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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원망과 모세의 호소
민 11:1-15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 11:1-15 / [다베라라 하는 곳]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이 고생스럽다고 여호와께 온갖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많은 무리의 투정과 불평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몹시 화가 나서 불을 내리시자 그 불이 진지의 한끝에 붙었다. 2) 그러자 많은 무리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모세가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드리자 불이 꺼졌다. 3) 그래서 그곳을 `불붙다'라는 뜻으로 다베라라고 이름 지었다. 다베라라는 지명은 이렇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진영0에 불을 붙이신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4) [애굽이 그립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따라온 이방인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대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자꾸 불평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 고기 좀 먹어 봤으면. 5) 애굽에 있을 때는 생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는데! 어디 그뿐이었나?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까지 마음대로 먹지 않았던가? 6) 그런데 이제는 고작 만나뿐이로구나!.' 7) 만나는 생긴 것이 고수풀씨와 같았고 빛깔은 노르스름하고 투명하게 빛났다. 8-9) 만나는 밤새 이슬과 함께 진지 이곳저곳에 내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에 일어나 만나를 거두어다가 맷돌에 찧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여 얇은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 맛은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과자맛이었다. 10) 모세는 백성이 자기들 천막문 앞에 모여서 우는 소리 하는 것을 듣고는 마음이 무척 언짢았다. 여호와께서도 무척 화가 나셨다. 11) 근심에 싸인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주님, 무슨 까닭으로 이 중을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어째서 이 종을 그렇게도 밉게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무리를 어떻게 책임지게 하십니까? 12) 이 무리를 제가 전부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아비가 자식을 챙기듯 이 많은 무리를 품에 안고 조상 때부터 약속받은 그 땅으로 데려가라고 하십니까? 13) 이 많은 무리가 먹을 고기를 도대체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고기가 먹고 싶다고 저리도 울부짖습니다. 14) 이 많은 무리가 제게는 너무도 힘에 부칩니다. 혼자서 이 많은 무리를 다 책임지려고 하니 그저 아득할 따름입니다. 15) 종에게 정녕코 이렇게 하시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십시오. 제게 은혜를 베풀어 더 이상 이런 꼴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본문은 시내 산을 떠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탐욕과 모세의 하소연을 담고 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1-3) 시내 광야를 떠나 삼일 길을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척박한 거친 광야 길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10:33). 어제의 구원과 내일의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린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받은 은혜와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면 오늘의 환경을 보며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실 만한 악한 말로 불평을 늘어놓을 때 그 모든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진영 전체에 심판의 불을 확산시키지 않으시고 진영 끝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이 아닌 잘못을 환기시켜 바른 길로 가게하려 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불길이 꺼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4-9)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나온 잡족들이 있었습니다(출 12:38).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섞여 살며 먼저 탐욕을 품었습니다. 탐욕은 자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탐욕은 눈이 먼 힘입니다. 그들의 불평은 전염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셔서 양식으로 삼게 하셨으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땅의 양식을 추구하는 자는 하늘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섞여 사는 무리”에 선동되어 하나님을 원망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때를 그리워하는 어리석음이 없도록 우리 안에 섞여 있는 탐욕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탐욕은 죄요,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모세가 여호와께(10-15) “어찌하여”라는 말을 반복사용하며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혼자 백성들의 문제와 짐을 다 짊어지도록 하셨고 지금까지 혼자 그 모든 짐을 짊어짐이 벅차다고 불평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고기를 먹일 능력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자포자기합니다. 모세는 자기 관점이 아닌 하나님 관점에서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함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할 때 지치고 불평하게 됩니다.
적용: 받은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고 받은 은혜는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의 만나를 거두지 않으면 만나는 사라집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얼마나 부지런합니까(수 1:8; 시 1:2, 3)?
믿음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형편과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분명히 불평, 낙심, 원망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지금도 나를 일으켜주시고, 날마다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고 매일 매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하고 오늘도 나와 함께 하사 내 삶에 기적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 설 교 >
맡은 바 책임을 다하라
민 11:14 / 한태완 목사
나는 개미들의 활동과 공동체 생황을 관찰하기 위해 집에서 개미를 키워보았습니다. 음식을 찾는 개미, 알을 돌보는 개미. 병정개미 등 그들은 철저히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으며, 모두 암컷 개미였습니다. 수컷 개미는 번식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지고 짝짓기가 끝나면 바로 죽습니다. 여왕개미는 알을 낳기 위해서만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내가 마구 잡아넣은 개미들인데도 금세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척척해내고 있었습니다. 곤충학자들은 개미가 페로몬을 분비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페로몬은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듯 서로를 확인하고 식량의 위치를 알려주며 집을 짓고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개미들의 세계는 불평을 하는 일이 없고 자기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개미들처럼 질서가 있고 책임에 충실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임과 무책임에 관한 예화를 소개합니다.
먼저 책임을 다한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웨일즈라는 시골에 사는 과부가 어느 날 밤, 자기 아기가 위독하다고 10km를 걸어와 의사에게 왕진을 청했습니다. 의사는 처음에는 가봤자 가난한 과부에게서 사례 받는 것도 문제고 또 안 간다면 아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이해타산보다 의사로서의 책임과 인도적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준비하고 시골길을 걸어 급히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의사의 도움으로 아기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장성하여 영국 수상이 된 로이드 조지입니다. 의사의 책임감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입니다.
또 다른 예화입니다.
피디아스(Phidias)라는 그리스의 최고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다이애나 신상을 조각한 사람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거대한 조각품은 지상 100피트 높이에 세워질 작품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어느덧 일이 거의 마무리되어 그 조각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었는데, 피디아스는 아직도 멀었다는 듯이 조각 뒷부분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정성스럽게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 중 한 사람이 답답한 나머지 물었습니다. "선생님, 예술도 현실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각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인데 100피트 위에 세워질 조각의 머리 뒷부분의 머리카락을 누가 본다고 그렇게 시간을 들이십니까?" 이에 피디아스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보고, 두 번째는 역사가 평가하기 때문이네"
한 번쯤 깊이 새겨봄직한 말입니다.
이번에는 무책임에 관한 예화입니다.
1923년 영국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초호화 유럼선 '타이타닉호'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들이받아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그 곳에서 불과 50㎞ 떨어진 곳에서 캘리포니아호가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사고현장으로부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자 타이타닉호 무선사들은 필사적으로 구조요청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호에도 무선사 한 사람이 타고 있었으나 그는 무전기를 꺼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호는 대형참사를 까맣게 잊은채 항로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만약 무선사가 무전기를 켜 놓았더라면 '타이타닉 참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선사 한 사람의 무책임이 엄청난 희생을 낳은 것입니다.
또 다른 무책임에 관한 예화입니다.
1865년 4월14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 부부는 극장 2층의 귀빈석에 도착했습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로 환영했고 링컨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습니다. 연극 공연 중간에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동안 링컨이 부인 메리 토드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유럽 여행을 한번 하고 그 다음으로 축복받은 땅 가나안 지역 성지순례를 해보고 싶소. 특별히 예루살렘 땅을 걸어보고 싶구려. 그 곳은 예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주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지 않소. 주님이 직접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의 언덕, 거룩한 땅, 예루살렘 ….”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총성이 극장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것은 부주의한 경호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암살자 존 윌크스 부스가 링컨에게 접근해서 그의 머리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입니다.
우리시대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일이 터져도.....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장교들은 '돌격'이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만 한다고 합니다. 리더쉽에 있어서 「책임의식」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백성은 다 못해도 적어도 리더는 5분 정도는 더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다 도망가도 리더는 끝까지 '내 책임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파산한 일본 기업가들이 눈물로 회개하는 기자회견장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아랫목에 내려간 사람은 「배신자」와「책임에서 도피한 사람」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소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유학생의 절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은 내가 유학 왔다고 부러워 하지만 실상 나는 유배당해 왔습니다."
나 같은 인간이 아버지의 체면을 구길까봐 집에서 강제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버린 케이스입니다. 이제는 가정에서도 책임의식을 찾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자식은 누가 낳았는데 누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가요?
지옥 아랫목에 가면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을까요?
어떤 직업의 사람들이 가장 많을까요? 우리 모두 그 곳에서 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는 감당하지 않고, 그들의 해야 할 일만 강요하는 자에게는 오해와 고통만 뒤따를 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학생회 여름 수련회를 바닷가로 갔다가 한 학생이 심장마비로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학생의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그때 교회 담임 목사님이 울부짖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실 그 목사님에게 실제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잘못은 없지만 지도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영혼을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교사의 잘못으로 어린 영혼이 실족케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책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맡겨 준 자에게는 많은 책임을 물으시고, 적게 맡겨 준 자에게는 적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는 어린 영혼들을 진리와 소망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실족케 하여 그 영혼을 멍들게 하고 죽게 만드는 교사인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의 일입니다. 유방의 부하 장수 중에 번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번괘가 이끄는 부대가 항우의 부대에게 포위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번괘는 전령으로 하여금 육군에게 위급하다는 정보와 함께 구원을 요청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책임을 맡은 전령은 미친 광인으로 가장을 하고 발각되었을 때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입 속에 불덩어리가 된 숯덩이를 집어넣어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령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적에게 발각,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벙어리, 미친놈으로 인정되어 무사히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맡은바 임무를 완수하였고, 이로 인하여 번괘는 원군을 받아 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열국을 통일시켰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소중한 혀를 불태우면서까지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20:24)
유엔 통계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약 사분의 일 가량이 빈곤으로 말미암아 기아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60억 지구 인구 중 27. 2%에 해당하는 16억 2,0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있다는 보도입니다. 이는 하루에 약 40,000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고 있는 꼴이 됩니다. 또한 빈곤인구의 61.6%가 아시아에 살고 있으며 나라별로는 인도가 제일 많은 빈곤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미래 학자는 지구는 약 110억의 인구가 살아도 넉넉하게끔 만들어져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소득의 불균형과 인간의 자연 파괴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빈곤이라는 자업자득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기독교는 확실히 세계의 기아문제에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는 이 문제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셨지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없어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간구가 비중 있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온 세계인들을 향해 그 날에 족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남의 것을 빼앗을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기도이며 나의 양식만 아니라 모두의 양식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인 다니엘 웹스터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저명한 인사 스무 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서로들 담소를 나누는데, 웹스터만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웹스터 씨, 당신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모두 주목한 가운데 웹스터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저는 참으로 엄숙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말과 행동을 장차 올 그 날에 모두 다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금년에는 좀 더 성실하게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깨닫고 충성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고 축복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황을 이기는 신앙
민 11:10-23 / 김홍도 목사
세계적인 에너지(Energy) 파동으로 인한 파문이 한국에도 밀어 닥쳐서 석유값이 59%나 인상되고 모든 물가가 폭등함으로 극심한 경제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모든 민심이 동요되고 불안에 떨게 되고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신앙을 가진 크리스챤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이 불황을 이길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불황에 직면해서 믿음으로 극복한 사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그 중에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으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서 배불리 먹게 해 주셨는데, 그 백성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원망, 불평했습니다.
