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따뜻해.
영국 날씨가 여름에도 쌀쌀한 건 유명하다지만, 한국을 떠날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얇은 티셔츠만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정 추우면 티를 두 개 껴입으면 되지, 뭐. 숙소 근처의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영국의 지하철) 스테이션을 나오자마자, 그런 생각이 엄청난 오산이었단 걸 깨달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그나마 제일 두꺼운 편인 노란 폴로티를 입기는 했는데, 바지는 죄다 반바지뿐이고 티도 반팔이라 은근히 춥게 느껴졌다. 그나마 오전 나절 동안은 잃어버린 여행자 수표 일을 처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어서 못 느꼈는데, 강가를 걸으려니까 제법 으슬으슬했다. 템즈(Themes) 강의 야경을 보고 싶다고 주장한 건 연수였으니까, 갑자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다짜고짜 런던 구경을 시켜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가 완전히 편할 수는 없었다.
연수도, 한국에서라면 절대 그런 부탁을 안 했을 거였다. 그래서일까. 어딘지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져서 다 먹은 그릇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 가 보고 싶은데요? 웨인이 물어왔다. 템즈 강의 야경이요... 갑자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어 이 곳 템즈 강변.
웨인은 원래가 말이 없는 성격이었고, 연수는 원래는 시끌벅적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편이었지만 어딘지 쑥쓰러워서 굳이 말할 거리를 찾지 않고 있었다.
여덟 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연한 남색, 정도로만 보이는 런던의 밤이 연수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신기하네요. 아직도 밝아... 하늘만 쳐다보고 걷다가 된통 엎어지고 말았다.
아얏.
혼자 있을 때는, 아니 아무 때라도 그녀에게는 길거리에서 엎어지는 일 쯤이야 익숙한데. 그냥 탁탁 털고 일어나면 될걸 왠지 부끄러웠다. 이렇게 불편해서야 같이 여행할 수나 있을까?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눈앞에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응?
“잡아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하긴, 연수는 원래가 이렇게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자 어딘지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연수는 그를 바라보며 하핫, 쑥스러운 듯 웃었다.
고마워요 제가 원래 좀, 하면서 당연히 손을 놓아주려는데,
놓지 않는거다.
이쪽은 보지 않고 먼저 걸어가는 웨인을 바라보며, 연수는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싫지 않아.
좋아하는 건 아니야! #1
- in 런던.
다음날. 여행객인 그녀의 신분 상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밀레니엄 브릿지(Millenium Bridge, 20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템즈 강에 세워진 보행자 전용 다리. 한쪽 끝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이, 다른 한쪽 끝에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있어 관광객들이 자주 이용한다.) 앞에서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왠지 들뜬 마음에 여덟시부터 잠에서 깬 연수는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엠피쓰리와 간단한 필기도구만 챙겨든 채 어제 걸었던 템즈 강변을 되짚어가며 산책했다.
이렇게 혼자 고독을 즐기며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하며 자연스럽게 웨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에 돌아가서 자랑할 일이 많다. 생각나는 김에 연수는 런던 아이가 그려진 엽서를 사서 벤치에 앉았다.
엠피쓰리를 아예 꺼 버리니까, 들릴 듯 말 듯한 물소리와 산책하는 사람들의 걸음소리. 연수는 펜을 꾹꾹 눌러 민호에게,를 적었다.
차민호 얘는 지금쯤 죽어라고 알바나 하고 있으려나.
나 지금 템즈 강을 바라보면서 적고 있어. 멋있지? 여자애 혼자서 그 위험한 외국 땅을 어떻게 돌아다닐 거냐고 난리난리를 쳤었잖아, 니가. 근데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난 지금 여기서 되게 좋은 사람을 만났거든. 나이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 또래 정도인 한국 남자인데, 이름은 웨인이라고 해. 한국 이름도 있겠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어. 그를 처음 만난 건...
“근데 정말 현대미술엔 관심 없는데...”
장장 두 시간이 넘게, 엽서를 쓰다가 산책을 하다가 했다. 엄마, 아빠, 민호, 다른 친구들... 엽서 써줄 사람 명단을 만들어가지고 올걸 후회했을 만큼 끝도 없이 많아서 나중에는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도 작은 가방 정도는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아, 약속 시간 삼십분 쯤 숙소에 들렀다가 온 거였다.
