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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대한매일신보 ‘헤이그 밀사 파견’ 보도
[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보도
“李完用氏 드르시오/修身齊家 못한 사람/治國인들 잘할 손가/前日事는 如何턴지/今日부터 悔改하야….”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는 할 말은 기어코 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은 혹독했으나 ‘을사5적’과 ‘정미7적’의 매국 행위를 호되게 꾸짖었다. 1907년 7월 3일,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 신문이었다.
대한제국은 그 이태 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돼 껍데기만 남은 채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으되!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기어이 퇴위(退位)하고 만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양위(讓位)’를 가장했으나 왕위를 ‘날치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12세에 궁에 들어와 망국(亡國)의 한을 삼켜야 했던 고종.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첫 황제(皇帝)가 되었고, 퇴위한 다음에는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가 다시 ‘이태왕(李太王)’으로 강등되는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혹자는 그 굴욕의 삶을 고사성어 ‘와전(瓦全)’에 빗댄다. “어찌 하찮은 기와(瓦)로 구르며 구차한 삶을 부지(全)했던가….”(중국 ‘북제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 것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였다.
그러나 막상 고종의 밀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자 러시아는 뒤통수를 쳤다.
평화회의 의장국이었던 러시아는 현지에 긴급전문을 보내 이들의 회의장 입장을 막도록 지시했다. 뿐인가. 밀사 파견 사실을 일본에 흘렸다.
러시아는 그때 일본과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꾸는 비밀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났으니 당황할밖에.
그러나 고종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비밀협상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퇴위한 뒤에도 러시아에 ‘망명 의사’를 타진하는 등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 얼마 뒤 새로 취임한 러시아 총영사는 본부의 훈령을 받는다. “평화회의에 갑작스러운 대한제국 밀사의 출현은 ‘무질서’를 발생시켰다. 한인들의 항일투쟁 고무발언은 삼가야 한다.”
고종이 ‘변함없는 우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니콜라이 2세.
그는 이 훈령 상단에 친필의견을 남겼다.
“공감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7-02 20: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702/8079138/1
- Israel, 10 Sheqalim (1978. Banknote)
1904 -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시온주의자 헤르츨(Herzl, Theodor) 출생
헤르츨 [Herzl, Theodor, 1860.5.2~1904.7.3]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1891∼1895년 빈의 《신 자유신문 Neue Freie Presse》 통신원으로 파리에 체재 중 드레퓌스 사건을 보고 유대인의 단결을 결심, 1896년 《유대인 국가 Der Judenstaat》를 저술하여 시오니즘(시온주의) 운동의 보급을 도모하였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를 주최, 유대인의 내셔널 홈을 팔레스티나에 건설한다는 목표와 ‘국제시오니스트연합’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주권국인 터키 정부와 그 실현을 위해 교섭하였으나 구체화되지 않았고, 1898년 영국 및 이집트 정부와의 시나이반도 양도 교섭도 실패로 끝났다. 1903년 영국 정부로부터 영국령 동아프리카를 장소로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시오니스트 내부의 의견이 갈라져 운동이 난항(難航)하던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시오니즘 정신이 담긴 소설 《탕크레드 Tancred》(제1차 십자군을 이끈 장군)가 있다. /네이버
1900 - 멕시코의 비행사 사라비아(Sarabia, Francisco) 출생
사라비아 [Sarabia, Francisco, 1900.7.3~1939.6.7]
Francisco Sarabia
In 2000 the Mexican postal service issued this stamp to honor the 100th anniversary of Mexico's most famous pilot - Francisco Sarabia who is also Lerdo's most famous son. Sarabia is remembered for setting a 1939 speed record on a non-stop flight from Mexico City to New York City.
He beat Amelia Earhart's previous record by almost 4 hours. The flight was in conjunction with the opening of the World's Fair. After a round of celebrations, he took off for Washington DC to deliver a personal letter from Present Cardenas to President Roosevelt.
While he was in Washington, his plane El Conquestador del Cielo was parked at the US Army Air Corps at Bolling Field. There the plane was serviced and readied for what was intended to be a leisurely flight back to Mexico City. Why hurry, he had the record.
A group of Mexican diplomatic folks gathered to bid farewell as he took off toward a hero's welcome in Mexico. His plane had gained about 100 feet of altitude when the engine failed, and the plane dumped into the Potomac River. Sarabia drowned.
An investigation showed that a mechanic had left a wipe rag inside the engine compartment. The rag had been sucked into the carburetor.
The plane was pulled from the river and shipped back to Mexico where it was placed in storage for the next 33 years until a display building was built for it in Lerdo. Today the plane is fully restored.