이 만나는 진주 같이 생긴데다가 맛은 기름이 섞여 고소하고 맛이 있었는데도, 그나마 배불리 먹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기를 민수기 11:4-6에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고 하면서 울어댔습니다. 모세가 백성들과 울며 탄식하는 모습을 보고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간 큰 반란이 일어나서 자기를 반역하고 돌질까지 하게 될 판이었습니다.
모세가 엎드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1-15).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 혼자 질 수 없다고 하니까 70인 장로들을 다 데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임한 성신을 그들에게도 부어 주도록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되 하루나, 이틀이나, 열흘이 아니라, 코에서 냄새가 나서 싫어지도록 1개윌간을 먹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명이 온데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바람이 불더니, 사방에서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지면에 덮이는데, 하룻길 되는 지면에 두 규빗쯤 쌓여서, 백성들이 잡아다 영양 많은 메추라기 고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여기 보면 모세도 이 불황을 이기지 못해서 "내가 이 백성을 잉태했습니까, 내가 낳기를 했습니까, 차라리 죽여 주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황을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1. 창조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불황속에서도 불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물론 모세까지도 창조주가 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들을 잉태했습니까? 차라리 죽여 주시옵소서" 그 뿐 아니라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소떼와 양떼를 잡은들 되겠습니까? 바다의 고기를 다 몰아온들 되겠습니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까짓 불황쯤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고,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먹고 있었으며 반석에서 나온 물도 마시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만들어 낼 수가 있으며, 또 예비해 두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 인류가 필요한 모든 에너지는 다 예비해 두신 것인데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불황입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자동차들이 주유소 앞에 줄을 서는 것을 보았고, 유류파동 때문에 야단법석 이지만 사실은 지하에는 아직 100년이상 쓸 석유가 있는데,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아껴두고 퍼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의 종말까지, 인류가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설혹 석유가 다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무한한 태양열이나, 원자력을 이용해서라도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 하나를 만들어 내려면 30내지 50개의 잎이 있어야 필요한 수분과 영앙을 빨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과수에는 1,000개 열리는 나무가 평균 10만개의 잎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3만 내지 5만개의 잎이면 되지만 하나님께서 비바람에 떨어질 것 등 다 예상하시고 넉넉히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필요한 것을 넉넉히 예비해 두시지 않았겠습니까? 꿩이 새끼를 겨우 몇 마리씩 키우는데 알은 보통 10-30개의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짐승에 게 알이나 새끼떼를 잡혀 먹힐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넉넉히 낳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동질의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결코 굶어 죽게 하거나 얼어 죽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음식보다 중한 목숨을 주신 하나님이 음식을 안 주겠으며 의복보다 중한 몸을 주신 하나님이 몸에 필요한 의복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마태복음 6:33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불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불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9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 긍정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역경과 불황에 처할 때, 우리의 생각과 말이 부정적으로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긍정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울며불며 원망과 불평 탄식 투성이의 말만 했습니다. 게다가 종살이하며 벽돌굽던 애굽 땅이 그립다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말을 들을 때 심히 진노하셨다고 했습니다. 불평, 원망, 탄식하면 점점 더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노아는 홍수심판 때에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으며 방주에 타서도 무서운 홍수를 내다 보지 않고 삼층 꼭대기에 창문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10명 정탐꾼의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을 듣고 "이제는 다 죽게 됐다"고 울며 탄식하던 사람은 그들의 말대로 광야를 배회하면서 다 죽어버렸고, 끝까지 긍정적인 말을 하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문제없다. 괜찮다"고 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불황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됩니다. 이런 긍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민족은 불황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슨 문제이건 문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해결의 열쇠도 있는 법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긍정적인 믿음만 가지면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930년 불황이 세계적으로 휩쓸 때 미국에도 극심한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미국이 그렇게까지 불황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불황이다. 불황이다" 하고 "큰 일 났다. 큰 일 났다"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게 되서 은행이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은행이 문을 닫으니, 기업체와 회사들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즈벨트 대통령이 매일 저녁 라디오 방송 "노변담화"라는 시간에 나와서 루즈벨트 정부는 이 불황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신뢰감을 국민들에게 넣어주자 국민들이 다시 정부를 신뢰하여 돈을 은행에 예금하게 되어 은행이 일어나고 공장이 다시 돌아가고 회사가 번창하게 되자 불황은 극복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성도들은 긍정적인 신앙을 불황일수록 더욱 굳게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3:5-6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지난날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도 기적적으로 건너고, 기적 가운데 매일 만나를 받아 먹으면서도 지난 날의 은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불황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겠다고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32:7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려울 적마다 6·25때 어느 섬에 피난 가서 먹을 것이 다 떨어져 풀을 뜯어다 쌀 한 줌 넣어서 풀죽을 끓여 먹고, 겨울에 땔감이 없어 마지막에는 나무뿌리, 풀 뿌리까리 뽑아다 때니, 산은 저절로 보들보들하게 개간이 되던 생각을 해봅니다.
또 저 남쪽으로 피난가서 먹을 것이 없으니 겨죽을 끓여먹고, 밀귀리를 익혀 먹다가 심지어 술찌꺼기 까지 물에 풀어 먹던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극심한 기근과 불황속에서도 우리가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앞으로 버리시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6·25 사변 당시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공산화되고 멸망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장마철인데도 비행기가 뜰 수 있게 되고 전황이 바뀌게 되어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6·25 동란때 U.N.군이 한국에 참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 U.N.군의 한국 참전 여부를 결정할 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U.N.군이 한국을 도울 수가 없는데, 그날 아침 소련 대표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캐디락(Cadilac)을 타고 가는데 이상하게 엔진이 꺼져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만져도 안 되서 결국 고쳐가지고야 도착했을 땐 이미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 참전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기적 가운데, 16개국 유엔군이 들어와서 이 땅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까지 우리가 살아 온 것이 개인이나, 국가나 우리의 힘과 재주로 살아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 온 것입니다.
<4. 하나님께 근거를 둔 경제생활>
이스라엘 나라에 가장 큰 경제불황은 신당을 짓고 우상 숭배를 많이 했던 아합 왕 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이 때 가장 불황을 잘 극복하고 안전하게 생활한 사람은 어느 부자나 권세가가 아니라, 가장 가난했던 사렙다 과부였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던 것을 선지자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가져다 바치고 그 흉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통의 밀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여, 불황을 잘 견디고 평안한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불황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축복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불황일 때 더욱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말라기 3:10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더욱 철저한 순종의 생활을 해야 축복과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가뭄이 와도 시들지 않는 것과 같이 불황 중에도 기적과 축복을 더욱 체험할 수가 있게 됩니다. - 아멘 -<1979년 7월 15일 주일대예배 설교>
여호와의 불
민 11:1-6 / 문기태 목사
지난 주간에는 대구의 한 지하철 안에서 일어난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과 같이 죽고 싶다고 지하철에 인화물질을 갖고 들어가 방화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상황실 관계자와 기관사가 당황하여 상황 판단을 잘못하여 피해가 크게 늘었다고도 말합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저는 이런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차된 지하철 안에서 불이 붙었는데 그처럼 많은 사람이 아주 짧은 시간에 희생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실수와 범죄도 큰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시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국가 신인도가 두 단계나 낮게 전망되며 주가가 떨어지는 것과 외국 자본의 유동을 보면서 위기가 다가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구 지하철 사건 같은 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한반도 전역이 불탈 것입니다. 수십년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대부분 불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기도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또한 무서운 불이 붙어 희생자가 많이 난 이런 사건을 우리는 뉴스와 사람들의 말에 의해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성경에 비추어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와 세상을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릴 것입니다.
성경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진 끝에 여호와의 불이 붙어 사르게 하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 불이 얼마나 강했는지 다베라라는 지명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베라는 다 베어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사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불이 그들중에 붙어 타버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의 진에 불을 보내셨을까요? 1절에 보면 '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진노하시고 그들에게 불을 보내셨습니다. 그 불이 활활 타오르자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자주 잊습니다. 그래서 악한 말도 함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 만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을 때가 많습니다.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판단되시면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혹 이번 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원망하는 악한 말로 인한 것은 아닐까요? 나와 내 가족이 희생되지 않았음에 다행으로 여기지만 말고 우리의 허물때문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원망하는 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들으시지는 않았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원망은 해보았을 것입니다. 원망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망할때 악한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혹은 사람에 대한 악한 원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조심스럽게 그로인해 하나님께 불경스런 자세를 키우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살펴 보십시오.
자,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앞에 악한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원망의 악한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고 울며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노예생활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자자손손 태어나자 마자 노예가 되어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소망 없는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들어와서는 하나님께서 첫날부터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걷는 걸음마다 지켜주셔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나쁜 짐승이나 해로운 해충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신들에게 능력이 있어서 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체가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들판에 나가 만나를 한 되, 두 되 주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살벌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고백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반석에서 물이 터져 그 물을 손에 움켜쥐고 마시면서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감사하지는 않고 불평하고 원망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고기를 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이 진짜 고기를 못 먹은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는 수백만 마리의 양떼와 소떼, 염소 떼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므로 가끔 한 마리씩 잡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 맛을 전혀 못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은 재산이므로 마음대로 잡아 먹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실컷 먹고 싶은 욕심에 고기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에서 볼 때 고기 달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탐욕에 가득차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탐욕이 생깁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원망과 불평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원망 하는 사람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평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가진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우리 집사님들과 필리핀에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매연이 심한지 한 시간동안 차를 타고 가니까 가슴에 통증이 와서 손수건으로 마스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후예배에 사진을 보시겠지만 폐차시킨 자동차 엔진에다가 철판을 땜질해서 씌여놓은 고물 지프니를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씩 타고 다녔습니다. 한달에 10만원정도 밖에 안되는 수입으로 사는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좋은 것을 마음대로 누리며 살고 있는지 실감하고 왔습니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필리핀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보다 훨씬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할 때는 열심히 부르짖어 응답되었는데 지금 우리는 정말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잊고 불평하며 없는 것만 찾아 원망하는 악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갖고 싶어하는 고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갖고 싶어하는 고기가 여러분의 마음에는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금 자신이 받아 누리는 은혜를 헤아려 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인지, 돈의 힘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모세혈관 하나만 터져도 모든 것이 끝장날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는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하고 원망의 말을 쏟아 놓는 것은 아주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아주 무서운 일임을 기억하시고 오늘부로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 있는 불평과 원망을 다 쓸어 버리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불신할 때 원망의 악한 말이 나옵니다.(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끌어들이실 때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습니다. 거기에 양식이 없다는 것, 물이 없다는 것,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일 수 있는 준비도 하시고, 목 마르면 마시게 할 준비도 하시고, 행여 만나가 질리면 고기라도 주실 준비까지 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자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고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정말 고기가 먹고 싶으면 '하나님,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고기를 먹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였습니다. 얼마나 얄미운 자세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고기 먹고 싶은데, 정말 하나님이 고기를 줄 수 있겠는가? '하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편 78편 22절을 보면,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영적으로 잘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내게 없는 것을 주실 것이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곤경에서도 원망의 악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 안되니까 뭔가 다른 것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뜻대로 잘 안되니까 함부로 원망의 악한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중에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정작 하나님을 믿어야 할 순간에 믿음이 없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려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원망과 불평을 앞세워 불신앙을 드러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하나님만 의지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언제나 신뢰하는 믿음이 충만합니까?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권자요, 내 삶의 유일한 통치자인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힘들 때도, 가난할 때도, 위기를 만날 때도 함부로 불평하며 원망하면 안됩니다. 시험이 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께 힘써 나아와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불쾌하다고 함부로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악한 말, 원망의 말, 불평의 말을 쉽게 뱉어내서는 안됩니다. 무조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만 맡기고 기도하며 믿음의 말을 많이 하는 덕스러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악한 자의 충동에 속으면 원망의 악한 말이 나옵니다.(4)
하나님의 백성들이 울며'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 꼬?' 한 것은 악한 자들의 충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1장 4절을 보면 이상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예이면서도 집안에 노예를 데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종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얽히고 설킨 잡족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자 이 잡족들이 함께 짐을 싸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만 남자가 60만 명이라고 했으므로, 잡족들과 남녀노소꺼자 다 합하면 300만 명 이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입니다.
