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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6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쇼트트랙 김길리·이동현, 주니어 세계선수권서 나란히 3관왕
2023년 이탈리아 해안 난민선박 난파해 최소 59명 사망
이탈리아 서남부 칼라브리아주(州) 동쪽 해안 부근에서 난민을 태운 선박이 난파 사고를 당해 최소 59명이 숨졌다. 이날 오전 난민과 이주민을 태운 목선이 칼라브리아주 크로토네시 앞 해안에서 암초에 부딪힌 뒤 난파한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59명이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와 아기 12명이 포함됐다.
해류에 휩쓸린 채 숨진 난민의 시신들이 목선의 잔해와 함께 해변으로 떠내려오기도 했다. 부서진 선박에서 해변까지 헤엄쳐 도달한 이들을 포함해 최소 81명이 생존했다고 크로토네시 측은 전했다. 생존자들은 임시 대피소로 이동하거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2022년 한국 대표 석학자 이어령 사망
이어령(88)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문학평론)으로 활동했다.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비평가로 등단한 뒤 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전반을 아우른 지성의 필력을 휘두르면서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짧게 말하겠다”면서도 홀로 서너 시간은 족히 쏟아내는 달변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이어령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것을 비롯해 10여개가 넘는 직함을 거쳤다. 경기고교 교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월간 문학사상 발행인,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2017년 삿포로 겨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종합 2위(금메달 16개 은 18개 동 16개)
2016년 제주 강정 해군기지 9년 만에 준공
2015년 헌법재판소 형법제정(1953년) 이후 62년간 유지된 간통죄에 위헌 판결
2014년 서울 송파구 반지하 셋집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 숨진 채 발견
2011년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별세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이 지난 26일 93세로 별세했다. 경기상고를 졸업한 그는 1950년 한일은행에 입행, 지점장과 상무, 전무를 거쳐 1976년부터 4년간 한일은행장을 역임했다.
그는 정통 은행가이며 원칙주의자였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에게 경영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1965년 김 회장이 한일은행에 신입 행원으로 들어갔을 때 김 전 행장이 남대문 지점장이었다. 김 회장은 1997년 처음 하나은행 행장이 돼서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이제 행장이 됐으니 사표 한장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될 때엔 바로 사표를 제출하라'고 말했을 정도로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그는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렴 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친형이며,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장인이다.
2010년 김연아, 여자 피겨 스케이팅 신기록 작성
2010년 2월 26일(한국시간) 김연아(20·고려대)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150점대’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2010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첫번째 올림픽 메달이다.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1위 차지한 금메달리스트는 18년 만에 처음이다.
김연아는 26일 퍼시픽 컬리시엄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50.06점(기술 78.30점·구성 71.76점)을 획득, 쇼트(78.50점)와 프리를 합친 종합점수에서 총 228.56점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는 김연아 본인이 2009년 세운 프리스케이팅 세계기록(133.95점)을 무려 16점 넘게 올린 것이다.
이날 경기에서 김연아는 파란색 하이넥 드레스를 입고 출전했으며 ‘피아노 협주곡 F장조’(조지 거쉰 작곡)에 맞춰 연기했다. 김연아는 총 7번의 점프를 포함한 모든 요소를 모두 실수없이 성공시켜 ‘클린(무결점) 프로그램’으로 연기를 마쳤다.
한편 김연아 다음 순서로 나온 일본의 아사다 마오(20)는 기에 눌린 듯 잇따라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했으나, 131.72점(기술 64.68점·구성 67.04점)으로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았으며, 합계 205.50점으로 은메달을 따냈다. 동메달은 합계 202.64점을 받은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티에게 돌아갔다.
이로서 김연아는 ISU(국제빙상연맹)이 주관하는 4대륙피겨선수권대회(FCC), 세계피겨선수권대회, 그랑프리 파이널(GPF)에 이어 올림픽까지 석권하면서 ‘피겨 여제’에 등극했다.
