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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25.14;00 ∼15:00 제주시벤처마루 10층 대강당 백록담홀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제주도지부 ‘안보의식 고취 위한 나라사랑 안보교육’
김원민 전우의 강연 내용입니다.
월남전과 나
---김 원 민(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
안녕하십니까? 저는 1965년 10월부터 1967년 2월까지 16개월 동안 월남전에 참전했던 김원민이라는 전우입니다.
저는 오늘 ‘월남전과 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릴 내용은, 주월 한국군 전체를 아우르면서, 제가 맹호부대 출신이기 때문에 맹호를 중심으로 월남전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월남전 민간인 피해 문제와, 우리의 안보 현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올해 2019년은 우리 나라가 1964년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지 55년, 그리고 1965년 전투부대인 육군 맹호사단과 해병 청룡여단을 파견하여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54년이 되는 해입니다.
50년이면 강산도 다섯 번 변하는 긴 세월이지만, 지금까지도 월남전쟁은 우리 전우들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온 사건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월남전처럼 국가발전에 많은 영향을 준 전쟁은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빈곤 탈출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국군의 장비 현대화 등 군사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가져온 계기가 된 것이 월남전이었습니다. 여기 우리 월남전 참전 전우들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월남 땅을 밟았던 1960년대 우리 나라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끼니를 잇는 것조차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기였지요. 1965년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 달러 정도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으니, 지난 해 2018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비교하면 얼마나 못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보다 못살았고, 심지어 북한보다도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월남 파병으로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고, 정부와 기업의 베트남 진출 경험을 활용하여 1970년대 중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월남 파병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국가발전에 미친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반만년 역사상 한반도만을 의식하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세계에 눈을 돌리고 웅비하는 계기가 된 것이 월남 파병이며, 국군에게 자주 국방 의지를 심고 전투경험을 갖게 하여 우리 군이 세계적 강군으로 부상한 것도 월남 파병 덕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과 5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던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끌어 올리고, 단군 성조 이래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 주역이 바로 우리 월남전 참전 전우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파월 당시 20대의 팔팔했던 우리 전우들은 이제 모두가 70∼80대의 나이로 백발이 되어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보호받지 못하며, 고엽제 같은 전쟁 후유증으로 해마다 세상을 떠나는 등 아직도 월남전은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전쟁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월남전 참전을 용병이니 뭐니 하며 부정적으로 깎아내리는가 하면, 민간인 학살이라는 있지도 않은 시나리오로 우리 전우들을 욕보이고 있음은 참으로 한탄할 노릇입니다. 용병이니 학살이니 하는 문제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월남전에 참전하였기 때문에 이룩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신화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세계에서 아주 못사는 작은 나라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 나라가 50년 후에 우리처럼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 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과연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을 우리 전우들은 이룩해 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우리가 늙었다고, 또는 자신들과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놓고 “보수 꼴통”이니, “노인들은 무대에서 퇴장할 사람들이니까 투표하러 투표장에 나오지도 말라” 느니, “노인들이 쉬어야지 왜 일을 하려고 그러느냐”, 심지어는 “나라에 짐밖에 안 되는 노인네들 연금을 없애야 된다”는 등등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해괴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노인들을 폄훼하는 말을 들으면 서유석의 유행가 한 곡조가 생각납니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 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이 노래는 노인들이 새 출발을 이야기 하며 희망적으로 끝맺음을 하지만, 늙는 것에 대한 서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늙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겠다는 식의 마음만큼은 청춘이고 열정이 가득하다는 메시지로 느껴집니다.