그런데 이 잡족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 만나만 먹다가 질려서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며 소리내어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이 불평이 전염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현실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의지하고,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잡족들의 이 같은 행위를 가만 둘 리가 없습니다. "만나를 먹고 연명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인데, 이것도 모르고 감히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다니." 하고 호통을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전염되어 함께 울고 난리법석을 떨었으니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섞여 사는 무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밤낮없이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잘못하면 내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탐하고 좋아하니까 나도 덩달아 탐하고 좋아하는 시험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평하니까 덩달아 불평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원망하니까 따라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극을 받아야 되고, 거룩한 백성들을 통해서 좋은 영향력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살기 위해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이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다워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아름다와야 합니다. 성숙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며 살아야지 나쁜 영향을 받으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영향을 주는 자입니까? 받는 자입니까? 물론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입니까? 나쁜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입니까? 좋은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까? 나쁜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까?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목사님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듣다보니 저에 대한 감정이 참 좋지 않았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도 성장하지 않고 유익이 별로 없었습니다.신앙생활, 교회생활이 별로 즐겁지도 않고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까 아니더랍니다. 들은 만큼 선입견을 가진만큼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목회에 협력자가 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자 자신에게 축복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상하게 부정적인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말을 듣고 정확하게 확인하지도 않고서 그대로 믿고 함부로 원망하거나 불평하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섞여 사는 무리의 영향으로 탐욕을 품고 울며 원망하였다고 잡족에게만 심판이 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재앙이 바로 그들에게 내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나쁜 영향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믿음을 드러내고 오히려 그들앞에서 감사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망하지 않으려면 누가 충동을 하여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능동적으로 좋은 영향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살면 원망의 악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원망의 악한 말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 악한 사람들의 말에 자극 받아서 탐욕을 품고 원망의 악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기브롯 핫다와', 탐욕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먼저 정신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살라 버립니다.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거룩한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심판의 불, 소멸의 불이 꺼지게 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2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불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르기전에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통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징계를 멈추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이 탐욕에 대해, 원망의 악한 말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 받고, 경건생활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길 바랍니다. 믿음의 진보를 멈추고 엉뚱하게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의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중단없이 전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랩
민 11:1-9 / 이동원 목사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로 누군가가 무슨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르쳐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작( ) 삼( )] 정답은 물론 ‘작심삼일(作心 三日)’이지요. 그런데 한 학생이 쓴 답이 ‘작은 삼촌’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작은 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더랍니다. 틀린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작심삼일의 실패를 목격하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시내 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을 것에 대한 기대를 안고 시내 산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주변에서 보낸 시간은 11개월여에 달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 산까지는 3개월 남짓했지만 여기 시내 산 일대에서 거의 일년 가까이를 지체하게 된 것입니다. 신1:6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시내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지 오래니” 그들이 시내 산 일대에서 상당한 오랜 시간을 지체하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다시 민10:11을 보십시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지 두 번째 해 둘째 달-이때가 바로 이스라엘이 시내 산을 떠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전기가 된 유월절 사건을 기점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삼 개월이 경과하여 이 백성들은 시내 산에 도착했고 그리고 그 다음 해 둘째 달에 떠났다고 했으니까 약 11개월을 지체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가 그들의 행진을 이렇게 지체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새 결심을 단단히 하고 드디어 시내 광야를 떠나 이제 바란 광야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민10:1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꼭 사흘이 지나간 것입니다. 민10:33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때에--”그리고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는 다베라(3절-불사름) 그리고 기브롯 핫다아와(33절-탐욕의 무덤)에 도착한 것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시내산 동북 55km 지점의 현재의 아인 엘 하드라(Ain el Hadra)지역으로 간주됩니다. 여기 까지가 약 사흘길인 셈입니다.(출애굽 지도 참조) 그런데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시작합니다. 이제 시내 산의 결심은 이 백성에게 다시 작심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심삼일의 불평과 원망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일까요? 오늘의 우리는 과연 다를까요? 그러면 우리의 광야 행진에서 오늘 우리가 거듭하는 이 원망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인생의 길을 가면서도 원망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의 건망증, 곧 우리의 망각 때문입니다. 무엇을 망각하기 때문입니까?
1.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모든 은혜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들이 노예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었던 홍해를 도강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목마름의 고통에 시달릴때 마실수 없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고 단물이 되게 하신 일, 르비딤 반석을 쳐서 갈한 목을 축이시게 한 일-다 그의 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듯 여기 까지 오게 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불평하고 있습니다. 11: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우리가 원망의 언어를 쏟고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일을 매우 심각한 악(악한 말-1절)으로 간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불을 일으켜 진영 끝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다베라’ 곧 불사름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영 끝이었을까요? 아마 그날의 원망은 진영 끝에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된 때문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공동체의 행진에서 끝에 위치한 사람들은 헌신 자들이나 일꾼들이 아닌 구경꾼의 자세를 가진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일꾼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구경꾼들이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할일은 무엇입니까? 구경꾼의 자세를 청산하고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은혜를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시는 일입니다.
2. 현재의 축복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4-9절 까지는 엄격하게 말하면 다베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먹을 것을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메뉴가 바뀌지 않는다고 이제는 만나만 만날 먹는 것이 지겨워졌다는 것입니다. 9절은 분명하게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고 증거합니다. 광야의 만나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축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못한 것입니다. 현존의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는 깨달음이 실종된 것입니다. 5-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리 광야에서 음식을 대할 수 없었을 때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내리는 만나는 기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히브리어로 ‘만후’(저것이 뭐냐?)고 외치다가 그 이름은 ‘만후’ 곧 ‘만나’라고 칭한 것입니다. 처음 그들은 만나의 맛을 ‘꿀과자’(출16:31)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 8절에서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하다가 후일 ‘하찮은 음식/박한 식물’(민21:5)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축복에 익숙해 지다보면 더 이상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이 장애인의 날이었고 우리 교회 여러 성도들이 장애 체험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새삼스럽게 내가 건강한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건강한 두발로 대지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장애인들입니다.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한가지의 결격 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믿음을 갖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광야에 아직도 만나는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에게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3. 미래의 약속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이 광야에서 특히 불평과 원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지금 지나는 이 바란 광야가 크고 적막한 아무것도 없는 광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1:19이 묘사하는 이 광야의 특성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그 광야가 바로 바란 광야이었던 것입니다. 신8:15도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바란 광야의 묘사로 이해합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광야를 지나야 그들은 비로소 약속의 땅으로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는 이제 이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자 하는 주의 놀라운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약속을 망각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가나안’을 거꾸로 ‘안나가’로 읽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행진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는 일입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is yet to come) 20대초의 저의 인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책방에서 우연히 접어든 책 한권이 제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리챠드 바크가 쓴 ‘조나단 리빙스톤 시걸’/ ‘갈매기의 꿈’이었습니다.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동료 갈매기들이 먹이 찾기에만 열중하고 있었을때 그는 높이 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높이 날면 멀리 새로운 세상을 볼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추방당하지만 그는 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의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때이어서 저에게 이 갈매기 조나단의 이야기는 제가 그리스도안에서 보아야 할 미래를 암시해 주는 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적당한 직장을 구하여 안정하는 길과 미국 유학을 통해 믿음의 길을 떠나는 두개의 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마침 신문에 광나루 워커힐 호텔에서 영어를 하는 직원을 뽑고 있어서 원서를 제출한 터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매기의 꿈을 읽고 저는 응시를 포기하고 유학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은 주께 맡기고 일단 비상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신학 공부를 위해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NW Airline비행기 좌석에 올라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저는 저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저의 경제적 고통속에 있는 저의 가족들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내 미래를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제부터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비행 연습을 하겠습니다. 주께서 저를 훈련시켜 주시고 주님의 때에 주님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주님의 때에 저를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저는 이 곳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모두를 향한 미래의 약속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을 따라 비상할 준비가 되어 계시다면 이제 원망이나 불평일랑 푸른 창공으로 던져 버리십시오.
어제 10일간의 우주 탐사를 마친 한국 역사상 첫 우주인 이소연 자매가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광주 성지 교회 이길수 안수집사와 정금순 권사의 1남 2녀중 장녀로 어려서부터 기도안에서 자라온 믿음의 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정 금순 권사는 특히 딸 소연이가 “하늘을 나르는 인물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매일처럼 딸과 QT를 나누었고 이 소연 자매는 늘 어머니와 고향 교회에 기도 제목을 전해 왔다고 합니다. 소연 자매는 한국을 떠나기전 지구로 귀환하고 귀국하면 제일 먼저 고향 교회에 와서 간증을 나누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내일을 향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준비된 선물입니다. 자, 과거에 은혜를 주신 주님, 현재 내 인생의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고 계신 주님,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붙들고 살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시라면 왜 원망하십니까? 왜, 불평하십니까?
