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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장인 르우엘
민 10:29-36
29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30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31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32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 10:29-36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끄시다] 모세가 자기 장인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가고 있는 길일세. 그러니 자네도 우리와 함께 가면 어떻겠나? 여호와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땅을 주시겠다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그 땅으로 가면 자네에게도 한몫을 떼어 주겠네.' 30) `나는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친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어요' 하고 호밥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31) 그러자 모세가 간청하였다. `그러지 말게나. 우리는 이 광야 어디에다 진을 쳐야할 지 잘 모르지만 자네는 진을 쳐야할 곳을 잘 알지 않는가? 여태껏 그렇게 해왔으니 제발 우리 길잡이가 되어 주게나 32) 자네가 우리와 동행을 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복을 함께 나누어 주겠네. 그러니 부디 같이 가주게나.' 33)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을 떠나 계약궤를 앞세우고 사흘쯤 걷다가 쉴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34) 이스라엘 백성이 한낮에 길을 갈 때에는 언제나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 위를 덮어 주었다. 35) 계약궤가 출발할 때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일어나소서, 여호와여. 주님의 원수들을 흩어 버리소서. 주님을 미워하는 것들이 주님을 보기만해도 혼비백산 도망치게 하소서.' 36) 또 계약궤가 머물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였다.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이스라엘 부대 부대마다 그 위에 머무르소서. 그 위에 복을 내리소서.'
모세가 광야 지리를 잘 아는 그의 처남 호밥에게 안내를 부탁합니다.
미디안 사람 르우엘(29-32) 르우엘은 모세의 장인으로 미디안 사람으로 족장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는 그를 겐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르우엘은 출애굽기에서는 이드로라고 불렀으며, 사사기 4장 11절에서는 호밥이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아들인 호밥과 부르는 과정에서 동일시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르우엘이었던 모세의 장인이 제사장이 되면서 이드로라는 이름을 새로이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와 같이 사사기 4장 11절에서 나오는 모세의 장인으로 표기된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로 모세와는 처남과 매부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호밥에게 함께 동행하자고 제안하면서 약속의 땅의 일부를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호밥은 광야 출신으로 광야에 대하여서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호밥이 함께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호밥은 모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삿 1:16ff).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스라엘 민족만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동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주어지며 인간의 동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을 받는 사람은 정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가며(33-36)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언약의 증표인 십계명이 쓰인 두 돌판이 보관되어있습니다. 앞에서 나와 있지 아니한 언약궤의 위치가 비로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시내 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언제나 이스라엘 여정의 선두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의 행진은 하나님의 구름과 언약궤가 가장 앞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로 성막과 성물과 열두 지파가 질서정연하게 나아가는 행진이었습니다.
적용: 인생 여정에 당신의 선두에 선 것은 무엇인가요(신 6:5; 엡 6:14)? 그리고 형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에 4:16).
당신은 사랑에 배반당한 경험이 있나요? 당신이 모든 것을 주며 사랑했는데, 당신의 사랑이 헌신짝같이 버림받은 고통이 있나요? 어떤 마음이었던가요? 가슴이 너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겠네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정신이 나가 방황하였겠지요. 분노도 생기고, 괜스레 화를 내기도 했겠지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겠네요. 말로 어떻게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왜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느냐고요?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함이랍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며 예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 설 교 >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민수기 10:29-32 / 박한응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하여 각가지 은혜와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내일이 우리나라의 최대 민속 명절인 추석(秋夕)입니다.
옛 말에 중추가절(仲秋佳節)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추석 명절이 가장 좋은 절기(節氣)라는 뜻입니다. 추석 명절은 우리나라의 민속 명절로서 참으로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먹을 것이 풍성하며 인심 또한 풍성한 계절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말도 있습니다.
추석 또는 명절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고향입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기를 쓰고 고향을 찾아갑니다. 지난해 명절에 어떤 사람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15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그만큼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도 추석에 고향을 찾아갈 사람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고향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란 참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향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탈출하여 시내 광야에 왔을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왔습니다.(출18:1-12) 그 후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노쇠한 상태로써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자기의 고향 미디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모세의 장인은 자기의 아들 호밥을 모세와 함께 있도록 하여 모세에게 힘이 되어 주도록 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처남이 되는 호밥은 광야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를 좋게 여겨 약속하기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모세의 처남 호밥은 모세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모세가 아무리 좋은 조건의 약속을 하여도 막무가내로 말하기를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고 합니다. 모세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본문 31-32절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라고 하였지만 호밥은 결국 자기의 친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 기록된 말씀대로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는 말씀을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고향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이 가려고 합니까?
1. 고향에 대한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고향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향이 있습니다. 다만 그 고향에 대한 이미지(Image)와 그 느낌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고향을 동경하고 또 고향에 대한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학가들이 고향을 예찬하였고 또 많은 가수들이 고향을 노래하였습니다.
(2) 우리들에게는 여러 곳의 고향이 있습니다.
① 나를 낳아서 길러 주신 육신의 고향인 어머니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모두 다 용서하시고 따뜻하게 품어 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② 마음의 고향은 내가 자라난 곳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고향이 화려하든 초라하든 자기가 어릴 때 자란 곳은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자란 고향을 그리워하곤 합니다. 강원도 남대천에서 부화된 연어들은 태평양 드넓은 바다에서 몇 년이고 살다가 죽을 때는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고향 남대천을 찾아와 산란을 하고 죽습니다.
③ 믿음의 고향은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의 고향은 바로 교회입니다.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예배당의 산소통 두드리는 종소리만 들어도 달려가던 언덕 위의 그 예배당이 바로 믿음의 고향입니다. 그 믿음의 고향 교회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④ 영혼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히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고향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그곳을 사모해야 합니다.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할렐루야!!
다 같이 찬송을 한 절 부르겠습니다.
<찬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2. 고향이란 무엇인가?
(1) 고향은 마치 모태와 같은 곳입니다.
고향은 마치 어머니의 모태와도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사모하고 그리워합니다. 모든 동물들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굴에 와서 죽는다는 말도 있고 비둘기는 수백 km를 가서 풀어놓아도 자기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철새들은 수천 km를 날아서 정확히 자기가 살던 곳을 찾아갑니다. 또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돗개가 팔려 갔다가 700리 길을 달려서 옛 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고향을 찾을 줄 모른다면야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향은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고향이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고향의 환경과 전통이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3) 고향은 타향에 간 사람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데는 몇 가지 필수적인 환경과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① 우선은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자식을 낳아서 지극한 정성과 극진한 사랑으로 사람 되게 길러 내는 분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② 다음으로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교육을 시켜서 건전한 국민으로 성장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국가요 나라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있고 나라가 있다고 해서 모두는 아닙니다.
③ 또 하나,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고향은 졸졸대며 흐르는 시냇물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뒷동산의 풀 한 포기, 그리고 팔베개하고 드러눕던 양지바른 언덕과, 친구들과 뛰놀던 보리밭, 그리고 정다운 이웃 사람들, 이런 것들이 한 인격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자기를 성숙시켜 준 나라에는 충성을 하면서, 자기를 만들어 준 고향에 대해서는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충효 사상(忠孝思想)만을 배워 왔지 고향을 위한 덕목(德目)을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멀리 두고 생각만 하는 고향이 아닙니다. 향수(鄕愁)라는 향긋한 말만 껌 씹듯이 하는 것이 고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절 때마다 고향을 향해 민족이 대 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고향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고향에 대하여 보답해야 하고 이바지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떠나온 시원(始原)으로 돌아가 그것을 지켜 온 갸륵한 사람들과 새로 그 시원을 떠나는 젊은 세대들을 위하여 오랜 방랑에서 모은 지혜(智慧)와 재포(財布)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고향이 있으므로 마음 놓고 떠돌았던 사람들, 탯줄 같은 끈끈한 끈을 항상 고향에 매어 놓고, 마치 우주인들이 우주선 밖으로 나올 때 생명줄로 연결이 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다시 우주선 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그 끈을 당겨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위해 일해야 할 것입니다.
