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문밖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성문밖편지
과연 교회는
성직자(목사)가
필요한가?
안녕 하십니까?
이번에는 성직이라 불리는 목사직에 관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오늘의 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글들이기 때문에 자연히 문제점들을 언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읽는 분들 중에서는 불편해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큰 틀에서 생각해서 이해하시고 함께 기도하면서 21세기 좋은 교회 만들기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왜, 목사 문제가 거론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현실적 사안들입니다. 교회개척 해서 조금만 자라면 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쟁이 없는 교회는 개척교회 아니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는 반드시 목사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사들이 틀려먹은 사람들이라? 아니면 목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쁘고, 틀려먹고, 시험에 들고, 마귀새끼들이 되어서 그럴까요? 그런 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교회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제도자체가 갈등과 분쟁을 유발시키는 근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문제는 그대로 두고 네탓 내탓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개혁)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며, 현실성이 없는 글들이란 걸 잘 알면서도,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사람을 얻어 교회처럼 사람들을 모아 무슨 세력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돈 버려가면서(발행 비) 사람들로부터는 칭찬 보다 무지하게 욕을 들으면서 이 짓(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제안마저도 없다면 미래의 교회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오늘의 교회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참으로 보배로운 복음마저도 부정적 교회모습에 가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질타하신 분들 중에는 "너는 얼마나 깨끗하고 잘나서 건방지게 개혁 운운하느냐?" 고 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가 결코 깨끗하고 잘나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저주받아 멸망해야 마땅한 존재들이란 것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지 않은 것 아닌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졸이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 소망이 있다면(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동기라도 되어서 많은 목사님들이, 많은 분들이 교회의 여러 부분에서 깊이 생각하고, 검토하고, 연구하고, 기도해서 좋은 교회 만들기, 21세기 인류 앞에 새로운 기독교의 모습을 제시함으로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안(代案)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고로 책망하시기 전에, 성문밖편지에 실린 글이 비록 현실성이 없고 때론 황당한 이론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교회를 놓고 고민 좀 하자는 것이, 성문 밖 편지의 바램입니다.
끝으로 하나 더 부탁 말씀은 옹색하게 지금의 교회형태에 매이지 말고, 그리스도라는 우주적인 분을 염두에 두고, 보다 우주적인 틀에서, 미래의 대안을 모색해 보았으면 합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회라는 말(단어)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면 극복 하고라도 대안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주: 성직자란 말을 쓴다는 것이 합당치는 안치만 보는 분들의 편안함을 위해서 때론 성직이란 말을 쓰겠습니다.)
1. 목사직 출발의 근거
목사직은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는가? 흔히 사람들은 목사를 가르켜 성직자란 말을 합니다. 본래 교회에서는 성직이란 말이 합당한 표현은 아닙니다. 성직이란 종교의 승려나 사제 혹은 제사장들에게 붙여 진 명칭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도 종교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목사를 성직자라고 부른 것이죠. 오늘 교회에서 성직자라 불리는 목사는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는가?
성경에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의 기록 중에 목사란 말이 나옵니다. 이 목사란 말은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 단 한번 나옵니다. 이 말씀을 중세 교회개혁자들이 교회 성직자 명으로 사용 한 것입니다. 장로교의 경우 1541년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 개혁작업을 하면서, 교회 헌법(Ordinances)을 기초하여 200인 의회의 결의를 얻어 공포 할 때, 본문을 근거하여 교회의 직분으로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네 종류의 직분을 두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에서 성직명으로 목사란 명칭을 채택하고, 목사에게 설교권을 부여 한 것입니다.
물론 중세교회(카톨릭)는 주교 밑에 사제를 두었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 성직 존중주의(Clericaism)의 영향으로 사제를 영적 아버지라 하여 신부(Father)라 불렀습니다. 우리개신교의 목사에 해당된 성직 명이죠. 구약에서 뿌리를 찾는다면 서기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무튼 교회에서 목사란 명칭이 사용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부터입니다. 목사의 역할이나 위상, 그리고 선임방법, 사역 지 선정 등은 교파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기록에 보니까 영국 성공회 같은 경우는 개혁 초기에는 목사란 명칭을 썼다가 신부 명으로 다시 되돌아간 경우도 있고, 구세군 같은 경우는 사관이라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직명에 대해서는 교파 창시와 함께 많은 연구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왜 성직 명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목사란 성직 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났으면 싶어서입니다.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목사란 명칭에 대해, 마치 명예의 전당에서 하사된 작위(爵位)명 이나 된 것처럼 신분의 특별의식을 가지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목사란 성직명이 절대적인 것 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는 제사장, 혹은 하나님의 사자,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 영적 지도자 등의 사고(思考)를 가지려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죠. 열거된 직임 들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부흥 강사들이 생각 없이 쏟아놓은 말들을 따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음)
최근에 이르면서 목사란 명칭이 너무나 오염되어서 교회개혁을 한다면 중세 개혁할때 이름을 바꾸었던것처럼 이 이름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너무나, 너무나 오염되어서...
2. 목사와 교회의 성격
성직자 문제는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은 목사가 양산 된 데에도 일차적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목사가 양산이 될까? 성경에 보면 성직자는 희생과 고난이 수반된 직책인데 왜 그럴까? 그것은 구조의 모순이 가져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직자 개인을 탓하기 앞서 성직을 필요로 한 교회에 대해서 재검토(재해석) 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문제는 이미 앞에서 발행된 성문 밖 편지(3, 4권)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존립 시한에 관해서 논함으로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한정적 계시란 말을 아십니까?