예상 못할 은혜와 믿음
민수기 11:1~14, 22~23 / 김홍도 목사
예상 못할 은혜와 믿음
올림픽 게임에서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야구의 나라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최강의 야구팀인 쿠바를 두 번이나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을 보고, 해설하는 분이 마지막에 “한국의 야구팀이 미국을 비롯해서 쿠바까지 6개국 팀을 한 번도 지지 않고 다 이기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예측도 못 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일도 상상 못 할 일이 일어나거늘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상상도 못 하고 예측도 못 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로 향해 갈 때에 큰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사는 무리(mixed multitude)가 불평하기 시작하니 그 불평이(complaint) 삽시간에 염병처럼 퍼져 갔습니다. 불평의 내용은 민수기 11장 5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하며 불평하고 또 하나님이 매일새벽 내려 주시는 ‘만나’ 는 각종 비타민도 들어 있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찧어서 빵처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던 영양 많고 맛있는 하나님의 음식인데 맛이 없다고 불평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 했겠습니까? 여호와의 진노가 임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하셨을 때, 모세가 민수기 11장 22절에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정만도 60만 명인데 어떻게 이 큰 무리를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 한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모세도 의심하고 믿지 못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를 민수기 11장 23장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與否)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 한 일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에 강한 바람이 불어오게 해서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이스라엘 진중 사방에 내려와 덮이는데 두 규 빗 즉, 90㎝ 두께로 내려와 쌓였습니다. 메추라기 떼는 몇 날 며칠 떼를 지어 날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나 내려 앉아 머리를 쳐 박고 정신없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이 메추라기 고기를 구워먹고, 볶아먹고, 삶아먹으며 고기를 실컷 먹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신 말씀이 이루어 졌습니다.
1. 백성의 불평과 원망
① 섞인 무리(mixed multitude)의 불평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인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종살이 하던 애굽 땅을 그리워하면서 불평을 했더니 온 무리에 염병같이 퍼져서 온 백성이 울며불며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진중에 불을 내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불살랐습니다.
성경에 “섞인 무리” 혹은 “쓴 뿌리”란 말씀이 종종 나오는데 이 “섞인 무리” 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하면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애굽 사람이고 부인이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남편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부인이 애굽 사람이거나 해서 피가 섞여 사는 사람을 의미 합니다. 혹은 애굽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섞여서 출애굽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땅을 그리워하며 불평하기 좋아한 것입니다. 민수기 11장 5~6절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 하니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의 “섞인 무리” 란? 성경 강해집을 쓴 Mc Gee 목사에 의하면 별 일 없는 한 주일 낮 예배에는 참석을 하는데 밤 예배나 성경공부 하는 데는 안 나오고 기도회 같은데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등산을 가거나 조기축구회는 잘 나가고 끼리끼리 놀러 다니기는 잘 하지만 교회봉사는 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섞인 무리” 들입니다. 이 섞인 무리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만나’ 를 가지고도 불평했습니다. 민수기11장 6절에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라고 불평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라 각종 비타민이 다 들어 있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입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했으니 얼마나 맛있고 좋은 음식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불평만 했습니다. “만나” 는 오늘날 “설교말씀”, “생명의 양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내의 “섞인 무리” 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설교가 이러쿵저러쿵 비판하거나 불평하기만 좋아 합니다.
9년 전 MBC 사건이 터졌을 때 교회 주변에 남자 권사 대여섯 사람이 몰려다니며 불평하고 별별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다하며 다니다가 주동인물 권사가 갑자기 병명도 모른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모임이 해산되고 없어졌습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이런 “섞인 무리” 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② 모세의 불평
모세와 같은 위대한 영도자가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울었더니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에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했고, 12절을 보면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 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잉태를 했습니까? 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다음 13절에 보면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하고 15절에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즉시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는데도 “...보행자가 육십 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고 불신앙의 말을 할 때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고 하시며 바다에 세찬바람이 불어오게 해서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이스라엘 진중에 덮였는데 약 90㎝, 즉 1미터 가까이 날아와 쌓이게 해서 한 달 동안 실컷 먹고 남게 했습니다.
2. 상상 못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못 하실 것이 없음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 하오리이까” 하고 모세 자신도 의심했지만 하나님은 고기를 실컷 먹이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7장에도 이와 같은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북 왕국 수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져서 오늘은 내 아이를 잡아먹고 내일은 네 아이를 잡아먹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나귀머리 하나에 80세겔 요즘 말로하면 돼지머리 하나에 100만원 하고 밀가루 한 포에 100만원 넘게 하는 상황인데 선지자 엘리사가 예언하기를 “내일 이맘때에 밀가루 한 포대에 5천원하고 보리쌀 한 포대에 5천 원 할 것” 이라고 했더니 왕의 신하 중 한사람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말하며 의심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예측도 못 할 일이 일어날 것 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큰 군대가 쳐 들어오는 소리가 아람군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용병을 끌어 왔구나 생각하고 그 많은 군량미 밀가루와 보리쌀을 버려두고 혼비백산 도망갔습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사마리아성에 네 문둥이가 아람 군 진영을 보니 조용한 것을 보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가보자, 기왕 굶어 죽을 바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가보자’ 하고 아람 진중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밀가루, 보리쌀, 음식과 군복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 실컷 먹고, 힘껏 짊어지고 와서 이스라엘 군대에 알려주었습니다. 거짓말인줄 알았다가 사실임을 깨닫고 성문을 열어 재끼고 물밀 듯이 백성들이 나가 많은 양식과 의복을 가져왔습니다. 100만원하던 밀가루, 보리쌀이 5천원에도 안 팔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하던 이스라엘 나라의 장관은 군중의 발에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8.15해방 때도 사실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해방을 맞게 되었고 6.25때 UN군이 파병된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3. 절망적 환경에서 우리가 가질 태도
①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하셨습니다. 암담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굳세게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② 불타는 심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다면 기도에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아 33장 2~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 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숨겼던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시고 예상치 못했던 일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망우리 변두리에 세계 최대의 감리교 성전을 짓고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예측도 못한 일입니다. 2006년도에는 세계감리교대회를 역사상처음으로 교회에서 치루었고 역사상 가장 훌륭하게 치루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부터 상상 할 수 없는 사탄의 시험과 방해를 받아 도저히 건축을 완성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온 성도들의 믿음과 뜨거운 기도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면 안 됩니다.
불초 이종도 얼마나 많은 시련과 사탄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몇 번이나 목회를 중단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나 44년 목회를 무사히 마칠 뿐 아니라 동사목사로 종신토록 이모작 목회까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은 저 자신도 어느 누구도 예측도 못하고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③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아무리 불행처럼 보여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했고 시편 118편 6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 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예측도 못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믿고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들으십니다
민 11:1-6 / 문기태 목사
김진홍 목사님이 전도를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 앉자 마자 자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세 시간을 이야기하는데 6.25전쟁이 나오고 다섯 시간이 지나자 8.15광복절이 나오는데 언제 끝이 날까 싶더랍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자니 배도 고프고 지겹기도 해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그야말로 순교하는 심정으로 들었는데 남자는 열 시간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마치며 대뜸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에 나 교회 나갈라요. 이제까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사람은 목사님 뿐이오." 예수믿으라고 한 마디도 안했어도 듣기만 잘해도 전도가 됩니다.
인간 관계를 잘하는 비결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경청(敬聽)이라는 한자는 기울일 '경(敬)' 자에 들을 '청(聽)'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청(聽)'자를 보면 귀와 눈과 마음이 들어 있다. 즉 듣는 것은 귀를 기울이며 눈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십니까? 귀를 기울이며 눈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들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을 기뻐하시고 좋은 복으로 만족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심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진노하시고 그들의 진영에 불을 붙여 큰 재앙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만 들으시리라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시고 그 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복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삽니다. 그래서 악한 말도 함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 만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원망하는 말, 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원망스러운 일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하며 악한 말을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합시다.
자,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게 될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앞에서 악한 말로 원망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원망의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노예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자자손손 태어나자 마자 노예가 되어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소망 없는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광야에 들어와서는 하나님께서 첫날부터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을 갈라 물을 주셨습니다. 걷는 걸음마다 지켜주셔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살벌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해도 모자랄 판국입니다. 물을 마시면서도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로 이렇게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해도 모자랄 판국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왜 원망했습니까? 고기를 못먹는다고!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에서 볼 때 만나에 불만을 품고 고기 타령 하는 것은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탐욕에 가득차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탐욕이 생깁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바로 이 원망과 불평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원망 하는 사람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평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가진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을 불신하면 원망의 말이 나옵니다.(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끌어들이실 때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습니다. 거기에 양식이 없다는 것, 물이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일 준비도 하시고, 목 마르면 마시게 할 준비도 하시고, 행여 만나가 질리면 고기도 주실 준비까지 다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고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정말 고기가 먹고 싶으면 '하나님,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고기를 먹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편 78편 22절을 보면,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영적으로 잘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주셨다.'는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에 없는 것은 언젠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내게 없는 것을 주실 것이다.'는 믿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곤경에서도 원망의 악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내뜻대로 잘 안되니까 뭔가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내뜻대로 잘 안되니까 함부로 원망의 악한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중에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정작 하나님께 믿음을 보여야 할 순간에 불신앙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려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원망과 불평을 함으로 불신앙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하나님만 믿습니까?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권자요, 내 삶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믿는다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힘들 때도, 가난할 때도, 위기를 만날 때도 함부로 불평하며 원망하면 안됩니다. 시험이 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께 나아와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맘이 상한다고 함부로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악한 말, 원망의 말, 불평의 말을 내뱉어서는 안됩니다. 무조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말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악한 자의 충동에 속으면 원망의 말이 나옵니다.(4)
하나님의 백성들이 울며'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한 것은 악한 자들의 충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1장 4절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다른 민족들이 함께 짐을 싸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인종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다른 인종들이 광야에서 먼저 탐욕을 품고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며 소리내어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이 불평이 전염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다른 인종들의 이런 태도에 "이제까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원망하는가?" 하고 호통을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향을 받아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밤낮없이 그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따라서 잘못하면 내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탐욕에 나도 덩달아 탐욕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불평에 덩달아 불평의 말을 쏟아 놓기 쉽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의 원망에 끌려 따라서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극을 받아야 되고, 거룩한 백성들을 통해서 좋은 영향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이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다워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아름다와야 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향을 주는 자입니까? 받는 자입니까?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입니까? 나쁜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입니까? 좋은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까? 나쁜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까?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목사님들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듣다보니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도 성장하지 않고 유익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에는 나와도 신앙생활이 별로 즐겁지도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까 아니더랍니다. 들은 만큼, 선입견을 가진만큼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목회에 협력자가 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자 은혜를 받게 되고 자신에게 축복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말을 들어도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끌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살면 원망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원망의 말이 나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에 영향 받으면 원망이 나옵니다. 원망의 악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살라 버립니다.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거룩한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심판의 불이 꺼지게 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2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원망의 말만 들으시지 않고 기도하는 모세의 말도 귀기울여 들으십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진노의 불을 끄십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진영위에 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육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달동안 질리도록 먹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징계를 멈추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해 지는 넓은 들녘 초라한 부부가 마주보면서 고개를 숙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피곤한 발끝에 조그마한 아기의 관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인즉 불쌍한 젊은 부부가 아기 관을 묻기 전 기도하는 비통한 모습입니다. 밀레가 그 그림을 선배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선배가 충고기를 '애틋한 사연, 아름다운 전원과 황혼,그리고 기도…. 다 좋은데 가운데 관이 맘에 걸린다. 관 대신 바구니를 그려 넣으면 어떤가?' 그래서 아기 관을 바구니로 고쳐 그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미가 만 배로 살아났습니다. 전체 그림은 그대로인데 하단에 바구니 하나 고쳐 그리니 비통한 장례식이 황혼의 감사로 승화되면서 불멸의 명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만 바꿔도 아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감사와 기도의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심판을 거두시고 온갖 복으로 상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아름다운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을 버리라
민 11:1-9 / 이강웅 목사
서론: 하와이에는 환영이나 우정의 표시로 목에 화환을 걸어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레이’라고 부르는 이 화환은 대게 꽃을 엮어 만듭니다. 레이를 목에 걸어줌으로써 환영이나 감사를 표현하기도 하고, 작별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와이의 향기 나는 꽃들로 엮어진 레이를 목에 걸면 주위의 모든 것이 향기로워집니다. 상대방이 기분이 좋건 나쁘건, 나를 불평하든지 칭찬하든지, 상관없이 꽃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것은 내 목에 걸고 있는 화환 때문에 그렇습니다.
