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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민족끼리
《 토마스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에 대한 서평 》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한국계 미국인인 토마스 주남 여사가 경험했다는 환상과 계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이 책의 번역자로 소개되어 있어서 그동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바 있다.
필자는 그동안 이 책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몇 번 받았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읽어볼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이 글은 이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 견해이다.
이 서평은 다음과 같은 목차로 서술하기로 한다.
1. 서평을 위한 사전 고찰
(1) 오늘날에도 직통 계시가 필요한가?
(2)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유효한가?
(3) 오늘날에도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4) 오늘날에도 주님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2. 문제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
(1) 몸의 진동과 거룩한 웃음
(2) 천국 방문은 매트릭스 접속과 같은 것?
(3) 변화된 몸
(4) 면류관
(5) 구원의 조건은 순종과 마음의 청결?
(6) 십일조와 헌금의 강조
(7) 낙태된 아기들과 일곱 살 전에 죽은 아이들
(8)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크리스천들
(9) 주남 여사의 교회
(10) 주님의 재림 전에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
(11) 토마스 주남 여사의 천국 집
(12) 손녀와 외손녀의 휴거 환상에 나타나는 시한부 종말론
(13) 몸 사역
(14) 성령 춤
(15) 기름 부음
(16) 예수님의 생일
(17) 주님의 직접적인 성직 수여
(18) 진정한 크리스천과 교회의 비율은 20%?
(19) 현실세계에서도 주님을 육안으로 본다?
(20) 치유의 기적
(21) 마지막 대통령이 조지 부시?
(22) 천국의 새 노래
(23) 하늘의 천사
(24) 그 외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
3. 진정성에 대한 평가(진실인가, 허구인가?)
4. 이 책의 부정적인 영향
(1) 계시론에 대한 혼란
(2) 성경관에 대한 혼란
(3) 신앙에 대한 혼란
(4) 구원에 대한 불안 야기
(5) 신비체험에 대한 열망
(6) 영적 체험에 대한 왜곡
(7) 은사주의로의 경도
(8) 현실 도피
1. 서평을 위한 사전 고찰
(1) 오늘날에도 직통 계시가 필요한가?
이 책은 토마스 주남 여사가 7년 동안 무려 17번이나 천국을 다녀오며 체험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전적으로 직통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직통 계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주시는 계시를 가리키는데 주남 여사는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그의 직접적인 말씀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책의 제목과 디자인도 주님이 알려주셨다고 말하고 있다(251ㆍ258쪽). 또한 그 분량면에 있어서도 요한계시록의 몇 배에 이르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직통 계시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으로서 성경의 완성과 함께 그 용도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본 것과 같은 직통 계시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정통 기독교의 입장이다.
오늘날에도 직통 계시를 필요로 한다면 이는 성경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과연 성경이 더 이상의 직통 계시를 필요로 하거나 그 내용을 보충해야 할 만큼 부족한 책일까? 단연코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저자를 통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계시의 책으로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실행,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완성과 함께 더 이상의 직통 계시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들은 대부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환상의 모두가 직통 계시는 아니다. 환상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 교회역사에는 프란시스처럼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고 그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성경의 완성 이후 기독교에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 있는 환상은 대부분 단편적ㆍ부분적인 것이고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고 긴 스토리로 이어지는 환상은 아니다. 특히 토마스 주남 여사처럼 지속적으로 여러 번 전개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독교적인 문서는 정경(正經), 외경(外經), 위경(僞經)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서 정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 교회에서 수납된 66권의 책을 말하고, 외경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고 감추어진 책을, 위경은 거짓으로 지어낸 책을 말한다.
여기서 위경의 특징은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처럼 묵시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꿈, 천사, 환상, 계시 같은 신비주의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보충하려는 경향을 많이 띠고 있다.
이 점에서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위경의 특징과 유사한 점이 많다. 환상이나 계시 같은 신비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성경의 내용을 보충하려는 점이 많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완성과 함께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필요하지 않고, 성경은 더 이상의 계시를 필요로 할만큼 불완전한 책이 아니라는 전제가 성립되면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그 진정성과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2)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유효한가?
<천국은 확실히 있다>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의 하나는 '예언'이다. 토마스 주남 여사도 책 서두에 랜돌프 래리 목사로부터 "예언 사역의 영역에서 주님의 축복을 받았고 밤 11시에서 새벽 3시 사이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환상을 보게 될 것"(18쪽)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에도 예언이 필요하며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은사가 여전히 유효할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예전에 예언에 대한 답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 주소의 게시물에 올려져 있으니 우선 이 글부터 참고 바란다.
▶ http://cafe.naver.com/shalom/10473 (예언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인가요?)
필자가 위에 링크한 게시물에서 밝혔듯이 예언이란 어떤 공동체나 사람의 장래 일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이 이런 것이라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무당이나 점쟁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언의 말씀은 바로 성경 말씀이다. 오늘날의 예언이란 장래의 운명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주남 여사가 거론하고 있는 예언은 장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손녀가 휴거를 했다거나 1998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거나 부시가 마지막 대통령이라고 하는 등의 예언은 모두 장래 일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오늘날에도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토마스 주남 여사는 자신을 일컬어 "말세의 여선지자"라고 표현하고 있다(338ㆍ366쪽). 오늘날에도 선지자가 필요한가,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선지자의 기능적인 면은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와 동일한 위치로서의 선지자는 더 이상 없다는 주장이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와 예언의 메시지는 선지자에게 주어졌으며, 구약성경은 선지자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정경의 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저자의 신분이었는데 구약정경은 선지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했고 신약정경은 사도가 기록했거나 사도적 권위가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 원칙에서 비껴가면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선지자의 직분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까지만 존재했고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교회사에 더 이상 선지자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최고의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을 완성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지자 직분은 성경시대에만 존재하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선지자의 기능적인 역할이 교회에 계승되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라는 위상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선지자의 직분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선지자를 자처할 수 없다. 선지자를 자처한다는 것부터가 자신이 이단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남 여사가 스스로를 "말세의 여선지자"로 자처하는 것은 자신의 책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오늘날에도 주님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이 책에는 주님과 주남 여사 사이의 대화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화는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대화하듯이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과연 오늘날에도 사람이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인간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교제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기가 무척 어렵게 되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은 사람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위해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을 찾아오신 경우이고 그 대상도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주로 선지자들이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주남 여사처럼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며 그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 모세인데 성경은 모세가 죽은 후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 34:10)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모세 이후에는 모세만큼 하나님과 대화하며 직접적인 음성을 들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모세 이후에는 모세만큼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나오지 못했다. 모세 이후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는데 왕정시대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선지자였던 다윗도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삼상 30:1-8).
또 신약성경을 가장 많이 저술한 사도 바울도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모세만큼은 듣지 못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에게 직접 하신 것으로 나타나는 주님의 말씀은 다음이 전부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22:7;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22:8;26:15).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5-6). /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행 22:10). /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 동일 사건에 대한 기록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행 22:18).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 27:24).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자가 함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물론 바울은 이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훨씬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지은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주님 여사가 들었다는 주님의 음성은 바울에게 하신 말씀보다 월등하게 많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끝난지 오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성경의 인물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지는 않는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많았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언의 말씀을 선포했으며, 사도 요한도 계시를 통해 장래 일을 보고 계시록을 저술했다.
그러나 성경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이미 끝난 시대이기 때문에 모세나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실제 이단으로 선고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인 기도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고전 2:10) 성령이다. 특히 성령은 믿는 자 가운데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감동ㆍ감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오늘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는 많은 것을 들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 하나는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래 주소의 게시물을 참고 바란다.
▶ http://cafe.naver.com/shalom/157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아무튼 성경의 완성으로 오늘날에는 주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다고 볼 때 주남 여사가 수십회에 걸쳐 주님과 일대일로 대화하며 그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2. 문제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
다음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문제가 있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열거한 것이다. 많은 것을 들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24건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1) 몸의 진동과 거룩한 웃음
토마스 주남 여사는 주님이 방문하실 때는 항상 몸에 진동이 온다고 적고 있으며, 거룩한 웃음(468쪽), 쓰러짐(396쪽) 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빈야드 운동의 모습과 유사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는 1996년에 열린 제81회 총회에서 빈야드를 이단으로 규정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 주소의 게시물에 올려져 있다.