한정적(限定的) 계시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한정적 계시란 "점진적 계시"의 일부를 한정계시라 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은혜언약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수 천년의 세월을 거처 오면서 수 없는 변천을 거듭 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편지 2권 참고) 크게는 광야의 교회, 가나안의 교회(국가), 유대교, 초대교회, 로마교회를 거쳐, 개혁교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이렇게 진행되어온 그 과정들의 한 토막의 계시를 한정적 계시라 한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 성취까지의 한정적 계시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한정적 계시를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의 교회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구조를 그대로 두고는 성직자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교회에 관한 입장정립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 사도들이 언급했던 교회를 기초로 한 성직에 따른 언급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형태가 주 재림의 때까지 지속 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또는 교회란 과정적인 것인가 반영구적(恒久的)인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것으로 봐서 교회는(역사를 봐서) 과도기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3, 4권의 성문 밖 편지에서 언급한 바대로 로마통치 하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교회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편한 방법 일수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교회명칭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②또는 과거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심처럼, 사도들에게 보이신 교회에 관한 계시는 한정적 계시의 빛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교회란 명칭이 가장 적합한 것일수 있지만, 그것이 꼭 항구적 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계시들이 대부분 그리스도 이전에 있었던 한정적 계시였던 것처럼 교회에 관한 계시도, 사도시대에 필요한 것으로 한정적 계시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정계시(점진적 계시)를 인정을 할 수 있다면 교회란 명칭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 명칭, 곧 과도기적 명칭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한정계시니, 과도기적 명칭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인가? 21세기 대안으로는 교회명칭 이나, 오늘의 교회형태를 갖고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충분히 다른 대안이 제시되어 있지만 교회란 이름에 가려서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말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안에 대한 메시지는 교회란 명칭이 살아지기 전에는 드러낼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헤롯이 죽기 전에는 애굽에서 돌아올 수 없었던 것과 같고, 요한의 세례가 있고 난 후에 세상에 나타나심(요 1:31) 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구조변화는 필연적입니다
오늘의 성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구조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바 대로, 수세기를 거처 오면서 형태와 구조가 거듭 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구조가 전부 성서적이다 하는 것도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고, 이 모습 이대로 주 재림의 날까지 지속될꺼란 생각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이란 거죠, 중세종교개혁으로 형태 변화가 된 이후, 지금에 이르면서 교회구조 또한 보이게 보이지 않게 변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에 와서 이대로는 안된다 하니까, 거부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오늘의 개신교 목사로 몸담고 있는 분들이(변해온 교회에) 더는 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엉망진창 되어(?) 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으면서, 이대로가 좋다? 는 사고(思考)는 발끝에서부터 썩어 들어오는데도 수술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구조가 전부 성경대로 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겠죠? 사도시대의 교회 구조와 오늘의 교회 구조는 너무나 다르고, 카톨릭 교회와 지금의 개신 교회 구조 또한 다르다는 것은 인정 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교회형태는 바꿀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 구조는 대부분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이 만든 것들이란 것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구조들이 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억지로 부인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 안습니까? 그 결과들이 구라파 교회들에서, 또는 미국교회에서, 그리고 지금의 한국 교회에서 노출되고 있는 대도 "우리교회는 괜잖다?" "이대로가 좋은데 무슨 개혁?" 그것은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오늘의 현상을 보지 않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죠.
벌써 그런 현상이 드러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이대로가 좋다?" "우리교회는 잘 하고 있는데?" 눈앞에 낭떠러지 인대도 소경 된 자는 나는 괜찮다 하면서 여전히 절벽을 향해 걷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마음이 조이고, 또 불안 한 것은 한번 놓친 고기는 다시 잡기 힘들 듯, 이대로 머뭇거리면 사람들은 잃어버리고 교회당 건물들만 남게되는 그날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안달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탄식하심처럼 소경 된 인도자여! 소경 된 목사들이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이 21세기 지구촌 사람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구조는 바뀌어야 합니다.
성문 밖 편지의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다 해도, 이 기회에 깊이 생각 해보는 진지함이 목사들에게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교회구조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진리라고 믿는자 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3. 목사와 목회
목사와 목회(Ministry)에 관해서는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목회의 범위를 어디까지를 두고 목회라고 규정 하느냐 하는 문제와 그 역할자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지금까지는 보편적으로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을 두고 포괄적으로 목회라고 해왔습니다. 카톨릭의 경우 좁게는 설교와 성례전의 집행을 제외한 교회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목회로 보는 반면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그 반대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목회는 주님의 "영혼의 돌보심"의 정신에 입각하여 "개인의 영혼의 성장, 발전, 치유, 구원에 대한 배려"등이 목회의 중심으로 떠오른 추세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성경을 근거해서 목회 한계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문제들이 목사의 목회 범위 안에서 파생된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말씀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 15-17)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19-20상)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의 말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다음은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 1-3) 이런 말씀들이 목회와 관련된 말씀들일 것입니다.
두 장로의 구분
여기서 목사목회 한계와 역할에 대해 나눠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교회의 갈등과 분쟁의 근원이 목사 목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디모데 전서 5장 17절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여기서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로 나눠지고, 디도서 1장 5절에서도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 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함이니" 여기서도 그레데에 떨어 뜨려둔 디도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세운 장로들로 구분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주목 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대안제시에서 언급하려는 것 임)
다스리는 장로
지금까지는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목사 혼자 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서 에 말 말씀한바 대로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로 목회 역할을 분리하는 것이 성서적으로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잘 다스리는 장로는 누구를 두고 한 말일까?