삶의 태도는 마치 레이와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레이를 하나씩 두르고 있는데. 무엇을 엮어서 목에 두르느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만약 말린 조기, 굴비를 엮어 목에 두르고 다닌다면 어디를 가든지 비린 생선 냄새가 날 것입니다. 더러운 양말을 엮어 두른다면 온 세상이 퀴퀴한 냄새로 뒤덮인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아니면 하와이 꽃송이들로 엮어 만든 레이를 목에 건다면 가는 곳마다 향기로운 냄새로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향기 또는 악취를 가는 곳마다 피우고 다닙니다. 무엇을 지니고 다닐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 몫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삶의 태도로 말미암아 고약한 냄새를 이곳저곳에 흘리고 다니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갑니다. 훌륭한 태도를 지닌 사람은 그가 거쳐 지나가는 곳마다 향기를 날립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향기롭게, 아름답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의 태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감사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더욱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살 때 더 많은 감사를 또한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복을 불러들입니다.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불러옵니다.
반면에 복과 행복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는 복마저 쫓아버리는 태도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부정적인 태도의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원망과 불평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평이나 원망이 저절로 나올 만한 역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불평을 넘어서 남 탓하며 원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불신앙의 악한 언어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드는 것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걷다가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다베라’(3절)라는 곳이었습니다. ‘다베라’는 ‘불사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한 직후 하늘로부터 벼락같은 것이 내리쳐서 장막에 불이 붙은 사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 이런 범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을까요? 민수기서를 쭉 공부해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은 아주 고질적이고 상습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망과 불평이 그들의 삶의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목격하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뿌리에서 맺힌 열매가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는 그들에게 더 큰 불행을 불러들이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더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더 부요하고 풍성해 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혹시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원망이나 불평이 우리 삶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생선을 목에 두르고 있어서 그 비린 냄새로 인해 사람들이 접근을 꺼려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원망과 불평의 태도가 은혜와 복을 쫓아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 원망의 원인
사람들이 원망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뜨거운 태양빛 아래 황량한 사막 길을 걷는 고달픔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신발도 변변치 않은 시대에, 길은 거칠고 황량한 광야입니다. 돌부리에 발가락이 채이면 피가 흘러요. 아이들은 목말라하지요. 시원한 그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200만 명이 이동하려니 얼마나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이 많았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맞습니다. 나름대로 불평할 이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서늘한 그늘을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쫓아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 만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들은 감사하기보다 애굽에서 먹던 것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그들은 만나에 싫증이 나서 고기를 찾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이스라엘이 불평하게 된 이유에는 단순히 부족함과 불편함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들이 원망하며 불평했던 것은:
1) 첫째로,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 또한 바로의 학정에 시달리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자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몸만 따라 나왔지 그 마음에는 전혀 구원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길이 조금 힘들고 환경이 불편해지자 이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람들의 불평에 쉽사리 전염되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 옆에 서 보십시오. 세상이 전부 불만투성이로 보일 것입니다. 감사하며 찬양하는 사람 옆에 서 보십시오. 은혜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목적은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공의와 평강이 흘러넘치는 샬롬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마땅이 불신앙의 이방인들을 책망하여 잠잠케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지도하여 따라오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염되고 설득되어 함께 원망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원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비전과 사명이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세상의 가치관과 세태에 따라서 살지 않고,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 건져주신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에게는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대로 믿음의 길을 갑니다. 좀 손해 보고 고생도 되지만 믿음으로 가는 이 길이 가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고자 하는 영적 열망이 있기 때문에 자청하여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에 기꺼이 헌신한 분들이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주도해서 이끌고 가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있던 이방인들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 이끌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구원의 감격과 감사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도 꿈도 없는, 그래서 지극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주도한다면 교회의 비극입니다. 이미 교회의 타락이 시작 된 것입니다.
2) 둘째로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탐욕을 품으매”이 말은‘다른 음식에 대해서 과도한 욕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만나 대신에 고기 먹고 싶다고 울고 칭얼대는 것은 애들이 반찬 투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욕구는 도가 넘는 일이었습니다. 도가 넘어 해서는 안 될 말, 도에 지나친 말까지 함부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만나 외에는’ 만나를 아주 별 볼 일 없는 음식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민수기 21장에 가면 만나를 가리켜서 ‘이 하찮은 음식을 우리가 싫어하노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지금 먹고 있는 이 만나가 결코 빈약하거나 하찮은 음식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 준 아주 소중한 음식입니다. 누가 매일 200만 명이 넘는 분량의 음식을 제공한다 말입니까?
5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값없이’라뇨?! 그들이 정말 값없이 생선과 채소를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그 고기 몇 점과 생선 한 도막 먹기 위해서 얼마나 등골 빠지게 일했습니까? 매일 채찍으로 맞으며 짐승처럼 살다가 아주 가끔 그것도 주인 몰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주워 먹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고기를 조금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생활이었던 애굽생활을 미화시키고, 자유인으로 먹는 만나를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큰 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꾸 애굽 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가야할 곳은 가나안 땅이지 애굽 땅이 아닙니다. 저들은 사모하고 흠모해야 할 땅이 가나안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대해서는 눈이 열리지 않고, 애굽 당에서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애굽의 고기 가마 곁과 애굽의 세상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탐욕이 이렇게 눈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태도를 가지게 되면 과거에 베풀어진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현재 받은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좋은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2. 원망의 해악
원망의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그들을 진노하사 불을 내리셔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원망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부메랑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왜 진영 앞도 아니고, 좌나 우도 아닌, 진영 끝을 불사르게 하셨을까요? 아마도 원망과 불평하던 자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이에 물들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뒷자리를 조심하십시오(?).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매사에 앞장서서 맡겨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합니다. 힘들어도 잘 견디어 냅니다. 주로 불평하는 자들은 손님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일찍 나와서 기도로 마음을 준비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은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2020년 우리는 방관자의 자세를 가지지 말고, 주인의식과 시대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떨어지는 줄을 믿습니다.
3. 원망을 극복하기 위하여
1) 과거의 은혜를 상기하십시오.
지금 이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땅의 노예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정녕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과 절대 권력자 바로의 강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구출함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광야 길에 들어서자마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심도 은혜였습니다. 무엇보다 가로막힌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지금 여기 다베라의 지점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이런 은혜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며 다짐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찬양의 자리는 원망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잊으셔도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인도하심을 받은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내 삶의 위기에서 부르짖었을 때 응답하신 그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2) 현재의 복을 세어보십시오.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 받았을 때 그들은 꿀맛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만나)고 소리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먹다보니 더 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은혜로 바라보는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없으면 절대 안 되지만 그것에 익숙해질 때 그만 우리는 더 이상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를 하나님의 주신 복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내려주시는 은혜에 집중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넘어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습니까? 현재의 복을 한 번 세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의 복에 감사할 때 더 큰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3) 미래의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죽으라고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겠습니까? 광야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목적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힘들어도 조금만 더 견디면 가나안에 도달할 것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목적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원망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좌절과 낙심과 절망은 우리가 인생의 목표 혹은 희망을 상실하기 때문에 옵니다. 현실의 어려움만을 바라보고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서 종종 갈 길을 놓치고 방황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생의 순례의 길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결론: 2010년 남미 칠레 산호세 광산이 붕괴되었습니다. 당시 작업 중이던 33명의 광부들은 지하 700m 아래 매몰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장 69일 만에 기적적으로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습니다. 승객 300여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존자 170여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이 배의 선장이었습니다.
칠레 33인의 광부들은 어떻게 지하 700m에서 69일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세월호 선장은 300여명의 승객을 버리고 어떻게 혼자 살아남겠다는 결정을 했을까요?
이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결정한 것은 바로 그들의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칠레 광부들은 깊은 갱도에 갇혀 있었어도 서로 사랑과 동료애를 바탕으로 구조될 것이라는 낙관적 태도를 전혀 버리지 않았습니다. 곧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서로 격려했습니다.
반면 세월호 선장에게 대법원에서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 “승객의 안전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승객들의 탈출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는 상황을 그저 방관만 하였다.” 그리고 선장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습니다. 상황을 아주 극단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책임을 선장의 태도에 물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올바른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렇다고 올바른 태도가 꼭 성공과 행복을 절대적으로 담보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훌륭한 태도를 가지고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과 함정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태도는 우리 삶을 살아가는데 중대한 변수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신앙인에게는 감사하며 긍정적인 태도로 사는 것과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부정적 태도로 사는 것은 매우 중대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거나 아니면 불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고 그 결과는 천국과 지옥 만큼이나 차이나게 합니다.
올해도 우리 인생을 시험하고 도전하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으로 좌초될지도 모릅니다. 인생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과거에 받은 은혜를 상기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감사의 조건을 헤아려 보십시오. 매일 새롭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지 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담대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나만은 싫다
민 11:1-9 / 석원태 목사
민수기 10장 29절을 들으십시오.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호밥(이드로)에게 자기와 자기 민족의 행방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의 자유의 집을 향한 비전을 제시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이스라엘은 목적이 분명히 설정되어 있는 역사를 치르는 자들입니다.
