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써 놓았던, 아버지를 백봉령 정상에 뿌리고 오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 경포호수 가로수 벚꽃망울에서 서서히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희귀한 봄태풍이 올라 온다고 했습니다. 하늘은 묵직하게 검은 색깔이었고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하얗게 식어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낙옆처럼 각자 널부러져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며칠간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차라리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침대 귀퉁이를 잡고 이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화해를 한걸까요? 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전날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침대 옆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녹아 버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도 전부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괴로운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어서 보내고 싶을 정도 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저와 화해를 하고 가셨습니다. 병원 로비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를 만나고 편안해졌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아버지를 보내는 마음에서 미안함이 덜해졌습니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무릎에 안고 오는 내내, 방금 화장한 온기가 따스했습니다.
영정의 사진은 젊은 시절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시절 근덕 농고 음악선생의 어깨를 감싸고 삼화사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 사진은 흑백사진이었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봄날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시절은 아버지의 봄날이었을 겁니다. 가족을 두고 시골 학교에 갓 부임한 키 크고 혈기 왕성한 미남 선생은 아마 거칠것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아버지였던 겁니다. 나는, 백봉령으로 가는 내내 그 생각만 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괴로웠던 모습을 지워버리고 아버지의 봄날만 생각하면서 마음은 더욱 편해졌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백봉령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옥계 시내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고, 산 중턱에는 진달래의 분홍빛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백봉령 정상에서 잔설이 남아있는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었습니다. 멀리 동해 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내려오는 길, 아버지와 상관없이 봄날은 무심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벚꽃은 더욱 활짝 피었습니다.
봄날은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갔습니다.”
사춘기 시절, 지독히도 반항아였던 나는 기어코 학교 옥상에서 의자와 책상을 불태우고 말았다.
야간 자율학습은 전혀 자율적이지 않다는 나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퇴학을 당하고 학교 공부를 안하기로 결심했는데, 아버지의 명령과 설득으로 겨우 묵호종합고등학교로 전학을 올 수 있었다.
그리고도 겨우 들어간 대학에서 데모만 하다가 군대에 끌려갔다.
그 순간 순간은 아버지에게는 불효임에 틀림없었다.
일본 유학을 간다는 말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온 다음, 시간 강사 생활이 너무 싫어서 때려치고 중장비 임대업을 하면서, 다시 아버지와 틀어졌다.
중장비 임대업으로 돈을 벌어서, 동남아와 태평양 바다를 스쿠버다이빙 하면서 놀러 다니는 나를 아버지는 못마땅해 했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불가능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나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가 먼저 떠나고 아내가 떠난 것은 다행이었다.
지독히도 아내를 이뻐하던 아버지였다.
이제 아내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던 참견할 사람도 없다.
이제 나는 내 멋대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글을 쓸 것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을 아내와 아버지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