(4) 고향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 33장의 말씀을 보면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의 집으로 피난을 가서 살아 온지가 어언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이제 고향을 찾아옵니다. 야곱은 대 가족을 거느렸습니다. 재산의 상징인 수많은 오마 육축(五馬六畜)을 거느렸습니다. 한 말로 말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도록 형 에서는 여전히 동생 야곱에 대한 증오가 변함이 없고 어떻게든지 복수하겠다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워 기도함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에 새 힘을 얻고 형을 만났을 때에,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던 에서도 어느 순간에 그의 증오심이 사랑의 마음으로 변하였습니다. 불타던 복수심은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20년 전의 해묵은 미움과 증오에 대하여 서로 용서하고 화해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고향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3. 성경에는 고향을 찾아간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을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조상 야곱이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7년 대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온지 43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이제는 모세를 영도자로 하여 애굽에 온지 430년 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고향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2)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창30:25-26)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 나오미와 룻이 고향 베들레헴을 찾아갔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기근을 피하여 그의 남편 엘리멜렉과 아들 말룐과 기룐과 함께 이웃나라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자부를 얻고 잘 살아보려고 하였으나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온역으로 죽고 뒤를 이어서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할 수 없어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을 찾아갔습니다. 금의환향이 아니고 실패하고 망하여서 돌아온 나오미를 고향 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혼자만이 잘살아 보겠다고 모압으로 갔다가 망해서 거지가 되어 돌아왔다고 조롱이나 멸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동행한 룻은 날마다 들에 나가서 이삭을 주어다가 시모 공경을 극진히 하여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
(4)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고향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를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지 어언 70년이 지났습니다. 7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그들은 다시 고향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시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눅15:11절 이하의 말씀에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허랑 방탕하여 다 없이 한 후에 그 나라에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어 죽기 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과거의 모든 허물과 죄는 모두 불문에 붙이고 그 아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4. 오늘의 우리들은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1) 오늘의 성도가 찾아갈 고향은 어디입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결코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도 자신들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이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에 대하여는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은 세상이요(벧전2:11)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세상(약4:14)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영생의 세계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영생의 세계에 갈 준비를 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요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다 하늘나라의 고향을 찾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 공명, 영화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에 집착하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는 우리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상상도 못할 하늘나라의 축제가 있을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신실하신 약속을 믿고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2) 우리들에게는 더 좋은 고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계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도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에서는 3천만 명이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가용차로 가고, 어떤 사람은 고속버스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기차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비행기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찾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고향이 아닙니다. 자동차 타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닙니다.
<G. S> 순 례 자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나의 집은 저 하늘 저 너머 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 요 이 땅에 있을 맘 없도다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시네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 요 이 땅에 있을 맘 없도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빌3:20) 믿고 날마다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천성을 향하여 한 걸음씩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절대로 낙심하지도 말고, 쉬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우리의 영원한 고향, 우리 주님이 예비해 주신 천국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시장 거리에서는 명절 준비를 하느라고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고 싶어도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북에다 고향을 둔 실향민입니다. 그래도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찾아뵈올 수 있는 부모님이 게신 분도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살아생전에 극진한 효성으로 효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명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들뜨고 흥청망청 할 때 우리들의 생활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설에서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하게 이 명절을 지내는 사람도 있고 또한 소년 소녀 가장들도 기억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나눔을 함께 할 수 있는 이 명절이 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명절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 말씀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절 말씀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서로 복을 나눠 주라
민수기 10:29-32 / 이한규 목사
< 동행을 잘 선택하라 >
모세는 장인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가나안 땅으로의 동행을 제안했다(29절). 르우엘의 다른 이름은 이드로다(출 3:1; 4:18; 18:1). 르우엘은 본명이고 이드로는 제사장명으로 추정된다. 호밥이 사사기 4장 11절에는 모세의 장인으로 표현되었지만 본문에는 르우엘의 아들로 표현되었기에 모세의 처남인 셈이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는가? 장인이란 말의 히브리어 호텐은 처가 식구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이기에 장인의 의미도 있고 처남의 의미도 있다. 실제로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 아닌 모세의 처남이다.
모세가 호밥에게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가나안 땅으로 동행하면 선대하겠다고 하면서 자신들과 동행하면 복이 있음을 나타내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란 믿음의 말을 해 주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은 호밥의 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누릴 복을 호밥도 함께 받기 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모세의 제안은 이런 말과 같다. “우리 교회에 등록해 같이 신앙생활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의 선택이고 복된 인생은 더욱 선택이다. 철학은 경탄에서 시작되고 진리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은혜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잘 선택해서 복된 사람이나 교회와 동행하고 동역하는 것은 앞날을 복되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선택하는가도 중요하다. 참된 은혜는 과감하게 하나님을 선택하고 좋은 동행을 선택할 때 주어진다. 더 나아가 내면에 잠재한 ‘좋은 나’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안에는 피를 흘리려는 ‘잔인한 나’도 있고 말씀대로 살려는 ‘정결한 나’도 있다. 어떤 나와 동행하기를 선택해서 어떤 나를 내면에서 길러내느냐에 따라 복의 수준이 크게 달라진다.
< 서로 복을 나눠 주라 >
모세의 제안에 호밥은 자신의 고향과 친족에게로 가겠다고 했다(30절). 그때 모세가 호밥의 동행을 재차 권했는데 그렇게 권한 핵심 이유는 신 광야의 지리에 익숙한 호밥이 어디서 진을 쳐야 하고 어디로 행군해야 할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31절). 그처럼 하나님이 광야에서 인도하실 것이란 확신이 있을지라도 자신도 최선을 다해 길을 찾거나 뚫으려고 하라. 하나님께 다 맡긴다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는 호밥에게 자신들과 동행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똑같이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32절). 결국 호밥은 모세와 동행했다. 그때 모세는 호밥에게 앞으로 얻을 복을 나눠주고 싶어 함께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누군가와 나누며 그를 기쁘게 하면서 나의 복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확산시키는 것이 최대 행복이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며 살라.
한 아이가 벌에 쏘여 울자 전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자 곧 아픔이 없어졌어도 계속 아픈 척 하며 가짜로 울었다. 나중에 그가 그때를 떠올리며 두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벌에 쏘인 나쁜 일이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좋은 일을 가져다준 것처럼 나쁜 일이 있으면 곧 좋은 일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자고 결심했다.
둘째, 어릴 때는 가짜 눈물로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른이 되면 진짜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자고 결심했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떠났다.
혼자 만족하며 사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함께 공감하며 살려고 하라. 더 나아가 나눔에 힘쓰고 특히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 힘쓰라. 힘들게 사는 사람과 한과 상처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하나님 대신 나의 삶으로 보여 주라. 내가 나누면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표식이 누군가의 한과 상처와 슬픔을 씻어 준다. 그처럼 남에게 기쁨을 나눠 주며 그의 슬픔을 빼앗아갈 때 내게 더욱 복된 일이 주어진다.