아울러 카타리나 비트(구 동독·1988 캘거리), 크리스티 야마구치(미국·1992 알베르빌),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1994 릴레함메르), 타라 리핀스키(미국·1998 나가노)에 이어 ‘세계선수권-올림픽’ 연속 제패도 이뤘다.
2010년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유선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별신굿' 김유선(金有善·75) 명예보유자가 2010년 2월 26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49년 9월 동해안 무속계에 입문해 1985년 4월 보유자로 인정됐고 2005년 4월 명예보유자가 됐다. 서울올림픽 개최공연(1988) 대전엑스포 축하공연(1993) 영국 런던 공연(1996) 광주비엔날레 공연(1997) 안동탈춤페스티벌 공연(2000) 등 다수의 공연에 참여했다.
동해안별신굿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마을굿으로 부산에서 강원도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서 매년 혹은 2~3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축제성 강한 굿이다
2007년 1만년만에 드러난 ‘남극 얼음 밑 세상’
2007년 2월 26일 남극 대륙의 거대한 얼음덩어리 아래에서 서식해온 생물들이 1만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극 대륙에서 남미 남단 케이프혼 쪽으로 길게 뻗은 남극 반도. 그 일부인 라센(Larsen) 빙붕(바다 위에 떠있는 얼음덩어리)이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부터. 1995년엔 라센A 빙붕이, 2002년엔 라센B 빙붕이 붕괴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 결과 제주도 면적의 약 5.5배에 달하는 1만㎢의 바다가 1만2000년 만에 얼음 아래 덮여 있던 속살을 드러냈다.
독일 알프레드 베그너 극지해양연구소 연구팀은 잠수정을 타고 이 지역 바닷속을 최초로 탐사했다. 그 전까지는 과학자들이 얼음에 구멍을 뚫고 원격 조종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남극 바닷속을 탐사해왔다. 연구팀은 10주간의 탐사 끝에 새로운 종(種)의 해양생물 19종을 비롯해 총 1000여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 조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빙붕 붕괴 후 남극 바닷속 생태계 변화를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연구팀은 크릴 새우와 밍크 고래 등이 대규모로 서식하고 있으며, 수심 2000m 심해(深海)에 사는 갯나리와 해삼, 성게, 멍게 등이 남극 바닷속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탐사팀을 이끈 줄리안 구트(Gutt) 박사는 “얼음이 사라진 뒤 해양 생태계가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번 조사는 지구 온난화가 생물 다양성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부동산 실거래 첫 집계
2006년 한해 국내에서 거래된 부동산은 모두 322만 건으로 아파트 188조원 등 총거래 금액이 42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5년 GDP(국내총생산)의 52.7%, 상장사 시가총액(코스피·코스닥)의 53%에 해당하는 자금 규모이다. 건설교통부는 2007년 2월 26일 이 같은 내용의 ‘2006년 부동산 거래 현황 및 아파트 실거래가 자료’를 공개했다. 정부가 작년 초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제를 도입함에 따라 연간 부동산 거래금액이 처음으로 파악됐다.
건교부는 또 작년 4분기에 거래된 20만6000건과 올 1월에 거래된 2만건 등 아파트 22만6000건의 실거래가 자료도 추가 공개했다.
2006년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공개
독도를 ‘조선 강원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한 17세기 일본측의 공문서가 2006년 2월 26일 공개됐다. 이 문서는 최근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해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한 가문에 전승된 것이다. 손승철(孫承喆)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무라카미(村上) 가문으로부터 ‘원록 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의 원본 사진을 입수하고 이를 공개했다.
문서는 “조선국 강원도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있다”는 안용복(安龍福)의 진술을 담았다. 이어 ‘조선의 8도(朝鮮之八道)’라는 제목 아래 각 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강원도’ 아래 ‘이 도(道) 가운데 죽도와 송도가 있다’라고 명기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문서는 1696년(숙종 22년) 5월 일본 어선의 독도 출어에 항의하기 위해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안용복을 일본 지방 관리가 취조해 막부 직할령인 이와미(石見)주에 보고한 내용이다. 문서의 존재는 작년 5월 일본 시마네현의 지방지 산인주오신보(山陰中央新報)의 보도에 의해 알려졌으나 실물사진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6년 세계인구 65억명 돌파
세계 인구가 2006년 2월 26일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인구통계국의 국제 프로그램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한국 시각 26일 오전 9시16분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섰다.