· 앞에서 소개된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벧전 5: 1-3),
· 또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부터 각 교회의 장로를 택하여 세운 사람들이 (행 14: 23)
· 바울이 밀레도에 머물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해 오게한 분들(행 20: 17)도,
· 또는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에서 각 성의 장로들을 세운이들도 바로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에 해당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딛 1: 5)
그렇다면 다스리는 장로는 그 지역 사람들로 디모데 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6-9절에 언급된 말씀에 부합한 자들을 세워 교회를 치리 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소위 목회는 치리 하는 장로의 몫이 되어야 한 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지키고 관리하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장로나 감독이 맡아서 한 것이고, 그들이 설교를 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기초 교육은 시킨 듯 함)
치리 장로의 입장
앞에서 치리 하는 장로란 곧 목회 하는 장로란 말을 했습니다. 목회란 뜻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벧전 5:2) 이 말씀에서 "너희 중" 이란 말씀과 "치되"란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중"은 장로 된 자들과 함께 사는 그지역의 사람들 혹은 그 지역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할 수 있고, "치다"는그 장로가 치다, 혹은 목회를 하다 란뜻으로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의 장로가 목회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치리 하는 장로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 전서 3장의 감독 선임자의 자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란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린다는 뜻에는 여러 가지를 포함되겠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포함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리 하는 장로는 자기 직업(기업)이 있는 자가 그 지역의 교회(성도)를 돌아본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역 교회에는 직업 성직자(생활비를 받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종교와 다른 점이고, 이렇게 되어야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의 구실을 각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자세 한것은 대안 제시 할 때,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치리자의 자세
이것은 치리 장로의 자세입니다. 앞에서 소개된 베드로의 말씀 (벧전 5: 1-3)에 근거하면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여기서 ①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라는 억지로 하지 말라/ 자원함으로 하며, 무보수 봉사를 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하고, ②더러운 이(利)를 위해 하지 말고,/ 성직 맡은 자가 돈 받는 것 하지 말고, 교회의 부패는 무제한 헌금을 거둬 들인데 있습니다. ③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주장하는 자세/ 치리자의 장로가 되는 것이 지위 상승 자(계급의식)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자세하지 말고, 오히려 섬기는 자세로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뒤에 오는 성도들은 먼저 된 장로들의 모습에서 섬기는 것을 배워가기 때문에 본이되라, 한 것일 것입니다.
치리장로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위해, 봉사의 역할 자 혹은 시중드는 자 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Sevice man 혹은 Attendance(시중 자)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치리 장로란 뜻은 교회의 관리역할자 란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교회를 맡아 관리하고 운영해 가는 것은 치리 장로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가르치는 장로
이번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에 대해서입니다. 목사장로를 뜻한 말씀으로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는 누구인가? 그것은 오늘의 목사에 해당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된 사람들로는 사도들을 비릇 바울, 아볼로와 사도들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디모데, 디도, 두기고,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등은 말씀 전달자들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특히 사도들의 제자들의 역할은 사도들이 써준 서신들을 전달하는 일이나 사도들이 가르쳐준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것(딤후 2:2)같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말씀 전달자들은 어떤 한곳에 정착, 지금의 목사들처럼 10년-20년 혹은 종신 혹은 대물림을 한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 머문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오늘의 목사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문제를 푸는데 핵심적 관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전달자)는 말씀을 전달했으면 다음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 당연한 전달자의 소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흥 강사들이 집회가 끝나면 그 교회를 떠나듯,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자리잡고 앉아 있는 담임 목사가 따로 있고, 선교사가 따로 있는, 그런 식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목회지가 따로 있고 선교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 사도들 (말씀 전한자들)은 한 곳에 머문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사명감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자(목사)는 교회 치리와는 관계없이 말씀만 전달하고 다음 곳을 향해 훌적 떠나가는 자들 일때 (사도들처럼)얼마나 고고(孤高)한 품격을 유지하겠는가?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이한 날선 검처럼 권위가 있지 않겠는가?
뒤에 가서 다시 설명을 하겠지만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한곳에 정착해서 교회의 치리자 역할까지 하려고하기 때문에 교회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 날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말씀을 가르치고 또 다른 곳을 향해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된다면 그는 영원히 교회로부터 천사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의 장로나 집사들에게 멱살 붙잡혀 강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세상 메스컴에서 조롱(?)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들이 빚을 내서라도 교회를 개척하고, 그곳에서 정착을 하려는 것은 그곳이 보장된 기반(소득 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장되지 않은 말씀 전달자라 했을때 빚을 내서 교회 개척을 하며, 일년에 수 백만원씩을 내면서 신학교를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말씀만 전하고 떠나갈 곳의 교회당 짓는 일을 위해 금식 기도하며 몸부림 칠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사도들이 보였던 전도자의 삶을 이제라도 본 받아야 합니다. 목사직이 밥 먹고사는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서는 교회는 분쟁과 비리가 끊임없이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곳에 정착해서 사례비라 해서 월급을 챙기려는 것은 스스로 삯군이 되겠다는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성서에 제시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로의 길을 간다고 했을 때 비로소 목사 될 자만 목사가 되는 법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합니다.