우리 전우님들 이런 마음가짐으로 씩씩하게 살아갑시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럼, 월남전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월남 파병과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1964년 10월 16일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경기도 가평에 있는 6사단에 배속되었는데, 6사단에 배속된 지 한 달쯤 지나서 1965년 1월초 ‘비둘기부대’ 교육단으로 파견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둘기부대가 무엇하는 부대인지 몰랐고, 군 생활도 얼마 하지 않은 최고 쫄짜로서 모든 것이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비둘기부대는 공식 명칭이 ‘주월한국군 군사원조단’으로 후방 지원과 건설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 월남 파병 부대였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비둘기부대는 일부 경비부서를 빼고는 모두 공병으로 편성됐으며, 특이한 것은 해병 제1 독립공병중대가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부대는 육군과 해병대 공병으로 이뤄진 혼성부대입니다. 해병 공병중대 병력은 포항에서 가평으로 올라와 비둘기 본대에 합류했습니다. 어떤 이는 월남전에 참전한 해병대 장병은 모두 청룡부대 소속인줄 알지만 사실 비둘기부대로도 해병 용사들이 참전했던 것입니다.
비둘기부대는 1965년 1월부터 2월초까지 경기도 가평 현리 6사단 주둔지에서 약 한 달간 파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교육단에서 교육계를 보며 비둘기부대 훈련 계획을 매일 각 부대로 내려 보내는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 경기도 가평은 1월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추운가 하면 손으로 물을 만지고 문고리를 잡으면 바삭바삭 얼음이 얼 정도였죠. 이런 기후조건 속에서도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는 무더운 열대지방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교육을 시켰으니, 훈련도 훈련이지만 추위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한 달간 파월 훈련을 마친 비둘기부대는 1965년 2월 5일 경기도 가평 현리에서 결단식을 가졌으며, 2월 13일 파월 제1진 선발대가 출발했고, 3월 10일에는 부대 전체가 인천항을 출발하여 16일 사이공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이후 비둘기부대는 사이공 북쪽 22Km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자체 능력으로 경계와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와 교량 보수에 착수했습니다. 비둘기부대는 파월 초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도로 신설 공사를 비롯하여, 교량, 학교, 진료소 건설 공사와 태권도 지도, 심리전 활동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월남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 1964년 9월 월남에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 등 140명을 파병하고, 2차 파병으로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비전투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월남에 보낸 이후에도 월남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월남 남부 전 지역에서 지상전이 가열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과 남베트남은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당시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2개 사단을 월남전선으로 빼내려고 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미군이 빠져나가면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북한의 침공을 우려하여 전투사단인 보병수도사단, 즉 맹호부대의 월남 파견을 승낙하게 됩니다. 원래 처음에는 육군 수도사단 1개 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월남전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데다가 수도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부에 건의해서 해병여단인 청룡부대의 파월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10월에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여단이 월남에 파병되었고, 이듬해 1966년 8월에는 보병 제9사단, 즉 백마부대가 파월됨으로 하여 5만 병력 규모의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1965년부터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약 9년에 걸쳐 56만3387건의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비둘기, 맹호, 청룡, 백마, 십자성부대 외에, 주월한국군을 지휘하는 주월한국군사령부, 해군수송전대인 백구부대,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 등 육․해․공군․해병대가 모두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비둘기부대가 월남으로 떠난 후 저는 6사단으로 원대 복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생 데모가 격화되면서 1965년 4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6사단이 위수군으로 서울에 출동하여 태릉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태릉은 현재 국가대표 선수촌이 만들어진 곳인데, 당시는 소나무 밭 벌판이었습니다. 저는 그해 8월 국회에서 전투부대 파월이 의결되자 월남 파병을 자원하여 태릉 주둔지에서 강원도 홍천에 있던 수도사단, 곧 맹호부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수도사단은 그 해 8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사단 단위의 파월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저는 수도사단사령부 정훈대에 배치되어 맹호진중신문 편집과 ‘맹호의 소리’ 방송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복 왼쪽 어깨에는 사단마크인 호랑이 견장과, 그 위에 영문으로 P. I O, 즉, Public Information Officer, 공보병이라는 표지를 달고 활동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현역군인 기자였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공보부가 맹호부대 파월 분위기를 전 국민에게 파급하기 위해 제정한 유호 작사 이희목 작곡 ‘맹호들은 간다’라는 노래를 사단 전 장병에게 보급하기 위해 맹호들은 간다 노래의 녹음 테이프를 들고 예하 부대를 순회하며 사병들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며 훈련으로 고달픈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했습니다.