▶ http://cafe.naver.com/shalom/10106 [예장 통합 이단자료-028] 빈야드(빈야드 교회/토론토공항 교회)
(2) 천국 방문은 매트릭스 접속과 같은 것?
주남 여사의 천국 방문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라는 SF 영화를 연상케 한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가상현실의 세계인데 이곳으로 가려면 침대 위에 누워서 몸에 접속코드를 연결해야 한다. 매트릭스에 들어가더라도 몸은 여전히 침대 위에 있는데 침대 위의 몸은 매트릭스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을 한다. 예컨대 매트릭스에 접속한 사람이 매트릭스에서 고통을 당하면 침대 위의 몸도 고통스런 반응을 보인다.
주남 여사가 천국을 방문할 때는 항상 침대 위에 누워있는데 그의 '변화된 몸'(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하는 자신의 몸을 '변화된 몸'이라고 지칭)이 천국을 방문할 때는 침대 위에 있는 지상의 몸도 천국에서 체험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반응한다고 말한다.
"내 변화된 몸이 행복해 할 때, 내 육신의 몸도 행복한 반응을 보입니다. 내 변화된 몸이 슬플 때, 육신의 몸은 눈물을 흘립니다. 내 변화된 몸이 노래할 때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출 때는 손을 움직이고, 웃을 때는 웃습니다. 내가 나의 변화된 몸 안에 있는 젊은 여인으로서 주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 지상의 몸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로 응답하고 내 입과 머리는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13쪽).
"주님은 아빠가 어린 자녀에게 하듯이 나를 번쩍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리셨습니다. 나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내 몸, 즉 변화되지 않은 몸이 침대에서 거의 들어 올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282쪽).
혹 이 책이 꾸며낸 픽션이라면 <매트릭스> 영화에서 그 소재를 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남 여사의 천국 방문 형식은 매트릭스와 닮은 점이 있다.
과연 이같은 방법의 천국 방문이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성경에는 이같은 방법으로 신비체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의 신비체험은 육신의 몸으로 한 것이며, 바울은 자신이 낙원에 이끌려 간 체험에 대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고후 12:2).
또 주남 여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13쪽) 육신의 몸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어떻게 육신의 눈으로 천국을 봤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3) 변화된 몸
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할 때의 자신의 몸을 '변화된 몸'이라고 지칭한다. 즉 자신의 변화된 몸이 천국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새 몸을 살펴보았을 때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전에 '몸 밖으로 나오는 체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내가 나의 몸 밖으로 나가서 내가 아닌 다른 몸 속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몸은 또 한편으로는 나였던 체험이었습니다.
그 몸은 청년기 때의 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의 십대 때와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젊었을 때의 내 모습, 즉 하나님도 모르고 희망도 없이 지냈던 얼떨떨한 청년기 때의 얼굴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내가 본 얼굴은 하나님을 알고 소망이 가득한 모습의 젊은 아가씨였습니다"(65-66쪽).
"나의 몸은 이미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몸은 십대의 젊고 아름답고 발랄한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변화된 몸을 볼 때마다 나는 충격을 느꼈습니다"(156쪽).
그런데 이것이 성경적ㆍ신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성경은 우리 몸의 변화는 구원을 완성했을 때, 그리고 주님의 재림시에 이루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0에서 구원의 단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가장 마지막 단계가 영화이다. 영화는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으로서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구원의 완성은 천국에 들어갈 때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된 몸은 아직 세상에 있는 사람은 입을 수 없고 구원을 완성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아직 세상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데도 변화된 몸으로 천국을 방문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그의 육신이 천국을 방문한 것이 아닐지라도 미래에 이루어질 몸의 변화를 벌써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4) 면류관
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할 때는 자신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67ㆍ77ㆍ116ㆍ209쪽). 이 또한 성경적이지 못하다. 성경은 우리 성도가 쓰게 될 면류관은 세상에서 자신의 갈 길을 다가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이 말씀은 우리 성도가 쓰게 될 면류관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임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즉 월계관처럼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남 여사는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방문자의 신분으로 천국에 갔음에도 면류관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성경과 모순이다.
하늘의 보좌와 새 예루살렘을 보았던 사도 요한도 묵시를 받을 때 면류관을 쓰지 못했다. 요한계시록에서 면류관을 썼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던 24명의 장로들이었다(계 4:10). 그런데 주님이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요한보다 못한 사람이 면류관을 쓸 수 있는가? 이것도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5) 구원의 조건은 순종과 마음의 청결?
이 책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의 조건으로 순종과 마음의 청결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즉 주님께 순종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남 여사는 이것을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순종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녀들뿐이다"(69쪽).
"오직 마음이 물처럼 깨끗한 자들만이 이곳에 올 수 있다"(89쪽).
"나의 나라에 들어올 사람들은 오직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곧 나의 순종하는 자녀들뿐이란다"(115쪽).
"나는 마음이 순결하고 순종하는 자녀들, 곧 자신들의 삶에서 나를 우선으로 두는 자들을 택한다"(227쪽).
"마음이 물처럼 깨끗하지 않고 나의 말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249쪽).
"마음이 깨끗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291쪽).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 불순종하는 크리스천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422-423쪽).
이 책에서 주남 여사의 구원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은 다음 문장이다.
"나는 '구원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가서 아름다운 혼인 예복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오직 물처럼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혼인 예복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큼 거룩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골짜기들을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487쪽).
그러면 성경은 순종과 깨끗한 마음이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물론 순종과 깨끗한 마음이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구원론에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다(엡 2:8).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있으면 비록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는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주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순종과 깨끗한 마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구원론은 행위를 강조하는 행위구원론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순종은 곧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고 언급하는 등 기존의 구원론을 뒤짚는 내용이 있어서 교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많다. 물론 정통 기독교도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교회 내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휴거 후에도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상에 남아 있었다고 하는 등(487쪽) 구원받지 못할 크리스천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고 뿐 아니라 그들이 사후에 갈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골짜기라고 함으로써 가톨릭교의 연옥 개념을 연상케 하고 있다.
사견이지만 변승우 목사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책도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승우 목사의 큰믿음교회는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를 권장도서로 적극 추천하는 등 주남 여사의 신앙노선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6) 십일조와 헌금의 강조
이 책에는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주남 여사는 주님께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자녀들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이다"(69쪽)라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십일조와 헌금에 있어서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을 매우 언짢아하신다고 적고 있다(420쪽).
또 주남 여사가 열방교회로 옮기고 나서는 성령께서 헌금시간마다 춤을 추라고 자신을 단으로 데려가셨다고 하는데(449쪽) 왜 헌금시간에 춤을 추라는 것인가? 이는 마치 성령께서 헌금에 매우 관심이 많으신 분으로 묘사한 것과 다름이 없다.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기를 기대하신다. 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지역 교회에 다른 교회에 드려야 한다"(478쪽)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구원이 표식들>이라는 작은 제목 아래에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십일조와 헌금이 구원의 표식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외에도 남편과 함께 십일조를 드리니 매일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물질적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내용도 있다(444쪽). 그러면서 십일조에 관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부흥사들의 전형적인 헌금강조 설교를 연상케 한다. 과연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이 헌금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던가? 오히려 예수님은 한 고드란트, 즉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불과한 적은 돈을 드린 과부가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다(마 12:41-44).
이 말씀은 예수님은 헌금을 바라거나 강조하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물질보다 헌신된 마음을 더 중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이 책의 내용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성품과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십일조는 구약성경에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을 바치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시지 않았다. 이사야 1:11-13에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물질보다 선과 인애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이 내용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성품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십일조와 헌금을 너무 강조하는 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십일조와 헌금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십일조나 헌물의 당위성에 대한 말씀도 많이 나온다. 문제는 오늘날에는 교회 건축이나 교세 확장 등 교회 내의 유익을 위해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7) 낙태된 아기들과 일곱 살 전에 죽은 아이들
주남 여사는 천국에서 낙태된 아기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간 적도 있는데 주님께서 낙태된 아기들에 대해 "만약 이 아기들의 어머니들이 구원을 받으면 자신들의 아기들을 돌려받을 것이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다른 어머니들이 이 아기들을 얻게 될 것"(100쪽)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성경적ㆍ교리적으로 반론의 여지가 너무나 상당하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0:34-36에서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즉 천국에서는 세상에서와 같은 가족관계가 유지되지 않으며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은 어머니들이 천국에서 낙태된 아기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천국에서는 지상에서와 같은 가족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모순되는 내용이 틀림 없다.
