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는 종이봉투에 가득 담긴 2파운드어치 체리를 품에 안았다.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으니 상큼한 체리향이 입안에 퍼진다.
“와! 저거 봐요, 저거!"
그녀가 가리킨 쪽은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이름과는 다르게 정원은 아니고, 주로 관광객들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런던 시내의 시장이다.) 입구의 광장이었는데, 삐에로 분장을 하고 외발 자전거를 탄 남자가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유학생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라 놀랄 게 아니지만, 유럽에 온지 고작 이틀밖에 안 된 여행객에게는 제법 신기할 만도 했다. 금세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어간 그녀.
“어떻게 저걸 타고 사과를 깎지? 대박이다, 진짜.”
연신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웨인으로서는 저깟 삐에로보다 그녀 쪽이 더 신기했다. 두 시간쯤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여행자 수표를 취급하는 유명한 회사.)의 문의 창구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쏘리, 아임 낫 굿 앳 잉글리쉬. 캔 유 스피크 리를 슬로워? 따위 말을 더듬더듬하면서 울상을 짓고 있던 여자가 아니었던가? 사실 그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것 따위 딱 질색이건만, 뒷줄에서 동양인 남자(웨인을 가리킨다.)를 발견하더니 유레카! 라도 외칠 것처럼 들떠서는, 저기요! 하는데... 차마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십 분도 넘게 웬 동양인 여자에게 붙들려 반쪽짜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창구 직원마저도 그 쪽을 애타게 쳐다봤었다.)
그가 능숙하게 통역 노릇을 해 주고, 이제 됐죠? 하고 가려던 참에 그녀는 옷소매를 붙잡고, 쑥스러운 듯이 물어왔다.
저기,
“저기요!”
혼자 신이 나서 이쪽엔 관심도 없었던 것 같은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웨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해요 잠시, 하려던 참이었다.
“자, 이거. 선물이에요.”
엥?
자기가 좋아라고 꺼내먹던 체리 봉투를 척 내미는 게 아닌가.
“아니 뭐... 이거는 이거구요, 밥은 제가 살 테니까. 제가 세 개 먹긴 했는데...”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체리라...
웨인은 어딘지 유쾌한 기분이 되어 체리를 한 알 입에 넣었다. 이로 살짝 누르니까 온통 퍼지는 달콤함, 상큼함이 나쁘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 아니야! #0
- in 런던
체리는 결국 한 알씩 교대로 나눠먹었다.
런던에서 맞는 두 번째 저녁놀을 바라보며, 연수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남자와 근처의 일본식 라멘 집에 마주보고 앉아있다. 어느 것 하나,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창구, 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들어가서도 영어 회화 공부에 소홀했던 자신을 후회해 봤지만, 그래봤댔자 직원이 파든? 파든? 을 반복하기는 마찬가지.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여행자 수표를 누군가 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가 닳았다. 답답함에 못 이겨 주위를 돌아봤을 때 눈에 띈 동양인 남자를 보고 속으로 유레카, 를 외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동양인을 봐도 반가워하지 말라,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말들을 숱하게 익혀왔지만, 그 남자는 왠지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었다.
“아까는 정말 너무너무 반갑고 고마웠어요. 저는 정연수라고 해요.”
악수를 청할까? 하다 말았다.
“웨인이라고 불러요.”
원래 말이 좀 짧나? 그리고 한국사람 맞는 것 같은데 이름은 왜 웨인이야?
뭐라고 더 물으려는데 점원이 그녀 몫의 라멘을 들고 온다. 땡큐! 습관대로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사실은 배가 고파서 아까아까부터 밥을 먹고 싶은데, 그래도 그가 주문한 게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웨인이라...
“유학생이세요?”
“아, 뭐...”
“영어 엄청 잘하시던데.”
그래도 칭찬을 한 건데 대답도 안 하네. 연수가 티 안 나게 입을 비죽였다. 적당한 타이밍에 다시 점원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가 주문한 라멘은 스파이시 어쩌고... 가 적혀있는 거였는데, 보아하니 한국 라면과 그닥 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잘 못 느끼는데, 지내다보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차이나타운에서 해결해도 되지만 여기 꽤 유명하거든요. 맛있어서.”
아, 그렇구나~ 말 잘 하네.
연수는 대단한 것을 배웠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젓가락을 들었다.
“맛있다!”
“그죠?”
“네!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전날 숙소 근처에서 사먹었던 햄버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던 참에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어디야. 너무 빨리 먹나, 하면서도 연수는 라멘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 남자, 아니 웨인과 만나게 된 건 정말 잘된 일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여행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한국에서 출발할 때까지도, 아니 히드로(Heathrow, 런던의 가장 큰 국제공항.)에 내릴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에 넘쳤었거늘, 길도 모르겠고 말도 안 통하는 이 곳 런던에서 과연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앞이 막막해졌다.
히드로에서부터, 한 번 타는 데 한국 돈으로 7천원이나 하는 지하철을 타고 시내 중심부까지 왔다. 오기는 왔는데, 막상 숙소를 찾으려 하니 약에 쓸래도 없는 공간 지각력 때문에 캐리어를 두 손에 바리바리 붙잡고 같은 골목을 돌고 돌며 헤맸다. (그 때문에 같은 햄버거 집 앞에 다섯 번이나 서 있어야 했고, 결국 햄버거 냄새가 너무 좋아서 사먹어 봤거늘, 태어나서 먹어본 햄버거 중에 제일 맛이 없었다. 그런 게 런던에 와서 처음 먹어 본 음식이라니!) 그 뿐인가? 겨우겨우 호스텔을 찾아서 체크인을 하고, 긴 비행의 여로를 푸는 셈 치고 푹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까 여행자 수표를 넣어 두었던 파우치가 사라진 거다. 별 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무려 삼백 파운드다, 삼백 파운드. 아침부터 여기저기에 국제 전화를 돌리고, 관련 서류를 바지런히 챙겨 숙소를 나온 이후에 지금까지 런던은 연수에게 고생스러운 도시일 뿐이었다. 여기 이 남자, 웨인을 만나기 전까지!
“다 먹었어요?”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어차피 다시 안볼 사람인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냅킨을 들어 입을 닦고, 그것을 또 단정하게 접어서 내려놓고 나서야, 이미 한참 전부터 빈 그릇만 쳐다보고 있던 연수에게 물어온다. 생긴 것만 봐서는 사기꾼이나 납치범 같아보이지는 않고, 아니 오히려, 한국 거리를 걷다가 마주친다면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할 것 같은 얼굴이고. 말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고...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핑핑 하고 들릴 듯 했다.
“저, 런던 구경 좀 시켜주세요!”
말을 던져놓고, 연수는 왠지 웨인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어졌다. 얼굴이 좀, 붉어지는 듯도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좋아하는 건 아니야! 는 런던에서 시작해서 한국에서 끝나는 소설입니다. 다시 말해 런던 올 로케로 스타트를 끊는 거죠! 재미있게 봐 주셨으면 좋겠네요~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셨으면 덧글 많이많이 달아주세요. :$
첫댓글 와우!! 참신한 소재에다가 내용도 너무 재밋어요ㅎㅎ!!업쪽부탁드려요~~
잼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