맹호진중신문은 1965년 10월 초 강원도 홍천 수도사단 진중에서 창간호를 냈는데, 그 머리기사가 ‘강재구 대위 장렬히 산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맹호 1연대 3대대 10중대장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 4일 중대 병력을 인솔하고 홍천 인근의 수류탄 훈련장으로 가서 수류탄 투척 훈련에 들어갔는데,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세 번째 조가 수류탄을 투척할 때, 그 조에 속한 한 이등병병사가 던진 수류탄이 앞으로 날아가지 않고 머리 위로 높이 치솟는가 했더니 중대 병력이 대기하고 있던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막 수류탄을 받으려는 찰나 손과 손 사이를 빠져나와 땅에 떨어졌는데, 순간, 강재구 대위는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습니다. 중대원들이 달려갔을 때는 그는 이미 비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많은 부하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은 것입니다. 강재구 대위의 죽음은 지휘관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가라는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이것이야 말로 강한 군대의 의리요, 신의요, 애정이라 할 것입니다.
그 후 강재구 대위가 속했던 맹호 1연대 3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되었고, 파월 후 1966년 2월 재구대대가 민사작전으로 세운 월남의 피난민 마을 이름도 ‘재구촌’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재구촌이란 이름은 재구대대 주둔 지역의 행정수반인 빈딩성 성장이 붙여준 것이라 더욱 빛이 났습니다. 재구대대는 그 후에도 계속 도로 건설과 가옥 건축, 진료소 설치, 학교 건설 등에 매진함에 따라 그 해 3월에는 촌민수가 점점 늘어 303세대 1328명이 입주하였고, 초등학교에도 남학생 71명과 여학생 51명으로 학생 수가 날로 불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맹호진중신문 창간호를 낸 뒤, 1965년 10월 8일 금요일, 홍천을 떠나 강원도 춘천역을 거쳐 환송식이 열릴 서울 여의도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1965년 10월 12일 화요일 오후 2시, 흐린 날씨 속에 맹호부대 파월 환송식이 여의도 모래 벌에서 펼쳐졌습니다. 1만여 명의 맹호 용사들이 도열해 사열 분열을 하는 가운데, 식장을 메운 20여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하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위문품을 담았던 광목주머니에 여의도 모래를 가득 담아 바늘로 꿰맨 다음 그 위에 ‘조국의 흙’이라 쓰고 배낭에 넣었습니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 음악가 쇼팽을 흉내 낸 것이지만, 전쟁터로 가는 절박함과, 모래알처럼 작지만 피 끓는 나라사랑 정신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래주머니는 제가 월남전선에서 귀국할 때 후임 병사에게 물려주고 왔는데 그 후일담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환송식 다음 날 1965년 10월13일 수요일, 비 내리는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항으로 가서 미군 수송선에 올라 월남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맹호사단 예하의 제1연대와 기갑연대 등 전투 병력은 부산으로 가서 부산항 제3부두에서 월남으로 출발했지만, 우리 맹호사단사령부와 직할대, 그리고 나중에 제100군수사령부, 십자성부대로 독립하는 맹호사단 군수지원사령부 병력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연대 병력과 합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1개 전투사단 전체가 부대이동으로 월남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철모에 총을 메고 완전 군장을 한 채 배에 올랐습니다. 당시 개인 화기로는, 연대 병력의 경우 2차대전과 6․25 사변 때 사용했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군 주력 화기였던 M1 소총을 들고 갔으며, 사단사령부를 비롯한 행정근무부대는 카빈 소총을 개조한 M2 카빈 자동 소총을 휴대하고 월남전선으로 갔습니다. 미군이 쓰는 최신 개인 화기인 M16 소총은 제가 귀국한 뒤인 1967년 하반기부터 주월 한국군에 보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1965년 10월 23일 토요일, 월남 중부 퀴논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인천항을 떠난 지 열흘만이었습니다. 우리는 퀴논의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개인호를 파고 천막을 친 다음 본격적으로 진중신문 발간과 방송 준비를 했습니다.