이 뿐 아니라 이 이야기는 유아구원론에 있어서도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낙태아의 구원 여부에 대해 확실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는 성경을 보충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엿보인다.
또 478쪽 이하에는 낙태아 구원에 대한 것보다 더 심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는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아이의 부모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일곱 살 전에 죽은 아이는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님은 이 모든 것들을 이 책에 기록하기 원하셨다"(479쪽)는 글을 덧붙이며 이 주장의 확실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찾기 힘든 위험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일찍 죽은 아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어른이건 아이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가르침이다.
만일 주남 여사의 글이 사실이라면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나 일곱 살 전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또한 예수님을 모르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과 북한처럼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 태어난 사람도 일곱 살 전에 죽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셈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사설(邪說)이다.
기독교의 구원론에 있어서 죽을 때의 나이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원죄를 물려받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린아이라고 해서 죄가 없을 수는 없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한 다윗의 고백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8)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크리스천들
주남 여사는 누런색을 입고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지옥 구덩이 주변을 무작정 배회하고 있는 무리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불순종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이다(115쪽). 이것은 죽은 자가 갈 곳은 천국과 지옥 외에도 제3의 장소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내용이다.
또 회색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목표도 희망도 없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들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크리스천이며 대부분 심판 후에 불못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135쪽 이하). 이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기에 기독교의 구원론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9) 주남 여사의 교회
주남 여사는 주님께서 "너는 엄청난 부를 소유할 것이다. 나는 네가 그것을 나를 위한 교회를 세우는 데 쓰기를 원한다"(160쪽), "모든 일을 마친 다음에는 나의 교회를 짓도록 해라"(273쪽)고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그후 교회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돈이 있어야 큰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주남 여사의 교회는 세상의 다른 교회와 차별되는 특별한 교회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어서 수긍하기 어렵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손꼽히는 초대교회는 돈으로 세워진 것인가? 엄청난 부가 있어야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발상은 결코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사료된다.
성도들에게서 헌금을 많이 받아 교회를 크고 웅장하게 짓는 일에 골몰하는 교회는 기독교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제자들이 헤롯이 지은 성전에 대해 감탄해할 때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를 웅장하게 짓는 것은 주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정말 주남 여사에게 "나의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기존의 교회가 부족함이 많거나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다고 단정짓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기성 교회가 부패했다는 주장은 이단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단들은 자기네 교회만이 진리임을 강조하려고 기성 교회를 비판하는 경향이 많다.
(10) 주님의 재림 전에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
이 책은 참 믿기 힘든 내용도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재림 전에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백성들에게 오기 전에 불신자들 가운데 절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161쪽).
주남 여사는 주님이 이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다고 강조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세상의 불신자 절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흥분시키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성에 결정타를 날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히려 말세에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짐과 함께 배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9-12).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질 종말의 날에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 일이 어찌 가능이나 하겠는가? 심지어 예수님은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하고 말씀하셨다. 택함 받은 사람도 미혹을 당할 정도면 말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거역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또 요한계시록에는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마 12:12) 하는 말씀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인 특성 때문에 명쾌한 해석이 쉽지 않고 다양한 해석과 설(說)이 있지만 이 말씀은 말세에는 사탄이 더욱 광분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으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말세에는 예수님을 믿기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또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하셨는데 이 말씀은 구원을 받는 사람보다 받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을 때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중동의 이슬람 국가는 복음화율이 1%도 안되는 곳이 많은데 이런 나라의 복음화율이 50%로 치솟는다면 이는 정말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주남 여사가 이 책에서 주님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닥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 주남 여사는 이 책에서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을 때 불신자의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11) 토마스 주남 여사의 천국 집
주남 여사는 천국에서 자신이 살 집도 보았다고 하는데 이 집은 흰색 골조의 이층집이며 차고에는 빨간색 고급승용차가 있고 집안에는 크림색 양탄자가 깔려 있다고 한다(278쪽 이하).
그런데 주남 여사는 천국에서는 날아다닌다고 했다. 그렇다면 천국에 승용차가 왜 필요할까? 특히 고급 승용차는 세상에서는 부(富)의 상징이기도 하다. 천국백성들이 모두 고급 승용차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천국도 세상처럼 빈부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주남 여사가 묘사하고 있는 천국의 집은 지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꿈꾸는 고급스럽고 쾌적한 주거지를 그린 것에 다름 아니다.
(12) 손녀와 외손녀의 휴거 환상에 나타나는 시한부 종말론
이 책에는 휴거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있는데 주남 여사는 당시 자신의 한 살된 손녀와 10개월된 외손녀가 휴거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288쪽). 그리고 주님이 이 환상을 보여주신 데 대해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아이들의 나이가 얼마가 될 것인지 내가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289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이단성을 띠고 있다.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는 세상의 그 누구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종말의 때에 대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현재 생존하는 자신의 손녀와 외손녀가 휴거되는 모습을 환상을 통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늙어 죽기 전에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암시이기에 종말의 때를 예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종말의 때를 예언한 사람이나 종파는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부분은 이 책의 진정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13) 몸 사역
이 책에는 '몸 사역'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몸 사역이 왜 필요하며 그처럼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몸 사역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주남 여사는 몸 사역에 대해 몸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마법사의 주술행위를 연상케 한다. 일부 내용을 인용해 본다.
"때로 주님은 내 몸을 십자가 형태로 만드시기도 했고, 자신의 숨을 내 코와 입에 불어넣으시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 주님은 자신의 눈에서 나의 눈으로 불을 내뿜기도 했습니다. …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 주님은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했습니다. 내 몸은 주님의 권능에 순종하여 일어서기도 하고 뒹구르기도 했습니다"(327-328쪽).
이같은 내용은 성경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주님이 마법사를 연상케 하는 이같은 행위를 하실지 의문이다.
그리고 몸 사역과 관련하여 주님이 자신의 몸을 33번이나 여셨다는 내용도 있다(334쪽). 몸을 연다는 개념도 모호하거니와 사역자에게 왜 몸을 여는 과정이 필요한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중국 무협지에는 운기조식을 하는 장면과 무공의 고수가 부상을 입었거나 기력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등에 손을 얹고 내공을 주입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공을 전수하려 할 때 취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그런데 주남 여사의 몸 사역에 대한 묘사는 중국 무협지의 이같은 비과학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몸 사역은 1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는데(340쪽) 과연 주님이 이런 과정으로 당신의 사역자를 훈련시시키시고 준비시키실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이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주로 고난이나 연단, 말씀의 가르침 등을 통해서이다.
또 몸 사역이 끝난 후에는 주님께서 거대한 황금열쇠를 주셨다는 내용도 있는데(330쪽) 이것도 너무 판타지적이다. 사실 이 책에서 판타지적인 요소는 셀 수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주남 여사는 몸 사역을 '성령 춤'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주님이 몸을 준비시키는 몸 사역은 성령 춤을 위한 과정이라는 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 춤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보편적인 예배행위나 사역행위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서술한다.
(14) 성령 춤
이 책에는 성령 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주남 여사는 성령 춤을 출 때는 자기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시며 각각의 스텝과 동작도 성령님이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385쪽). 주남 여사가 천국을 방문했을 때 자주 하는 일도 주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만큼 춤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이다.
뒤로 가면 알 수 있지만 성령 춤은 주남 여사의 주요 사역행위이다. 성령 춤은 예배 중에 또는 예배드리기 전에 일정시간 추게 되는데 주남 여사는 자신이 성령 춤을 춘 기간에는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398쪽).
그리고 주님이 춤 사역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내게 목사님을 찾아가서 장차 이 교회에 많은 기적과 축복이 임할 것이며 나의 춤은 성령님에 의해 이끌린 것이라고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382쪽).
"너는 이 춤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427쪽).
"주님은 나에게 교회의 축복을 위해 강단에서 춤을 추라고 말씀하셨어요"(433쪽).
"딸아, 이런 식으로 나는 네게 이 마지막 때를 위해 네 사역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너의 기적의 춤 사역에는 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450쪽).