4. 목사와 은사
목사는 은사직의 하나 입니다. 앞에서 논해온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한 자"는 오늘의 목사에 해당된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직이란 은사에 속한 직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성령의 각양은사들을 각 사람에게 주셨는데 (고전 12:4-11) 말씀과 관련하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함을"등의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는 이 은사를 받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사란 명칭이 무슨 작위(爵位)와 같이 여겨, 은사가 전혀 없는 사람도, 또는 사역과 전혀 무관 한 사람도 목사 안수를 받고 작위 명(신분 명)처럼 사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기막힌 것은 계급의식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조소(嘲笑)를 유발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위고, 다음은 강도사(준 목사), 전도사(조사)등의 서열에 따라 신분적 대우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희극(?)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고 보면, 이미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이 만든, 사람들의 조직체(組織體)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은사가 무시된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자랑이나, 사람의 신분을 위해서 부여된 은혜가아니라 오직 복음(교회)을 위해서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부여된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유동적이란 말은 부여 하셨다가 거두시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심각해진 요인 중의 하나가 성령의 은사가 없는 이들이 목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설교집이나 뒤적이고, 남이 한 설교 테입 이나 들어서 신자를 가르치려는 목사라 한다면 그는 성령의 은사가 없다고 보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직은 은사직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가 설교를 준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준비해서 설교로 신자를 가르친다? 생각 해볼 문제죠.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겠죠. 매주일 낮 밤 수요일, 새벽기도, 또 무슨모임, 심방 설교? 그 많은 설교들을해야 하니 준비를 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 같이 많은 설교를 듣는 신자는 일년이면 얼마만큼 성숙된(변화된)신자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 7)솔직히 10년-20년 교회 다닌 분들이 얼마만큼 성숙된 삶을 삽니까? 듣고 또 들어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것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 분쟁의 주역들이 초신자들입니까?, 아니면 오래 다닌 사람입니까? 사람을 통해 듣는 설교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예수를 배척 한것이 아니고, 교회 분쟁의 주역들이 설교를 듣지 못해서 분쟁의 주역이 된것이 아닙니다.
목사들이 머리를 싸매고 설교를 준비해서 유창한 설교를 한다고 해서 신자가 성숙되고 교회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일년중 한 두 마디라도 주께로부터 임한(성령의 조명에 의한) 영감(靈感)있는 말씀이 있을 때 신자는 자라고 빛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한사람의 목사설교를 일년이고 십년이고 반복해 들어도 은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신자의 청각에 그 목사 설교에 채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세뇌된 청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들은 그 목사에게 맹종은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숙된 사람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 목사의 소속
앞에서 이미 말해왔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는 한곳에 정착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안 제시를 할 때 언급을 다시 할 것이지만 목사의 신분 소속은 지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지금도 목사는 지 교회 소속이 아니라 노회 소속으로 된 곳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그 기본 뜻이 지 교회 정착된 신분이 아니 란데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소속이 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의 생활비도 지 교회가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목사는 노회 이상의 기구에서 관리를 하고 생활비도 그곳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선임도 엄격해 지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침의 수고에 권위도 지켜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논한바 대로, 위의 기구에서 관리가 되기 때문에 물론 한곳에 정착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따로 있고, 선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말씀 사역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관리 기구의 지시에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된 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자들은 제멋대로 사역 지를 간 사람들이 아니 였 습니다.
뒤에 가서 다시 언급이 되겠지만 말씀증거(설교)에도 엄격한 관리와 검증을 통해 증거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증거자의 의도설교(意圖說敎)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건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며, 동일한 신앙의 질을 위함이며, 동일한 신앙의 성장을 위함인 것입니다.
필자는 과거에 신학교에 잠시 관여 한바가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후보생 선발을 총회의 정확한 인력 수급 계획에 따라, 선발하고, 가령 2005년도에 총회에서는 어느 지역에 선교사를 몇 명 보낼 것인가, 어떤 과목의 신학자는 몇 사람을 키울 것인가, 교회 개척은 어떤 지역에 몇 개를 세울 것인가, 에 대한 계획을 먼저 세우고 그 역할에 맞는 사람을 선발해서, 총회에서 전 학비 및 생활비까지도 부담해서 키워야 한다고 제한한바 있었습니다. 물론 예산 확보 계획까지도 정확하게 세워서였죠, 하지만 채택 될 리가 없죠. 가난한 신학생들의 피맺힌 돈 받아 목사를 만들어 내니, 그 사람은 목사 되면 본전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사도들도 설교 밑천이 바닥 났어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면서, 왜 사도들처럼 한곳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고 떠나갈 수는 없나요? 사도들은 당시에 성령의 감동에 의한 계시를 직접 받은 분들입니다. 그런 데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은 것은 설교 밑천이 바닥 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처럼 설교 생산공장들(?)이 못되었던 거죠, 요즈음 목사님들은 설교 제작의 슈퍼맨들이라 해야 할까요? 사실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목사님 밑에서 5년, 10년, 혹은 20년 설교를 듣고, 과연 얼마나 성숙된 신앙인이 되었을 꺼라고 생각합니까?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입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목사가 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반복된 설교를 되풀이하는 것은(본문과 제목만 다른)성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솔직히 목사 자신을 위한것 아닐까요? 목사님들이야 그런 생각 갖고 그렇게 목회 하는 분들이야 없겠죠, 하지만 냉정히, 객관적으로 본 다면 그런 면도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들고, 비만과, 무력증에 걸려, 아무구실도 할 수 없고, 한다는 것이란 자기끼리 먹고 쓰고 즐기는 것과, 자기들 교회 키우는 일, 자기 이름 알리는 일,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심한 표현이라면 용서하십시오.