호출부호 KFVN, ‘맹호의 소리 방송’은 사단사령부 안에 콘센트 건물이 들어설 때까지 보도병인 저와 아나운서 요원, PD 등 3명이 한 팀이 되어 1965년 11월15일부터 퀴논 시내에 있는 베트남 국립퀴논방송국에 가서 퀴논방송국 전파를 빌어 매일 오후 5시부터 20분씩 한국군을 위한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1966년 4월 15일 사단사령부 안에 맹호의 소리방송국
콘센트 건물이 완공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한국말 방송 전파를 월남의 하늘 아래 쏘아 올렸습니다. 이것은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해외에 우리 말 방송국이 설치된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실 1965년 당시에는 북한이 먼저 하노이에 평양방송을 설립하여 주월 한국군을 대상으로 한국어 심리전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할 우리 방송국 설치가 시급히 요청되던 때였습니다.
맹호방송은 하루 9시간 방송 중 7시간은 본국에서 공수돼 온 국군방송이나 KBS 중앙방송, MBC 문화방송, TBC 동양방송, DBS 동아방송, CBS 기독교방송의 패키지프로그램을 방송했고, 나머지 2시간 남짓은 맹호부대 현지에서 제작 방송하였는데 이 시간에는 주로 저희 현역병 보도요원이 전방부대 작전지역에 나가 직접 취재한 전투상황이나 심리전 상황 등을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당시 장병들로부터 인기가 있었던 본국의 패키지프로그램은 ‘고국잡지’, ‘향토소식’, ‘십자성 밤하늘 아래’, ‘위문포스트’, ‘가족통신’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족통신은 고국에 있는 부모 형제 친지들의 육성을 녹음하여 월남에 보내는 방송이었기에 장병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청취했습니다. 그래서 가족통신은 가장 높은 청취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본국에서 보내온 패키지프로그램 가운데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졌던 프로권투 주니어미들급 세계 타이틀전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세계챔피언 벤베누티를 15회 판정으로 눌러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된 일입니다. 이 권투시합 실황 중계 녹음테이프가 본국에서 공수됨에 따라, 그 해 7월 맹호방송에서 중계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들으며 맹호 용사들이 열광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울렁입니다.
당시 저는 작전지역 취재를 하는 가운데서도, 맹호사단장 겸 주월군사령관인 채명신 소장이 주월한국군과 주월미군, 월남군 장병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축하 메시지를 사단장실에서 직접 인터뷰하여 방송하기도 했으며, 사단장이 대민지원 현장에서 연설하는 내용을 현지에서 녹음하여 방송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전투 못지않게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게릴라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에서는 민심이 기반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데, 우리 한국군의 경우 민심 이탈부터 방지하였으므로 베트콩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것입니다.
