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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4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영화 헤어질 결심' 21회 디렉터스컷 5관왕 싹쓸이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제21회 디렉터스컷 어워즈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21회 디렛터스컷 어워즈가 3년만에 대면 개최됐다. 시상식은 영화 부문, 시리즈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날 '헤어질 결심'은 5관왕으로 다관왕에 등극했다.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어 정서경 작가와 함께 각본상도 받았다.
이 뿐 아니라 배우상도 싹쓸이했다. 박해일은 올해의 남자배우상, 탕웨이는 올해의 여자배우상을 받았고, 서현우는 올해의 새로운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2022년 러시아군 우크라이나 침공 첫날 220명 사상
2020년 베트남의 민주화·종교자유에 헌신한 틱광도 스님 입적(92세)
2016년 중고매물거래 사이트 이베이에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대통령 매물로 등장(입찰가 10만$)
2012년 증산도 개창한 안운산 종도사 별세
증산도(甑山道)를 개창한 안운산(安雲山·90) 종도사(宗道師·증산도 최고 지도자)가 24일 오전 10시 선화(仙化·별세를 일컫는 증산도 용어)했다.
증산도는 유불선 등의 교리를 연구해 새 종교를 만들고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강증산(1871~ 1909)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안 종도사는 조부와 부친 영향으로 12세 때 입도,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으로 침체에 빠진 도문을 8·15 광복 이후 되살렸으며 증산도를 개창해 1970년대 이후 최고 지도자를 지냈다.
도조(道祖)인 강증산 상제의 행적과 종도들의 증언을 채록해 '도전(道典)'을 펴냈고, 2000년대 중반에는 '상생방송(STB)'을 개국했다. 안 종도사는 "남이 먼저 잘되게 하고, 남을 먼저 살리는 사람이 새 세상의 주역이 된다"며 평생 상생의 도를 설파했다
2011년 '닥의 작가' 정창섭 교수 별세
1960년대에는 서구적 앵포르멜을 실험했지만, 1970년대부터는 한지(韓紙)를 이용해 우리 전통의 미감을 탐구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한지 위에 먹물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얼룩을 남기도록 한 '귀(歸)' 연작을 내놓았고, 1980년대에는 물기를 머금은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편 뒤 두드리거나 만져 표면 효과를 낸 '저(楮)' 연작 등을 선보였다. 고인의 작품들은 한국적 미의식이 서구적 추상미술과 만나는 접점을 찾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1년 '간첩사건 연루' 고영복 前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별세
공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고영복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24일 오전 1시 83세로 별세했다.
고영복 전 교수는 1966년부터 1993년 정년퇴임 시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사회학회장,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 등을 지내면서 사회학계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하던 1961년부터 퇴임 이후인 1996년까지 북한 공작원과 수차례 접촉하고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1997년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공판 과정에서 혐의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1·2심을 거치면서 형기가 7년에서 2년으로 줄었다.
고인은 지난해 9월 담도암 판정을 받고 6개월째 투병해왔다
2010년 김연아, 여자 피겨스케이팅 쇼트프로그램 세계신기록
김연아(20)가 2010년 2월 24일(이하 한국시각)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시엄에서 열린 쇼트 프로그램에서 역대 세계 최고점수인 합계 78.50점(기술점수 44.70점·예술점수 33.80점)으로 1위에 올랐다. 2009년 10월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자신이 세웠던 76.28점을 2.22점 앞선 기록이었다.
김연아와 동갑내기 라이벌인 아사다 마오(일본)도 호연을 하며 아슬아슬한 승부를 펼쳤다. 아사다는 김연아 바로 앞인 5조 2번째 선수로 연기를 펼쳤다. 아사다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는 등 실수 없는 연기로 73.78을 기록했다. 중간 순위 1위. 2009년 팀트로피 대회 이후 아사다의 두번째 70대 점수였다. 하지만 곧 이어진 김연아의 연기로 순위는 2위로 내려갔다.
한편,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는 3위(71.36점)에 올랐으며 곽민정(16)은 16위(53.16점)로 24명에게 주어지는 프리 스케이팅 진출권을 따냈다.
2010년 이승훈, 스피드스케이팅 10000m 올림픽 기록 금메달
이승훈(22·한체대)이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이승훈은 2010년 2월 24일(한국시각)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1만m 레이스에서 12분58초55로 골인,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네덜란드의 요켐 유이트데하게가 세웠던 종전 올림픽 기록(12분58초92)을 0.37초 앞당겼다. 1만m는 스피드 스케이팅 최장거리 종목이다.