언약궤와 함께 살아가는 민족
민 10:33-36 / 박성복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언약궤와 함께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여러분, 2013년도는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약궤를 때로는 ‘증거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법궤’라고도 말합니다만 다 똑같습니다. 언약궤는 말씀 언(言)자에다 약속 약(約)자를 쓰고, 함 궤(櫃)를 쓰는데 ‘말씀으로 약속을 한 궤짝’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돌 판 두 개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증거궤도 증명할 증(證)자를 쓰고, 의거 할 거(據)를 쓰고, 함 궤(櫃)를 썼는데 원어는 똑 같습니다. 즉 이 말씀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법궤에 돌 판 두개가 들어가 있는데 그 돌비에 기록된대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다라고 해서 ‘언약궤(言約櫃)’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또한 틀림없이 우리에게 증명을 해 준다고 해서 ‘증거궤(證據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와 하나님과 법으로 세워졌다고 했기 때문에 ‘법궤(法櫃)’입니다. 모두가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에 어떻게 살았던지 그 당시에는 이런 증거궤나 법궤가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이 언약궤를 받았는데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겐 큰 보화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와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오면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도 없었고 마실 물도 없고 전토도 없었으며 사냥 거리도 없었고 장사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했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게 했으며 먹을 수 있는 만나도 아침에 나가기만 하면 가져올수 있게 했고, 반석을 쳐서 마실 물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이는 법궤가 움직이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여 가는 곳마다, 말씀이 이끌어 가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로 구속받고 바로왕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세의 인도로 무사히 애굽 땅을 벗어나서 시내산 아래에 와서 여장을 풀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불러 올려서 직접 돌비에 십계명을 새겨주시고 각종 율법과 제사의 법을 제시해 주시면서 성막도 짓게 했는데, 다시 말해서 이동 성전까지 짓게 한 것이 시내산 아래서입니다. 그래서 그 산을 말하기를 ‘성산’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노릇하며 살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제사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도 그들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선조에게서 구전으로 내려왔던 제사나 그 약속의 말씀을 계속 가지고 내려왔을 뿐이지 어떠한 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와서 확실하게 문서로 법을 기록해 놓고 그 법대로 살아가게 하면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의 법을 주신 줄로 믿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와 함께 살아가면서 복을 받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면서 복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 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도 받았고 민법과 모든 행정 제반에 대한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년여 이상을 있다가 이 산을 떠나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민수기1장에 보면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12지파의 모든 인구조사를 다 마칩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앞으로 약 38년 동안 행군을 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질서와 모든 지도자에게 통솔력을 바로 하달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또한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장인 민수기10장 11절에 보면 대장정의 길을 떠하는 때를 출애굽한지 2년 2월 20일이라고 하는 날짜를 말해놨는데 여기의 2년이 무슨 연대냐면 애굽 연대가 아니고 고향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허락한 연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향 가는 우리에게도 확실한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2월 20일은 태양력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과 석 달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자, 그들이 이제 그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을 떠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대장정의 길을 떠날 때를 보면 이날까지는 그런 질서와 그런 방법을 하나하나 일러주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시내산을 떠나갈 때는 제사장들이 그런 것을 잘 듣고 따라야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신년 2013년 1월 6일인데 이날에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모두 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 온 줄로 압니다. 제가 1월 1일 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계사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뱀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남극과 북극을 빼고 온대 지방과 아열대 지방, 한대 지방등 이 지구땅에 서식하는 뱀의 종류가 약2,700종이라 그랬는데요 파충류를 연구하는 심재한이란 박사가 중앙일보에 게재하기를 약3,400종이라고 발표를 했더라고요. 여러분은 안 놀라네요. 저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뱀의 종류가 2,700종류라는 것도 많다고 그랬는데 그분이 3,400종이라고 발표했더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뱀의 종류가 많은가? 하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올해가 뱀의 해라고 해서 뱀에 대한 애기를 하면 보통 너무 징그럽고 뱀을 보면 다 놀래고 합니다만 뱀이 쥐를 잡아먹고 해충도 잡아먹으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죠? 거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 시간이 많이 갈 것 같아서 약하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이미 1월 1일 예배에 그 뱀의 지혜를 가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과 떠난 후는 그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왜냐면 그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는 이런 법도 없었고 이런 제단도 없었으며 제사법도 없었는데 이제 떠날 때부터는 완전히 체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장 1절부터보면 그들이 출발할 때 제사장이 먼저 은 나팔을 불게 됩니다. 여러분, 이 나팔을 어떨 때 붑니까? 나팔이라는 것은 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8장 보면 나팔이 나오는데 거기엔 전부 다 나팔이 일곱 개가 나옵니다. 첫째 나팔, 둘째 나팔 등 일곱 나팔이 나오는데 모든 나팔은 누가 들으라고 부느냐면 백성이 들으라고 부는 겁니다. 성경에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부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양각나팔은 나팔이 양쪽으로 불어 제치는 것이 양각나팔인 줄 알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각나팔은 양의 뿔로 부는 나팔이 양각 나팔인데 그걸 고등학교 때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는 양의 뿔을 가지고 부는 나팔이 아니고 본문에 나오는 나팔은 은 나팔입니다. 은을 두들겨 쳐서 나팔을 만들어서 ‘뒤-’하고 나팔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전쟁 나팔인지 이동 나팔인지 알 수 있도록 붑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렇습니다. 이제 제단이 하나 생겼고 그 제단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가 멈추면 바로 열두 지파가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뺑 둘러 진을 칩니다. 왜냐면 이는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법궤 중심으로 해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법궤를 중심하고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열두 지파가 깃발을 꽂고 진을 칩니다.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와 이제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사장이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나팔을 불고 싶어도 못 붑니다. 이른 아침에 동쪽에서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제단 앞에 피어오르면 제사장은 지체하지 않고 나팔을 불어야 됩니다. 이동 나팔을 불면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지파별로 모여서 이동할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항상 어디에 귀를 기울여야 되냐면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거기에 아주 신경을 민감하게 써야 됩니다. 그래야 백성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어디에 신경을 써야 되냐면 구름이 피어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온 신경을 거기에 써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 위에 어떤 징조가 있나 늘 바라봐야 되고 백성들은 항상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하라는 나팔 소리가 나는지 신경을 쓰며 항상 준비해야 됩니다. 이제 달라졌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2013년도부터는 하나님의 제단을 중심하고 말씀을 중심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경고의 나팔이 불어지는지 우리는 늘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이제는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거나 예배를 드리다가 말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공 예배는 빠지지 말아야 됩니다. 