광장 쪽에서 유유히 나타난 웨인은, 유럽에 왔으면 미술관에 가 봐야죠, 라면서 앞장서 걸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나는 정말,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딱 질색인데. 투덜투덜 대면서도 일단 따라 가보았다.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밀레니엄 브릿지와 함께 2000년을 맞아 프로젝트로 기획, 건축한 현대 미술 전시관.)은 생각보다 더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연수는 허리에 양손을 얹어놓고, 만만찮은 적을 맞았다는 듯 흐음, 올려다보았다.
뭔가... 건물이 나한테 fuck you 하는 것 같애.
웨인에게는 들리지 않게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테이트 모던 건물의 형태 자체가 직사각형이 있고, 가운데 손가락과 비슷한^^; 직사각형이 가운데에 있는 모양.)
원래는 오래된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미술관을 짓는다는 발상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런던의 명물로 잡았다는 이 곳. 런던의 대부분 전시관들이 그렇듯 입장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쨌거나 연수도 가벼운 마음이 됐다.
그런데... 미로같은 전시관을 휘적휘적 돌아다닌지 삼십분이나 됐을까? 연수는 도저히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림이 예쁘기라도 하면 와, 잘 그렸네, 감탄이라도 할 텐데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림도 아닌 것이 조각도 아닌 것이, 그저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이 남자는 (물론 연수가 자기 맘대로 결정한 것뿐이지만) 그래도 날 관광시켜준다고 하더니, 자기 혼자 좋아하는 곳에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전선 같은 것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전시품을 한참 응시하고 있는 웨인은 놔두고, 연수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재미없어요?”
자상한 건지 무심한 건지, 그러고도 몇 분이나 있은 다음에야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웨인이 연수 옆에 와 앉았다.
“제가 원래 박물관을 무지 싫어하거든요. 엄마 아빠도 그럴 거면 왜 굳이 유럽까지 가냐고 했는데... 유럽에 이거 말고 볼 게 없나요, 뭐. 웨인은 이런 거 잘 알아요?”
“몰라서 재미없는 거예요?”
“당연하죠!”
묻자마자 대꾸하고, 연수는 웨인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무식한 거 티냈나, 싶어서였다.
웨인은 과연 옅게 미소를 띠고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비웃는 느낌은 아닌 것도 같고... 연수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웨인이 먼저 일어선다.
“따라와봐요.”
“아니, 저는 그냥. 다리도 아프고.”
, 하는데, 웨인이 못 들은 척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아니, 왜 웨인 맘대로예요? 보기 싫다니까요! 어제의 은혜를 금세 잊어버린 연수가 따졌지만 또 못 들은 척. 웨인은 바로 옆 전시실의 한 그림 앞에 섰다.
“나도 예술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옆에 써진 거나 보고 다녔던 거지, 뭐가 뭔지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도.”
웨인이 앞에 선 연수의 어깨를 잡는다. 세지 않게 눌리는 느낌. 연수는 앞의 그림을 쳐다보았다. 역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어두운 색감으로 그려진 바다. 거의 캔버스 전부를 바다가 채우고 있고, 위쪽에 그려진 수평선도 왠지 선명하지가 않았다. 흐릿하다. 그리고... 오른쪽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점처럼 그려진 섬이 있었다.
“그냥, 보고 있으면 쓸쓸하잖아요. 이걸 그릴 때 화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다못해 파도조차 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라는 거 얼마나 지루하고 외로워요. 그냥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보고 지나가는 거라구요.”
왠지 감성적이 된 웨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연수도 다시 한 번 그림을 쳐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그림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있잖아요, 조금만 더 가면 섬 같은 게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가면 물도 있고 동물들도 있고 과일 나무 같은 것도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그 그림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웨인이 연수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풀고 다른 그림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전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전시회든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그저 질색하기만 했던 연수도, 왠지 그림을 그냥 이렇게 봐도 되는 거구나 싶어서 왠지 이대로 미술관을 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첫댓글 훈훈하네요ㅋㅋㅋ 담편 기대합니다
담편기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