이번 올림픽 남자 5000m에서 은메달을 땄던 이승훈은 이날 전체 8조 중 5조로 출전했으며, 함께 레이스를 펼쳤던 네덜란드의 아르엔 판 데 리에프트(13분33초37)를 한 바퀴 이상 앞서는 뛰어난 경기를 했다.
5000m 우승자였던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는 마지막 8조로 출전, 12분54초50의 새 올림픽 기록으로 우승하는 듯 했으나 실격(인코스를 두 번 타고 코스변경시 발을 아웃코스에 걸치는 반칙)했다.
이승훈은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지 이제 7개월 정도밖에 이나지 않았지만, 앞서 5000m에서 아시아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1만m에서는 아시아인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2010년 부산여중생 실종사건 발생
부산 사상구 덕포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서 이모(13) 양이 실종됐다. 이날 오후 7시께 엄마 홍모(38)씨화 전화통화를 했던 이모양은 이 양의 오빠(15)가 집에 귀가한 오후 9시께에는 집에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당시 현관문은 잠기지 않은 채 닫혀 있었고 도난물품은 없었다.
실종 당일 집에 이 양의 휴대전화와 안경이 놓여있었고, 신분을 알 수 없는 운동화 발자국이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뤄 납치와 단순 가출 가능성을 두고 수사가 진행됐다.
이후 이 양의 흔적을 찾는 데 실패한 경찰은 공개수사로 전환(2월27일)했으며, 유력용의자 김길태(33)를 공개수배(3월2일)했다. 하지만 김 씨를 붙잡기도 전에 이 양은 실종 11일 만인 3월 6일 오후 이 양의 집에서 100m가량 떨어진 이웃집 옥상 물탱크 안에서 알몸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양의 시신에서 채취.검출한 모발, 타액, 질액 등을 감정한 결과 질액에서 용의자 김씨와 유전자가 같은 DNA 결과를 확인됐다. 이 양의 직접 사망원인은 비구폐색 및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확인됐으며 성폭행 흔적도 발견됐다. 하지만 이 양의 시신이 밀폐된 물탱크 안에 유기됐고, 석회가루가 뿌려진 상태여서 사망시간 추정은 불확실해졌다.
한편 용의자 김씨는 감정 결과에 따라 피의자로 확정됐으며 경찰은 총력을 기울여 김씨를 3월 10일 오후 2시 50분쯤 부산 사상구 삼락동 덕포시장 인근의 한 빌라 1층 주창장 앞에서 검거했다. 실종 된지 15일, 공개수배 12일만이었다.
검거된 김씨는 줄곧 범행을 부인했지만 14일 오전 거짓말탐지기와뇌파 조사를 받은 후, 밤부터 담당형사에게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김씨는 30여년전 현재의 부모에게 입양됐으며 1994년부터 절도혐의로 소년원을 드나들었다. 1997년에는 성폭행 미수로 3년을 복역했고 2001년 부녀자를 10일간 감금·폭행한 혐의로 8년을 복역했다. 2009년 6월 출소했지만 다음해인 2010년 1월 20대 여성을 성폭행하고 감금한 혐의로 수배 중인 상태였다.
2010년 초전도체 권위자 이성익 교수 사망
2010년 2월 24일 오후 3시30분께 서울 마포구 한 아파트 화단에서 12층에 사는 서강대학 물리학과 이성익(58) 교수가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 최모(63)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교수의 점퍼 호주머니에서 ’좋은 논문을 내지 못해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고 평소 각종 스트레스로 불면증 치료를 받았다는 유족의 진술 등을 미뤄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고있다.
이 교수는 초전도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2006년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국과학상 물리학부문,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등을 받았고 포항공대에서 교편을 잡다 2008년 서강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는 1993년 수은계 초전도체를 개발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됐다. 2001년 초고속 슈퍼컴퓨터, 마이크로파 통신 등의 개발에 쓰이는 초전도 박막을 세계 최초로 제작했으며, 200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물리학회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 초전도체는 핵융합발전을 할 수 있는 핵융합로에 필수적이다.