이제 달라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래서 제사장은 항상 제단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갑자기 구름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몇 시에 나팔을 분다’고 미리 알리는 것도 없습니다. 갑자기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이쿠, 이제 이동해야 되는구나”하면서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때까지 백성들은 시내산 아래서 펑퍼짐하게 퍼져 있었고, 모세만 엄청나게 바빴습니다만 이제는 모세와 아론과 제사장들,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됩니까? 이 광야에서 다른 광야로 옮기게 됩니다. 여러분, 이 광야에서 다른 광야로 옮기면서 백성들이 피곤에 지칩니다. 은 나팔을 불면 머물러있던 광야에서 새로운 미지의 광야로 이동해야 됩니다. 그 이동할 때는 애들 손을 잡고 노인양반 모시고 짐을 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법궤를 매고, 또 제사장의 자녀들은 그 성물을 매고 고달픈 광야 길을 또 다시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도 처음부터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농촌에 태어났든 어촌에 태어났든 부모 따라 태어나서 살다가 이 동네 저 동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많이 이동을 하면서 오늘 서울 동네까지 온 사람도 있고, 타동네로 이동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르면 이동할 채비를 꾸리고, 그 구름이 제단 위, 이스라엘 민족 위에 쫙 덮으면 맨 앞에 법궤가 앞장서서 이동을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그 법궤를 따라 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는 말씀을 따라가야 됩니다. 말씀을 앞세우고 가면서 말씀이 가는 곳에 어려워도 괴로워도 욕먹어도 편안해도 그 길을 따라가야 되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내가 함께 멈춰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두지파가 진을 칠 때에는 전부 다 제단을 바라보고 진을 쳤습니다. 그것이 특색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바라보고 살면서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새벽에 만나를 가져오는 일을 하고 또 광야에서 이동을 하면서 모든 행렬이 진행을 하면 따라갑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지내온 일들을 돌아봐도 그렇고 앞으로 38년 동안 가야될 길들은 매우 험난합니다. 모래사막 지대를 넘어야 하고 언덕을 넘고 계곡을 지나고 해야 하는데 거기엔 만들어진 길도 없습니다. 거기는 아스팔트나 고속도로도 아닙니다. 오직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빛이 인도하는 대로, 밤에는 인도하는 불이 추위를 막아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훤히 비춰줍니다. 그러니 이방사람이 볼 때는 희한한 민족으로 보이고 괴상망측한 민족으로 보일겁니다. 또한 낮에는 그 작열한 태양 볕 아래서 일사병이 들지 않도록 구름이 그 민족들 위에 덮개로 덮어주고, 밤에는 춥지 않도록 불로 따뜻하게 해주면서 길을 인도해줍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은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가고 있는데, 이방사람들이 볼 때는 ‘무슨 민족이 저런 민족이 다 있나?’라고 할 겁니다. 밤에는 붉은 불기둥 속에서 그들이 진행하고 낮에는 구름이 턱하고 덮어주니 진행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고 나면 이른 새벽에 이방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만나를 주워다 먹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면서 영원히 죽지않으리라고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안 죽는다는 것은 영과 육이 안 죽는다는 소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는데, 이것이 법궤역사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들어도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엘리베이터 타고 교회에 올라 오는데 ‘목사님, 최진실 남편이 또 자살했대요’라고 하더라고요. 뭐 자살도 유행인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돈이 없습니까? 뭐가 없습니까? 여러분, 이제는 돈 가지고도 못 살고요, 사랑 가지고도 못 살고 인물 가지고도 못 살며 기술 가지고도 못 삽니다. 이제 말씀의 법궤를 가지고 사는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지식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이제 되는 길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법궤밖에 없어요. 여러분, “2013년도에 이 말씀의 법궤가 가는 곳에 나를 인도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본문에 보니까 이 법궤가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법궤가 그들의 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2013년도에 여러분이 머물러야 할 곳을 말씀과 함께 찾아주시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 땅은 메마른 광야입니다. 이 세상은 고달픈 나그네 길입니다. 여러분 동감하시죠? 실감하시죠? 나그네 길이기에 얼마나 고달픕니까? 얼마나 메마른 땅입니까? 인정머리는 하나도 없는데가 이땅 아닙니까? 여러분, 제가 신문에 보니까 지금 45%가 독신주의자입니다. 그 독신 45%속에 독신남, 독신녀도 있고, 개인뿐 아니라 가정도 그렇게 되어 버렸답니다. 안 그러면 부부끼리 사는 가정, 부부도 아들 딸 시집 다 보내고 부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식도 안 낳고 사는 부부랍니다. 그 다음에 모자간에 사는 가정, 부자간에 사는 가정, 형제간에 사는 가정, 자매끼리 사는 가정이 45%랍니다. 그래서 나라가 지금 골병든답니다. 앞으로 20년이 되면 그 프로가 70%랍니다. 이것은 제가 한 소리가 아니고 신문에 발표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요? 삼포가 있습니다. 여기의 포는 ‘던질 포(抛)’자를 썼어요. 그래서 삼포(三抛)가 뭐냐면 먼저 결혼을 포기한다고 선언합니다. 아주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한답니다. 그 다음에 자식 낳는 것을 포기하고, 세 번째는 집 사는 것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 집값이 또 떨어진답니다. 이러면 모든 은행이 부동산 70%, 80% 다 잡아서 돈을 줬기 때문에 잘못하면 내려앉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이 세상이 변하고 있는지 옛날에 없던 소리 아닙니까? 하도 옛날에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소리할 때가 얼마 전 아닙니까? 이제는 그런 소리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도 새끼 둘 낳으면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자식 안 낳는 사람은 역적이라고 합니다. 시대 상황이 이렇게 됐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주님 오실 징조입니다. 이제 인종 씨를 마무리 하는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제 말을 믿어보시고 말씀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은 장막을 많이 옮긴줄로 압니다. 우리 사위도 ‘이제 이사를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아브라함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이사를 하다보면 돈도 들어가고 몸도 많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따라 늘 갑니다. 법궤를 멘 자가 앞서가면 그 뒤를 쭉 따라서 갑니다. 그래서 쉴만한 장소가 나오면 법궤가 딱 멈춥니다. 그러면 지파별로 깃발을 꽂고 성막과 약 912미터정도 떨어져서 12지파가 진을 칩니다. 거기에 레위 지파는 진을 안 칩니다. 왜냐면 제단 문제를 돌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을 치는데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뒷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에브라임이 없고 요셉이 나옵니다만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깁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얼마나 자식에게 복을 주도록 했는지 거기에 요셉 자식들의 두 지파가 나옵니다. 여러분, 아비들이여, 이런 것 좀 자식들에게 심어 주십시요. 지금 이 때가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 이제 주님 나라에 간다고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이제는 희생해야 됩니다. 노력을 해야 되고 애써야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12지파가 진을 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약300만 인구가 진을 치는데 그곳이 호남평야나 김해평야와 같은 평야가 아닙니다. 때론 언덕배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비탈길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지파는 고생이 되는 곳에 진을 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다음번엔 그래도 쉬었다가 갔으면 좋을만한 장소가 걸리기도 할 겁니다. 왜냐면 여러분, 옮길 때마다 똑같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고, 아주 짜증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럼 그것이 뭐냐면 나그네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이 나그네 길입니다. ‘아이고, 금년 같은 해는 지긋지긋하니까 새해가 빨리 왔으면 좋겠네!’라고 했지만 또 새해가 왔어도 또 똑같죠. 이것이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런 어려움은 소망이 있는 어려움입니다. 애굽에서의 어려움은 소망이 하나도 없지만 광야에서는 그래도 모세의 인도를 받았지요? 만나 내려 주지요? 반석의 오염되지 않은 생수를 주지요? 낮에는 시원한 에어컨(?) 틀어주지요? 밤에는 뜨끈뜨끈한 히터(?) 틀어주지요? 그래서 고생되더라도 바로의 고난 밑에서의 애굽 땅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아도 영이 병들면 자살합니다. 저는 그 유명한 젊은이가 왜 죽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그것도 유행입니다. 집안에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은 그 자식도 문제 일으키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은혜 끼치는 사람은 자식에게도 그 은혜가 넘어갑니다. 자살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한 가문에서 몇대를 내려가서 자살해도 가문에 큰 충격인데 그 집안이 셋이나 자살을 했으니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 자식은 뭐 하려고 낳았는지 남아있는 자식들이 딱하게 됐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것이 유전이 되기 바랍니다. 2012년까지 나쁜 것은 막아버리고, 2013년부터는 좋은 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쭉쭉 내려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은혜가 내려가야 됩니다.