6. 목사와 설교
이미 앞에서 치리 장로와 말씀의 가르침의 수고 자, 곧 목사에 관한 언급을 해왔습니다. 목사의 중책이라 하면 말씀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개혁 당시 교회 성직명을 목사라 하고 목사에게 설교권을 부여 한 후 교회가 분열되면서, 교세 확장을 위해 적당한 요식 절차만 거쳐 목사가 양산되고, 목사가 되면 누구에게나 부여된 강도권(설교권)은 오늘의교회를 개혁의 대상이 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가 한곳에 자리잡고 앉아 수년, 수십 년,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설교가 가져온 문제가 오늘의 교회문제의 근본이 된다는 점에서 깊은 검토가 필요 한 것입니다. 설교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눠서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① 성경을 왜곡되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 소개된 글을 봤습니다 지난해 CBS 50주년 심포지엄에서 사랑의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목사께서 한국교회 목사님들중 40%는 성경이 아닌 설교를 하고 있다고 했답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예로 두 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대형교회 목사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목사님의 설교를 필자가 직접 들은 설교입니다. 말씀은 고린도 후서 8장 9절을 갖고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요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으로, 주께서 우리로 부요 하게 해주셨으니 믿는 자는 마땅히 부요 하게 살수 있다는 것이 였 습니다. 가난하게 산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란 요지의 설교 였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아멘 아멘을 연발하고...이 설교가 맞는 설교입니까? (1-15절 참고)
다음은 이사야서 58장 6-7절의 말씀으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유명 금식기도원에서 기도원 원장 목사가 설교한 것입니다. 요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이 풀리고 멍에의 줄이 끌러지고 압제 당한 곳에서 자유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 역시 맞는 설교입니까? 유명 금식 기도원에는 수 천명에 달한 성도들이 참석했고 목사님들만도 수십 명은 족히 참석해 보였습니다. 역시 청중들은 아멘 아멘을 연발하고, 대형교회요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입니다. 유명목사들의 설교이니 순진한 성도들은 성경이 그런가 하여 살필 겨를도 없이 아멘 아멘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한국 교회의 실정입니다. 두 편의 설교는 터무니없는 설교지만 신자들은 아멘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②목사의 설교에는 의도가 따릅니다. 가령 교회당 건축을 목표했으면 성전 건축운운의 설교가 준비 되고 수양관 건축이 필요 할 때는 거기에 맞는, 묘지구입에도 교육관 건축에도 목사 안식년에도 선교사 파송에도 각종 목사의 의도를 따라 설교가 준비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나쁜가? 하는 이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성도의 영적 양육 혹은 성도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목사의 의도에 맞춰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를 위해서 목사가 필요 한 것이 아니라, 목사를 위해서 성도가 필요한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목사를 위한 교회가 되고 만다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 설교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③ 목사 설교에는 세뇌가 됩니다.(최면에 걸린 상태) 한사람에게서 일년이고 십 년이고 일방적인 설교를 계속 듣게 된다는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한 중에 이미 그 신자는 설교하는 목사에게 세뇌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세뇌되어 최면상태가 아니 라면 그분들은 목사의 도전 세력이 되거나 아니면 벌써 그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최근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폭로되고 있지만 진작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그 교회 교인들은 꿈쩍을 않고, 도리어 자기교회 목사 보호에 목숨까지라도 바쳐서 보호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된것은 이미 깊이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④ 목사 설교권은 교회(교단)분열의 근원이 됩니다. 중세 개혁이후 개신교가 4분 5열 걸레처럼 된 것은 누구나 돈 몇 푼 들고, 일정 기간의 요식 절차만 거치면 목사가 되고, 목사가 되면 누구나 설교를 합니다. 각 개인의 성경 해석과 주장은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을 만들고, 추종세력과 함께 조금도 거리낌 없이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교파가 만들어지고 어느 곳에서나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깊이 들어가면 그 근본 원인은 목사의 설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⑤ 신자의 영혼이 설교자 한사람에게 맡겨져 있고, 한사람을 통한 일방적 설교는 신자로 하여금 우매(愚昧)한 백성을 만듭니다. 동시에 신자는 편식 신자가 되어 균형 감각을 잃고, 마침내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외에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공공연히 행합니다. 이것이 신자보호란 이름으로죠.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교자 개인의 교회(개인 기업?)를 만든 결과가 되고, 소경 된 설교자일 경우는 그 설교를 듣고 따라가는 교인도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것처럼 위험한 것이 또 없다 는 것입니다.
⑥ 목사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설득력 있는 설교는 신자를 수 천명이고 수 만 명이고 수십만이고 제한 없이 끌어 드린다 해도, 누구도 탓하거나 제재(制裁)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교회 구조입니다. 지금 제한 없는 신자 유치를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설교자의 것이 아니라 주께서 피 흘려 사신 주의 것입니다. 말 담이 좋은 목사(설교 잘한 목사?)라면 무제한 신자를 끌어 들여(다른 교회당에 소속 된 자라 할 찌라도) 자기 영향하에 둔다 한들, 누구도 제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교회사이에, 목사와 목사사이에, 신자와 신자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반목이 쌓여 있습니다. 이 결과는 본래지역을 중심한 교회가 무너지고 목사중심 교회로 전락이 되는 모순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성문밖 3, 4권 참고)
⑦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면 그는 교회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기반을 만드는데 절대적 자기 공력(功力)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목사 자신이 의도해서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사고(思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주인이 되고, 교회의 제정은 물론, 교회의 중요 요직은 족벌로 혹은 측근으로 채워지고 교회는 그 목사의 왕국이 됩니다. 목사의 왕국은 자연스럽게 세습을 말하게 되죠.