"춤을 다 추고 난 후 주님은 나에게 울프슨 목사님에게 가서 내가 추는 춤이 주님과 교회에 매우 중요하며, 주님이 교회를 축복하고 계신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457쪽).
"2001년 7월 22일 주님은 나에게 강단의 첫 번째 단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464쪽).
"주님은 나에게 이 춤을 훈련시키시려고 수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내가 이 춤을 추면 주님은 언제나 미소를 지으십니다. … 주님은 이 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465쪽).
"다음에는 강단에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강단 전체가 네 것이다"(434쪽).
주남 여사가 자신의 춤 사역의 권위를 얼마나 강조하는지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처음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춤을 추었을 때 목사의 제지와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주남 여사는 목사의 이 행위에 대해 주님께서 "사탄이 그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가 너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나의 성령을 소멸시켰다. 너는 그 교회에 다시는 가지 말아라"고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385-386쪽).
성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성품에 비춰볼 때 주님이 정말 그런 말씀을 하실지 의문이다. 예배시간에 춤을 추는 행위는 예배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이를 제지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주님이 특정인을 지목하고 그에게 특정 교회에 가라,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만국의 모든 교회는 이단에 속하지 않은 한 통일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주님의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목사가 단지 춤추는 행위를 제지시킨 것 때문에 사탄 운운하시면서 그 교회를 가지 말라고 말씀하실 리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 내용은 자신의 춤 사역에 대한 권위를 높이고 춤 사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같기만 하다.
무엇보다 성령 춤이라는 것은 예배의 보편적인 의식이 아니며 이를 행하는 교회도 극히 드문 실정이다. 물론 춤으로 드리는 예배가 옳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이 성령 춤에 대한 강조로 주남 여사가 자신의 춤 사역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성령 춤의 전 단계로 몸 사역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것도 이같은 느낌을 들게 한 요인이다.
그리고 주남 여사는 성령 춤을 '기적의 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책 어디에도 성령 춤을 출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명시적인 내용이 없다. 춤을 출 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주남 여사 자신의 희망사항으로 그려지고 있다(426-427쪽).
(15) 기름 부음
이 책의 주요 특징은 '기름 부음'이란 말이 수없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외에도 주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여러 날 동안 기름을 부으셨다는 내용도 있는데 그 병의 수도 무려 85병에 이른다고 말한다(325쪽).
주님이 주남 여사에게 왜 그처럼 많은 기름을 부으셨는지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구약시대에 기름은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그의 머리 위에 부었는데 이것은 일회적이지 여러 번에 걸친 것은 아니다. 주님이 주남 여사를 사역자로 세우시려고 기름을 부으셨다면 한 번이면 족한데 여러 번 부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또 주님이 양팔로도 잡을 수 없는 거대한 황금병에 담긴 기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통채로 부으셨다는 이야기도 있다(344쪽). 기름 부음에 대한 내용은 그 필요성에 비춰볼 때는 지나치게 부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6) 예수님의 생일
이 책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님께서 금면류관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주남 여사가 그 이유를 묻자 주님께서 "딸아, 오늘은 내 생일이란다"(329쪽)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395-396쪽과 454쪽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12월 25일은 추정상의 성탄일일 뿐 예수님의 실제 생일은 세상의 그 누구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출생신고를 하여 사람들의 생일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고 예수님은 한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서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확한 성탄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진짜 생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도 그렇거니와 확률적으로 365:1에 해당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날을 자기 생일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항상 참된 것만 말씀하시는 주님의 성품에 비추어보면 그 진정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17) 주님의 직접적인 성직 수여
주남 여사는 2002년 4월 4일에 주님이 자신에게 성직을 수여하셨다고 말했다(479쪽). 서른세 번째의 자물쇠를 열었을 때도 주님이 금빛 옷에 금면류관을 쓰고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성직을 주노라"(341쪽) 하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납득하기 힘든 점이 너무 많다. 주남 여사가 받은 성직은 무엇보다 주님이 직접 수여하신 것인데 신약시대에 주님이 직접 임명하신 성직은 사도의 직분 밖에 없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 일컬어진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바울 등이었는데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때 사도로 임명되었고 바울의 사도직도 주님이 직접 주신 것이다.
신약시대에 사도의 직분이 교회의 초석으로 삼을 만큼 존귀했던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직접 이 직분을 수여하신 데 근거하고 있다. 신약정경의 첫 번째 결정기준이 '사도성'이었다는 것은 사도의 권위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사도의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승계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는데 그래서 사도직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맛디아가 얻은 사도의 직분은 가룟 유다가 배신행위로 잃은 사도직을 대신한 것이다.
사도직이 오늘날의 목사직과 크게 다른 점은 임명의 주체이다. 사도직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님이 직접 임명하시지만 목사직은 교회 공동체에서 임명한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이 교회에 주신 권세에 의거하여 성직자를 임명한다. 사도 시대 이후의 성직자는 모두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세우신 것이지 직접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성직을 받았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사도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에 주신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주님이 주남 여사에게 성직을 주셨다는 것은 진정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이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직자의 주요 역할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 사도들의 주요 사명은 바로 말씀 선포였다. 교회에 집사 제도를 두게 된 배경도 사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행 6:1-4).
그런데 주남 여사가 받은 사명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160쪽에는 주남 여사가 "주님, 저는 설교를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주님께서 "너는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남 여사의 사역이라는 것은 소위 '춤 사역'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강단에서 '기적의 춤'을 추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자신의 몸을 여시는 소위 '몸 사역'도 성령 춤을 추기 위한 훈련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직을 받았다는 주남 여사의 말은 자신의 춤 사역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소위 '말세의 여선지자'라는 사람이, 그것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성직을 받았다는 사람의 역할이 말씀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강단에서 춤을 추는 것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춤꾼이 성직자로 불려진 사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18) 진정한 크리스천과 교회의 비율은 20%?
주남 여사의 말에 따르면 주님은 크리스천의 20%만이 실제로 당신을 기쁘시게 하고(353-354쪽) 약 20%의 교회만이 당신을 최우선으로 놓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386쪽). 그런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크리스천의 비율을 이처럼 간단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비율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애매하기 때문이다.
주남 여사는 주님께서 교회에 대해 "나의 교회들은 너무 안일하게 있어 왔다. 나는 내 교회 중 많은 교회들이 아주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하셨다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은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진정한 크리스천과 참된 교회의 비율이 그처럼 적다는 것은 세상에 건전하지 못한 교회가 그만큼 많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정 교회나 이단으로 하여금 기성 교회를 공격하게 하는 빌미로 이용될 수도 있다.
또 목사에 대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도 있다.
"내 딸아, 많은 목사들이 내가 네게 보여 주었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되고 그들의 성도들이 그 뒤를 뒤따르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 주남아, 너는 반드시 이것을 책에 써야 한다"(386쪽).
이 글은 이 책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목회자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많다. 기성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그들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교회와 목회자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과연 주님이 교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이같은 발언을 반드시 책에 써야 한다고 강조하실 정도로 하셨을지 의문이다.
(19) 현실세계에서도 주님을 육안으로 본다?
주남 여사는 주님의 모습을 천국을 방문했을 때만 본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적고 있다. 30쪽에는 워싱턴 타코마 시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중에 강대상 옆에서 주님의 임재를 보았는데 주님은 흰 머리칼을 하고 흰옷을 입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계셨다는 이야기가 있고, 370쪽에는 주남 여사가 주님이 교회 강단 앞에서 아주 행복한 얼굴로 걸어다니신다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또 381쪽에는 1999년 4월에 주님이 예복을 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적어도 20분 정도를 강대상 옆에 서 계셨다는 이야기가 있고, 453쪽에는 2000년 12월 24일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동안 크리스마스 가운을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459쪽에는 2001년 3월 25일에 성전에서 기도하고 난 후 주님이 금빛 가운을 입으시고 강대상에 서 계셨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다. 과연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실까? 성경에는 주님을 직접 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고 주님 여사가 경험한 것처럼 일상적으로 특정인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니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승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서 육신의 눈으로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욥바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을 때 주님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다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만 들었다(행 10:9-16).