2009년 프리미엄 과자 멜라민 검출
서울시는 2009년 2월 24일 독일 기업이 제조한 식품첨가물에서 멜라민이 검출됐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발표한 직후 해당 제품에 대해 긴급 판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번 멜라민 검출은 23일 뉴질랜드 식품안전청(NZFSA)이 "독일 CFB사 스페인 공장에서 제조한 “피로인산제이철(Ferric Pyrophosphate)” 제품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 식품첨가물은 수입업체 ㈜엠에스씨가 2007~08년 5400kg을 수입돼 ‘닥터유 골든키즈100%’와 ‘고소미’ 등 오리온의 7개 과자제품, 동아제약의 건강기능식품 등에 사용됐다.
특히 멜라민 이후 깐깐해진 소비자들을 안심시키겠다며 오리온이 출시한 ‘프리미엄’ 과자, ‘금쪽같이’ 소중한 아이에게 마음 놓고 먹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프리미엄 제품에 멜라민이 검출된 원료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하고 있다.
완제품에 대한 멜라민 검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하지만 원료에서 멜라민이 검출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비자들은 배신감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사실 검출된 멜라민의 양이 최대 22ppm 수준인 데다 제품에 사용될 때 1만분의 1-2천분의 1 수준으로 희석되기 때문에 최종 제품에서 농도는 검출한계인 0.1ppm 이하로 낮아져 멜라민이 검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009년 인천시내버스의 준공영제가 시행, 급행간선버스가 운행을 시작
2008년 참여정부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2월 25일 출범.
2007년 한미 양국, 전작권 전환 및 한미연합사 해체에 합의
한·미 양국군이 함께 행사해 오던 전시 작전통제권(전작권)이 2012년 4월 17일 한국군의 손으로 넘어온다.
1978년 이후 한·미 양국군간에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해온 한미 연합사령부도 그날 해체된다.
2007년 2월 24일(한국시각) 김장수(金章洙) 국방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열고 위와 같은 사항을 합의했다.
전작권의 한국군 전환(이양)은 1950년 7월 14일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 작전권을 넘겨준 뒤 62년 만의 일이다. 4월17일은 이 대통령이 서한을 보낸 7월14일을 거꾸로 조합한 날짜이다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
2006년 필리핀 아로요, 국가 비상사태 선포
필리핀이 24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또 장성을 포함한 군 장교들과 민간인 수 명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필리핀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거리고, 아로요 대통령을 규탄하는 반(反)정부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 간에 유혈 충돌이 잇따르는 등 필리핀 정국이 심각한 위기 상태로 접어들었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TV·라디오 연설을 통해 “비상사태는 야권과 좌익·군부 모험주의자들이 선거로 출범한 합법적인 정부를 축출하려는 ‘체계적 음모’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정 최고 통수권자로서 군경(軍警)에 폭넓은 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필리핀 군은 이날 특수부대 사령관인 다니요 림 준장을 비롯한 일부 장교와 민간인 수 명을 체포했으며, 제네로소 센가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 위협이 감소했으나, 아직 잔존(殘存)한다”며 “군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로요) 정부를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다.
수도 마닐라 일대에는 검문소가 설치됐고, 경찰은 최고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또 말라카낭 대통령궁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철조망과 컨테이너가 설치돼 핵심 요원 이외에 접근이 전면 제한됐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예정된 대규모 반정치 집회가 금지됐고 각급 학교 수업도 취소됐다”고 전했다.
필리핀에서 비상사태 선포는 1989년 12월 이후 17년 만에 처음이다.
그러나 비상사태 선포에도 불구하고 5000여명의 시위대는 ‘피플 파워’ 기념탑 주변으로 진입을 시도,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해산에 나섰다. 20년 전 피플 파워를 이끌었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경찰의 시위 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이날 아로요 퇴진 시위를 강행했다.