채명신 맹호사단장 겸 주월한국군사령관은 파월 즉시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 실행지침으로 전 장병이 민사심리전 요원이 되어 한국군이 월남에 오게 된 것을 이해시키며, 베트콩을 주민과 분리시키고 고립시킨다는 방침을 내보였습니다. 이 슬로건은 한글과 월남어로 번역하여 맹호부대 주둔지인 빈딩성 일대에 커다란 입간판으로 만들어 세웠는데, 이 입간판은 미국 신문에도 사진기사로 크게 실려 맹호부대의 주민 사랑 정신을 널리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대민작전과 지원에 힘 기울인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 진료 352만 3364명, 식량 1만 9640톤, 의류 46만 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과 교실 3319채, 교량 132개, 도로 394Km, 태권도 보급 90만 2060명, 경로잔치와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파월 전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우들의 베트남 순례 코스에 꼭 들어가는 꾸몽고개도 그 대표적 민사작전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퀴논 남방 24Km 1번도로에 위치한 꾸몽고개는 해발 300m로, 고개 양쪽에는 각각 500m, 600m의 검푸른 산이 버티고 있어 금방이라도 고개를 삼켜버릴 듯 한 위엄으로 내려 보고 있습니다. 이 꾸몽고개가 바로 빈딩성과 푸엔성의 경계점이며, 또한 크게는 자유월남과 공산베트콩의 국경 아닌 국경선으로 남과 북을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맹호 1연대 작전지역이기도 했는데, 이 고개 남쪽은 베트콩 행정지역으로 여기서는 주민들이 베트콩에 대한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이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사취재차 방문하여 고개에 올라서서 남쪽을 멀리 내려다보면 베트콩이 총을 메고 검문소에서 주민들을 일일이 검문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검문소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한 1번도로의 아스팔트 위에서는 베트콩 지역 주민과 자유월남 지역의 주민들이 하루 한차례씩 생산된 산물을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두 시간동안 물물교환 형식으로 서로 바꾸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베트콩지역 주민들은 주로 돼지, 닭, 해산물 등을 가져오는 반면, 자유월남지역에서는 쌀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베트콩들은 부상
자를 치료할 의약품을 쌀보다 더 선호 했습니다. 그러나 의약품은 월남정부에서 통제품으로 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암거래가 성행했습니다. 의약품은 자유월남지역 시장에서보다 5배 이상 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특히 이 꾸몽고개 장터에는 남자는 출입을 못하고, 여자들만 들어가도록 하는 금남의 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묘령의 여인들은 통제품인 의약품을 브래지어나 팬티 속에 몰래 숨겨와 밀거래를 하곤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맹호 1연대 병사들은 이들이 물물교환 하는 것을 도와주는 한편, 부대에 보급된 쌀을 절약하여 시장을 찾는 자유 지역과 베트콩지역 주민 모두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민사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맹호 지역으로 귀순하는 베트콩지역 주민과, 심지어 베트콩까지 생겨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과 유럽 언론들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맹호의 민사작전’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꾸몽고개 취재내용을 맹호방송과 진중신문에 소개하는 한편, 국내 언론사 특파원들에게도 제공하였습니다.
이 꾸몽고개 민사작전은 1967년 3월에 시작된 맹호와 백마의 군단급 작전인 오작교작전으로 1번도로가 완전 개통되면서 끝이 났습니다. 이 작전으로 하여 베트콩지역이 완전히 해방되어 월남정부 관할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맹호부대는 파월 당시 예하 3개 보병연대 중 제26연대는 본국에 남겨 놓고 1연대와 기갑연대와 포병사령부로 사단편제를 갖추었습니다. 그것은 제106후송병원을 포함한 군수지원사령부가 맹호부대 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6연대를 본국에 남겨 둔 것인데, 1966년 4월 맹호부대군수지원사령부가 100군수사령부, 즉 십자성부대로 독립해 나감에 따라 6개월만인 1966년 4월 15일 제26연대가 추가로 파월됨으로써 맹호사단은 완전한 사단 편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맹호 본대보다 반년 늦게 파월된 26연대는, 6․25 당시 가장 먼저 한만국경 혜산진까지 북진해 압록강 물을 떠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해서 혜산진부대라는 별칭이 붙은 막강한 전투단이었습니다.