신약성경에서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본 사람은 바울과 사도 요한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바울이 회심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는 주님의 몸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멀어버렸다. 이것은 주님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두려운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마치 특정인을 만나보듯이 주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님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성경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끊어진지 오래인 이 시대에 주님이 과연 이처럼 특정인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실지 무척 의문이다.
(20) 치유의 기적
주남 여사는 이 책에서 치유에 대한 경험도 기록하고 있다. 주남 여사가 초자연적인 치유의 기적을 많이 행했다면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많은 치유의 기적들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치유의 기적은 관심 있게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주남 여사가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치유의 이야기는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남의 병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치유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치유의 이야기는 405쪽 이하와 474쪽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후두염, 오른쪽 귀에서 소음이 들리는 증상, 몸 왼쪽과 어깨가 아픈 증상 등 자신의 병을 치유받았다는 것이다.
주남 여사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신유의 능력을 주셨다고 했는데(93쪽)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을 행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다른 사람의 불치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치료한 것이 얼마큼 진정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주남 여사는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신유의 능력을 주셨다고 말했는데(93쪽) 그렇다면 왜 이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행한 이야기는 없을까? 성경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아닌 남의 병을 치유했다.
또 주남 여사는 자신의 '성령 춤'을 '기적의 춤'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강단에서 '기적의 춤'을 출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있다.
(21) 마지막 대통령이 조지 부시?
이 책에는 주님이 조지 부시가 마지막 때의 대통령으로 택함받았다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있다(456쪽). 이 부분을 읽고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우리 나라는 대통령선거철이 되면 용하다는 역술가들이 앞다퉈 당선자를 예언하고 총선 때가 되면 점쟁이 집이 붐빈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이 누가 대통령이 될지 예언하셨다는 부분은 꼭 우리 나라의 이같은 무속신앙을 연상케 한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임기는 2009년 1월 중에 끝나는데 조지 부시가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라면 종말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 점에서 조지 부시가 마지막 때의 대통령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시한부 종말론과 다름이 없다.
(22) 천국의 새 노래
주남 여사는 주님이 천국의 새 노래를 가르쳐 주셨는데 곡조와 가사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61쪽). 그런데 세상에도 주님을 찬양하는 많은 노래들이 있는데 굳이 주님께서 천국의 새 노래를 미리 주실지 의문이다. 주님이 천국의 새 노래를 주셨다는 것은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은 노래가 부족함이 많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에는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하는 말씀이 있다. 천국의 노래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천국에서 부를 노래이지 지상에서 미리 부르는 노래는 아니라고 사료된다.
주남 여사는 자신의 춤 사역의 권위를 높이려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천국의 새 노래를 주셨다고 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23) 하늘의 천사
이 책에는 주남 여사가 육안으로 천사를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480쪽). 쇼핑몰 주차장에서 도움을 요청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나중에 주님이 그 남자가 천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 예배시간에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도 천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의 존재인 천사가 중대한 목적도 없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성경에는 천사가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난 사건이 대표적이다(창 18-19장).
그런데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중대한 목적하에 천사를 보내신 특별한 사례이다. 그런데 주남 여사의 경우는 어떤 중대한 일로 인해 천사를 만난 것이 아니다. 여자처럼 보이는 천사의 경우 줄리라는 여인을 전도하기 위해 주남 여사에게 나타났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천사가 과연 이런 방법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서 전도를 도울까? 굳이 천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전도를 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24) 그 외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
① 주남 여사는 천국에도 각자의 집이 있고 집마다 문패가 있다고 말한다(145-146쪽). 또 별장도 있다고 한다(217쪽). 성경에는 이에 대한 말씀이 없어 진위를 알 수 없지만 천국에도 각자의 집과 문패가 있다면 천국도 세상처럼 빈부와 신분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논란의 여지가 많다.
실제 주남 여사는 천국에는 다양항 계층과 장소가 있고 주님께서 이것을 여러 번 보여주셨다고(423쪽) 함으로써 천국도 신분계급이 있음을 명시했다. 천국에도 빈부 격차와 신분의 차별이 있다면 이런 곳을 과연 진정한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② 천국에도 여성들이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파우더 룸이 있다고 말한다(197쪽). 이것은 천국에 가면 몸이 변화되는데 왜 굳이 화장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화장은 얼굴을 좀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인위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③ 주남 여사는 과일과 물고기가 천국의 주된 음식이라고 소개하면서 주님이 친히 요리해주신 물고기를 먹은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207-209쪽). 그런데 이 또한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도 음식의 종류는 가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천국의 주된 음식이 고작 과일과 물고기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일까?
④ 주남 여사는 잠자리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실 때는 방 곳곳에서 귀신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321쪽). 영적인 존재인 귀신을 인간의 육안으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⑤ 주남 여사가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331-332쪽). 물론 진짜 육신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⑥ 주남 여사는 1998년 4월 3일에 미가엘 천사를 만났다고 한다. 주님은 미가엘에 대해 2m가 약간 넘는 키에 몸무게는 135kg이고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잘 생긴 천사라고 소개하셨다고 나온다. 그리고 미가엘 천사가 주남 여사에게 "주남! 당신은 내 주님의 귀한 딸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346쪽).
이 부분은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던져 준다. 첫째,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몸무게를 단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위이다. 몸무게는 주로 육적인 몸의 중량을 나타낼 때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미가엘의 키와 몸무게 등의 외모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실 만큼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⑦ 주남 여사는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주님이 막으신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보존함으로써 성령께서 자신 손으로 춤을 추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413쪽).
그런데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오히려 안수기도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이다. 병자의 손에 손을 얹으면 불결해진다는 것은 율법적 사고이다. 예수님도 친히 병자의 몸에 손을 얹고 치유를 행하셨는데 그러면 주님의 손길이 불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⑧ 주남 여사는 472쪽 이하에서 겸손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제목과 내용이 따로 놀고 있다. 겸손의 중요성에 대한 예로 춤을 출 때 입을 흰 드레스들을 바느질할 여자 재봉사를 들었는데 여기에는 겸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주남 여사의 자기 자랑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겸손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3. 진정성에 대한 평가(진실인가, 허구인가?)
앞에서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 책에는 성경의 내용과 모순되거나 심각한 이단적 내용이 적지 않음을 발견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이 진실인가, 허구인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참고로 진실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짜로 주남 여사에게 나타나셔서 천국을 방문하게 하시고 여러 가지 직통 계시를 주셨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며, 허구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주남 여사가 경험했다는 일들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소설처럼 지어냈거나 신비체험의 일부를 확대ㆍ과장했거나 그가 만난 주님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면 이 책은 진실이 아니라 허구라고 사료된다. 그 이유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경적이지 않은 내용이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유명세를 타려고 지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많이 일어난다.
신약성경이 저술된 시대와 그 후의 시대에도 소위 위경(僞經)이 많이 나타났다. 신약 위경은 포티우스(Photius)라는 사람이 약 280개의 위경 목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 수가 엄청났다. 신약 위경의 특징은 유명한 사도나 제자의 이름을 표제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베드로복음서, 빌립복음서, 바울행전, 바나바행전, 고린도삼서, 바울묵시록" 등과 같은 형식으로 말이다.
위경의 저작 배경에는 유명세를 타려는 저자의 의도도 많은 작용을 했다.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에도 이같은 의도가 너무나 많이 엿보이고 있다.
그 근거로는 첫째,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는 말이 너무 자주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주남 여사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높여주시고 칭찬하시는 말씀이 무척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십여 쪽에 걸쳐서 말이다. 그 예를 구체적으로 들면 다음과 같다.
"내 딸 주남아, 너는 오랜 동안 나의 특별한 딸이었다"(41쪽).
"딸아, 너는 참으로 내 말에 잘 순종하는 자녀이다. 그래서 내가 네게 특별한 은사들을 주려고 한다"(41-42쪽).
"너는 나의 귀한 딸이다. 네가 어디로 가든 너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46쪽).
"딸아, 너는 나를 크게 섬기게 될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너는 나의 충실한 딸이다. 그래서 이 중요한 일을 네게 맡긴다"(50쪽).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계속해서 너를 방문할 것이다"(57쪽).
"나는 네가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내가 이 영적 은사들을 네게 주려는 이유이다"(58쪽).