현재 초당 4.4명이 태어나고 있으며 현 인구는 1990년에 비해 4배 가량 늘어났다. 통계국은 지난 2004년 3월 보고서를 통해 1999년 6월에 인구 60억명을 넘어섰다고 밝힌 바 있어 7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명이 늘어난 것이다. 또 6년 후인 2012년 10월 18일 오후 4시36분(미국 동부 시각)에 70억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2006년 프랑스, 유대청년 피살에 반유대주의 시끌 정치인·시민 등 3만여명 추모 행진
2006년 2월 26일 프랑스 전역에서 반유대주의 범죄로 희생된 유대인 청년 일랑 알리미(23)를 기리는 가두행진이 열렸다. 무하마드 만평 사태 당시에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이슬람의 분노에 침묵하던 정치인들도 이날 반유대주의 행진에는 앞다투어 참석했다.
파리의 행진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 필립 두스트 블라지 외무장관, 야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제1서기,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 등 여야 정치인과 인권단체, 시민 등 3만300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 23일 파리의 유대교 회당에서 열린 알리미 추모식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도 참석했다.
알리미는 범죄 조직의 미인계(美人計)에 넘어가 납치됐다. 범인들은 가족들에게 45만달러(약 5억5000만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알리미는 납치된 지 3주 만인 지난 13일 파리 교외 철길에서 심한 고문에 다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됐고 곧 숨졌다.
처음에는 단순 강도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체포된 10여명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 “알리미가 돈이 많고 뭉쳐 사는 유대인이어서 범행 대상이 됐다”고 말하고, 수사 과정에서 이 범죄조직이 이전에도 유대인 4명을 납치하려 했던 것이 드러나면서,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비난 여론에 불을 댕겼다.
프랑스 정부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독일 나치에 넘겨 대량학살에 협력한 전력(前歷) 탓에, 정부가 반유대주의를 좌시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니콜라 사르코지 장관은 가두행진에서 “그들은 ‘유대인은 돈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바로 반유대주의”라고 말했다.
한편 범죄조직의 두목으로 보이는 용의자 유세프 포파나는 지난 23일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 외곽에서 체포됐다. 포파나는 돈을 노린 단순 범행이라고 주장하며 반유대주의 혐의는 부인했다고 현지 경찰은 밝혔다.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첫 미사
2004년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마케도니아 대통령 비행기 추락사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Trajkovski) 마케도니아 대통령과 참모진 9명이 탑승한 소형 제트 여객기가 26일 보스니아 남부에서 추락해, 전원 사망했다. 트라이코프스키 대통령은 이날 수도 스코페를 떠나, 국제투자회의가 열리는 보스니아의 모스타르로 향하던 길이었다.
보스니아 내무부측은 이후 목적지인 모스타르에서 비행기로 수분 거리에 떨어진 스톨라츠 인근 산악 지대에서 비행기 잔해를 찾았으며, 생존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추락 당시 이 지역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숨진 트라이코프스키(47) 대통령은 지난 1999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슬라브어를 쓰는 마케도니아 국민과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계 간 긴장관계 속에서 평화를 유지해, 2001년에는 알바니아계 반군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 내전을 막았다. 상법·고용법 전문 법률가 출신으로, 서방에선 국제적 시각과 외교 감각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고 BBC 방송은 전했다.
비행기가 추락한 스톨라츠 인근 지역에선 지난 1996년 4월에도 미 공군 소속의 여객기가 추락해 무역 회의에 참석하려던 당시 미국 상무장관 론 브라운 등 탑승객 35명이 숨지기도 했다.
2003년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치과의사 이도행씨 무죄 확정
1995년 6월 12일 오전 8시50분쯤 서울 은평구 불광동 M아파트 708호 문틈에서 흰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경비원의 신고로 출동한 소방관들은 오전 9시40분쯤 치과의사 최수희(여,당시 31세)씨와 딸(당시 1세)의 시신을 발견했다.