26연대가 파월됨에 따라 맹호사단은 퀴논에 사단사령부를 두고, 퀴논 북쪽 푸캇에 호부대라는 별칭의 제1연대, 19번도로에 있는 빈케에 번개부대로 불리는 제1기갑연대, 그리고 퀴논 남쪽 송카우에 혜산진부대인 제26연대를 배치하여 작전을 펼쳤습니다. 특히 맹호사단사령부에는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과 제106후송병원이 자리 잡아 맹호의 군수지원을 했습니다. 특기할 사항은, 당시 청룡부대에는 105밀리 포대만 있고, 105밀리보다 구경이 큰 155밀리 포대가 없었기 때문에 맹호사단에서 155밀리 1개 포대, 즉 ‘628 브라보 포대’를 청룡에 배속시켜 포 지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66년 8월부터 10월 8일까지 보병 제9사단, 즉 백마부대가 월남에 증파돼 닌호아를 비롯하여 청룡부대가 맡았던 캄란과 투이호아 일대에 전개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군은 2개 사단과 1개 여단의 전투부대가 월남에서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월남전을 이야기 할 때 중대전술기지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중대전술기지는 채명신 장군이 제창한 전술개념으로, 전투력의 핵심인 중대단위로 방어 편성을 함으로 하여 중대 조직과 편성을 적절하게 안배한다면 어떠한 적도 물리칠 수 있고, 중대 단위의 기본조직을 활용하여 주민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 심리전이나 대민사업을 편다면 보다 광범위하게 평정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대전술기지에 대해 당시 미군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맹호사단 기갑연대 3대대 9중대가 1966년 8월 9일 캄보디아 국경 두코에서 월맹 정규군 2개 대대의 기습을 받았으나 6시간의 혈전 끝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 작전 교리가 경탄의 대상이 되었고, 중대전술기지의 중요성은 그 후 1967년 2월 15일 청룡여단 3대대 11중대의 짜빈동 전투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두코와 짜빈동 전투 모두 한국군 중대 단위의 소규모 부대가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갖춘 2개 대대, 또는 연대급 월맹 정규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중대전술기지 개념으로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 수백 명을 사살하고 격퇴하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이 후 미군보병학교에 교리 연구 과제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6․25 때 도와준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과 함께 당시 시각으로 볼 때 월남전은 우리나라 안보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월남 파병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된 국가생존과 발전전략으로써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월남 파병이 국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월남 파병으로 인한 외환 수입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총 6억2000만 달러에 달했고, 이 돈은 1967년에서 1971년까지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적 재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만일 월남전 참전이 없었다면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과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댐, 발전소, 제철공장 건립 등 손톱깎이 하나도 만들 수 없던 허약한 나라에서 불과 몇 년 만에 일약 공업국가로 발전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놓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이득은 우리 전우들의 희생의 대가였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만 8년6개월 동안 총 32만 명의 한국군이 월남에 파견되어 전사자 5000여 명, 부상자가 1만6000여 명에 이르렀고, 지금까지도 고엽제 등으로 인해 많은 전우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월남전 당시 베트콩과 그에 동조하던 민간인 적대세력과 싸운 한국군에게 양민 학살의 누명을 씌워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가 하면, 용병이라는 터무니없는 망발로 전우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국격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게다가 전․현 대통령들이 확인도 되지 않은 월남전 민간인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던 일은 매우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지난해 3월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으며, 그 전 해인 2017년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호치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에 보낸 영상 축전을 통해서도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2001년 8월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방한 중이던 베트남 정부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한국군이) 참전하여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사실상 사과를 한 셈입니다.