본문에 법궤를 따라가는 백성들이 나오는데 오늘 우리도 말씀의 법궤를 따라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가 이제 백성이 쉴만한 곳에 멈추면 모든 백성이 멈추고 법궤가 있는 이동 성전을 중심해서 진을 치고 쉽니다. 여러분, 민수기를 잘 배워보십시오. 놀라운 은혜가 될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진을 치면서 성전을 바라봅니다. 왜 성전을 바라봅니까? 그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중심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법궤, 언약의 말씀은 오늘 이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백성을 언약궤가 인도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35절에 보면 지도자 모세가 기도를 하는데 ‘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법궤가 가는 곳에는 대적을 완전히 멸해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 대적들이 아주 맥을 못 추게 짓밟아 버리고 또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여기 도망간다는 말은 ‘만날 수가 없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되지만은 전쟁의 날에 원수를 물리치는 역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어버릴 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도록 해달라고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은혜시대 때는 말씀 없이 기도해도 충분했습니다. 이적기사도 나타나고 응답도 옵니다. 그러나 이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언약궤를 가지고 기도할 때에 응답이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꼭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향하여 갈 때에 쉴만한 곳에 법궤가 멈췄는데, 오늘 우리도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그 말씀이 멈추면 우리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에 은혜를 받게 하시고 축복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향가는 백성들은 반드시 제단을 중심으로 진을 쳤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먼곳에 또한 만나 내릴 곳을 예정하시고 내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러분, 40년 동안 만나가 내리면 이방인들이 와서 맛보기라도 했을만 한데 그런 것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주지를 않았습니다. 오늘날 영생의 말씀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지를 않습니다. 고향가야 될 백성들에게만 말씀의 만나를 주십니다. 세상에 안 믿는 저 이방인들이 만나를 주워 먹은 역사가 없었습니다. 절대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만나도 고향 갈 자들에게만 줬다면,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오늘 그 나라에 갈 자들에게만 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준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영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번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고,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좋죠?
그리고 이제 30절에 보면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이제 원수 대적들은 도망가게 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데 여기 ‘천만인’이 나오는데 이 말은 ‘수많은 택한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법궤가 머물러 있는 곳에 이 백성이 멈춰있으니까 떠나지 마시옵소서. 내가 멈추는 이곳에 하나님의 신이여 떠나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법궤를 앞세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한 인도를 받았고 법궤가 머물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편하게 쉬게 되었으며 법궤가 원수에게 갈 때에 원수가 혼비백산하여 물러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됩니까? 이 법궤가 넘실거리는 요단강물을 밟을 때에는 요단강물이 쌍벽을 이루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홍해는 모세가 든 지팡이로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는데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를 받은 자들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 중 20세 이상이 다 죽어 버렸을 때에 제2차 세례가 요단을 가르고 또한 세례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멘 제자장들이 물을 밟을 때에 요단강물이 쫙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말씀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법궤가 여리고성을 돌 때에도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일곱번 도는 날 아침에 무너뜨렸는데 그것은 법궤 역사가 그렇게 위력이 강하다는 겁니다. 이는 말씀역사가 그렇게 위력이 강하다는 것을 저와 여러분이 믿어야 됩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했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언약궤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고, 반드시 주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쉴 곳
민 10:33-35 / 고신일 목사
할렐루야!
놀이동산 가보셨는지요?
아이들은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사람 많은 게 불편합니다.
오래 전, 용인에 있는 한 놀이동산에 하루 종일 단 2명의 손님만 입장했던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43년 전인 1977년 1월 20일, 그날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갔고
폭설이 내린 날, 한 노부부가 놀이동산을 방문했답니다.
놀이동산에 가보고 싶었던 노부부는 시골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올라왔다가
또 언제 오겠나 하는 생각에 눈이 와도, 추위에도
놀이동산에 입장하여 그날 놀이동산을 찾은 2명의 입장객이 되었습니다.
그 날, 눈 때문에 몇몇 놀이기구는 운행을 못했지만
노부부는 놀이동산 전체를 전세 낸 것처럼 즐겼다고 합니다.
<2013. 8. 19. 경향신문 17면 ‘에버랜드 개장 37년 만에 입장객 2억명 돌파’ 기사 및
2016. 4. 15. 헤럴드 경제 20면 ‘40살 에버랜드… 자연농원서 세계 10大 종합리조트로 우뚝’ 기사 참조. >
추운 날씨가 이어집니다.
춥다고 / 바쁘다고 / 귀찮다고 찾아뵈어야 하고, 만나뵈어야 할 분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어떤 날, 어떤 상황이라 해도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게 해서는 안 됩니다.
추위에도 한 결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말씀을 앞에 두고
언제나 당당하게 믿음을 지키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본문 3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 (민 10:33)
‘여호와의 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머물렀던 ‘시내산’을 가리킵니다.
< 필립 붓드 저, 『WBC 성경주석 5 : 민수기』(서울 : 솔로몬, 2001), pp.214~215. 참조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산,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이동할 때 첫 삼일 동안 이동 행렬에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민 10:33~34)
언약궤 백성들 앞에서 갔습니다.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만들었던 것으로,
그 안에는
-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신 10:1 이하)
-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
- 아론의 싹 난 지팡이 (히 9:4~5) 가 들어있었습니다.
< 『비전성경사전』 (서울 : 두란노, 2011). p.899. 참조. >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임재>는 일반용어가 아닙니다.
기독교 용어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함께 하시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길 인도하셨음을 뜻합니다.
<목회와신학 편집부, 『민수기 :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 두란노아카데미, 2009),
pp.241~242. 참조. >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쉴 곳을 찾아 머물면 뒤따르던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쉬었습니다.
‘그 넓은 광야에서 특별히 좋은 곳도 없는 돌짝밭/불모지/사막 … 황량한 곳에서
아무데서나 쉬면되지 꼭 쉴 곳을 찾아서 쉬어야 하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쉴 때 …
그리고 쉰 후에 다시 언약궤를 먼저 떠나보낼 때 …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먼저, 궤를 진영에서 떠나보낼 때, 출발할 때입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민 10:35)
궤가 쉴 때입니다.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 10:36)
궤를 떠나보내면서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흩어주시기를 구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도망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궤와 함께 백성들이 쉴 때는 우리 가운데로 돌아와서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어딘가에 있을 적을 염려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곳 …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앞에서 인도하신 곳 …
하나님이 쉴 만한 곳이라고 찾아주신 곳에서 쉬었던 것입니다.
<목회와신학 편집부,『민수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서울 : 두란노아카데미, 2009), pp.242. >
여러분은 쉬고 싶을 때, 쉬어야 할 때 어디서 어떻게 쉬시는지요?
요즘 생활 방식이 다양해지다 보니 일하는 방식, 직업의 양상도 가지각색으로 나타납니다.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던 직업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직업도 있고,
예전에 없었지만 요즘에 새로 생긴 직업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험과 지식으로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이 직업을 택하라’고 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직업, 직장 중에 앞으로 없어질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점점 우리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택배, 음식배달, 퀵서비스, 대리운전 등 여러 곳을 이동하며 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가리켜‘이동노동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2018년 6월 26일 국민일보 13면 ‘카페 유랑 방송사 프리랜서들, 이젠 쉴 둥지 생겼어요.’ 기사참조 >
요즘은 인터넷, 휴대전화로 물건을 주문하면 당일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두‘이동노동’하는 분들의 수고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실이 없이 일하는 분들은 마땅히 ‘쉴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휴식이 필요할 때, 어디서 쉬시는지요?
잠시라도 눈 붙일 곳이 있다면 … 추위와 더위를 피할 곳이 있다면 … 감사해야 합니다.
쉴 곳 없이 일하는 분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가 되고 건강이 허락되고, 형편이 허락될 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쉴 곳 없이 앞만 보고 계속 달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운전자의 졸음으로 인한 사고가
음주나 약물로 인해 일어나는 교통사고들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고속도로 곳곳에 ‘졸음 쉼터’가 있습니다.
쉴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안전하게 쉬고 가라는 것이지요.
<2019년 7월 10일 한국일보 29면 ‘이정모 칼럼 : 음주운전보다 무서운 졸음운전’ 기사 참조. >
경제 분야의 투자 전략 중에는 ‘곡괭이와 삽’이라는 전략이 있습니다.
