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치를 세워야 나라가 삽니다]
-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1990년대 후반 영국 대학 조교수일 때 필자의 연봉은 세전 2000만원을 조금 넘었다.
4인 가족이 겨우 먹고살 정도였다.
같은 나이 또래의 교사나 소방관과 비슷한 액수였다.
교수들의 불만은 정부를 향했다.
교수노조는 수업을 중지하고 데모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참여하는 교수는 극소수였다.
학교 후문에 몇 명의 교수가 엉거주춤 서서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는 정도였다.
필자는 한 영국인 교수에게 왜 데모에 동참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좋아서 택한 직업입니다.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치와 계산이 조화돼야 선진국입니다.
손익만 따지는 한국,인간의 가치가 사라진 후진국입니다.
환자들의 곁을 떠난 의사들의 파업, 저출산도 이에서 비롯되고,종교와 정부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국인은 어떻게 직업들을 선택할까요?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4%가
직업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월급과 안정성, 즉 평생 소득을 꼽았다.
조사 대상 47개국 중 한국보다 이 비중이 높은 나라는 에티오피아, 이집트, 루마니아 3개국에 불과했다.
조사가 행해졌던 2005~09년에 세 나라의 평균 소득은 약 3000달러 정도였지만 한국은 2만 달러를 넘었다.
그런데도 돈 대신 보람과 동료를 택한 한국인의 비중은 겨우16%에 불과했다.세계에서 꼴찌였다.
반면 스웨덴인의 76%는 보람과 동료를 직업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답했다.
심지어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 대만, 중국도 이 비중이 50%, 35%, 26%였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생계유지가 가능한 나라에서 한국인만큼 직업 선택에 돈을 중시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의 국력은 성장했지만 인간의 가치의 힘은 완전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경제개발 시대의 ‘잘살아 보세’를 더 발전된 가치로 대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잘살아 보세’는 ‘나와 내 가족만 잘살아 보세’로 퇴행해 버렸다.
성공의 기준이 돈으로 획일화 되다 보니 심각한 깔때기 현상이 생겼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 다수가 깔때기란 경쟁의 병목에서 쥐어짜이고 뒤틀리고 튕겨 나간다.
깔때기를 통과한 사람도 괴롭고 지치기는 매한가지다.
소득이 늘어도 행복하지 않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당연히 사회 갈등 수준도 높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모든 문제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집단으로 뭉쳐 기득권을 방어하려 애쓴다.
이 같은 고갈등·고비용 사회에서는 성장은 커녕 현상 유지도 버거워진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가치는 사라진다.
저출산도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예전에는 결혼과 출산은 사람의 가치였기 때문에 비용을 계산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선진국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높은 근본 이유도 결혼과 출산을 여전히 인간의 가치의 영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 증원과 전공의 파업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공의들이 의사 증원에 따라 미래 소득이 감소할 것을 우려하는 데 있다.
결국 환자를 치료한다는 숭고한 직업을 소득 창출의 도구로 물신화(物神化)시킨 까닭이다.
선진국에서는 계산을 따르는 합리성과 계산을 거부하는 가치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시키는 ‘합리성의 재앙’에 직면했다.
마음의 힘에서 한국은 아직도 후진국이다.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공동체의 가치를 민족에서 자유로 전환하려 한다.
자유는 인간과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자유는 너와 나를 묶어주지 못한다.
약자에 대한 공감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너와 나 사이의 연대 의식이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물질 중심 가치관은 이마저 해체해 왔다.
자녀 양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는 세계가치관 조사에서
한국은‘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택한 비중이 최하위인 나라 중 하나다.
정부부터 신뢰와 공감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칼의 정책’으로썬 통합의 가치를 만들기는 어렵다.
의대 증원을 한다니 너도나도 재수 3수가 아니라 N수로 의대쪽으로 몰린다고 하는데 지금도 의대는 평균 5수들이라고 한다.
이래서야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배출되겠는가?
그러니 의사가 수술을 기피하고 간호사나 의사들을 불러다 대리 수술을 하고 돌팔이 의사들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정부가 단기간에 정책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날카로운 공권력은 자발성과 호의에 기초한 시민간 연대를 약화한다.
비정상적인 의료체계의 짐을 가장 많이 져왔던 전공의의 호소도 귀담아듣고 심각하게 왜곡된 의료수가도 바로 잡아야 한다.
의사들간의 수입차이가 천차만별이다.
의료수가는 일종의 가격이다.
그런데 지금의 의료수가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매우 중요한 가격기능을 무시하고 있다.
주어진 예산총액을 전제로 의료행위 사이의 형평성만 따졌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희소성 항목을 신설하고 사회과학자를 참여켜 기피 의료분야와 지방 및 고난도 의료행위의 희소가치를 반영해야 한다.
종교는 역할을 다하고 있나?
종교는 가치관의 뿌리다.
그런데 종교의 가치관도 오늘날은 돈의 가치관으로 평가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라고 했다.
불교의 유마경에서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며 병자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유교의 인(仁)도 사람 사랑이 핵심임을 가르친다.
해방신학은 사랑을 가르치기 보다는 칼을, 피를 요구한다.
신앙은 영원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초월의 관점에서 인생을 봄으로써 돈과 차별되는 가치를 정련해 낸다.
의사 파업에서 생각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은 어디로 갔나.
이 시대의 불자는 누구인가.
유교의 덕목은 어디로 사라졌나.
우리 사회가 신앙인에게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