2006년 질병관리본부, 국내 AI 인체감염 사례 발표
국내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에 4명이 감염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처음 확인됐다. 하지만 이들은 혈청조사에서 AI 바이러스 양성 반응을 나타냈을 뿐 무증상(無症狀) 상태였으며 이미 항체가 생성돼 치료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정부 관계자는 밝혔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2006년 2월 24일 “국내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했던 2003년 1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닭·오리 도살에 참여한 11명의 혈청을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에 보낸 결과 4명의 혈청에서 AI 바이러스 항체가 생성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11명은 AI가 유행했을 당시 충북 음성, 천안 등 10개 시군 19개 농장에서 닭, 오리 등의 도살에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된 4명의 직업은 공무원 2명과 군인, 자원봉사자인 주민이었다. 이 중 2명은 충북 음성과 진천에 거주하는 36세 남자와 50세 남자이며, 나머지 2명은 각각 충남 천안과 전남 나주에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질병관리본부는 이날 오후 현지를 방문해 양성반응이 나온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재검사를 위해 혈액을 채취하고 그동안의 건강상태를 조사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작업을 하기 전에 미리 AI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먹었으며 작업 후 10일간 인플루엔자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현재도 별다른 질병없이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2003년 12월 AI가 유행하자 2000여명의 혈청을 채취, 감염 위험이 높았던 88명의 혈청을 2004년 1월 미국 CDC에 보냈으나 모두 음성으로 판정받았다. 이후 4명의 감염자가 뒤늦게 발견된 것은 질병관리본부 직원이 혈청 검사 기술을 미국에서 연수받은 뒤 작년 4월부터 자체 조사했기 때문이다.
2006년 한국국방포럼 창립총회
2006년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 전략기획위원장에 임명
2006년 중국에 첫 외국합작 대학
2006년 2월 24일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시에 중국 최초의 외국 합작대학인‘닝보노팅엄대학’이 설립됐다.
영국 노팅엄대학과 완리(萬里)학원이 공동 투자해서 설립한 닝보노팅엄대학은 24일 존 프레스코트 영국 부총리와 천즈리(陳至立) 국무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설립 기념식을 가졌다.
2006년 아이칸 “KT&G 주식 공개매수”
2006년 아라카와 시즈카,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
2006년 2월 24일(한국시각) 토리노 팔라벨라 링크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푸른색 톤의 의상을 입고 나온 일본의 아라카와 시즈카는 ‘쿨 뷰티(Cool Beauty)’라는 별명처럼 초반엔 약간 차갑게 느껴졌지만 3회전·2회전 점프 콤비네이션으로 화려하게 시작한 뒤 점차 감정을 살려나갔다.
트리플 점프 다섯 번에 스파이럴, 스텝 동작 등을 깨끗하게 연기했다. 트리플 루프를 할 순간 더블 루프로 멈칫했던게 유일한 실수. 프리 스케이팅 점수 125.32점으로 쇼트프로그램(66.02점)과의 합계점수는 191.43점. 이날 연기 중 실수로 넘어진 코헨(183.36점)과 슬러츠카야(181.44점)를 제쳤다.
동계 올림픽 사상 첫 일본, 아시아 선수가 따낸 피겨 금메달이었다. 지금까지 최고는 1992년 알베르빌 대회의 은메달(이토 미도리)이었다.
2001년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 사망
모든 정보를 `0`과 `1`로 표시하는 원리를 창안, `현대 디지털 정보통신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84)이 2001년 2월 2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메드포드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섀넌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
섀넌은 MIT 대학원 재학시절 정보를 `0`과 `1`이란 2진법 수체계로 표시하는 방법을 개발, 정보의 전자적 전달을 가능케 했다. 그의 이론은 전화·텔레비전·컴퓨터 네트워크 등 오늘날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정보통신의 핵심 원리를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유전자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토대가 됐다. 전문가들은 "섀넌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다. 디지털 혁명은 그에 의해 시작됐다"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섀넌은 2차대전 당시 암호해독가로 활약했으며, 그가 개발한 대(對)항공기 조준기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로부터 런던을 방어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는 MIT에서 50세에 은퇴한 이후 저글링 로봇, 로켓엔진을 장착한 프리스비, 체스를 두는 로봇, 미로를 스스로 해결하는 쥐로봇 등을 발명했다.
1998년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퇴임
김영삼 대통령이 1998년 2월 24일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청와대를 떠나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영삼 대통령은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인사차 모인 민주계의원들 앞에서 퇴임 소감을 말했다.
퇴임에 앞서 김 대통령은 전날인 2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환송만찬에 참석, “지난 5년동안 변화와 개혁의 과정에서 나의 본의와는 달리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줄 것을 당부한다며 맺힌 것이 있다면 풀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 “화해의 요청”을 하는 순간이었다.
김 대통령은 앞으로 전직대통령 예우법 등에 따라 연금 수당 등을 포함,매월 총 1천80만여원을 받게 되고 경호는 7년간 청와대가 맡는다.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장에 전임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했다.