두 모녀는 목에 졸린 듯한 자국이 있는 상태로 물이 담긴 욕조에 떠 있었다. 불은 안방 장롱 속 옷가지들에서 처음 발화한 것으로 추정됐다. 최씨의 가방에 있던 현금과 수표 51만8000원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찰은 최씨의 남편 이도행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지문이나 범행도구 같은 직접적인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검· 경은 이씨를 수차례 소환·조사하고 거짓말탐지기도 동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실시했고, 내노라 하는 국내 법의학 교수들도 나섰다. 혈액형 감정은 물론, 모의 화재실험까지 실시했다.
검찰은 사건 발생 3개월 만인 같은 해 9월 2일 이씨가 가정 불화 등으로 인해 부인과 딸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 그를 구속했고 그후 이 사건은 이씨측과 검찰 간의 기나긴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1996년 2월 1심에서는 유죄와 함께 사형이 선고됐으나, 같은 해 6월 항소심에서는 무죄로 뒤집혔다. 1998년 11월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지만, 2001년 2월 서울고법은 또다시 무죄를 선고했다. 직접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느냐를 놓고 하급심과 대법원을 오간 ‘핑퐁 판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한 번의 사형 선고, 세 번의 사형 구형을 받았다. 평화로운 한 가정의 가장에서 가족을 죽인 살인범으로 1심법원에서 사형선고까지 8년동안 말못할 고통을 받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또다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사·신부·연예인 등 80∼90여명이 참가한 ‘이도행을 위한 모임’까지 만들어졌다.
2001년 고 박종철씨, 서울대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
2001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3차 상봉
제3차 이산가족 상봉이 2001년 2월 26일부터 2박3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졌다. 서울 센트럴시티에선 100명의 북측 이산가족들이 500여명의 남쪽 가족을 만났으며, 이어 평양 고려호텔에선 남한 이산가족 100명이 북쪽 가족들과 눈물어린 포옹을 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969년 12월 대한항공 여객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납북된 딸 성경희씨를 어머니 김삼례씨가 32년 만에 만나 회한의 정을 나눈 순간이었다. 또한 6.25때 포로가 돼 북한에 살고 있던 국군 포로 2명도 평양에서 남한측의 동생들을 만나 눈물의 50년을 회상했다. 서울에선 고 정지용 시인의 둘째 아들이 남쪽의 형을 만나 얼싸안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1999년 패티김, 가수 데뷔 40주년 기념 대형콘서트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은 패티김이 1999년 2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요인생 40주년-사랑은 영원히’라는 타이틀로 대형콘서트를 열었다. 국내 대중음악인이 데뷔 40주년을 기해 이처럼 대대적인 축하공연을 열기는 패티김이 처음이다.
1959년 데뷔한 패티김은 광복 후 한국가수로선 처음 일본에 진출했고, 1963년엔 미국 라스베가스로 건너가 자니 카슨 ‘투나잇 쇼’에 8회나 출연하는 인기를 누렸다. 또 패티김은 1960~70년대 가요사에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우뚝섰던 대형가수였다. 길옥윤 박춘석씨와 손잡고 앨범 70여장, 노래는 600여곡을 발표, 빅히트곡만 ‘모정’ ‘초우’ ‘못잊어’ ‘이별’ ‘9월의 노래’ ‘빛과 그림자’를 비롯한 40여곡이 있다.
쪽져 넘겨 묶은 머리, 건강하고 여유로운 미소. 언제나처럼 한구석 흐트러짐 없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패티김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날 반주는 김정택 SBS악단장이 지휘하는 40인조 오케스트라가 반주했고, 평소 가깝게 지내는 후배 조영남과 인순이가 축하 게스트로 출현, 음악 인생 40주년을 축하했다.