여호와는 그 백성의 왕이시었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의 영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속박으로부터의 구원과 가나안이란 비전을 안고 부푼 가슴과 넘치는 소망으로 자기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와 울리는 나팔소리, 바람에 휘날리는 군기, 법
를 중심으로 배열된 열 두 지파의 행렬. 실로 선민역사의 초자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역사엔 비극적 흑암의 장면이 수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우리는 또 한번 이 백성들이 만난 비극적인 한 장면을 만나보기로 합시다.
저들이 시내산을 발행하여 다베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원망하였습니다((11:4-6).
이 백성들의 말의 중심은 만나 만으로는 못살겠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만나 만은 싫다는 소리입니다.
Ⅰ.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의 소리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11:4)라고 하였습니다.
1. 섞여 사는 무리가 누구인가?
통혼한 잡족들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7, 3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라고 한 말을 보아 출애굽한 백성 중에는 순수한 이스라엘인이 아닌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잡족은 통혼한 무리를 말합니다. 레위기 24장 10절에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란 말을 보아 애굽인과 이스라엘인이 통혼하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각색 국적을 가진 자들로 당시 애굽의 강압적 건축노역에 불만하다가 이스라엘과 함께 도피하여 나온 자들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에 「중다한 잡족」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9:11, 수 8:35).
말하자면 국적이 애굽에 있던 자, 또 그와 통혼하여 애굽에 살던 자들이요, 선민의식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비중생자의 상징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의의를 알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선민의 긍지가 없던 자들입니다. 그저 애굽의 고역에서 목전의 삶의 편리를 따라 나온 것뿐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이란, 단순한 현실타개의 민족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역사입니다.
2. 이 무리는 탐욕을 품은 자들입니다.
즉 만나 제일주의를 배격한 자들입니다. 이 무리들은 만나 만을 싫어했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탐욕을 품으매'란 말은 '다른 종류의 음식물을 원하매' 하는 뜻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일체의 육체적 욕망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무리의 선동적인 소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만나 외의 다른 것을 요구하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탐욕은 영적 구미를 좌절시켜 버립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무리는 혼합주의로 영적 손실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현대교회는 이 섞여 사는 무리 때문에 만나 만은 싫다고 하는 불평의 함정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본문 11장 4절에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곡식 가운데 뿌린 가라지 운동입니다(마 13:24-28). 그것은 그물 속에 들어있는 좋은 고기 속에 섞여 있는 못된 고기입니다(마 13:47-50). 그것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입맞추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조화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동행하려는 수작입니다(고후 6:15-16). 그것은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부패적 요소입니다(고전 5:6).
그것은 신자의 마음 속에 섞여 있는 세속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음행이 섞여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에 더러운 것이,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갈 5:19-21)이 섞여 있습니다. 온갖 애굽적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이것들이 순수한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 만나만 가지고는 못산다고 선동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섞인 것이 없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섞인 것이 없습니까? 우리의 예배행위에 섞인 것이 없습니까? 우리의 감사에, 봉사에, 회개생활에, 전도생활에 섞인 것이 없습니까?
결국 이것들은 만나 만은 배격하는 선동적인 요소들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세속이 섞여 있을 때 만나 만은 싫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교회 안에 세속이 섞여 있을 때 만나 만능 사상이 배격을 당합니다.
Ⅱ. 병든 이스라엘의 소리입니다.
본문 11장 4절에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섞여 사는 무리의 선동 함정에 빠졌던 결과입니다. 저들은 병이 들었습니다. 어떤 병인가?
1. 원망하는 병입니다.
11장 1절에「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들의 불행에 대하여 중얼거리며 합작하여 불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원망과 거역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흔히, 형편이 너무도 어렵고 비참하여서 불평을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이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서 진노의 불이 내려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서운 죄입니다(11:2-3).
2. 애굽을 생각하는 병입니다.
11장 5절에「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피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참 불행한 백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저들은 애굽의 생선과 과실의 맛은 기억사면서 벽돌 굽던 일과 무거운 짐을 나르던 일과 감독들에게 채찍 맞던 아픔의 맛은 잊어버렸습니다.
저들은 애굽에서 먹던 부식들은 생각하면서 애굽의 노예생활은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나일강물에 던져짐을 당하였으면서도 값없이 부식 먹은 것만 생각났다고 합니다. 자식의 생명과 바꾸어 연명한 것도 잊어버리고 값없이 공짜로 먹은 것을 생각합니다.
저들은 애굽의 음식물은 기억하면서 저 출애굽의 거사와 홍해의 이적과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을 생각하는 신자의 마음! 그것이 하늘의 진수인 진리의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하는 병균입니다.
3. 불신앙의 병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는 병입니다.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믿지 않던 자의 악심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나 만으로는 못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애굽을 생각하는 마음과 불신앙의 병에 걸린 소리입니다. 몸에 병이 있으면 음식을 못 먹습니다. 그것은 병균이 모든 우리 인체의 미각작용을 죽여 버리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싫다는 영혼, 그것은 병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두려워하며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Ⅲ. 별미를 구하는 소리입니다
본문 11장 4-6절에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① 육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였습니다. 육지에서 나는 고기를 원했습니다.
② 어류를 달라는 것입니다.
「생선과」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고기를 원했습니다.
③ 신선한 채소·과일, 즉 비타민을 달라는 것입니다.
「외와 수박」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자극제도 달라는 것입니다.
「부추와 파와 마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애굽의 풍성한 산물들입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이것들을 못 먹어서 자기네 정력이 감퇴됐다고 야단입니다. 그리하여 탄식하기를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그럴듯한 요구 같습니다. 필요한 청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민수기 11장 33절대로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로 될 수밖에 없도록 큰 죄입니다.
별미를 구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1. 애굽 종살이에서 먹던 그 버릇, 그 미각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저들이 옛 애굽적 미각으로만 답습함은 죄입니다.
2. 그 요구가 너무나도 육체적인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신자들이 시각, 청각, 기타 관능적 피부감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같습니다. 흥분케 하는 자극제를 좋아했습니다.
3. 만나의 진미, 진가를 모르는 죄입니다.
이 만나는 모든 종합영양제입니다.
본문 11장 7-9절에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만나이신 예수! 그는 우리 영육의 종합영양제입니다. 그는 과학적인 분석,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추리 이상의 것입니다. 피부적인 체험 이상의 신비입니다. 그는 물리적인 힘 이상입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오늘이나 만나의 맛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인생의 영적 구미가 변한 것입니다. 만나의 색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변한 것입니다. 만나의 양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우리의 영혼이 불만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4. 임마누엘의 은총을 망각한 죄입니다.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말입니다. 만나 외에도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임재의 상징인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우리 정력이 쇠약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정력 과잉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불평불만을 위한 소리입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전혀 기억 못한 사람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고 하였습니다.
만나 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만나 만으로는 못살겠다고 하는 자들에게 만나 만으로 산다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만나가 무엇일까? 신구약 성경뿐입니다. 섞이지 않은 말씀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나 만으로 못살겠다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만나 만으로 산다고 합시다. 사람(성도)은 떡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떡은 하나님의 자연계시입니다.
성도는 특별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로 삽시다. 특별계시인 성경만으로 삽니다. 말씀 속에는 영도 있고 육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만나 만으로 산다고 합시다.
탐욕을 조심하라
민수기 11:1~9, 31~35 / 옥한흠 목사
언제부턴지 저는 신문을 잘 안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보기도 싫거니와, 큰 맘먹고 보면 불
쾌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한동안 감정을 삭이지 못할 때가 가끔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 꼴은 형편없이 돌아 가고, 뭔가 일이 터졌다 하면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끼리 해
먹은 이야기가 나돌 뿐입니다. 또한 자고 깨면 무슨 게이트를 운운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얼
마를 주고, 서로가 야합해서 주가를 조작하는가 하면, 또 뒤를 봐주면서 벌어들인 몇 백억을
어디에 로비했다는 등 이런 소리들이 연일 연야 신문을 도배질하고 있으니 누가 이런 신문
을 보고싶어 하겠습니까? 그래서 큰 제목만 보고는 자세히 읽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얼마 전엔 보물찾기 소동이 난적이 있습니다. 아마 외국에 있는 많은 지성인들이 우리 나라
의 토픽을 보고 웃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중요한 권력기관까지 동원해 보물을 찾느라고 아
우성을 치는 이런 코미디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부끄러운 부정부패의 뿌리를 파 들어가보면 거기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
수'라고 지적했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원수가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
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탐하는 탐욕은 사람과 나라를 망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만장
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말은 진리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
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돈에 탐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
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탐욕이 우
리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인들과 지성인들, 경제인들, 심지어 가정 주부들의 밑뿌리에
까지 도사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탐욕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좀 더 솔직히 말해 더 갖고 싶
다는 것이 왜 나쁩니까? '남보다 좀 앞서고 싶다. 그리고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
구가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유일한 본능일 것입니다.
가령 사자는 먹을 만큼만 사냥합니다. 쌓아 놓기 위해서 사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
간은 쌓아 놓기를 갈망합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좀 더'라는 이 욕구가 있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곤한지 모르고 뛰는 것입
니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명이 발전합니다. 성취욕을 누리게 됩니다.