"Pancho" Sarabia was born in Lerdo on 3 July 1900. He completed the first 8 years of school here before moving to El Paso for high school. From there he went to an automobile school in Kansas City. After graduation, he worked as a auto mechanic in the USA for two years before returning home.
He came back to Lerdo in 1919 to work as a mechanic and continue his love of auto racing. Soon aviation became the place for an adventurous young man, so he returned to the USA to study flying. He received his pilot's license in 1926.
He began his flying career by joining an aerial circus traveling the USA staging dare-devil air shows and engaging in air races as he had in car races. By the time the circus came to Monterrey, he owned his own plane. He decided to stay in Mexico. He worked his way around Mexico as a mechanic and charter pilot carrying passengers and cargo. He continued to do some flying circus work and teaching flying.He saw an opportunity to establish a freight business in Chiapas serving all of the Yucatan. He turned out to be as persuasive a salesman as he was an audacious pilot. He convinced the government to build a series of landing strips throughout the region so his planes could pickup crops to transport to market.At the time of his death, his company was operating 38 planes, and Sarabia was a recognized leader of aviation in Mexico and a national hero.Business success had not dimmed the urge to fly to the edge. So with the support and encouragement of President Cardenas, he undertook this last of his many record-setting flights. He was 39.For more information, read this detail account of his aviation activities by the Latin American Aviation Historical Society and the source of these pictures:
1888 - 일본의 화가 무라카미 가가쿠[村上華岳]
출생무라카미 가가쿠 [村上華岳, 1888.7.3~1939.11.11]
일본의 화가.
근대 일본의 화단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본명은 다케다 신이치[武田震一]. 17세 때 고베의 무라카미가(家)에 입적했으며 교토 시립미술공예학교, 교토 시립회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일찍부터 문부성 주최의 미술전람회인 문전(文展) 등 미술전에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16년 제10회 문전에서 〈아미타삼존 阿彌陀三尊〉이 특선으로 뽑혔다. 이 작품은 호류사[法隆寺]나 인도 아잔타의 석굴 벽화를 기초로 한 불화(佛畵)로서, 관능적이고 감미로움이 풍기는 작품이다. 1918년에는 동료인 쓰치다 바쿠센[土田麥僊], 오노 지쿠쿄[小野竹喬] 등과 함께 문전을 이탈하여 이상적인 일본화를 지향하는 국화창작협회(國畵創作協會)를 결성했다. 그는 이 협회의 회원으로서 절묘한 색채의 신비적인 화풍을 전개하여 새로운 일본화 운동을 추진하는 데 공헌했다. 1929년 이 협회가 해산된 뒤에는 고베에 은거하며 전람회에 출품을 끊고 오로지 종교적 명상이 담긴 환상적인 산수화나 불화를 그렸다. 만년의 그림은 화면이 색·형·선에서 더욱 단순화되어 준엄한 화풍을 보이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히다카 강 기요히메 日高川淸姬〉(1919)·〈여름산 夏の山〉(1931)·〈모란 牧丹〉(1939) 등이 있다. BIE /브리태니커
1886 - 카를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 공개
[어제의 오늘]1886년 카를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 공개
ㆍ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세 바퀴’가 세상을 바꿨다. TV 오락프로그램 이야기가 아니다. 바퀴 세 개를 달고 세상에 나온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모토바겐’ 이야기다.
스스로 움직이는 ‘말(馬) 없는 마차’를 향한 인류의 꿈은 수백년간 커져만 가고 있었다.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구상한 태엽 자동차와 1672년 페르디낭 베르비스트가 설계한 증기 자동차는 그 시작이었다. 1769년 프랑스 포병장교 니콜라 조제프 퀴뇨는 2기통 증기엔진을 얹은 삼륜 증기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불행히도 이 증기 자동차는 시연회 직후 다시 창고에 처박혔다. 커다란 증기기관의 무게 탓에 사람들이 차에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증기 자동차들이 잇달아 개발됐지만 공해와 도로파손이라는 반발의 목소리도 높았다.
