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동지(성도)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광야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말하듯이 광야입니다. 출애급의 한 복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광야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약해 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의 표현으로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의
지극히 큰 영적 계시를 경험하였던 영적 거장이 분쟁의 해법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 “광야의 의미”를 던졌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1-5)
사도 바울의 이러한 영적 통찰력은 다분히 히브리 속에 담긴 말씀에 의해
풀어진 영적 비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중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기에 백성이 원망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17:6) 여기서 “반석”은 “쭈르”로서 바위의 뜻입니다. 이 반석의 단어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반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록까지 이르러 반석의 사명이 어떻게 끝날지를 보여주는 영적 단어입니다.
(반석을) “치라”에서의 단어는 “나카”로서 “(지팡이로)때리다, 쳐 죽이다, 상하게 하다”의 뜻입니다. 지팡이는 “마테”로서 “사단을 누르는 눈물의 지팡이”라는 영적인 의미가 새겨진 지팡이입니다.
물은 “마임”으로서 복수형입니다.“사람에게서 흐르는 눈물”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시다”는 “솨타”로서 “잔치를 베풀다”입니다. “솨타”의 단어 속에는 “경배자와 예수 그리시도를 뜻하는 십자가와 빛”의 단어가 어우러진 단어입니다. 결국 “솨타”는 신약의 가나의 혼인 잔치와 천국의 혼인 잔치를 연결시켜 주는 단어입니다.
“결국 바위(예수)가 죽임을 당하고 옆구리가 터져서 물과 피로 세례를 받으며 살과 피를 먹으며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영적 비밀이 이 광야 사건에서 예표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출애급 사건의 광야 한복판인 르비딤의 사건을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에 이 말씀을 각인시켜 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성전, 성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게끔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이끄시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자 함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4-6)
“광야”는 “메다바르”입니다. 말씀은 “다바르”입니다. 자음이 모두 같은 말씀의 뜻인 “다바르”에서 온 단어가 광야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광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셉, 다윗, 엘리야, 사도바울, 심지어는 예수님도 광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한적한 곳”을 번역하면 “광야”입니다. 그런데 광야(메다바르)에서 “말씀”(다바르)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실행하는 교만 죄를 범함으로써 “온역”(염병)의 재앙을 받은 것처럼 재앙을 받습니다. “온역”은 “다바르”(말씀)와 자음이 같고 모음이 다른 한 어근에서 나온 “데베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전한 “그들의 다수가 멸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다수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생긴 “악평” 때문입니다. “악평”은 말씀(다바르)에 어근을 둔 파생명사인 “다바흐”입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초점을 두어 봅시다.
강북교회의 황 목사님과 성도들을 광야로 부르시고자 함은 이 시대 한국 교회에서
제사장 교회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근대 한국 교회사에서 많은 교회의 분란이 있었지만 우리와 같이 순수한 “광야로의 부르심”을 겪어 본 교회가 있었나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다수를” 골라내기 위해서 우리를 광야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광야 교회에서 “말씀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훈련을 인내로써 경주해야 합니다. “가데스”광야의 “가데스”의 원 발음은 “가도스”로서 “거룩하다, 신성하다”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신 광야입니다.
“말씀이 빛”인 이유는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강북제일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제사장 교회와 황 목사님을 ‘한국의 여호수아“로 삼기 위한 훈련의 광야입니다. 우리가 더욱 인내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를 앞세워서 ”요단강“를 건넙시다.
우리의 싸움은 시시한 총회와 노회의 조무래기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참여 못할 저들의 영혼을 위해 통곡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시대적 소명을 이 땅의 지금 우리에게 옮겨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신약의 사도행전 28장까지의 성경의 사도(제자)들의 행전을 써내려가는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기억하고 행전의 29장을 우리교회가 채우도록 악한 영들을 무찌르는 거룩한 십자군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성전은 “안식과 평안”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함을 이미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네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신12:20) 바로 이 때에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분쟁과 성결하지 못한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걷어내실 때까지 인내로 기다려야 헙니다. 안식과 평안이 없는 성전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들 열납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다윗이 전쟁으로 복속 시켜야 할 주변국들이 있었기에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의 손에 피가 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대상22:6-9). 나중에 지면을 통해 이 이야기도 해야 될 것입니다. 평안의 시대가 도래했던 솔로몬에게 이 성전의 임무를 허락하신 것은 바로 신명기 12장 20절의 말씀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이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안정화시키고 이스라엘 최초로 왕위 승계를 안정되게 이루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세밀한 계획을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갖고 계십니다.
광야의 동지 여러분! 광야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화이팅!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주신글에서 힘을얻습니다
귀한글에 늘 감사 드립니다.
광야의 의미....깊이 깨달으며 기드온의 용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을 기다리며, 주를 위하여 화이팅 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