1996년 전두환 전대통령 비자금 첫 공판
1996년 제46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에 리안감독 `감각과 분별` 수상
1996년 일본, 여성 결혼한 후 성(姓) 유지 가능.결혼연령 18세로 조정
1995년 김영식(9세) 킬리만자로 정복, 세계 최연소 등정
1994년에 8살 나이로 알프스 산맥 최고봉인 마테호른 (해발 4,478m) 등정에 성공했던 김영식은 킬리만자로 산 등산에 이어 1998년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 산 (6,194m)과 1999년 8월19일 유럽 최고봉인 엘브뤼즈 산 (5,642m) 정상에 올랐다. 2002년에는 남아메리카 최고봉인 아콩카구아(6,959m) 등정에 성공했다. 대륙별 최고봉을 하나씩 섭렵한 김영식의 목표는 7대륙 최고봉 정상 등정이다. 남은 산은 세계 최고봉이자 아시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남극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 오세아니아 최고봉인 칼츠텐츠(4,884m)이다.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
1992년 보건복지부, 태아 성감별 집중단속
1980년 서울지하철2호선중 왕십리~문래동 강북구간 건설공사 착공
1969년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 사망
1967년 자전거 개조한 비행기 실험
1967년 KBS TV, 아침방송 실시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민주공화당이 1963년 2월 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당총재에 정구영씨, 당의장에 김창열씨를 각각 선출했다. 두차례의 혁명을 이어 받아 새 노력의 양심과 협동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지닌 민주주의적 지도세력을 이룩하겠다고 내세워 정치활동 금지조항 해제 후 57일 만에 제일 먼저 창당을 선언했다.
정당의 이름인 민주공화당은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름을 합한 것이었다.
박정희 의장의 민정불참과 김종필씨의 사퇴로 불안정한 당내사정을 그대로 안은 채 열린 이날 대회는 1,896명의 대의원 중 1,319명의 참석으로 개회했다.
김동성, 김용우, 김성진씨 등 임시의장단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창당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당체제를 2원제로 하고 사무국 권한이 강력한 전문 62조의 당헌을 약간의 혼란 끝에 통과시키고 또 6개항의 총령과 7개항의 기본정책을 각각 채택했다. 8월 31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입당하여 총재직을 맡아 권위주의적 지도체제 아래 계파갈등을 억누르고 조직, 선전 등을 전문화, 당료화시켜 강력한 대중정당체제를 지향해 나갔다. 이후 민주공화당은 경제개발과 안보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1인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민주공화당은 이후 17년 동안 집권당으로 군림했지만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종필을 새 총재로 삼아 재건의 몸부림을 쳤으나 19080년 10월 27일 헌법 부칙에 의해 자동 해산됐다. 국내 정당사상 최장수 정당이었다
1960년 미국 해군기와 브라질 여객기 리우데자네이루 상공서 충돌
1954년 서독하원, 재군비허용 개헌안 가결
1952년 영국, 원폭소유 확인
1949년 유엔안보리 심사위원회, 한국유엔가입자격 가결
1948년 유엔소총회, 남한지역 총선거안 가결
1936년 일본 ‘2ㆍ26 사건’ 발발
1936년 2월 26일, 22명의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1,400여명의 사병들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2ㆍ26 사건’이었다.
장교들은 내각을 습격, 다카하시 대장상과 사이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수상관저와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다. 27일에는 도쿄에 계엄령이 시행됐고, 28일에는 이들에게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29일에는 2만4천여명의 군병력이 이들을 포위, 선무방송과 비라살포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천황에 의해 반란군으로 단정됐다는 소식에 동요하기 시작한 사병들은 대부분 원대복귀했으나 장교단 중 나카야마 대위는 책임을 지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른 청년장교들은 무장해제된 후 체포돼 법정에서 13명의 군인과 4명의 민간인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2.26사건’은 육군 내부에 존재해 온 두개의 파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준비를 위한 국내체제 확립과 고도의 국방국가실현을 목표로 하는 ‘통제파’와 관념적 행동방식에 의한 국가 개조를 계획하는 ‘황도파’가 이들이다. 통제파가 주로 참모본부, 육군성 등 중앙의 참모장교로 이루어졌다면, 황도파는 위관급의 청년장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933년, 천황은 국가통치권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최고기관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뿐이라는 ‘천황기관설’ 논쟁이 발단이 되어, 통제파가 황도파를 요직에서 내쫓으려 하자 두파의 싸움이 격화되어 이날의 ‘2.26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
1916년 독일-프랑스, 베르당 전투 시작
1908년 장지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 창간
1895년 교육강령조칙 영포
1876년 부산 개항
1876년 한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조약) 조인
일본의 강요로 일명 강화도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수호통상조약(병자수호조약)이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은 1875년 강화도에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에 대한 우리 포대의 발포사건을 빌미로 군사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을 포기해야 했고 일본에게 부산, 인천, 원산의 3항구를 개항해야 했다.
