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신 병 동
이 향 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막연한 상식만을 가진 채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은 신경정신과나 정신병동에 대해선 자기와는 무관한 곳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특별한 관심이 없다. 나 역시 그랬었는데 작년부터 그곳을 드나들게 되면서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일에 기막혀 하면서 이 일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해 하고 있다. 정신지체인 엄마를 닮아서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모자라는 장애아였다. 학교공부는 정상적인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 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명랑하고 착해서 자기 몫은 별 어려움 없이 다하던 아이가 가엾은 내 조카딸 이다.
중학교 졸업 후 장애인복지회관을 다녔는데 거기서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신랑을 만난 게 잘못이었다. 저보다 나은 신랑에게서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자신보다 못한 신랑과 만나 사는 일이 버겁고 삭여지지 않는 스트레스로 작용을 했나보다. 내 딸들을 결혼 시킬 때도 그렇게 힘들진 않을 만큼 어렵게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소리 없이 울며 잘 살아주길 기도했는데 그 아인 결혼 후 자신의 환경에 적응 못 하고 결혼 2년이 채 못 된 작년 봄 병이 나고 말았다.
시댁에서 이상해져서 친정으로 돌아온 아이는 따가운 봄 햇살 아래 온 동네를 소리소리 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잠자던 아이는 들이닥친 장정들에게 끌려가듯 구급차에 실려 음성에 있는 정신병동에 수용되었다. 아이를 면회 가니 철창 속에 환자복도 입지 않고 웅크리고 누워있던 아이가 쇠창살에 매달려 ‘고모 나 좀 나가게 해줘’ ‘엄마도 나쁘고 아빠도 나쁘고 시댁식구들도 다 나쁘다고 하면서 울며 하소연을 한다. ‘조금만 참고 말 잘 듣고 약 잘 먹어서 얼른 나으면 바로 퇴원 시켜 줄께’ 하고 아이를 달랬다.
인가와는 많이 떨어진 호젓한 산속에 작은 나라처럼 터를 잡고 있는 병원은 면회를 하려면 입구에서부터 통제를 받는다. 준비해간 먹을 것을 환자를 데리고 나와서 잘 조성된 조각공원내에서 자릴 잡고 먹이면 된다. 차츰 차도를 보이며 아이는 웃음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3개월쯤 지나서 퇴원을 했고 친정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런데 약을 복용하면서 그 부작용으로 아이는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하는데 그 정도가 심각한거다. 그런 병에 대한 특별한 상식이 없는 난 그 약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약을 먹지 말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약을 끊으면서 서서히 아이는 도로 원위치가 되어 가는 걸 모른 거다.
그 신경정신과약은 한번 먹게 되면 거의 평생을 복용해야 될 정도로 완치가 어려운 병이란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됐다.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느끼는 환청을 듣게 되며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고 한번 입은 옷이나 양말에 집착해서 벗으려고도 씻으려고도 하지 않고 거식증에 걸려 생으로 굶기도 하는 등 참으로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조카애가 굶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난 ‘배고프면 먹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는 산발을 하고 씻지 않아 냄새를 풀풀 풍기며 누워서 열흘을 넘게 굶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직접 본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죽겠다고 20일이 넘게 굶고 있는 아이를 다시 129 구급차에 실었다. 나와 무관했을 땐 청주 의료원에 정신병동이 있는 줄도 몰랐다. 시내에 있는 정신병동이라서 작은 공간 안에 여러 명이 함께 입원해 있는 병동의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면회 할 땐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간다. 치료가 시작되면서 독한 약물부작용이 또 나를 놀라게 했다. 어느 날 면회를 가니 아이가 몸을 떨기 시작한다. 오른손을 유난히 떠는데 수저를 잡지 못한다. 또 어느 날은 아이가 말을 잘 못하는 거다. 입을 실룩거리며 자기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양한 환자들 수많은 약들 어느 것이 그 환자와 적합한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수 없이 시행착오를 하면서 약을 선택하게 되고 독한 약물이 또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부작용을 환자는 견뎌내야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좀 차도가 있어서 퇴원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할 수 없는 결혼생활도 이혼으로 마무리를 하고 친정에서 정기적으로 통원치료 중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내가 못 본 사이 아이가 또 상태가 이상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엊그제 토요일 정기검진 날 이었다. 난 다시 입원시킬 각오를 했다. 살이 쪄서 잔뜩 부풀려 놓은 풍선처럼 부풀은 배는 만삭이나 다름없었다. 의사선생님이 입원해서 조절해 보자고 하신다. 그런데 난 욕심 아닌 욕심을 부려본다.
아이가 싫다고 하고 듣던 것보단 그래도 조금 나아보이는 아일 다시 정신병동에 입원시키긴 불쌍해서 한달만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리고 내일쯤에 전에 다니던 장애인 복지회관에 가서 사정을 해보려고 한다. 차츰 나아지면 일손 부족한 시골에서 품팔이라도 했으면 하고 바래본 내 욕심은 그저 허망한 물거품이 된 것 같다. 대부분 한번 입원하면 평생을 드나들면서 살아야 하는 게 정신병동이란다.
가엾고 불쌍한 녀석! 앞으로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더 울어야 할런지!
ㅡ2005년 6월 20일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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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난주 조카애를 데리고 복지회관을 다녀왔다. 그런데 거기서 난 또 절망을 했다. 3년만에 만난 장애우들, 복지회관식구들 모두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반갑게 맞아주는데...그들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지 모른다고 하는 조카애...
그날 담당복지사와 긴 상담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중~~지난번 병원에 입원했을때 치료담당복지사가 했던말~~의료원 병동에 입원해 있는 60명이 넘는 환자들과 치료목적으로 했던 프로그램중~"희망"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그 많은 환자중 희망이 없는 사람 손들라고 했더니 조카애와 또 한사람 딱 두명이 들었다는 얘길 하니...
ㅎㅎㅎㅎ 그 상담자 얘기~~그 얘긴 뒤집어~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도 되네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수 있다는것은 아직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거라나?) 하면서...복지회관 여러담당자들과 상의 후 조카애를 받아들여도 될지는 결정해 알려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결정된 연락은~! 아직은 거기서 일하기엔 무리라는 통보! 이제 난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댓글 너무나 가슴아픈 이야기 입니다.
마음 과 마음 이 교감할때 희망이 있을것 같아요.
힘드시겠지만 화이팅 해주세요.
여섯살이 되도록 혀가 굳어 벙어리인 타인을 말을틔워 희망을 준적이 있어요,.
조카니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희망을 가져보세요.
삶은 참 힘들다.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살아가기엔 똑 같이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간호하는 가족은 더 아프고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 힘내세요.
희망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