⑧ 개인이 자유롭게 갖는 설교권은 수많은 설교자를 양산하게 되고 양산 된 설교자들은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게 됩니다. 개척해서 몇 년만 고생하면 튼튼한 자기기반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죠. 특별히 밑천 없고, 기술 없고, 힘든 노동하기 싫은 이들이면 설교 배워(목사 되어) 설교하고 먹고사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죠, 사람들에게 목사님, 목사님 대접받으면서..어떤 분들은 술집이 늘어나는 것 보다 교회가 늘어 나는 현상은 훨신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이와 같은 문제는 목사 개개 인 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조적 모순이 만든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합리한 교회 구조를 갖고는 끊임없는 분쟁과 교회의 비리는 멈춰 질 수가 없는 것이며 시간이 갈수록 교회의 문제는 더 깊이 더 많이 노출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이렇게 될수록 사회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상실된다는데 있습니다. 교회의 영향력 을 잃게되면 마침내 기독교라는 전체가 사회로부터 외면되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쇠퇴기, 내지는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는데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이미 그런 현상은 나타나기 시작 한 것 아닌가?)
여기서 자연히 들고나올 제목이 "주일 성수"에 관한 문제 일 것입니다. 정착된 설교자가 없다면 매 주일 어떻게 예배를 드릴까? 하고 의문 제기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구조에서는 당연한 의문 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일 성수 문제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7. 목사와 주일성수
주일성수 문제를 다룰 때 자연히 조심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지켜온 전통적 교회의 핵심 교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잘못 이해 될 때는 지금까지의 반발 보다 더 심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을 갖고, "무식한 소리를지껄인다" "억지소리를 늘어놓는다"등 해괴한 욕설들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편지 내용을 잘못 파악 한 탓인 듯 합니다. 지금 주일성수 문제가 헌금 문제와 같은 맥락이란 점에서 조심성이 있습니다. "교회 이대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서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가를 조명해서 대안을 찾자는 것입니다. 본래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서 따로 쓸려고 했지만 목사와 주일문제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취급을 합니다.
첫째는 주일 성수의 유래입니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널리 알려져 있는 문제입니다. 본래 초대교회 시대에는 유대교를 따라 안식일을 함께 지켜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밀라노 칙령과 함께 교회가 로마 교회가 되면서 오늘의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라 합니다. ① 첫째는 당시 로마는 통지 족속들 중에 가장 골치꺼리로 여긴 족속이 유대족속 이였다 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방인들과 섞일수 없는 유대인의 선민 사상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600만이란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걸 봐도 짐작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독교 역시 유대인의 안식일을지키는것 때문에, 로마인들에게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보여졌고 그것은 로마인들의 곱지 않은 눈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대교와의 차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고, ② 둘째는 당시 로마는 다 종교(多 宗敎) 국가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가 미트라(mitera)교 였다 합니다. 그들은 태양신을 섬긴 사람들이었는데, 태양신은 "불멸의 젊은 신"으로 묘사되어 주로 군인들이 많이 믿었고, 로마 황실과 귀족층에도 널리 뿌리내려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제일(祭日)이 일요일(sunday /태양의 날) 이었습니다. 그 후 A.D 321년 태양의 날은 쉬라는 황제법령이 내려지면서 교회도 이 날을 본격적으로 주일 성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불멸의 태양신 미트라 와 그리스도를 동일한 신으로 이해, 미트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을 하나로 만드는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통합 작업을 한 것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한것이 었습니다. 미트라교는 그들대로 자기들의 태양신이 제일이었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기독교는 교회대로 유대교와의 차별되어야 했고, 이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안식후 첫날 주님이 부활하신 날도 된다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게 된것입니다. 문제는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해서 성경의 절대적 가르침인양 성도들에게 주일성수을 강요(?)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방 정치인의 정치적목적으로 행해진 것을 하나님의 뜻 인양, 하나님의 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제라도 냉정하게 검토하고 비 성서 적인 것은 가려 청산을 해야 합니다. 세상도 과거사 문제를 청산해야 된다고 하는 마당에 교회는 거짓을 묵인 한 채 거짓을 지켜 야 합니까?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나라에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지키는 것도 무방한 일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일성수을 강조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천박한 초등 학문(율법)으로 묶어, 성숙한자로의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종교인으로만 살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오랜 전통이라 할 찌라도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바대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를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은 그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라는 로마종교계(전 종교)의 최고 제사장 직책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유지 한 것을 봐서도 그는 크리스천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쓴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기 뜻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가들은 기독교가 로마 교회가 되면서 이방종교와 혼합하여 하나의 변질된 종교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일 성수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교회의 의전(儀典)들 중에는 이방의 종교 문화에서 유입 된 것들이 대부분 이란 사실을 알고, 비 성서적인 것들은 이제라도 청산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지적 한바와 같이 그 대표적인 것이 일요일의 주일성수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일성수(主日聖守) 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는 뜻인데, 문제는 성경에는 단 한번도 주일성수를 하라는 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가 주일성수 문제가 부정되면 오늘의 교회 기반이 붕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성수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세력은 "안식후 첫날" ( 요 20: 19, 행 20: 7, 고전 16: 2 ) 이란 말씀을 가장 많이 내세우게 됩니다. 그밖에는 궁여지책으로 끌어오는 말씀이 구약 율법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출 20: 8-11, 사 58: 13-14) 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벌써 성문 밖 편지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복음을 율법의 옷을 입혀 신자들에게 여과(濾過)없이 가르쳐 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언급을 했었습니다.