모두 12개조로 구성된 조약은 미일통상조약을 본 떠 일부 항구의 개방과 개항장의 일본 조계지 설치 등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제1조에서는 조선을 일본과 평등한 자주국으로 규정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케 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어 점차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1869년 미국 헌법개정으로 흑인에게 투표권 부여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802년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 출생
1801년 조선후기 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 사망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자이면서 한국 천주교 첫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한 선암 정약종(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선생이 1801년 2월 26일 순교했다. 그는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당대에 천주교 교리지식이 가장 해박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천주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760년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27세 때인 1786년 3월 둘째 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대부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와 구성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을 맡아 교회에 헌신했다.
1801년 1월 19일 정약종의 `책롱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임대인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의 서한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약종 일기 등이 들어 있는 정약종의 책롱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검거되고, 11일에 권철신과 함께 정약종이 체포돼 의금부에 투옥됐다. 정약종은 이날 국가가 금하는 사교(邪敎)를 믿고,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당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문화관광부는 그를 `200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1801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 순교
1801년 2월26일, 이승훈 정약종 등 초창기 천주교 지도자 6명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서소문 밖 네거리(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참수됐다.
청나라에서 한국인 최초로 영세(1784년)를 받고 귀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설립(1785년)하는 데 기여한 순교자 이승훈은 태어난 곳도 반석골(지금의 중구 중림동)이었고 세례명도 반석(베드로)이었다. 탄압이 거세질 때마다 배교(背敎)로 위험을 피해갔지만 결국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는 것이었다.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1866년에, 증손 연구와 균구가 1871년에 순교해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됐다.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는 천주신앙을 중심으로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가 대립하던 민감한 시기에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등을 옮기다 발각된 것이 발단이 됐지만, 남인 시파의 기세를 꺽으려는 노론 벽파의 정치적 공세 성격도 짙었다. 신서파에 온화한 정책을 펴오던 정조가 1800년에 죽고 벽파에 치우친 영조비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막 시작한 것도 박해를 부추겼다. 300여명이나 순교하면서 천주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살아남은 신도들이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오히려 천주신앙의 전국적인 확산을 촉진시켰다.
1786년 맴돌이 전류 현상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도미니크 아라고 출생
1577년 스웨덴 왕 에리크14세 사망
1564년 영국 극작가 말로우 출생
14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禁火)도감` 설치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禁火)도감`이 1426년 2월 26일(세종8년 2월 26일) 설치됐다. 2월 15일 한성부 남쪽에서 큰 불이 발생, 가옥2,170호와 행랑채 106칸을 태워, 남자9명 여자23명이 죽고 이튿날에도 인가 및 행랑채 200여호를 태우는 불이 잇따라 나자 조정은 이조 산하에 금화도감을 설치했다.
금화도감에서는 화재예방을 위해 청명절(4월 5일경) 3일전부터는 이른 아침, 바람이 잘 때에 불을 때어 음식 익히는 것을 허락하고 청명일에는 주야로 불과 연기를 금하게 했다. 그후 약35년 동안 큰 화재가 발생하지 않아 폐지되었다가 병란 등에 의한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등장하자 성종 12년에 `수성 금화사`로 부활, 유급의 소방상비대인 `멸화군(滅火軍)`과 함께 조선시대 소방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1154년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국의 왕 루지에로 2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