무언가 살맛이 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좀 더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좀 더 가지려는 욕구에 제동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정선에서 자제를 받
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제력이 없는 욕구는 무서운 것이 됩니다. '좀 더' 하는 마음가짐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탐욕화됩니다. 그리고 탐욕화된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파멸
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지노선을 정해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손톱
이 자라면 항상 적당하게 깎아 줍니다. 자라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 그대로 내버려두면
보기 흉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에 있는 '좀 더' 라는 욕구를 완전히 없
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어 주면 그것은 우리를 살게 만드는 에너
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10계명 가운데 마지막에 탐심에 대한 경고의 계명을 주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
라."(출20:17) 십계명의 제 10번째 계명은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
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는 다릅니다. 그런 것들은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그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행동이 아
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욕심을 내고 그것이 탐욕화되면 그 자체가 죄
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탐욕은 절대로 용납하거나 방치해서는 안되며 적정선에서 그 욕구를 자제해야만 합
니다. 설령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죄
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욕구를 자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제해야 합
니다. 또한 경건 생활을 통해서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욕심이 탐욕으로 변하지 않
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탐욕을 얼마나 미워하시고 탐욕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얼마나 무섭게
해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이 본문의 내용
은 하나의 드라마 같습니다. 여기에서 탐욕 때문에 망하는 사람을 봅니다. 탐욕 때문에 진노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드디어 모세라는 지도자를 내세워 그들을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민족이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여태껏 세계 역사상 그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
했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계곡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양식도,
물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런 곳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1년 동안 먹이
고 마시게 하시며,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아침마다 만나라 하여 깟씨와 같은, 요즘 말로 씨앗 같은 것을 보내 주셔서 백성들이 그것
을 찧거나 삶고, 또 튀겨서 먹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식탁 메뉴가 단조로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점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불망 섞인 말까지 하고 맙니다. '우
리 마음이 이 박한 음식을 싫어하노라.'(민21:5)
그러던 어느 날 일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네." 하면서 나중에는 몇 명이 주저앉아 고기를 달라며 울고 불고 야단법석을 떨
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분위기가 전염병이 되어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다 합해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장막에 앉아 고기를 내 놓으라고 울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그토록 원하는 고기를 메추라기를 통해 하
루 아침에 몰아서 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잇사이에 아직 남아 있을 때, 고기 때
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던 사람들 전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컫어 '기
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탐욕을 품다가 결국 다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기 먹고 싶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왜 그것이 탐욕이 됩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만 눈여겨보고 생각해 보면, 이것은 분수에 지나친 탐
욕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면서 그들이 품었던 탐욕
이 내 안에는 없는지, 그들이 하나님 앞에 탐욕으로 망한 것처럼 내 자신은 탐욕으로 망할
확률이 없는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층에 있는 사람만 탐욕으로 인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시 탐욕에 이끌려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고기를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린 탐욕이었습니다. 지금 이스
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보십시오. 노예생활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자자손손 태어나자 마
자 시작하게 되는 노예생활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소망 없는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계곡이라 할 수 있는 광야에 들어와서는 하
나님께서 첫날부터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걷는 걸음마다 지켜주셔
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나쁜 짐승이나 해로운 해충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돌보아 주셨
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
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체가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
니다. 이른 아침부터 들판에 나가 만나를 한 알, 두 알 주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살
벌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고백
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반석에서 물이 터져 그 물을 손에 움켜쥐고 마시면서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고기를 달라는 것이 말이 됩니
까? 그들이 진짜 고기를 못 먹은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는 수백만 마리의 양떼와 소떼, 염
소 떼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므로 가끔 한 마리씩 잡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 맛을
전혀 못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은 재산이므로 마음대로 잡아 먹지는 못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실컷 먹고 싶은 욕심에 고기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에서 볼 때 고기 달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울부짖는 탐욕이었습니다.
이렇듯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탐욕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탐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좀 더' 하
는 사람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탐욕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가진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루빈이라는 사람이 그린 재미있는 풍자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노아 홍수가 온 세
상에 있는 사람들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방주에는 노아의 식구들과 둘씩 쌍을 이룬 짐승들
이 타고 있었습니다. 한 1년 동안 배를 타고 다니다가 드디어 땅이 마르고 비가 그치자 방
주 문을 열고 사람과 짐승이 나왔습니다. 두 마리의 기린이 두 마리의 코끼리 뒤를 따라 배
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앞에 가던 코끼리 한 마리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젠장, 계속해서
비만 왔잖아. 여행치곤 정말 형편없는 여행이야." 온 세상에 있는 생물이 다 자기 죄 값으로
심판받아 수장이 된 마당에, 죄가 있어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방주에서 구원해 주셨는
데 불평을 한다는 것은 탐욕 중의 탐욕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싶어하는 고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갖고 싶어하는 고기
가 여러분의 마음에는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금
자신이 받아 누리는 은혜를 헤아려 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인지, 돈의 힘으로 사는 것
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모세혈관 하나만 터져도 모든 것
이 끝장날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는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좀 더, 좀 더' 하는 것은 탐욕 중의 탐욕입니다. 이런 탐
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다 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광야길의 원망
민11:1-9 / 이동원 목ㅅㅏ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망은 가장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 할수 있습니다. 원망해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망할때 악한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걷다가 이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다베라'라는 곳에서 였습니다. 다베라는 '다 버렸다'는 뜻이 아니고,'불사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한 직후 벼락같은 것이 내리쳐 장막에 불이 붙은 사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아니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 이런 범죄를 하게 되었을까요?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의 고단함이 '생각의 혼란'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혼란해 질때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우리가 잊어버릴것은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속에는 두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 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망각하고 싶은 일은 망각의 주머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에 혼란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일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망각해야 할일을 기억의 주머니에 집어 넣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정서균형이 깨지면서 우리는 모든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확하게 이런 삶의 정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지금 그들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몇가지를 망각한채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혹은 삶에 대한 악한 원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런 동일한 이유들이 있지 않은가 살펴 보십시오. 자, 그러면 도대체 왜 광야 길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원망하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과거의 은혜를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급땅의 노예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정녕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광야 길에 들어서자 마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도 은혜였습니다. 무엇보다 홍해바다를 건널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지금 여기 다베라의 지점까지 올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이런 은혜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치유함을 입었던 9명의 문둥병자들처럼 말입니다.10명의 나병환자가 다 치유함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했을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바를 기억하십니까?--"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며 다짐하기를-"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찬양의 자리는 원망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것을 잊으셔도 좋지만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인도하심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내 삶의 위기에서 부르짖어 도움을 구했을때 응답하신 그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주의 은혜의 감격이 회복될수만 있다면 원망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옛날 영국 쉑스피어가 살고 있었던 마을에 농아요 소경이었던 한 걸인이 구걸을 할때마다 그의 왼손을 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펴진 왼손에 돈을 쥐어주면 그는 즉시로 지체함이 없이 오른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오른 손바닥엔 "감사 합니다."(Thank You)는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문호 쉑스피어는 어린시절 그에게서 감사를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청교도들의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남겨져 있습니다.--"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그러나 한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저희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둘째는, 현재의 축복을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는 불편함과 부족함만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그들에게서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던 축복을 증언합니다.만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함께하는 축복으로서의 만나를 인해 감사하기 보다 없는 고기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누가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4절 앞부분에는 이 불평의 원인을 두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그것이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고, 둘째원인은 그들이 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섞여사는 무리'(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섞여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에게서 배웠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성도들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불신자에게 영향받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받았을때 그들은 꿀맛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만나)고 소리치며 놀라워 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축복으로 바라보는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고기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에 익숙해 지면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상실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미 주신 축복에 집중할수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새 역사를 창조할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길에서도 여전하신 주의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수가 있습니다.
셋째로,미래의 약속을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적지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지금 이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가나안이 아닙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면 가나안에 도달할것 아닙니까? (아마도 가나안을 거꾸로 읽고 있었을지 모릅니다.--'안나가'로)그런데 이 원망이 웬 말입니까? 가나안의 전망을 상실한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약속을 잊은 까닭이었습니다. 만일 이 백성들이 가나안을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면 원망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좌절과 절망은 인생의 목표 혹은 희망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지만 며칠간 한미준 신학생 세미나가 있었는데 강사중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것을 인상깊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눈이 좀 나빠서 혼자 생각하기를 자기 눈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자주 눈을 감는 습관을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안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습관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하시며 차라리 먼 곳(멀리 있는 산,구름,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라"는 충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눈앞의 광야 길이 나를 두렵게 하거나 권태롭게 할때 우리가 멀리 눈을 들어 가나안을 바라 볼수 있다면 광야 길의 행진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윅이란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그녀는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1952.7.4일에 34세의 나이로 칼리포니아 카타리나 섬에서 칼리포니아 해안까지 수영으로 도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섰습니다.백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의 TV중계속에 그녀는 출발했습니다. 그날따라 바다는 추웠고 안개가 짙었습니다. 호위하기 위해 따르던 보트조차도 헤매고 있었습니다. 무려 16시간의 사투에 가까운 수영끝에 아쉽게도 그녀는 이 도전을 포기하고 배에 올랐습니다.그런데 이 도전에 실패한후 실패의 이유를 말하는 인터뷰에서 플로렌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추위 때문이나 피곤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목표가 안개가 가리운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달후 그녀는 다시 도전하여 남자가 세운 기록을 두시간이나 단축하며 해안에 도달할수 있었습니다. 그날도 청명한 날이 아니었고 처음 도전의 날 못지않은 안개낀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자기가 도달할 육지의 골인 지점을 마음으로 그리면서 수영하여 성공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인생의 강야 길에서 우리는 목표에 대한 시야를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방황의 때입니다. 그때가 원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볼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의 인도따라 인생의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광야의 기온이 차거우십니까? 안개가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까? 모래바람이 아프게 때리고 계십니까?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안에서 주께서 그려주신 자신의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도전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인도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함께하는 축복들에 대해 기뻐하십시오.미래의 약속을 주장하며 나아 가십시오. 눈앞에 일고있는 모래폭풍을 바라보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멀리 보십시오.주님이 보여주시는 목표를 향해 일어나 다시 걸으십시오.그러면 당신의 광야 길은 원망의 길이 아닌 찬양의 길이 되실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윜은 마지막 1시간여의 힘든 수영기간을 앞두고 안개가 목표지점을 가리우고 있었을 때에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고 합니다.-"저, 안개 가 보이지. 저 안개는 목표지점에 가까웠다는 싸인이야. 보라고.저 안개가 너를 환영하고 있는거야.저기는 승리의 입구야.저 안개 바로 뒤에 승리가 있는거야. 맞아 ,안개뒤에는 승리야". 그때부터 "안개는 승리의 입구""안개뒤에는 승리""안개뒤에는 승리"하고 소리치며 전진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모두 안개를 장애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길의 안개를 승리의 입구로 보십시오. 안개뒤에 기다리는 승리의 선명한 목표를 바라 보십시오.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모든 원망을 작별하십시오. 파도속에 묻으십시오. 그리고 파도의 물결을 타고 약속의 땅으로 날아 가십시오.
