분 내내 불어대니까 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부젤라’ 는 엄청나게 큰 소음을 내는 괴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회 기간 내내 의사들은 ‘부부젤라’ 소리에 오래 노출되면 청력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올림픽인 <런던 올림픽>에서는 원천적으로 금지를 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으며, 월드컵 축구대회 직후에 열린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는 이 ‘부부젤라’ 를 가지고 입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무튼지 남아공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 내내 이 ‘부부젤라’ 라는 나팔이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렇게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는 이 나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나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당시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수 6:3~5) 여호수아는 말씀대로 하루 한 번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번을 돌았는데, 일곱 번째 돌 때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나팔을 소리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자, 그렇게 견고했던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여기에서 나팔 소리는 ‘전쟁 신호’였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건축하는 자들에게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게 했고, 나팔 부는 자는 나팔을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느 4:19~20) 여기에서 나팔 소리는 ‘경계 신호’였습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면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자들의 방해임을 알아차리고, 나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여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4장 30절과 31절에 보면,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림 신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나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 때마다 의미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나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지 3개월 째 되는 때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약 1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율법과 성막에 대한 규정과 절기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제 오랫동안 머물고 있던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을 돕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것은 시내 산을 떠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였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을 돕기 위해 준비하도록 하게 한 것은 나팔이었습니다. 얇은 은판을 망치로 두들겨서 나팔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이집트의 고대 유물에서 은으로 만든 부조들이 발견된 것을 보면, 납에서 은을 추출하는 정련기술은 이미 BC 3,000년부터 있었습니다. 은으로 만든 나팔은 숫양의 뿔로 만든 것보다 더 맑고 깨끗한 음을 낼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은 나팔은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부부젤라’ 보다는 조금 작은 45cm 정도의 길이로, 끝이 좁은 관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아무튼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 은 나팔을 만들게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은 나팔을 통해서 어떻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백성들을 모을 때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모을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은 회막 문 앞으로 집결시킬 때, 나팔 두 개를 한꺼번에 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나팔을 힘 있고 강렬하게 불지 않았습니다. 7절에서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평온하고 차분하게 불게 하셨습니다.
2) 지도자들을 소집할 때
둘째로 지도자들을 소집할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 각 지파의 족장들을 불러 모을 때, 나팔 두개 중에서 하나를 불게 했습니다.
3) 백성들을 출발시킬 때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발시킬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 여기 ‘크게 불 때’라는 말을 NIV영어 성경에 보면 ‘trumpet blast'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렬하게 분다는 의미입니다. 나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지면, 동쪽에 진을 치고 있는 지파들이 출발했습니다. 또 다시 두 번째 나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지면, 남쪽 진영에 있는 지파들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 나팔 소리가 나면 서쪽 진영과 북쪽 진영에 있는 지파들이 출발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튼지 200만 명 이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꺼번에 이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팔소리를 통해서 질서있게 이동하게 하셨습니다.
4) 적군들과 전쟁을 할 때
넷째로 적군들과 전쟁할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야훼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전쟁하기 위해 출전할 때, 나팔을 짧게 끊어 계속해서 크게 불었습니다. 이때의 나팔소리는 군대의 사기 진작을 북돋우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을 기원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전쟁을 하기에 앞서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셔서 전쟁에서 승리케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다섯째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등의 절기 때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 위에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나팔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팔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달하기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 소리를 놓치지 말고 잘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광야 여행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광야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광야는 낮에는 덮고 밤에는 춥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광야에는 강도, 맹수, 등 여러 가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경제, 문화, 교육 등이 과거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환경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제들은 갈수록 많아집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에이즈, 신종 플루, 구제역, 사스와 같은 무서운 질병이 생기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동차 사고, 가스 폭발사고, 지하철 화재, 등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터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재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이 지뢰밭과 같은 곳으로,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광야 같은 인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나팔소리를 들어야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양들을 키울 때, 유목생활을 하는 목자들은 자신들의 양들을 같은 우리에 함께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자기 양이라는 어떤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은 정확하게 자기 주인을 따라갑니다.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몰고 가기 위해 부르면, 그 음성을 들은 양들은 우리에서 나와 정확하게 자신의 목자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또 남극에는 6만여 펭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어미 펭귄은 어린새끼를 위해 3주마다 사냥을 해서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6만여 마리나 되는 펭귄들 가운데 어떻게 어미 펭귄이 자기 새끼를 찾아 먹이를 주는지 아십니까? 어미 펭귄은 6만 마리 속에 있는 자기 새끼의 울음소리를 듣고 정확하게 찾아가서 사냥해 온 먹이를 준다고 합니다. 목자와 양, 어미 펭귄과 새끼 펭귄을 이어주고 서로를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음성입니다. 만약 서로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없다면 양은 목자의 인도와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새끼 펭귄은 어미 펭귄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항상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따랐기 때문에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축들은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40년 동안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고, 옷이 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듣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나팔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나팔 소리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건 사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자연 재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시고,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가야할지 인생의 속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멈춰서야할 때와 앞으로 나아가야할 타이밍을 가르쳐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66권과 설교와 QT와 사건사고와 자연 재해 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