대한민국이 국군을 월남전에 보낸 것은 월남의 자유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특히 양민 학살은 일부의 주장일 뿐 한국과, 당시 자유월남 정부나 미국 등 연합군 측의 공식적 조사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왜 또 사과해야 합니까?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에 한번도 사과를 요구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논객은, 국군통수권자로서 국군의 자랑스런 해외 파병을 욕되게 하는 역사 자해행위라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우선 용병이란, 개인 또는 집단이 금전이나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국가 또는 단체의 전쟁을 대리하여 수행할 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우리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처음부터 파병 목적이 명확하였고, 한국군의 독자적 지휘권 아래서 작전에 임했기 때문에 용병이란 있을 수 없는 악의에 찬 말이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용병으로는 프랑스의 ‘외인부대’를 들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 월남전 참전자가 용병이란 이론이 성립된다면 이를 결정한 국가와 국회, 관련 기관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민 학살이란 대목입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전선이 없어 양민과 베트콩의 구별이 어렵고, 세계 뉴스의 광장이 되어 비밀이 절대 보장되지 않는 월남 전쟁터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전쟁에 임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전우들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채명신 사령관의 명령과, 엄격한 군법에 따라 방어적 작전 개념으로 월남 양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최우선했던 것입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이 월남의 무고한 민간인(양민)을 무차별 대량 학살 했다면, 한국 사람과 한국정부는 반드시 사죄를 해야 하고 아픔을 치유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한편으로는 답답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가짜 뉴스’가 사람을 잡는 셈입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는, 북한의 지원자로 추정될 뿐, 그 신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수정이라는 한 독신녀가 떠이빈사 고자이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380명, 그 주변에서 1004명이 학살당한 위령제 행사를 연속으로 거행하면서 알려졌습니다. 구수정은 한겨레신문 베트남 통신원 자격으로 1999년 5월 한겨레신문 자매지인 ‘한겨레 21’이라는 잡지에 그 같이 날조된 내용을 보도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한국사회에 알렸습니다.
이 여자가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세운 위령비들과 증오비가 있는 빈딩성 마을들은 남베트남군의 작전 책임관활 지역이라 47개의 연대를 가지고 있는 육군 22사단의 병력이 항상 주둔하며 미군과 한국군 등 외국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 시 주민 대피 방송을 실시하는 등 연계 군사 활동을 함께 펼치곤 하던 곳입니다.
또, 380명이 학살됐다는 마을에 한국군은 그 기간, 그러니까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그곳에서 3개 중대가 작전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전쟁사 공식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에 그려진 군인의 부대 마크는 한국군 맹호 부대 마크가 아니고 월남군 레인저 부대 마크인 것으로 판명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은 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월남의 무고한 민간인(양민) 9000명을 학살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그 당시의 객관적 언론자료나 세계적 공인 문서 등이 그런 사실이 없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주장하는 민간인들은 과연 누구 입니까? 민간인의 옷을 입고 무기를 가진 그들은 월남정부군을 포함한 미군, 한국군들과 싸우던 월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과 그들의 동거인이었던 것입니다. 한국군은 그 여자가 주장하는 민간인, 즉, 당시의 베트콩들과, 무기를 이용해 대적하는 그들의 동거인들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한 것 뿐 입니다.
전쟁 당시 월남 땅에는 2종류의 이념적 민간인이 존재 했습니다. 공산과 민주 편에 선 민간인들입니다. 아시다 시피 많은 전쟁을 치른 베트남의 역사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가 조국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독려 되는 것입니다.
전쟁사 기록에 의하면, 한국군, 미군 등 연합군에게 대적하는 민간인 전사들이 사는 마을이나 지역에서는 연합군 부대가 작전 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월남군이 항상 무고한 어린이와 노약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사전 대피 방송 통보를 여러 번 실시하곤 하는데도 이를 무시하면, 월맹군, 베트콩, 월남군, 민병대, 미군 등의 각종 무기의 포화가 여기저기서 날아들며 전투공방을 펼치기 때문에 피신하지 않은 민간인들만 피해를 보는 사례가 아주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월남 땅의 전쟁터에는 전선이 없고, 현장 조사된 객관적 기록들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 의한 피해인지를 알기가 불가능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월남전이 다른 전쟁들과 많이 다른 주요 특징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악의적 목적을 가진 그 여자는 증거도 없이 무조건 한국군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양민학살이라면, 1968년 3월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미라이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미라이 사건에서 347명∼504명의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밝혀지자 베트남과 미국 사회는 물론,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세계 각국의 유명 매스컴이 주시하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만이 무슨 특권으로 9000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도 무사 할 수 있었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9년에 걸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기간 동안 감춰지고, 그 비밀이 보장이 되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했겠습니까?