유익한 지도자 모세
민수기 11 : 4-15 / 이종윤 목사
구약성경의 민수기서는 우리에게 교훈을 통한 격려와 경고를 주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민수기서에는 특히 모세에 대한 내용을 크게 들 수 있는데, 모세의 삶을 통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난과 역경은 있었습니다. 그런 모세의 지도력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Ⅰ. 지도자 모세에게는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2가지 문제로 원망과 시비, 불평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00년간 노예였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불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하고 시비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시비하고 불평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 문제는 4가지가 있습니다. 자기집착, 분노, 죄책감, 두려움이 그것들입니다. 모세는 지도자로서 이런 문제로 긴장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Ⅱ. 지도자 모세는 작은 고통을 극대화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서 ‘내가 어떻게 이 백성을 인도 할 수 있습니까’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의 인도자가 되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같이 절망은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3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① 독수리가 새끼를 안고 나르듯 하나님은 내가 내 백성을 인도하리라 약속하셨다(출 19 : 4, 신 32 : 11)
②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가듯 내가 광야에서 내 백성을 안고 가리라 하셨다.(신 1 : 31)
③ 목자가 양을 안고 가듯 내가 안고 가리라 하셨다.(사 40 : 11)
유약한 모세는 이것들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에 절망부터 하였기에 그에게는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Ⅲ.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풍부한 자원을 잊고 있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고기도 주신다고 했을 때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지 않으며 그 능력의 손으로 손수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능력의 손으로 건져 내셨으며, 그들을 능력의 손으로 가나안까지 인도하셨고, 하나님은 능력의 손 뿐 아니라 능력의 말씀으로도 모세에게 힘이 되셨습니다.(23절)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세상에는 악이 들끓고 그 손길은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그런 험한 세상에서 유약한 지도자 모세처럼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급, 구원과 붙잡아주시는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믿으며 전진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축복에 익숙해질 때
민 11:4-9 / 강용규 목사
신명기에서 광야를 매우 위험하고 광대하며,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이 다 떨어지자,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슬 모양과 같은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를 날마다 내려 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그들에게 보내주셔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갈길 몰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이 음식 만나만 먹었더니 힘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며 노골적으로 싫증을 냈습니다. 그들을 살게 한 그 만나에 대해서 익숙해졌다고 싫증을 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을 비춘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 대해서도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기 위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생활을 하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에도 모세는 ”그들을 진멸하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보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매일같이 보다보니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하다보니 중요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서 싫증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기적과 같은 만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고 그들을 인도한 모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이 익숙해지자 싫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봅시다. 나라가 없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손기정 옹이 마라톤으로 우승을 했음에도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태극기를 게양하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회 청년이 주유소에게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벤츠 자동차를 타고 부유하게 보이는 사람이 그 청년의 등을 두드리면서 “네가 나보다 행복하다. 너는 돌아갈 나라가 있다.”고 말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라가 없는 아르메니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매일 매일 산다 해서 우리나라가 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고, 땅에서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부가 되어 한 사람은 오른쪽 눈, 다른 사람은 왼쪽 눈. 한 사람은 오른팔, 다른 사람은 왼팔이 되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내를 매일 본다 하여 싫어졌습니까? 남편을 매일 본다 하여 남편이 싫어졌습니까? 선물로 주신 자녀를 매일 본다 하여 그 자녀가 싫습니까? 한신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언제든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는 목양지를 주신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여깁니다. 한신교회에 부임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했고 여러분을 만난 것이 제게는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3년을 함께 지냈다고 제가 여러분에 대해 싫증을 내고, 여러분이 저에 대해 싫증을 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만나에 대해 싫증을 낸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서 불 뱀에 물려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나라를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를 잃습니다. 가정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가정이 깨지고 가정에 행복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녀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교회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절대로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익숙하다고 불평하면 하나님은 그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익숙해졌다고 해서 싫증 내지 않고 늘 감사하는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날마다 감격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오늘 밖에 볼 수 없다거나,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오늘 하루만의 일이라고 여긴다면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귀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 또한 내 생애 마지막 예배라고 여긴다면 간절한 예배가 될 수 밖에 없고, 내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늘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만약 우리 마음 가운데 싫증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굳어진 마음을 고쳐달라고 애통하며 참회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축복을 내리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이유
민 11:4-9 / 홍무수 목사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이런 실험을 해봤다고 합니다. 한 동네를 정해 놓고, 집집마다 매일 현관에 1만원씩 놓아두었습니다. 첫째날 ... 동네 사람들은 너무 이상했지만 조심스럽게 그 돈을 집어넣었습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 ... 며칠이 지나자 온 동네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정체불명의 그 사람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2주쯤 지나자 ... 돈이 언제 오나 나와서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3주쯤 지나자 ... 전혀 감사한 마음이 없이 당연히 받기 시작합니다. 4주째는 아주 자연스런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의식도 없이 돈을 챙깁니다. 그런데 실험 기간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소와 달리 돈은 나눠주지 않고 그냥 동네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동네 사람들이 불평하며 화를 냅니다. 심한 경우 어떤 집 주인은 아예 문을 열고 나와서 항의합니다. “왜 오늘은 돈을 주지 않는 겁니까? 어서 내 돈 만원을 달란 말이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동네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네. 그동안 준 것도 감사하지. 그리고 안 주면 그러려니 해야지, 언제 자기 돈 맡겼나?”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동네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될 경우에 감사치 못하고 오히려 불만 불평 원망을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내재된 죄성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런 사실을 지적합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 심한 경우 짐승만도 못하다고 성경은 공박합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오늘 본문 성경에도 인간의 그런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라도 우리 마음속에 감사치 못하는 완악함이 있다면 돌이켜 감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1] 감사 대신 불평한 이스라엘 : 배은망덕의 죄악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오랜 세월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출애굽 구원의 역사를 이뤄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오매불망 소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에 대해 불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과거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4절. “ ...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 ” 5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 ”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애굽의 은혜를 생각하면 매일 매일 감사해도 시원치 않은데,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광야 40년 내내 이런 식이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금세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건 인간의 도리도 아니고, 신앙인의 도리도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들은 더욱 큰 고통의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허겁지겁 울면서 회개하고 난리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진노를 푸시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잘 해야 될 텐데, 조금만 어려워지면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의 못된 습관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악순환이었습니다.
우리도 혹시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 상태를 갖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 이런 구습, 악습에서 벗어나 항상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요, 축복의 지름길인 줄로 믿습니다.
[2] 이스라엘이 감사할 수 없었던 이유 : 탐욕, 망각, 불신 - 이유도 아닌 이유들
우리는 원망과 불평의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됐나 그 이유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고 감사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이스라엘이 감사치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살펴보기로 합니다.
① 탐욕 :
4절.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 ” 이게 원망과 불평의 원인입니다. 탐욕이 무엇입니까? ‘과도한 욕심’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마치 블랙홀(Black Hole)과 같습니다. 계속 더, 더, 더 원합니다. 이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됩니다. 그리고 탐욕이 있는 한 인간은 만족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지만 전혀 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아침 만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만나는 정말 좋은 음식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제조해서 아침마다 이슬과 같이 내려주신 ‘천국제 웰빙 푸드’입니다. 사실 이것만 먹어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필수영양소를 다 넣어주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광야에서 농사도 못 짓고, 목축도 못 하는데 ... 여건도 안 되고, 계속 이동해야 되니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맨 처음에는 그들도 좋아했습니다. ‘만나’라는 명칭을 누가 지었습니까? 자기들이 ... “이것이 무엇이냐?” 그러다가 만나가 된 겁니다.(출16:15 참조. 히브리어 ‘만후’)
7절~9절 보면, 하나님이 매일 만나를 공급해 주셨고,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영양 부족이 생긴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울며 애통해 할 정도로 말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됐나요? 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탐욕이 생긴 겁니다. 인간이 ‘가진 것’보다 욕심이 더 많으면 불행해집니다. 반대로 ‘가진 것’보다 욕심이 적으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많은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걸 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소유를 얻어도 계속 불행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 속의 욕심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신앙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갈5:22~23 보면 성령의 열매가 나오죠. 우리가 예수 믿으면 성령님이 마음 속에 오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모습을 형성해 주십니다.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중에 맨 마지막 것이 무엇입니까? ‘절제’(self-control)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control)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의 전차에 브레이크 장치를 달아야 합니다. 만일 이게 없으면 사고 칩니다. 망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욕심을 다스림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6~8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렇게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면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② 망각 :
앞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애굽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까짓 음식 몇 가지 때문에 ... 사실 따지고 보면 만나보다 더 좋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5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 생각나거늘 ... ” 생선, 부추, 마늘 등 몇 가지 음식 때문에 종살이 하던 애굽을 그리워하다니! 그들은 생각할 것을 생각지 않고,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때의 그 비참함을 기억해야 되는데 한심합니다. 강제 부역을 하고, 채찍에 맞으며 고생하고, 압제받으며 설움 당하던 것을 기억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광야 생활이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사실 현재의 형편도 감지덕지인데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이었습니다. 지옥 갈 인생이었습니다. 과거에 잘 먹고 잘 살았다 해도 그런 것은 별 게 아닙니다. 과거에 죄 가운데 살면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방황과 허무,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지옥행 열차를 타고 갈 때 1등칸을 타고 푹신한 좌석을 즐기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그게 무슨 대수냐 이겁니다. 지옥행 열차에서 내려 천국행 열차를 탔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이겁니다. 물론 천국행 1등칸을 타면 좋겠죠. 그러나 3등칸이라도, 입석이라도 좋은 겁니다. 아니, 그냥 매달려서 가도 좋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아제는 영생을 얻었고, 천국의 소망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 가기 전이 세상에서 이미 영혼 가운데 영생의 기쁨, 하늘의 신령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게 어딥니까?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 외에도 육신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있네 없네 해도 옛날에 비해 얼마나 풍요로워졌습니까?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옛날 임금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타고 다니는구나! 오죽하면 옛날에는(그래봤자 30여년 전만 해도) 뚱뚱하면 풍채 좋다고 했잖아요. 배가 나오면 부러워하면서 배 사장님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비만이라고, 똥배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래서 ‘살빼기 전쟁’을 합니다. 좋은 것만 골라 먹고 골라 먹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려운 분들도 있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평균적으로 부요해진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올챙이 적 생각하면 감사 감사할 것밖에 없건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잊지 맙시다. 시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러분! 예수님 만나지 못했을 때 비참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 감격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③ 불신앙 :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신뢰하는 신앙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지지고 볶고 난리입니다. 자기들이 판단합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정 고기가 먹고 싶으면 신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잖아요. 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웁니까? 원망하며 하나님 속을 긁어놓습니까? 한편 생각해 보면 종살이는 고단했어도, 사람이니까 그때 먹던 음식이 생각날 수도 있겠죠. 그러면 하나님께 신사적으로 기도하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전능자이신데 불쌍히 여기면서 주셨을지 어떻게 압니까?
불평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잔뜩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불신앙으로 울고불고 하니까 그게 복이 되질 못합니다. 민11:36 보면,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쌓인 두께가 2 규빗(1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 길이로 45cm 정도니까 2규빗은 90cm)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한 까닭에 주동한 사람들 다수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게 됩니다. 민11:33절~34절 보면 그들이 고기를 씹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앙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에게 이렇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그게 신앙의 사람이 가질 태도입니다. 시50:14~15 말씀을 보십시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부디 이 말씀대로 환란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옛날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봅시다. 그들은 감사할 수 없는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펴본 대로 그 중 하나도 정당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감사할 이유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고, 지금 살아 있는 것만도 감사해야 됩니다. 설사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당연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로 당연한 것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기본이요, 축복의 씨앗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참 인간이요, 참 신앙인이요, 참으로 축복된 인생입니다. 부디 감사하는 신앙으로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