1998년 캄타이 시판돈 총리, 라오스 대통령에 선출
라오스의회가 1998년 2월 24일 캄타이 시판돈(74) 총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시판돈 신임 라오스대통령은 1975년 이후 군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양지만 골라 밟은 군출신 인사이다.
시판돈은 총리로 재직 중 지난 1992년부터 집권당인 라오스 인민혁명당(LPRP) 중앙위원장을 겸임했으며 당총재를 맡아 왔다. 당정군 국정 전반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일찍이 누하크 폼사반 대통령의 후임자로 거론됐었다.
그는 1924년 라오스 남부 참파삭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23세때부터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항해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시판돈은 지난 1956년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지 2년 뒤 라오스 인민혁명당(LPRP)에 입당했다. 1959년 당선전국장을 거쳐 1975년 인민혁명당이 집권한 이후 23년 간 국방장관, 군총사령관, 부총리 등 정부 요직을 거치면서 착실히 기반을 닦았다.
1997년 서울대와 9개 지방 국립대 `학술교류 협정` 체결
서울대와 9개 지방 국립대 총장들이 1997년 2월 24일 서울대 행정관 제1회의실에서 ‘학술교류협정’ 을 체결했다. 10개대 총장들은 합술교류협정을 통해 교직원 교류, 학생 교류 및 계절학기와 정규학기 학점 상호인정, 정보 및 자료의 교환 연구 및 학술회의 공동추진과 첨단 연구 기자재 및 시설물의 공동사용 등에 합의했다.
이날 체결된 협정으로 지방 국립대 학생과 교수들이 서울대에서 공부하거나 연구할 기회가 원칙적으로 완전 개방돼 이 협정이 잘 지켜질 경우 대학교육의 지역 불균등을 크게 개선하고 지방 국립대에 대한 수험생들의 선호를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이날 협정에 참가한 대학은 강원대, 경북대, 경상대, 부산대, 서울대, 전남대, 전북대, 제주대, 충남대, 충북대이다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중 연합군 대규모 지상 공격
1991년 2월 24일 페르시아 만 전쟁 중 연합군의 대대적인 지상 공격이 시작되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유발된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이라크는 공중전으로 무리하게 전쟁을 이끌었으나 연합군은 공격 목표를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의 지상군으로 변경했다.
그 결과 1991년 2월 24일 야간에 실시된 연합군의 대대적인 지상 공격으로 이라크의 요새와 무기고, 장갑차 등이 파괴되었다.
2월 27일 연합군은 쿠웨이트 시를 탈환하고 바스라 지역에서 저항하던 이라크 수비대까지 섬멸시켰다.
다음날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정전 선포로 쿠웨이트는 독립을 되찾았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패전 후 쿠르드족과 시아파가 일으킨 반란 등 여러 민중 소요에 직면했다.
1983년 스페인, 사유회사 첫 국유화
1982년 민방위교육훈련 46세이상 면제
1981년 동력자원연구소, 금산에 우라늄광 발견 사실 발표
1980년 이집트, 이스라엘 대사 교환
1978년 윤보선, 함석헌 등 66명 `3.1민주구국선언` 발표
1973년 1백명이상 고용업체에 복지시설 의무화
1973년 서울, 부산간 우편전용열차 첫선 (철마우체국
철도 위를 달리며 우편 업무를 보는 철마 우체국이 1973.2.24부터 경부선에서 집무!
철마 우체국은 제161 완행 열차(하행)와 제162 완행 열차(상행)에 우편 화물차 1량씩을 연결하여 운영하게 되므로 열차 승객과 역구내의 마중객 등이 항상 이용할 수 있으며, 종래의 우편 수송 업무도 겸하게 했다.
철마우체국장이라는「편장(便長)」밑에 6-7명의 체신 직원으로 편성된 이 우체국은 일반 우체국에서 취급하는 모든 우편 업무를 취급, 정거하는 모든 역에 즉각 우편물을 떨어뜨려 배달하게 되므로 우편 배달 속도가 10-24시간 빨라졌다.
1971년 알제리, 사하라 사막의 석유와 천연가스 국유화
1969년 장경국 자유중국 국방부장 내한
1967년 한국, 국제통신위성기구에 가입
1966년 가나에 군사쿠테타, 군경서 정권장악
아프리카 서부 기니아만에 있는 가나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
초대 대통령 은크루마는 미얀마와 중국, 북베트남 순방으로 해외에 나가 있다 실각했다.
