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마을의 이야기와 시
도연명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지방 사람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루는 시내를 따라가다가 길을 얼마나 멀리 왔는지 잊어버렸다. 홀연 복숭아
나무 숲을 만났다. 시내의 양 언덕 수백 보 되는 땅 안에 다른 나무는 없고 풀
이 선뜻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펄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그 숲 끝까지 가 보려고 하
였다. 숲은 시냇물의 발원지에서 끝나고 거기에 산이 하난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 입구가 있었는데 빛이 나오는 것 같았따. 곧 배를 버리고 입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매우 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하였다. 다시 수십 보를 가니
툭 트이며 밝아졌다. 토지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가옥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고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못과 뽕나무며 대나무 같은 것들도 있었다. 밭 사이의 길
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과 개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왕
래하면서 밭을 갈고 있었는데, 남녀의 옷차림이 모두 바깥세상의 사람들돠 같았
다. 노인과 어린이 모두 기쁜 듯이 저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를 보
고는 크게 놀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해 주자 곧 그를
초대하여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 술자리를 벌여 닭을 잡고 음식을 만들어 대접
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와 있다는 것을 듣고는 모두 와서 바깥 세상의 소식
을 물었다. 그들 스스로 말하길, “선조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
을 사람을 이끌고 세상과 떨어진 이곳에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아 마침내 외부 사람
과 단절이 되었다” 하고는 “지금이 어느 시대요?”라고 물었다. 한(漢)나라가 있는
지조차 모르니 위진(魏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어부가 자기가 들은 것을
그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해 주니, 모두 탄식하고 놀랐다. 나머지사람들
도 각기 또 어부를 초청하여 자기들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모두 술과 밥을 내놓고
대접했다. 며칠 머물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이 마을 사람이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시오”하였다. 어부가 나와서 배를 찾아, 지난번의 길을 따라
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군(郡)에 이르러 태수를 만나 보고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아뢰었다. 태수가 곧 사람
을 보내 그가 가는 곳을 따라가 전에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하였으나 끝내 길을 잃
고 더 이상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다.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얼마 지
나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마침내 그곳을 찾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어진 사람들은 그 난세를 피하였네
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는 상산(商山)으로 은거하고
도화원(桃花源)의 조상들도 떠났네
지나간 자취 점차 파묻혀 없어지고
도화원으로 왔던 길도 마침내 황폐해졌다네
서로 격려하며 농사일에 힘쓰고
해 지면 서로 더불어 돌아와 쉬었다네
뽕나무와 대나무는 짙은 그늘 드리우고
콩과 기장은 철 따라 심네
봄에는 누에에서 긴 실을 뽑고
가을에는 수확해도 세금이 없네
황폐한 길은 내왕하기에 흐릿하고
닭과 개만 서로 소리 내어 운다네
제사는 여전히 옛 법도대로 하고
복장도 새로운 모양이 없구나
아이들은 마음껏 다니면서 노래 부르고
노인들은 즐겁게 놀러 다니네
초목이 무성하면 봄이 온 걸 알고
나무가 시들면 바람이 매서움을 아노라
비록 세월 적은 달력 없지만
사계절은 저절로 한 해를 이루나니
기쁘고도 즐거움이 많은데
어찌 수고로이 꾀쓸 필요 있으랴
기이한 자취 오백 년 숨어 있다가
하루아침에 신선 세계 드러났네
순박함과 경박함 본래부터 서로 달라
곧바로 다시 깊이 숨었네
세속의 사람들에게 묻노니
어찌 세속 밖의 일을 알 수 있으리오
원하노니 가벼운 바람 타고
높이 날아 나와 뜻 맞는 사람 찬고 싶네
[작가소개]
도연명[ 陶淵明 ]
<요약> 중국 동진(東晋)말기 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주요 작품으로 《오류선생전》,《도화원기》,《귀거래사》등이 있다.
출생-사망 : 365 ~ 427
자 : 연명 ·원량
시호 : 정절선생
본명 : 도잠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 주장현의 남서 시상
주요작품 :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귀거래사》
자(字)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遊戱文學)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對句的技巧)나 전거(典據)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는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儲光羲)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리고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문선(文選)》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이후 판본(版本)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연명 [陶淵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