"너는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내가 네 기도에 응답하는 이유이다. 나는 네가 마음이 순수하고 순종하는 딸임을 안다. 나는 많은 일에 있어 너를 신뢰한다. 따라서 내가 이 중요한 일을 위해 너를 선택한 것이다. 네 믿음은 나를 아주 기쁘게 하고, 그리고 네 의지력도 그러하다. 나는 마음이 담대하고 독립심이 강하다. 그래서 나는 매우 기쁘다"(59쪽).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니 아무도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를 이 세상의 악한 일에서 보호해 줄 것이다. 너는 나의 소중한 딸이다"(62쪽).
"내 딸아, 이제 네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81쪽).
"나는 네게 신유의 능력과 다른 영적 은사들을 줄 것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내 그곳에 있어 너를 인도할 것이다"(93쪽).
"내 딸아, 나는 네가 나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너를 택하였다. 나는 네 의지력과 네 믿음이 마음에 든다"(97쪽).
"나는 내 능력을 네게 그리고 네 속에 풀어놓을 것이다. 너는 병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세상에 있을 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106쪽).
"나는 너를 나의 친구로 대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모든 일에 너를 돌보아주마"(138쪽).
"너는 이 일을 위해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네가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너를 축복해 줄 것이다"(138쪽).
"나의 딸아, 너는 이미 나를 기쁘게 하였다. 너는 나에게 매우 특별한 딸이란다. 나는 너를 심히 축복하기를 원한다"(148쪽).
"주남아, 나는 이 마지막 때의 일을 위해 너를 창조하였다. 내가 너를 유명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네가 나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충성할 것을 안다"(159쪽).
"그 점이 바로 너를 택한 이유이다. 내가 너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말아라. 아무도 너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선물을 너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곧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게 될 것이다"(167쪽).
"딸아, 너는 내게 특별하단다"(226쪽).
"너는 내게 매우 특별하다. … 나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이에 적합한 사람을 택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바로 내가 택한 딸이다. 나는 네가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 지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234쪽).
"저는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어려운 자들을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어요." /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몹시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 너는 나에게 특별한 딸이 될 것이다. … 나는 네가 지상에서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243쪽).
"딸아, 너는 이 일을 위해 왜 내가 너를 지목하였는지 계속 묻고 있구나. 내가 다시 말하마. 네가 이 책을 쓰기에 적합한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네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가 일러 준 모든 것을 행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253쪽).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 저는 저의 온 가족이 주님을 섬기며 기꺼이 생명까지도 드리기를 원합니다." / "딸아, 그래서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이란다"(254쪽).
"이 일에 있어서 네가 순종한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선택한 이유란다"(264쪽).
"딸아, 너는 이미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단다.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위해 너를 선택한 것이다"(273쪽).
"주남아, 너는 100점 이상으로 시험을 통과하였다"(357쪽).
"내 딸아, 내가 너의 육체와 정신에 일을 행하기 전에는 너도 이 진흙과 같았다. 그러나 이제 너는 흠잡을 데 없이 준비된 그릇이다"(372쪽).
"사랑하는 딸아, 이 마지막 때에 너는 나의 매우 특별한 딸이다"(455쪽).
"너는 내 생일과 설날에 최고의 축하 선물이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하니 기뻐하여라"(474쪽).
"나는 너에게 성직을 수여한다"(479쪽).
"딸아, 너는 중요한 시험을 통과했구나. 나는 네가 수없이 낙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내게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대신 혼자 모든 것을 간직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485쪽).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주남 여사를 높여주시고 칭찬하신 말씀은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같은 언급이 이 책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고 사료된다.
주님께서 특정인을 높여주시거나 칭찬하시는 말을 이처럼 자주 하시는 분일까?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리우는 욥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칭찬을 듣지 못했다.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는 칭찬은 하나님이 욥이 듣는 데서 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도들에게도 주남 여사에게 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별로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책망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마 17:17).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요한계시록에도 주님이 요한을 높여주신 말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도 저자를 높여주는 말씀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자기를 자랑하는 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던 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이야기할 때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 12:5) 하고 고백했다.
바울의 신비체험 이야기에는 주님께서 바울을 칭찬해주신 말씀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주님께 세 번이나 구했던 자신의 소원이 거절당했으며 다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는 말씀만 들었다.
그런데 주남 여사가 지은 책에는 저자에 대한 주님의 칭찬과 높여주시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정말 이 책의 집필이 주님이 계획하시고 명하신 것이라면 저자를 높여주는 언사가 이처럼 많이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이 책에 주남 여사에 대한 칭찬과 높여주시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 책이 위작임을 드러내는 유력한 증거이다. 주님은 자랑과 교만을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주님께서 설마 작가의 자기 자랑으로 가득찬 책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실까?
바울도 많은 계시를 받았지만 오히려 주님은 바울이 그 계시로 인해 스스로를 높이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그런데 주남 여사가 주님의 명에 따라 지었다는 이 책에는 자기를 높이는 말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바울에게는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신 주님께서 주남 여사에게는 스스로를 높이게 내버려두신다면 이는 모순된 행위에 다름 아니다.
주님이 주남 여사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높여주시는 말씀이 무척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주남 여사가 자기 자랑이나 자기에 대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이 책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꾸며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둘째, 자신이 지은 책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남 여사는 이 책에서 책을 쓰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며 주님의 주요한 관심사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주님의 명에 따라 책을 쓰게 되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네게 보여주거나 말하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네게 계시하는 그대로만 적어라"(96쪽).
"주남아, 너는 할 일이 많이 있다. 나는 네가 책을 한 권 쓰기를 바란다. 그 책은 종말에 관한 중요한 책이다. 그 책은 많은 언어로 번역될 것이다. 나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일을 위해 너를 선택하였다. 나의 거룩한 영이 내 능력을 너에게 부어주기 위해서 너의 몸을 항상 진동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117쪽).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 네가 나와 함께 했던 체험을 책으로 쓰기 바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온 세상이 이 책을 읽고 내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122쪽).
"너무나 많은 내 자녀들이 아직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위해 네가 책을 써 주기를 바라는 이유이다"(149쪽).
"너는 책을 쓰는 방법을 몰라도 된다. 내가 네게 보여 주고 말해 주는 것들을 기록해라. 그러면 작가가 너를 대신하여 책을 쓸 것이다. 딸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네가 기록해 놓은 것을 다시 쓰도록 인도할 것이다. 성령충만한 작가가 너를 위해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다"(159쪽).
"나의 딸아, 나는 네가 방해받지 않고 이 책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고 또 나의 자녀들에게 특별한 축복이 될 것이다. … 이 책에 관한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175쪽).
"나는 네가 책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너는 많은 교회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182쪽).
"내 딸아, 내가 네게 보여주고 말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라. 이 모든 것을 전해라. 네가 이처럼 순종하는 딸이기에 내가 너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218쪽).
"이 책은 반드시 성령충만한 자가 집필해야 한다. 내 딸아, 네가 만일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능력을 힘입지 않는다면 나는 이 책을 집필하는데 너를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에 말한 대로 나는 이 일을 위해 오래 전부터 너를 준비시켜 왔다"(244쪽).
"내가 네게 보여 주고 말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바란다. 어떤 것도 보태거나 빼지 말아라. 이 일을 마치면 너는 특별한 은사를 받아 나를 섬길 것이고 나의 자녀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253쪽).
"내 딸아, 이 책에 대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일은 내가 할 것이다. 내 딸아, 그저 너는 나를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책의 표지에는 너의 사진을 넣도록 해라"(256쪽).
"주님게서 내게 환상을 주실 때 수반되는 초자연적인 음성이 흘러나오고 나는 다시 한 번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고 적혀 있는 책 표지를 보았습니다. … 그때 책 한 권이 주님과 나를 향해 날아오자 주님은 손으로 그 책을 잡아 나에게 주셨습니다"(267쪽).
"나는 주님이 다만 이 책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가 다시 강조되어지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성경의 진리를 다시 언급하기 위하여 나를 도구로 선택하셨고, 이 책을 그 전달수단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또한 주님의 백성들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천국에 관한 놀라운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신다고 믿습니다"(285쪽).
"나는 속히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내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이 책은 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네가 환상 가운데 본 것들은 매우 가까운 장래에 지상에서 일어날 일이다"(291쪽).
"이날 밤 주님은 이 책이 속히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속히 내 백성에게 올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94쪽).