19세기(180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발견되면서
주로 동부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 돈 벌기 위해 서부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돈을 번 사람들은 금 캐러 갔던 사람들이 아니라 따로 있었습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1829~1902)라는 사람은 금 캐러 가는 사람들에게
천막 만들던 두꺼운 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일 할 때 잘 찢어지지 않는 그 바지는 엄청나게 팔렸는데
그것이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Levi's)>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또 릴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1824~1893)는
금 캐러 가는 사람들에게 삽, 곡괭이 등 채굴 장비를 팔아 큰 부자가 되어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피터 린치, 존 로스차일드 저,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서울 : 국일증권 경제연구소,
2009), p.27. 참조. >
꼭 금을 캐야 금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금만 찾을 필요 없습니다.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쉬면서 여유롭게 깊이 / 넓게 생각하며 일해야 합니다.
사람은 앞만 보고 계속 갈 수는 없습니다. 멈추고 쉴 때도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도 ‘쉴 곳’이 필요합니다.
앞만 보고 가는 신앙생활 … 자기 목적을 향해서만 앞으로 가는 신앙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만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원하심은 없어지고
자기가 세운 목표를 이루려는 내 생각, 내 고집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 장로님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새벽기도에 제일 먼저 나와서 늦게까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쓰고, 심야기도회에도 늦게까지 기도하니
관리실에서 그분 때문에 늦게 간다고 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신앙의 기준이 자기 판단, 자기 생각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없어서 골칫거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은 좋은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시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광야에서 지내는 게 좋았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에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쉼 까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무는 곳에서 쉬었습니다.
더 가고 싶지만, 언약궤가 멈추면 멈췄습니다.
움직일 때도 / 쉴 때도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말을 보내든, 연휴를 보내든, 휴가를 보내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쉼은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일할 수 있도록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좋은 휴대전화도 몇 날 며칠 계속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수시로 전원에 연결해 충전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쉼이 필요하다면서 무엇이든 하던 일을 다 멈추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은 쉬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쉼을 핑계로 여기 저기 발을 끊습니다. 교회도 / 예배도 끊어버립니다.
신앙생활마저 휴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끊어버립니다.
그것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전화 배터리 아낀다며 전화 꺼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6개월, 1년 정도 휴대폰을 꺼두면 어떻게 됩니까?
사용하지는 않았어도 자동으로 방전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켜지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관계가 끊어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쉰다고 영적으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의미 없이 오래 쉬기만 하면, 충전되기는커녕 어느 순간 완전히 방전되어 믿음까지 잃고 맙니다.
쉬면서도 새 힘 얻으려면 힘을 주시는 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 40:31)
쉼과 신앙 … 쉼과 하나님은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서 쉬어야 ‘충전’되고
하나님 뜻 안에 있어야 온전한 쉼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우리가 살다 보면 피곤하고 지칩니다. 더 이상 열매 맺을 수 없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 맺을 힘을 회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지인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의 관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 삼일 길을 걷는 동안
언약궤는 삼일 내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날 차비를 할 때
가장 먼저 출발해야 했던 사람들은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가셨습니다.
앞에 가시고,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앞에서 인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명절을 보내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저런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생기는 게 인생이라면
그 걱정들까지 앞에 가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우리는 앞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으로 앞으로 행진해야 합니다.
운전하다 보면 도로에 ‘사고 많은 곳’이라는 <사고다발지역> 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사고 많이 나는 장소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사고가 특정한 장소에서만 많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통계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1년에 3만 명의 사람들이 집에서 사고로 죽는다고 합니다.
단순 부상 사고도 약 20%가 집에서 일어납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 안전한 삶을 살길 바란다면
아무 장소도 찾아가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방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 2013년 7월 21일 김장환의 큐티365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 참조.
(나침반 출판사 홈페이지 www.nabook.net에서 인용) >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자동차는 시동이 꺼진 채 주차장에 세워져있을 때가 사고 확률이 가장 낮습니다.
그러나 배는 정박해 있으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항해하라고 만들었습니다.
바람 불고 위험해도 바다에 나가야 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차도 주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도로를 달리라고 제작되었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아무 일 없이 세상에 살다가 오라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으면 지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힘이 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쉴 곳을 찾아주셨습니다.
쉬고 난 다음에는 다시 앞에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명절을 보내면서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반면 이 명절에도 일터를 지켜야 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합니다.
쉬는 동안도 하나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걱정거리 … 해결되지 않는 문제 …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앞에서 쉴 곳을 찾아주시는 하나님이 죄와 더러움과 걱정과 문제로부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살아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을 떠나 광야 길을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 전진 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 쉴 때도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의 뜻 안에서 쉬고 또 가고 / 또 쉬고 …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기도하고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안전한 행진을 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약궤와 함께 살아가는 민족
민 10:33-36 / 박성복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언약궤와 함께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여러분, 2013년도는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약궤를 때로는 ‘증거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법궤’라고도 말합니다만 다 똑같습니다. 언약궤는 말씀 언(言)자에다 약속 약(約)자를 쓰고, 함 궤(櫃)를 쓰는데 ‘말씀으로 약속을 한 궤짝’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돌 판 두 개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증거궤도 증명할 증(證)자를 쓰고, 의거 할 거(據)를 쓰고, 함 궤(櫃)를 썼는데 원어는 똑 같습니다. 즉 이 말씀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법궤에 돌 판 두개가 들어가 있는데 그 돌비에 기록된대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다라고 해서 ‘언약궤(言約櫃)’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또한 틀림없이 우리에게 증명을 해 준다고 해서 ‘증거궤(證據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와 하나님과 법으로 세워졌다고 했기 때문에 ‘법궤(法櫃)’입니다. 모두가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에 어떻게 살았던지 그 당시에는 이런 증거궤나 법궤가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이 언약궤를 받았는데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겐 큰 보화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와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오면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도 없었고 마실 물도 없고 전토도 없었으며 사냥 거리도 없었고 장사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했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게 했으며 먹을 수 있는 만나도 아침에 나가기만 하면 가져올수 있게 했고, 반석을 쳐서 마실 물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이는 법궤가 움직이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여 가는 곳마다, 말씀이 이끌어 가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로 구속받고 바로왕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세의 인도로 무사히 애굽 땅을 벗어나서 시내산 아래에 와서 여장을 풀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불러 올려서 직접 돌비에 십계명을 새겨주시고 각종 율법과 제사의 법을 제시해 주시면서 성막도 짓게 했는데, 다시 말해서 이동 성전까지 짓게 한 것이 시내산 아래서입니다. 