재야인사들과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쿠데타 세력은 집권에 성공했다.
수도 아크라의 시민들은 거대한 은크루마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했다.
쿠데타 세력은 1960년 가나공화국 수립 이후 은크루마 정권이 잡아들인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군사정권은 1969년 8월 총선거에서 사회학자 코피 부시아를 총리로 하는 민간정권으로 이양됐다.
1966년 조지프 안서 안크라가 가나의 대통령에 취임
1963년 소련, 핵실험 재개
1962년 중국 계몽사상가 호적 사망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부르주아 사상가로 낙인찍혀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야 했던 중국의 계몽사상가 호적이 1962년 2월 24일 사망했다. 1891년 안후이성 지시현에서 태어나 1910년 미국에 유학해 1914년 코넬대학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듀이 교수로부터 교육학을 배워 진화론,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베이징대학 교수가 된 호적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중국공산당 대부인 진독수와 함께 백화운동 등 사상운동에 힘을 쏟았다. 백화는 중국의 사대부들이 쓰는 문자가 아니라 서민들이 쓰는 구어체의 속어로 그 역사는 당송 시절의 `백화 속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화운동은 격동기의 중국에서 한가한 문화운동이 아니라 훈민정음 같은 언어혁명이자 정치개혁이었다. `언문일치`를 주장한 `문학개량추의`를 `신청년`에 발표, 문학개혁의 대표적 인물이 됐다.
1919년 `이데올로기는 되도록 적게 말하고 문제를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다연구문제 소담주의`는 공산당의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또 프래그머티즘에 의한 고전연구를 제창하고 `중국 고전의 검토`를 주장해 실증적인 고전 연구분야를 개척했으며 1930년 `신월` 1931년`독립평론`을 창간해 장개석 정권에 접근했다. 1938년 국민당 정부의 주미대사를 지내고 그 뒤 행정원 최고정치고문, 베이징대 총장을 지냈다. 사후 중국의 개혁ㆍ개방 정책 바람에 힘입어 그가 국민당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상 전체를 백안시했던 것이 아닌지에 대한 자체의 반성이 일고 있다.
1961년 한국, 필리핀 무역협정 조인
1958년 제네바서 국제해양법회의 개막
1952년 미국 서구 6개국, 대공산국수출금지협정 조인
1946년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되다.
1940년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입적
한국 근대 불교사의 대표적인 개혁운동가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백용성 스님이 1940년 2월 24일 입적했다. 1864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스님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1911년 서울로 올라와 한용운 스님과 함께 포교활동을 벌이던 스님에게 왕실의 한 상궁이 내 준 집은 스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이곳을 대각사로 이름지은 스님은 1916년 처음 이곳에 자리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주석처로 삼았다.
스님이 대각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하여 3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1922년부터였다. 그는 `대각교당`이란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적 색채가 점점 짙어가던 불교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일제가 불교계를 황폐화시키려고 주지 자격에 비구계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3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에 비구승만이 법맥으로 면면할 따름이요, 대처-육식을 하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없노라"며 1926년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 건백서’를 제출했다. 건백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대각교` 운동을 공식 선언하고 기존 불교 교단에 자신의 승적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백용성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옥중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반입해 읽고 있는 신앙서적들이 한글로 씌어진 것을 보고 불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도 힘써 `조선글 화엄경`(1927년)을 비롯해 30여 종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을 한글화했다. 또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일요 불교학교를 운영하면서 직접 오르간을 치기도 했다.
"생산하지 못하는 종교는 흡혈적 종교요, 사기적 종교"라고 생각한 그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며 경상남도 함양과 만주 용정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많은 자금을 보내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일행은 대각사를 찾아서 이에 감사했다. 대각사는 또한 백용성 스님의 법맥을 잇는 `용성 문중`의 큰 집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백용성 스님은 동산·동헌·자운·고암 스님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두었다. 용성 문중은 만공 스님의 법맥을 잇는 `덕숭 문중`과 함께 불교 조계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용성 스님의 제자들은 물론 성철·혜암·광덕·능가 스님 등 그의 손자뻘되는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모두 대각사에서 지낸 시절을 갖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으며, 국가보훈처에 의해 199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1938년 듀폰사, 나일론 재질 칫솔 판매
1933년 국제연맹, 일본의 만주철퇴안 결의
1931년 영국, 프랑스 해군군축협정 체결
1917년 조선상업은행, 일본인에게도 주주를 허용
1916년 일본 총독부, 소록도에 자혜의원 설립
1916년 2월24일,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격리ㆍ치료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령이 공포됐다. 장소는 어린 사슴의 형상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소록도(小鹿島)였고 병원은 자혜의원(慈蕙醫院). 병원이 설립되기 전 부산ㆍ대구ㆍ광주 등에 한센병 요양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환자들이 유랑으로 떠돌거나 걸식으로 연명하던 때였다.