"2000년 1월 13일 아침기도 후, 주님은 나의 사역과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이 책에 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책 출간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398쪽).
이상의 내용들은 주님께서 이 책의 집필과 출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주남 여사는 책의 제목까지 주님이 정해주셨다고 말하고 있다(251쪽). 심지어 주님께서 책의 표지 디자인까지 환상으로 보여주셨고(258쪽), 책의 표지에 자신의 사진을 넣으라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256쪽).
이것은 이 책을 신격화하려는 인위적인 시도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쓰게 하실 때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시하시고 통제하신 것은 아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을 인간이 받아쓰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그들의 사상과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시고 이것이 성경 집필에 반영되게 하셨다. 그래서 성경 저자의 사상과 경험은 성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지만 강조점이 저마다 다르다.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했고, 누가는 이방인이자 의사로서 예수님의 치유이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기록에 있어서 인간 저자의 사상과 경험을 존중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주남 여사가 지은 책은 결코 정경의 반열에 놓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관심을 지나칠 정도로 부각시키고 있다. 책의 제목과 표지 디자인까지 주님께서 일일이 지시해 주셨다는 것은 정경의 경우와 비교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신구약 정경의 결정과 채택에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특히 신약의 문서는 구약의 문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했기 때문에 더욱 오랜 시간과 논란의 과정을 거쳤다. 교회사에서 신약정경의 목록이 가장 최종적으로 결정된 시기가 1546년이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에 수납된 정경도 그 채택과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이처럼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정경과는 결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 개인의 저서에 주님께서 이처럼 큰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며, 주남 여사가 자신의 책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려고 주님의 이름을 팔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진실'이 아니라 '허구'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진실'로 인정하기에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1장-서평을 위한 사전 고찰"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 시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필요하지 않으며 주님과 일대일로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제2장에서 밝혔듯이 이 책에는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으로 문제의 여지가 있거나 이단적인 내용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 성경적이지 않은 내용이 많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이 허구임을 밝혀주는 구체적 증거이다.
그 외에 주남 여사가 주님의 말씀을 빌어 자신을 높이는 내용을 너무 많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책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위작성(僞作性을) 더욱 확신시켜 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이 허구라는 것은 소설적 요소가 다분하다는 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소설의 특징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라는 데 있다. 그러나 그 허구는 현실을 완전히 초월하지 않으며, 작가의 경험과 사상 및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 나타나는 이야기나 자료를 소재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 책은 천국과 지옥을 방문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으며, 작가의 경험과 사상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낙태아와 일곱 살 전에 죽은 아이는 부모의 신앙과 관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은 아이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묘사한 것은 자신의 교회가 환난 전 휴거설을 신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주요 소재는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고기, 과일 열매, 천사, 면류관, 기름 부음, 생명수, 십자가, 성경의 완전수 7 등등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소재들인데 주남 여사는 이같은 소재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자신의 책이 성경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춤 사역에 대한 지나친 부각도 이 책의 위작성을 확신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남 여사가 하는 일은 소위 '춤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춤 사역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역행위가 아니며 그 역사도 무척 짧다.
기독교 역사 이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말씀 사역'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 사역이 중심에 있었으며 사도들의 사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역자는 대부분 말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스스로 밝혔듯이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160쪽). 그가 잘 하는 일은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런데 춤 사역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사역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춤꾼에 불과한 주남 여사로서는 기독교에서 유명세를 타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이 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주남 여사가 자신의 춤 사역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기록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만큼 춤 사역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춤을 '성령 춤, 기적의 춤'이라고 미화할 뿐 아니라 자신의 춤 동작은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며(381쪽), 춤을 추기 전에 부른 새 노래는 주님께서 곡조와 가사를 함께 주신 천국의 노래라고 주장하고 있다(461쪽).
그리고 자신의 춤을 '성령 춤'으로 미화하기 위한 노력도 눈물겹다. 성령 춤을 추기 전에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준비시키는 '몸 사역'을 행하셨고, 자신의 몸에 무려 85병에 이르는 기름을 부으셨을 뿐 아니라(325쪽) 양팔로도 잡을 수 없는 거대한 황금병에 담긴 기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통채로 부으셨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344쪽).
또 몸 사역이 끝난 후에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황금열쇠를 주셨을 뿐 아니라(330쪽) 성직까지 수여하셨다고 주장하고 있다(341쪽). 이는 실로 자신의 춤 사역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상과 같은 사유로 이 책은 주남 여사가 소설처럼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고 사료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주남 여사가 실제로 신비체험을 하긴 했는데 그에게 나타난 주님이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 사탄이 주님인 것처럼 위장하여 나타났을 가능성이다. 성경에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는 말씀이 있다. 사탄도 영적인 존재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자신이 주님인 것처럼 위장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목적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데 있다면 사탄이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지옥에 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이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데 얼마큼 일조할 것 같은가? 이 책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내용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실제 이 책을 읽고 신앙적으로 혼란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우리 나라는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가 그 유명한 조용기 목사로 소개되어 있어서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같은 혼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할 우려가 있다. 사실 그동안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전해졌는데 그 내용이 서로 완벽히 일치하지 않고 있다. 천국에 대한 일치되지 못한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실재를 의심하게 만들고 이것은 결국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우려가 분명히 있다.
어쨌거나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이 진실이 아닌 허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주의가 요망된다고 사료된다.
4. 이 책의 부정적인 영향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많이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교회와 독자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몇 가지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계시론에 대한 혼란
정통 기독교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직통 계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며 성경에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기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직통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마치 제2의 요한계시록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직통 계시가 필요하다면 이는 성경이 불완전하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진정성을 인정하게 되면 계시론에 대한 혼란을 피할 수 없다.
(2) 성경관에 대한 혼란
정통 기독교는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신비체험이나 기적도 신앙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성경에 반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리고 성경에 없는 내용도 많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성경관에 대한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즉 독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은 완벽하지 않으며 보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3) 신앙에 대한 혼란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혼란을 초래할 만한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낙태아와 일곱 살 이전에 죽은 아이는 천국에 간다거나 진동, 거룩한 웃음 등의 영적 현상, 몸 사역과 성령 춤, 천국의 모습과 휴거 등등은 정통 기독교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에 대해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는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진동, 거룩한 웃음 같은 현상은 찬반 양론이 있고 어떤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보고 있는데 이 책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휴거에 대한 것만 하더라도 횟수에 있어서는 한 번 휴거설과 두 번 휴거설이 있고, 시기에 있어서는 환난 전 휴거설과 환난 후 휴거설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정통 교단 내에서도 그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니다.
그런데 이 책은 환난 전 휴거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141쪽). 환난 전 휴거설은 주로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지지하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도 세대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 책은 교계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많다.
(4) 구원에 대한 불안 야기
이 책은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순결하고 순종하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천이어도 주님께 불순종하면 지옥 구덩이 주변을 배회하거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불안을 심어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구원론에 있어서 정통신학과 부딪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5) 신비체험에 대한 열망
이 책은 토마스 주남 여사의 신비체험을 다루고 있다. 천국을 방문한다거나 환상을 본다거나 주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누구나 체험해보고 싶은 신비적인 현상임은 틀림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나도 주남 여사처럼 신비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이를 기도제목으로 삼게 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신비주의도 기독교 신앙의 한 요소를 이루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적과 환상 이야기는 모두 신비한 일들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사도 바울과 요한처럼 삼층천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거나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는 등 신비체험을 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신비주의는 그 폐해도 만만치 않다. 신비주의는 체험을 중시하는 특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여러 가지 신앙 현상의 옳고 그름은 성경을 통해서 검증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은 여러 가지 신비체험 현상을 성경의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외에도 신비주의는 지나치게 몰입할 경우 현실초월적이거나 은사주의와 영합하는 등의 폐단도 있다. 그래서 정통 기독교는 신비주의로 경도된 신앙을 무척 경계하고 있다. 실제 정통 기독교에서 사이비나 이단으로 규정된 종파들 중에서는 신비주의 색채를 지닌 곳이 적지 않다. 신비주의 이단들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고 교회와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신비체험에 대한 열망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숫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것은 신비체험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신앙적 요소가 아님을 드러낸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신비체험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이 혹 독자들의 신앙을 신비주의로 이끌게 하거나 신비체험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6) 영적 체험에 대한 왜곡
기독교에서는 신앙이 성장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체험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거나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구약시대의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 직접적인 음성을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남 여사는 문자 그대로 자신이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신뢰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 책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영적 체험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 즉 영적 체험은 주남 여사처럼 직접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은사주의로의 경도
이 책은 은사주의자가 환영할 만한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방편이지만 이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그 신앙이 은사주의로 흐르게 될 우려가 있다. 은사주의는 지나치게 빠지면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신비주의나 기복신앙으로 경도될 위험이 많다.