그래서 그 산을 말하기를 ‘성산’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노릇하며 살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제사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도 그들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선조에게서 구전으로 내려왔던 제사나 그 약속의 말씀을 계속 가지고 내려왔을 뿐이지 어떠한 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와서 확실하게 문서로 법을 기록해 놓고 그 법대로 살아가게 하면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의 법을 주신 줄로 믿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와 함께 살아가면서 복을 받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면서 복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 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도 받았고 민법과 모든 행정 제반에 대한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년여 이상을 있다가 이 산을 떠나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민수기1장에 보면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12지파의 모든 인구조사를 다 마칩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앞으로 약 38년 동안 행군을 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질서와 모든 지도자에게 통솔력을 바로 하달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또한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장인 민수기10장 11절에 보면 대장정의 길을 떠하는 때를 출애굽한지 2년 2월 20일이라고 하는 날짜를 말해놨는데 여기의 2년이 무슨 연대냐면 애굽 연대가 아니고 고향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허락한 연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향 가는 우리에게도 확실한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2월 20일은 태양력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과 석 달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자, 그들이 이제 그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을 떠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대장정의 길을 떠날 때를 보면 이날까지는 그런 질서와 그런 방법을 하나하나 일러주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시내산을 떠나갈 때는 제사장들이 그런 것을 잘 듣고 따라야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신년 2013년 1월 6일인데 이날에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모두 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 온 줄로 압니다. 제가 1월 1일 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계사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뱀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남극과 북극을 빼고 온대 지방과 아열대 지방, 한대 지방등 이 지구땅에 서식하는 뱀의 종류가 약2,700종이라 그랬는데요 파충류를 연구하는 심재한이란 박사가 중앙일보에 게재하기를 약3,400종이라고 발표를 했더라고요. 여러분은 안 놀라네요. 저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뱀의 종류가 2,700종류라는 것도 많다고 그랬는데 그분이 3,400종이라고 발표했더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뱀의 종류가 많은가? 하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올해가 뱀의 해라고 해서 뱀에 대한 애기를 하면 보통 너무 징그럽고 뱀을 보면 다 놀래고 합니다만 뱀이 쥐를 잡아먹고 해충도 잡아먹으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죠? 거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 시간이 많이 갈 것 같아서 약하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이미 1월 1일 예배에 그 뱀의 지혜를 가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과 떠난 후는 그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왜냐면 그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는 이런 법도 없었고 이런 제단도 없었으며 제사법도 없었는데 이제 떠날 때부터는 완전히 체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장 1절부터보면 그들이 출발할 때 제사장이 먼저 은 나팔을 불게 됩니다. 여러분, 이 나팔을 어떨 때 붑니까? 나팔이라는 것은 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8장 보면 나팔이 나오는데 거기엔 전부 다 나팔이 일곱 개가 나옵니다. 첫째 나팔, 둘째 나팔 등 일곱 나팔이 나오는데 모든 나팔은 누가 들으라고 부느냐면 백성이 들으라고 부는 겁니다. 성경에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부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양각나팔은 나팔이 양쪽으로 불어 제치는 것이 양각나팔인 줄 알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각나팔은 양의 뿔로 부는 나팔이 양각 나팔인데 그걸 고등학교 때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는 양의 뿔을 가지고 부는 나팔이 아니고 본문에 나오는 나팔은 은 나팔입니다. 은을 두들겨 쳐서 나팔을 만들어서 ‘뒤-’하고 나팔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전쟁 나팔인지 이동 나팔인지 알 수 있도록 붑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렇습니다. 이제 제단이 하나 생겼고 그 제단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가 멈추면 바로 열두 지파가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뺑 둘러 진을 칩니다. 왜냐면 이는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법궤 중심으로 해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법궤를 중심하고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열두 지파가 깃발을 꽂고 진을 칩니다.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와 이제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사장이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나팔을 불고 싶어도 못 붑니다. 이른 아침에 동쪽에서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제단 앞에 피어오르면 제사장은 지체하지 않고 나팔을 불어야 됩니다. 이동 나팔을 불면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지파별로 모여서 이동할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항상 어디에 귀를 기울여야 되냐면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거기에 아주 신경을 민감하게 써야 됩니다. 그래야 백성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어디에 신경을 써야 되냐면 구름이 피어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온 신경을 거기에 써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 위에 어떤 징조가 있나 늘 바라봐야 되고 백성들은 항상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하라는 나팔 소리가 나는지 신경을 쓰며 항상 준비해야 됩니다. 이제 달라졌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2013년도부터는 하나님의 제단을 중심하고 말씀을 중심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경고의 나팔이 불어지는지 우리는 늘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이제는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거나 예배를 드리다가 말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공 예배는 빠지지 말아야 됩니다. 이제 달라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래서 제사장은 항상 제단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갑자기 구름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몇 시에 나팔을 분다’고 미리 알리는 것도 없습니다. 갑자기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이쿠, 이제 이동해야 되는구나”하면서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때까지 백성들은 시내산 아래서 펑퍼짐하게 퍼져 있었고, 모세만 엄청나게 바빴습니다만 이제는 모세와 아론과 제사장들,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됩니까? 이 광야에서 다른 광야로 옮기게 됩니다. 여러분, 이 광야에서 다른 광야로 옮기면서 백성들이 피곤에 지칩니다. 은 나팔을 불면 머물러있던 광야에서 새로운 미지의 광야로 이동해야 됩니다. 그 이동할 때는 애들 손을 잡고 노인양반 모시고 짐을 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법궤를 매고, 또 제사장의 자녀들은 그 성물을 매고 고달픈 광야 길을 또 다시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도 처음부터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농촌에 태어났든 어촌에 태어났든 부모 따라 태어나서 살다가 이 동네 저 동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많이 이동을 하면서 오늘 서울 동네까지 온 사람도 있고, 타동네로 이동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르면 이동할 채비를 꾸리고, 그 구름이 제단 위, 이스라엘 민족 위에 쫙 덮으면 맨 앞에 법궤가 앞장서서 이동을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그 법궤를 따라 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따라가야 됩니다. 말씀을 앞세우고 가면서 말씀이 가는 곳에 어려워도 괴로워도 욕먹어도 편안해도 그 길을 따라가야 되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내가 함께 멈춰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두지파가 진을 칠 때에는 전부 다 제단을 바라보고 진을 쳤습니다. 그것이 특색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바라보고 살면서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새벽에 만나를 가져오는 일을 하고 또 광야에서 이동을 하면서 모든 행렬이 진행을 하면 따라갑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지내온 일들을 돌아봐도 그렇고 앞으로 38년 동안 가야될 길들은 매우 험난합니다. 모래사막 지대를 넘어야 하고 언덕을 넘고 계곡을 지나고 해야 하는데 거기엔 만들어진 길도 없습니다. 거기는 아스팔트나 고속도로도 아닙니다. 오직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빛이 인도하는 대로, 밤에는 인도하는 불이 추위를 막아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훤히 비춰줍니다. 그러니 이방사람이 볼 때는 희한한 민족으로 보이고 괴상망측한 민족으로 보일겁니다. 또한 낮에는 그 작열한 태양 볕 아래서 일사병이 들지 않도록 구름이 그 민족들 위에 덮개로 덮어주고, 밤에는 춥지 않도록 불로 따뜻하게 해주면서 길을 인도해줍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은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가고 있는데, 이방사람들이 볼 때는 ‘무슨 민족이 저런 민족이 다 있나?’라고 할 겁니다. 밤에는 붉은 불기둥 속에서 그들이 진행하고 낮에는 구름이 턱하고 덮어주니 진행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고 나면 이른 새벽에 이방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만나를 주워다 먹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면서 영원히 죽지않으리라고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안 죽는다는 것은 영과 육이 안 죽는다는 소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는데, 이것이 법궤역사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들어도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엘리베이터 타고 교회에 올라 오는데 ‘목사님, 최진실 남편이 또 자살했대요’라고 하더라고요. 뭐 자살도 유행인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돈이 없습니까? 