있지도 않았던 그녀의 거짓말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근거와 더불어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객관적 공식 증거나 국제적 자료 등의 근거가 없는 편파성이 인정되는 베트콩 기록물과, 당시 어린이였던 마을주민들의 일방적 증언, 그리고 육하원칙이 없고 검증되지 않은 극소수 참전자들의 무용담적 진술만으로 그들 주장의 유일한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월남전 민간인 학살을 주장하는 그 여자는 최근 ‘한-베평화재단’인가 뭔가 하는 조직을 설립해 월남전을 모르는 젊은이나 좌파적 성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베트남 관광단을 모집하여 학살 현장이라는 곳으로 데려가 한국군 월남 참전을 비판하는가 하면, 서귀포 강정마을에 일본군위안부 소녀상을 본 떠 만든, 파월한국군 만행의 상징이라는 ‘베트남 피에타’ 동상을 세우는 등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피에타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죽은 예수의 시체를 안고 비통해 하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트남 피에타라뇨?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여자는 양민 학살이라는 허위사실을 가지고 월남전 참전자를 팔면서 돈벌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아나는 한겨레신문 같은 좌파 언론과 기자, 그리고 무슨 정의구현이니 하는 좌경 성직자와 일부 종교 신자 등이 그녀의 거짓말을 사실인양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도 평화도,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1960∼70년대의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선진국 수준의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 위험은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가 과거보다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는 사라지지 않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안요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열강들도 나라마다의 군사전략을 펼치며 안보 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불안 요소의 존재, 열강들의 안보 강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안보 의식은 현저히 낮은 상황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임에도 ‘안보 불감증’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이미 판명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이나 트럼프의 비무장지대 깜짝 쇼 등의 여파로 인해 평화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착각에 빠져 안보의식이 매우 낮아진 상태라 하겠습니다. 안보 의식이 떨어지는 원인으로서 정부의 국방정책이나 안보교육의 부재, 언론의 역할 부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 별 변화도 없는데, 우리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니 뭐니 하며 마치 평화의 봄이 온 것처럼 포장하는 것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 같은 실정에서 월남 패망을 경험한 우리 월남전 참전용사들이라도 국민들의 안보 불감증을 없애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투철한 안보의식을 일깨우고 학생과 젊은이들의 안보 교육 강화에 우리 전우들이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나이가 많고, 월남전 참전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 시각과 고엽제로 인한 병마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월남에서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앞당긴 원동력이 되었음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우 여러분, 더욱 힘내시고 남은 여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끝으로 한 월남전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우리 전우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면서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국가의 명으로 월남전에서 싸웠다./사선을 넘나들다 살아서 귀국했다./50년이 지나도 우리는 만난다./파월 전우는 만나면 무조건 반갑다./장교든 사병이든 상관없다./맹호도 좋고 청룡도 좋다./백마도 좋고 십자성도 좋다./백구도 좋고 비둘기도 좋다./주월사도 좋고 은마도 좋다./선발대도 좋고 철수병도 좋다./보병도 좋고 헌병도 좋다./포병도 좋고 통신병도 좋다./수송이나 의무병이면 어떠리./훈장이 있든지 없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우리는 그거 따지지 않는다./그냥 만나서 그때 이야기를 한다./월남전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다./두 번 세 번 들어주면 어떠리./모두 긍정적으로 들어주자./함께 같은 부대에 있었으면 더 좋지./전우애로 뭉치면 두려운 게 없다./너도 언젠가는 떠나고/나도 떠날 사람이지만/너와 내가 함께 있었던 자리, 월남전선./사람은 살다가 가면 그 뿐이지만/전우는 영원히 마음속에 있다./자유의 십자군으로서 뛰어난 용맹과 빛나는 전통을 지닌 우리 파월국군./파월 국군이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이면에는/수많은 전우들의 숭고한 희생과/국민들의 한결같은 정성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고/70대의 고령에 처한 우리 파월 국가유공자들은 겨레의 자부심임을 느끼며 살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