신비주의나 기복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류가 아니다. 특히 기복신앙은 무속종교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기독교와 무속종교는 기름과 물의 관계처럼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것이다. 은사주의가 비판을 받게 된 것도 일부 무속신앙적인 요소가 있어서이다. 이것은 특히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8) 현실 도피
이 책은 천국 방문과 천국에 대한 묘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같은 신비체험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을 도피하려는 의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현실 도피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보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삶의 과제와 목적들을 쉽게 체념하게 하는 부작용을 야기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천국은 살아서는 갈 수 없고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현실을 도피하게 되면 삶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맞서서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어서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는 염세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물론 현실도피에 대한 우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우려가 야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5. 글을 맺으면서
이상으로 토마스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에 대한 서평을 써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진실의 책'이 아니라 주남 여사가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지어낸 '허구의 책'이라고 사료된다. 주남 여사가 이 책의 출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유명세, 자신의 춤 사역에 대한 신적 권위의 부여, 책 판매로 인한 경제적 수익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주남 여사는 책의 제목처럼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천국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함인데 천국은 바로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천국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믿는다.
굳이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그 내용이 전적으로 성경에 부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모든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자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주장은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성경의 지지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주남 여사는 책머리의 끝에 "여러분은 내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나의 천국체험이나 주님과 함께 했던 체험들이 철저하게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리라고 믿는다"(17쪽)라고 적었는데 이는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책에는 성경적이지 않은 내용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조용기 목사는 "이 책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저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그의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이 진정성을 확보하려면 신학적ㆍ교리적으로도 이단성이 없어야 한다. 신학과 교리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이단적인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바른 지식에 근거한 바른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이단 종파는 그 신학과 교리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신학과 교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만큼 이단에 빠지기 쉽다. 물론 이단들도 자기네들의 신학과 교리가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단의 성경 해석은 그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통신학과 정통교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적용을 돕는 교과서이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서적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면 신학적인 검증 작업도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용기 목사가 이 책을 번역하여 소개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필자는 조용기 목사가 이 책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것은 그의 목회일생에 일대 오점을 남긴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이 성경적이지 않고 진정성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신학적 소양이 있으면 충분히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조용기 목사가 이 책에 관련된 것은 그 자신에게도 대단한 불명예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누를 끼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보급으로 인해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신학적ㆍ교리적 검증을 통과하기 힘들기 때문에 진정성 있는 신앙서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요한계시록처럼 환상이나 신비체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3장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주남 여사의 자기 자랑과 스스로를 높이는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부각되어 있고, 주님의 명에 의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 등 책에 대해 신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어떤 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허구의 책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또 이 책이 복음 전도에 기여한다거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복음 전도에 기여하려면 기독교 내에서도 성경적인 신앙서적이라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책에 대한 진정성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 책에 대한 수많은 비판적인 견해는 진정성의 확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온갖 이단적인 사상이 난무하는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느것이 진리요 거짓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영적으로 튼튼한 무장을 하게 되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안목이 생기게 되고 진리를 왜곡하는 어떤 위험한 사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2008년 10월 15일 * 샬롬방 신앙공동체(shalombang.comㆍ한글주소:샬롬) 김경호 목사
휴거는 어린양의 혼인식이라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결혼을 원치 않고 바라지도 않고 준비도 않는자는 오지 못합니다.
그 날에 버려둠을 당함으로 여러분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할겁니다.
입으로는 "그 날은 좋은 날이겠죠.저는 주님과 함께 살꺼에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전 그 날에 주님을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강조하세요?" 라고 하지만
그 날에 버려둠으로 여러분 스스로 그 혼인식을 바라지도 ,원치도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재림신앙은 현실세계 도피적으로 된다는 것 과연 그럴까요? 함정이라구요?
지금 그 말이 오히려 미혹입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살게 된답니다. 그날의 영광을 위해
재림의 메세지는 이제 빨리 천국 가자 가 아니라
만약 지금이라도 주님이 오시면 구원 받을 수 있느냐
흠과 점이 없는지 확인 ,회개하고 ,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라, 올바른 길로 가라, 주님이 책망을 듣지 않도록 살자
이 메세지 인 것입니다.
재림신앙을 이상하게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군요.
아니요 주여나를구원하소서 그건 아닙니다. 주님만 붙들면 된다. 구원하소서님의 입에서 나온 말 자체가 상황에 따라 끔찍한 미혹을 사람들에게 줍니다.
말은 그럴듯 하죠 + 만약 "주님만 붙들면 됩니다." 라고 하고 싶으시면 추가로 "주님만 붙들고 있는지 확인" 이 빠졌습니다.
공중재림을 준비하는게 재림신앙입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시기를 바라며 사는 신앙입니다.
그런 말이 미혹일 수 있는 이유
1. 타국에 나간 주인의 집을 지키고 있는 새벽의 문지기가
스스로 나는 문만 지키면 된다 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문만 잘 지키면 된다" 라고 전한다.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긴장을 놓쳐 졸고 말았다.
그것이 문을 잘 지켰다고 볼 수 것인가?
하지만 주인이 원하는 것은 문 잘 지키고 + 졸지 말라는 것이였다. (그게 충성이니까)
새벽에 문 지키는 자에게 문 잘 지켜라+졸지 말아야 한다. 라는 본질+행함을 가르켜 행함으로 본질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새벽에 잘 존다는 약점을 잘 지적하여 행함으로 본질을 유지하게 이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우리가 일하는게 주인오면 수고가 끝이니
저 사람들은 주인만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면 거기에만 집중해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주인을 기다리는건 옳되 너무 주인만 신경쓰지 마라 안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다". 라고 미혹한다.
하지만 실상은 주인이 올때 좋은 모습을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한다. (그것이 영광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가 옳은 방향으로 쓰인 말인가요?
3. 신부들이 등불과 기름을 준비한다.
기름이 어느 정도 있고 불도 잘 유지하고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미 우린 준비했잖아" 라고 미혹한다.
"현재 등불에 불이 붙어서 불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라고 미혹한다.
실상은 늦게 올 것을 감안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똑같이 혼인식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던 신부들이
다 들어갈줄알았는데 충분히 예비하였던 신부만 혼인식에 참석 (그것이 예복이니까)
이 때 '불만 잘 나오면 된다" 라는 말이 옳은 말일까요?
pkys님/ 재림신앙 자체를 문제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 어떤 사람도 모르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책에서 재림의 날짜를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 문제이며 이것이 곳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것이고 시한부종말론이라는 것입니다. 토머스주남이 마지막때의 마지막 대통령이 부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여 주셨다하고 자신의 손녀가 휴거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날짜를 계산해 보면 재림 날짜가 나타납니다. 결국 토머스 주남은 간사한 계략을 써서 직접적으로 휴거 날짜를 말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재림의 날짜를 주장한것이죠
어느 정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주남은 구체적으로 몇 시 몇분이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가깝고 2010년 근처이다. <--- 이런류 그냥 무시하는게 좋습니다.
중요한건 지금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라고 하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휴거 관련 일부 카페를 예를 들자면
토마스 주남을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고,그가 맞다고도 안하고
너무 빠지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글도 게시하지 않습니다.
이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저렇다 저게 저렇다 라고 따지는게 옳은게 아니라는 거죠.
물론 예 입니다
위 글 보면 너무 재림신앙에 빠졌다고 라고 표현하는데
빠지면 안됩니까? 옳게 빠지면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 그 자체가 성경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시록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밤중소리(신생교회,합동)에 들어가시면 요한계시록 50년연구한 모든자료를 록걸지않고 무료로 보게 하셨고 한달에 한번 평신도와목회자들이 함께하는 일일 세미나가 있습니다.강추합니다.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