주일(일요일)은- 태양의 날을, 성수는-구약율법의 안식일을 합성해서 "주일성수" 란 말을 만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언급이 전혀 없고 오히려 날을 지키려 한자들을 두고 바울은 심한 탄식을 하면서 책망한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갈 4: 8-11, 골 2; 16, 20-21) 날을 지키라고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율법을 끌어다가 적용을 시키려는 모순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안식일 적 개념이 계승되어서 주일성수를 주장하게 된다면,(그 정신이 계승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 훨신 성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비 성서적이라 해서, 안식일교회(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이단이라 규정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안식일 적 개념을 갖고 주일성수를 가르치는 것은 훨신 더 이단이된 셈입니다. 이런 모순을 갖고 주일성수를 강요(?) 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이단의 앞잡이가 된 샘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와 안식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율법의 안식일 문제를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위에서 언급한바 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하는 근거를 구약 율법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율법에서의 안식일에 관한 것은 구체적 언급이 없어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안식일이 갖고있는 그 의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해서만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안식일(安息日/ Sabbath)은 말 그대로 쉰다, 휴식한다 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엿 세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창 2: 2)는 것에 기초되어 율법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라 했고, 그 분의 백성된 자들은 그날을 모두 안식을 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유대율법의 핵심적 사안입니다.그래서 10계명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안식일을 범했을 경우, 죽음 이 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출 31: 14-15, 민 15: 32-36, 느 9: 13-14, 렘 17: 24-27)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곧 생(生)과 사(死)가 가름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죽음과 삶이 관계된 엄한 규정은 안식일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안느냐하는 것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된 것처럼, 구약 백성들에게는 안식일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 잘라먹은 일로 바리새인들과 시비가 일었을 때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 이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마 12: 8)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완성된 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백성들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완전하게 그분 안에서 지킨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롬 8: 1) 뿐만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시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28) 사실 우리가 어떤 날을 쉰다고 해서 참 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 믿는 것이 복된 것이요, 복음이 복된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막힌 복을 또 무슨 날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하심을 헛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날 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 8-11)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에 이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1년 365일이 주님의 날을 사는자 들인 것입니다. 지난 여섯 번째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 들의 삶에 대해서 언급을 한바 있습니다. 만약에 날을 지킨다(성수주일) 고 하는 것은 아직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 주일날이라 해서 교회당에 찾아가는 그런 신자가 되어서 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를 하려는 자들은 아직은 초등학문에 속한 자(율법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사람이라고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 댄다고 해도 그의 삶 자체가 그것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일성수를 하면 안 된다 하니까 "왠 미친놈이 귀신들린 소리를 하는구먼" 하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야말로 상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신중히 말씀을 검토하시기를 참으로 권고합니다. 이 일은 결코 쉽게 지나 쳐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가 전통적 유전이 중요한가를 놓고 한바탕 씨름을 벌려서라도 분명한 결판이 나야 할 문제입니다. 로마교회의 시작과 함께 이방 종교문화와 혼합해서 만들어진 사생아(일요일의 주일성수)가 결코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유업은 날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居) 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거부감이 생긴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위배되거나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입니까?아니면 오랜 전통을 따라 지켜온 유전적 고정관념 때문입니까?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문제는 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아무리 오랜 전통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벗어난 전통은 있을 수 없으며, 더구나 이일로(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거나, 유린되는 일이 발생되고 있다면 즉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들은 1년365일이 그리스도의 날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365일을 사는자 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값진 것이요 보배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변론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365일을 주님의 날로 살지만 일주일의 하루를 구별해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365일을 주와 함께 산다는 고백의 표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 이 같은 자들이 있다면 그는 두 번 기 망(欺罔) 하는 자 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초대교회를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식일 하루만 지키는 자들이 아니요, 매일의 삶이 주의날로 살아간 사람들 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식 후 첫날 모인 것뿐이지 그날을 지키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일성수"란 말을 쓰게 되면 성도를 율법으로 묶는 행위라는 것을 바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당 주의 자 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일는지 모릅니다.
존. 오부라이언 이란 신부는"나는 성서를 창세기 첫 장부터 묵시록 끝장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주일(일요일)을 거룩 히 지키라는 구절을 발견하지 못했다" (억만인의 신앙,200쪽/ 카톨릭 출판사 간) 고 그의 고백 문에 글 쓴 것을 봤습니다. 성경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유전의 전통을 지켜야 합니까? 이제는 결단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주일성수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랜 전통과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분들로서는 정신나간 자의 괴변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종교의 제일(祭日)을 지키면서, 의미(意味)는 율법의 안식일을 적용, 혼합된 날을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망(欺罔) 하는 행위요, 그리스도를 비하(卑下)시키는 행위란 사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주장하는 것은 성직자들의 역할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한다면 지금 목회 하신 분들이 화를 내시겠죠?