소록도가 적지(適地)로 선정된 것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물, 육지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 섬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일제는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ㆍ이주시키고 이듬해부터 100여명의 환자들을 강제수용했다.
‘조선나병예방법’이 제정된 1935년부터는 전국의 부랑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로 수용되면서 환자수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일제가 이들을 환자가 아닌 반(反)사회인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부작용도 속출했다. 외로운 환자들끼리 동거를 하려면 불임수술 동의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해 1000여명이나 반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아야 했다. 급기야 1942년에는 이들에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요하던 원장이 피살되는 일도 벌어졌다. 1945년 8월에는 의사와 직원들간의 병원 운영권 싸움에 환자들이 휘말려 84명이나 살해되는 참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소록도갱생원(1934년) 국립나병원(1968년)을 거쳐 1982년부터는 국립 소록도병원으로 불리고 있으며, 환자수도 한때는 6000여명을 넘었지만 지금은 750여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1848년 마르크스ㆍ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발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제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공산주의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그들이 얻을 것은 전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팸플릿으로 불리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24일 영국 런던에서 발표됐다.
잇단 흉작과 대불황으로 빈곤과 굶주림이 유럽을 휩쓸고, 부르주아지배에 저항하는 혁명이 파리에서 일어나 독일로 번지던 이 날, 런던 거리에 처음 뿌려진 `공산당 선언`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깊고도 넓었다. 청년 마르크스(당시 3살)와 엥겔스(당시 28살)가 함께 쓴 23쪽 분량의 이 작은 책이 나온 뒤 인류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체제와 문명의 진로를 둘러싼 격렬한 이념 논쟁과 물리적 충돌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선언`의 논리에 근거를 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성립과 소멸 등을 경험했다. 마침 이날은 바다 건너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이 이틀 전 발발한 프랑스 2월 혁명에 의해 쫓겨난 날이었다.
독일어로 처음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현재까지 200여개 언어로 번역-발간돼 인류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려나갔다. 4장으로 구성된 공산당 선언은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해 봉건시대부터 19세기 자본주의에 이르는 역사를 고찰한 뒤, 자본주의는 결국 몰락하고 노동자 사회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1848년 루이 필립왕 퇴위, 프랑스 제2공화국 수립(프랑스 2월혁명)
1656년 스페인, 영국 선전포고
1637년 삼전도 굴욕의 날
1637년 2월 24일은 조선의 인조가 청나라2대왕 태종 숭덕제에게 큰절을 세번하고 머리를 세번 찧는 삼전도 굴욕이 있었던 날이다
조선의 16대왕인 인종때 청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 숭덕제가 1636년 12월 22일부터 시작한 침략전쟁이 바로 병자호란 이다.
병자호란은 1637년 2월 24일 끝나게 되지만 전쟁에서 진 조선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사를 표시해야 했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도록 요구한다
청나라의 승전을 알리고 기념하는 삼전도비는 본래 대청황제공덕비로 치욕비라고도 부른다.
이 삼전도비는 원래 한강변 삼밭나룻터 항복을 했던자리에 세웠으나 후에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훌륭함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하하며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일본은 1913년 다시 세워 놓게 된다.
1945년 광복직후 주민들이 이번에는 땅속에 묻어버리는데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후에도 여러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8-3번지로 옮기게 되었다.
2007년 2월에는 30대 청년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로 철거370이라 적어 훼손시키기도 했는데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한 행동이며 370은 인조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지 370년이 지났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2010년 4월 25일 고증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위치했는데 본래의 자리였던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라는 교서 inter gravissimas를 발표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를 격파하다.
1260년 몽고 쿠빌라이, 원나라 황제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