뭐가 없습니까? 여러분, 이제는 돈 가지고도 못 살고요, 사랑 가지고도 못 살고 인물 가지고도 못 살며 기술 가지고도 못 삽니다. 이제 말씀의 법궤를 가지고 사는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지식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이제 되는 길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법궤밖에 없어요. 여러분, “2013년도에 이 말씀의 법궤가 가는 곳에 나를 인도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본문에 보니까 이 법궤가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법궤가 그들의 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2013년도에 여러분이 머물러야 할 곳을 말씀과 함께 찾아주시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 땅은 메마른 광야입니다. 이 세상은 고달픈 나그네 길입니다. 여러분 동감하시죠? 실감하시죠? 나그네 길이기에 얼마나 고달픕니까? 얼마나 메마른 땅입니까? 인정머리는 하나도 없는데가 이땅 아닙니까? 여러분, 제가 신문에 보니까 지금 45%가 독신주의자입니다. 그 독신 45%속에 독신남, 독신녀도 있고, 개인뿐 아니라 가정도 그렇게 되어 버렸답니다. 안 그러면 부부끼리 사는 가정, 부부도 아들 딸 시집 다 보내고 부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식도 안 낳고 사는 부부랍니다. 그 다음에 모자간에 사는 가정, 부자간에 사는 가정, 형제간에 사는 가정, 자매끼리 사는 가정이 45%랍니다. 그래서 나라가 지금 골병든답니다. 앞으로 20년이 되면 그 프로가 70%랍니다. 이것은 제가 한 소리가 아니고 신문에 발표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요? 삼포가 있습니다. 여기의 포는 ‘던질 포(抛)’자를 썼어요. 그래서 삼포(三抛)가 뭐냐면 먼저 결혼을 포기한다고 선언합니다. 아주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한답니다. 그 다음에 자식 낳는 것을 포기하고, 세 번째는 집 사는 것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 집값이 또 떨어진답니다. 이러면 모든 은행이 부동산 70%, 80% 다 잡아서 돈을 줬기 때문에 잘못하면 내려앉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이 세상이 변하고 있는지 옛날에 없던 소리 아닙니까? 하도 옛날에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소리할 때가 얼마 전 아닙니까? 이제는 그런 소리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도 새끼 둘 낳으면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자식 안 낳는 사람은 역적이라고 합니다. 시대 상황이 이렇게 됐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주님 오실 징조입니다. 이제 인종 씨를 마무리 하는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제 말을 믿어보시고 말씀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은 장막을 많이 옮긴줄로 압니다. 우리 사위도 ‘이제 이사를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아브라함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이사를 하다보면 돈도 들어가고 몸도 많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따라 늘 갑니다. 법궤를 멘 자가 앞서가면 그 뒤를 쭉 따라서 갑니다. 그래서 쉴만한 장소가 나오면 법궤가 딱 멈춥니다. 그러면 지파별로 깃발을 꽂고 성막과 약 912미터정도 떨어져서 12지파가 진을 칩니다. 거기에 레위 지파는 진을 안 칩니다. 왜냐면 제단 문제를 돌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을 치는데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뒷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에브라임이 없고 요셉이 나옵니다만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깁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얼마나 자식에게 복을 주도록 했는지 거기에 요셉 자식들의 두 지파가 나옵니다. 여러분, 아비들이여, 이런 것 좀 자식들에게 심어 주십시요. 지금 이 때가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 이제 주님 나라에 간다고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이제는 희생해야 됩니다. 노력을 해야 되고 애써야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12지파가 진을 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약300만 인구가 진을 치는데 그곳이 호남평야나 김해평야와 같은 평야가 아닙니다. 때론 언덕배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비탈길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지파는 고생이 되는 곳에 진을 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다음번엔 그래도 쉬었다가 갔으면 좋을만한 장소가 걸리기도 할 겁니다. 왜냐면 여러분, 옮길 때마다 똑같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고, 아주 짜증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럼 그것이 뭐냐면 나그네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이 나그네 길입니다. ‘아이고, 금년 같은 해는 지긋지긋하니까 새해가 빨리 왔으면 좋겠네!’라고 했지만 또 새해가 왔어도 또 똑같죠. 이것이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런 어려움은 소망이 있는 어려움입니다. 애굽에서의 어려움은 소망이 하나도 없지만 광야에서는 그래도 모세의 인도를 받았지요? 만나 내려 주지요? 반석의 오염되지 않은 생수를 주지요? 낮에는 시원한 에어컨(?) 틀어주지요? 밤에는 뜨끈뜨끈한 히터(?) 틀어주지요? 그래서 고생되더라도 바로의 고난 밑에서의 애굽 땅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아도 영이 병들면 자살합니다. 저는 그 유명한 젊은이가 왜 죽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그것도 유행입니다. 집안에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은 그 자식도 문제 일으키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은혜 끼치는 사람은 자식에게도 그 은혜가 넘어갑니다. 자살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한 가문에서 몇대를 내려가서 자살해도 가문에 큰 충격인데 그 집안이 셋이나 자살을 했으니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 자식은 뭐 하려고 낳았는지 남아있는 자식들이 딱하게 됐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것이 유전이 되기 바랍니다. 2012년까지 다 나쁜 것은 막아버리고, 2013년부터는 좋은 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쭉쭉 내려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은혜가 내려가야 됩니다.
본문에 법궤를 따라가는 백성들이 나오는데 오늘 우리도 말씀의 법궤를 따라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가 이제 백성이 쉴만한 곳에 멈추면 모든 백성이 멈추고 법궤가 있는 이동 성전을 중심해서 진을 치고 쉽니다. 여러분, 민수기를 잘 배워보십시오. 놀라운 은혜가 될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진을 치면서 성전을 바라봅니다. 왜 성전을 바라봅니까? 그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중심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법궤, 언약의 말씀은 오늘 이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백성을 언약궤가 인도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35절에 보면 지도자 모세가 기도를 하는데 ‘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법궤가 가는 곳에는 대적을 완전히 멸해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 대적들이 아주 맥을 못 추게 짓밟아 버리고 또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여기 도망간다는 말은 ‘만날 수가 없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되지만은 전쟁의 날에 원수를 물리치는 역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어버릴 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도록 해달라고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은혜시대 때는 말씀 없이 기도해도 충분했습니다. 이적기사도 나타나고 응답도 옵니다. 그러나 이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언약궤를 가지고 기도할 때에 응답이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꼭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향하여 갈 때에 쉴만한 곳에 법궤가 멈췄는데, 오늘 우리도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그 말씀이 멈추면 우리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에 은혜를 받게 하시고 축복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향가는 백성들은 반드시 제단을 중심으로 진을 쳤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먼곳에 또한 만나 내릴 곳을 예정하시고 내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러분, 40년 동안 만나가 내리면 이방인들이 와서 맛보기라도 했을만 한데 그런 것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주지를 않았습니다. 오늘날 영생의 말씀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지를 않습니다. 고향가야 될 백성들에게만 말씀의 만나를 주십니다. 세상에 안 믿는 저 이방인들이 만나를 주워 먹은 역사가 없었습니다. 절대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만나도 고향 갈 자들에게만 줬다면,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오늘 그 나라에 갈 자들에게만 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준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영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번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고,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좋죠?
그리고 이제 30절에 보면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이제 원수 대적들은 도망가게 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데 여기 ‘천만인’이 나오는데 이 말은 ‘수많은 택한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법궤가 머물러 있는 곳에 이 백성이 멈춰있으니까 떠나지 마시옵소서. 내가 멈추는 이곳에 하나님의 신이여 떠나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법궤를 앞세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한 인도를 받았고 법궤가 머물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편하게 쉬게 되었으며 법궤가 원수에게 갈 때에 원수가 혼비백산하여 물러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됩니까? 이 법궤가 넘실거리는 요단강물을 밟을 때에는 요단강물이 쌍벽을 이루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홍해는 모세가 든 지팡이로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는데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를 받은 자들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 중 20세 이상이 다 죽어 버렸을 때에 제2차 세례가 요단을 가르고 또한 세례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멘 제자장들이 물을 밟을 때에 요단강물이 쫙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말씀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법궤가 여리고성을 돌 때에도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일곱번 도는 날 아침에 무너뜨렸는데 그것은 법궤 역사가 그렇게 위력이 강하다는 겁니다. 이는 말씀역사가 그렇게 위력이 강하다는 것을 저와 여러분이 믿어야 됩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했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언약궤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고, 반드시 주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