하지만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교회당을 하나님의 집(전)이라 말하면서 일 주일에 하루는 교회당에 모이게 하는 것은 사실상 목사님들의 일꺼리를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주일에 한 번식 설교를 들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1년 365일을 주님의 날로 살게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계를 정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세계 되게 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6일 동안은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이런 비유가 합당할는지 모르겠지 만 하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6일은 북한을 위해서 삽니까? 대한민국의 국민은 1년 365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역시 1년 365일을 하나님의 나라백성으로 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만을) 거룩하게 지켜 라, 함으로 종교인의 삶은 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금과 옥조 처럼 지켜온 주일성수 라는 것이 성서적이 아니다, 하니까 정신나간 인간이 엉터리 같은, 말도 안되는, 괴악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 가지만 생각해 주십시요. 첫째는 성경을 생각해 보시고, 둘째는 그리스도 구속의 원리를 생각해 보시고, 셋째는 종교와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책망을 할 것이 있으면 책망을 하십시요.
유대교의 안식일(토요일)이나, 모슬렘의 성금요일처럼, 기독교도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 그런 것입니까? 그와 같은 발상이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일반 종교들처럼 암흑의 역사로 만들어 온 것입니다. 예수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승천의 사건은 일반 종교의 교주들과는 다르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모양은 종교의 형태를 취해야 합니까? "내가 너희를 샀다,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다" 이 말 뜻을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8. 목사와 평신도?
목사그룹(교역자 그룹)의 형성은 평신도 그룹이란 어처구니없는 이중 그룹이 형성됩니다. 언제부턴가 "평신도 연합회" 무슨"평신도선교""평신도운동본부?"등 평신도란 말이 보편적으로, 또는 당연한 것처럼 사용합니다. 본래 평신도란 말은 성경에 단 한번도 사용 된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그렇게 구별되어졌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중적 사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중적 사역이란 성직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으로 나뉘어져, 결국 인간의 공로구원의 기초를 만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로 구원이란 성직자를 위한 구원이 따로 있을 때" 그 구원을 두고 붙여진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로 구속받은 백성은 동일한 은혜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자라 하고(사도행전에서),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한 것입니다.
평신도란 말은 로마카톨릭이 만든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성직주의 화"(Clericalization)와"성직 존중주의" (Clericaism)를 주장하면서 일반 신자들을 평신도라는 말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학습인 이라 해서 배우는 사람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성직 그룹은 일반 신자와는 전혀 차별을 두어, 교사(가르치는 사람) 혹은 영적 아버지라는 신분적 구별을 한 것입니다.
만인이 평등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주장, 카톨릭의 성직 존중주의를 반대하고 일어난 것이 개혁 운동이 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개혁교회가 어느덧, 평신도란 말이 다시 등장되고, 목사는 제사장 적인 신분임을 공고히 하려는 지경에까지 온 것입니다.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된 것이 과거로의 회귀(回歸)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성직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이 따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①결국 직업 성직자가 양산되는 동기가 되고, ②성직에서 제외된 평신도 그룹은 능동적이거나, 온전한 주의사람으로 (헌신 자로 /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갈 기회가 박탈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로부터 E-mail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요한복음 15장 7절을 가르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 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에서 영어로 in me 와 in you 에 대해서 새삼스러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문 밖 편지에서 "헌금(십일조)을 드리게 하면 안 된다" "주일성수를 요구하면 안 된다" 고 하니까 많은 목사님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편지에서의 주장은 바로 in me 와 in you를 위해서 교회당이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되고,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게 해서도 안 되고, 주일성수를 가르쳐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해온 것입니다. 아직도 이 뜻을 이해 못하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지금과 같은 교회구조와 방식은 율법신자가 되게 할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주장들(가르치고 있는 것)이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전적으로 성직자(목사)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 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 시대의 상황과 지금의 교회 상황을 혼동해서도 안됩니다. 사도시대는 성령의 계시에 의한 성경(신약)이 형성 될 때입니다. 지금은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성경)이 성도 각 사람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 참 교사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각 사람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을 의존하게 해야하는가? 목사를 의존하게 해야 하는가? 오늘의 교회구조가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직자(목사)가 백성과 성령사이를 가로막아 서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목사들의 스승만 된 것이 아니라 성도 각 사람의 스승도 된 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가르치심은 수십개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의 지식보다, 훨씬 우월한 지식임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 25). 신자들로 하여금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데 유익 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사람이 되게 하는데 유익한 것뿐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 38)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시겠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목사가 되는 것은 "아비에게 들은 것"(선생에게 배운 것/ 신학교?)에 의해 목사 노릇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께 의존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수만가지 자료를 참고해서 만든 설교라 해도, 말씀을 통한 잠깐의 성령의 조명하심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목사)가 신자들을 성령께 넘겨주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첫댓글 제목처럼 극단적인 목사무용론의 글은 아니고,생각하고 고민할만한 문제들을 담고있는 글이라 스크랩해왔습니다.
목사 무용론이라기 보다는 제사를 원치 않고 순종을 원한다는 하나님 말씀이 주제이네요!!! 지당한 말씀들입니다!
신앙적 인격과 품성이 겸비한 목사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만을 갖춘 목회 기능사로서의 목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마습니다 마고요 마져요~~ 못 알아 듣는 멋사가 문제고 못 알아 듣는 멋사가 찌-짐 뒤집듯이 이런글을 뒤집으니 문제지요 한국교회 멋사는 세속교회의 룰을 성경과 같이 짜집기 하는데 전문가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