1870년 독일에서 니콜라우스 오토가 개발한 4기통 휘발유 엔진은 새 전기가 됐다. 오토의 조수였던 고틀리에프 다임러는 1885년 자동차용 휘발유 엔진을 만들었고, 이듬해 2인승 마차에 그 엔진을 얹었다. 그러나 다임러의 성과는 빛이 바랬다. 카를 벤츠가 1년 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모토바겐’을 개발해 1886년 초 영국에서 특허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250㎏의 무게에 최고 시속 15㎞를 낼 수 있는 ‘페이턴트 모토바겐’은 같은 해 7월3일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린 벤츠 모토바겐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 베르타 벤츠가 있었다. 카를 벤츠는 계속 새로운 모델을 만들면서 모토바겐의 시판을 늦추고 있었다. 보다 못한 벤츠의 아내 베르타는 1888년 여름, 남편이 자고 있는 틈을 타 모토바겐 세 번째 모델에 시동을 걸었다. 엔진에서 연기가 나면 시냇물을 퍼다 냉각수로 넣었고, 연료가 떨어졌을 땐 근처 약국에 멈춰섰다. 만하임에서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포츠하임까지 총 106㎞. 차가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모자핀과 가터벨트까지 활용했던 베르타의 기지 넘치는 ‘세계 최초 장거리 주행’은 벤츠가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만하임에서는 2년마다 모토바겐을 타고 베르타 벤츠의 발자취를 따르는 축제를 열고 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02 17:51: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021751475&code=100100&s_code=ap005
1883 - 체코 출신의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Kafka, Franz) 출생
카프카 [Kafka, Franz, 1883.7.3~1924.6.3]
[역사속의 오늘]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는 늘 불안했다. 그는 ‘문학이 아닌 것은 모두 날 지루하게 한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지만, 글쓰기의 완성도에 대해 불안해했다.
1883년 오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에 삶을 마칠 때까지 소설, 편지, 일기 등 글쓰기에 전념했다. 중편 소설 ‘변신’(1914년)을 완성한 뒤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고 글쓰기 이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삶과 작품에는 고독과 불안이 깊이 스며있다. ‘변신’에서는 벌레로 변한 한 인간을 통해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와 소외,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통찰했다. 밤을 꼬박 새워 글을 쓰고 또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매혹에 푹 빠졌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에 의해 사후 그의 작품이 큰 빛을 보게 됐지만, 유언으로 자신의 수많은 작품 원고를 읽지 않은 상태 그대로 파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불안과 소외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 것이었고, 결국 그 작품은 카프카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도록 했다.
김병구기자 /매일신문 2009년 07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829&yy=2009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지식의 나무를 먹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생명의 나무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프란츠 카프카
1878 - 미국의 뮤지컬 배우, 대중가요 작가 코핸(Cohan, George M.) 출생
코핸 [Cohan, George M(ichael), 1878.7.3~1942.11.5]
[책갈피 속의 오늘]1878년 조지 마이클 코핸 출생
“난 브로드웨이의 일부를 가질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을 걸세. 단지 작은 일부분이네. 바로 최정상의 부분이라네!”(조지 마이클 코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심장부인 타임스스퀘어. 이곳엔 브로드웨이 각 극장의 할인티켓을 판매하는 매표소인 ‘TKTS’가 있다.
세계 공연의 메카인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편을 보려는 관광객으로 늘 북적대는 이곳에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아버지’ 조지 마이클 코핸(1878∼1942).
코핸은 1878년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제리와 넬리 코핸은 아일랜드계 떠돌이 엔터테이너였다. 그는 이미 열 살 때 부모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기 때문에 학교라곤 거의 다녀보질 못했다. 11세 때부터 부모랑 누나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가무극을 하기 시작했다.
15세가 되던 해 조지는 부모에게 순회공연을 다니는 것에 지쳤으며 브로드웨이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뮤지컬에서 쓰는 노래와 노래 사이를 대사로 연결하는 포맷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탭댄스를 뮤지컬에 적극 활용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춤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리틀 자니 존스’(1904년) 등 51개 뮤지컬과 500여 개의 싱글 넘버를 작곡했다.
작곡가, 작사가, 극작가, 프로듀서, 댄서, 배우로서 불가사의한 능력을 선보였던 코핸은 브로드웨이에 뮤지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
“그는 최고의 연기자, 작가, 작곡가, 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춤을 잘 추고, 어느 경영자보다도 작곡을 잘하고, 어느 각본가보다 경영을 잘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배우 윌리엄 콜리어)
코핸의 삶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뮤지컬이었다. 그의 삶은 1942년 영화 ‘양키 두들 댄디’로, 2006년에는 뮤지컬 ‘조지 엠 코핸 투나잇’으로 만들어졌다. 이 뮤지컬은 올해 9월 국내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그는 “인생에서의 커튼콜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처럼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 더는 박수를 누릴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산다.
당신은 그 소중한 무대 위에서 과연 어떤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인생의 주연배우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7-07-03 03:0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03/8461719/1
- New Zealand, 50 Dollars (Banknote) (출처 - 카페 화여자)
1874 -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지도자 응가타(Ngata, Apirana Turupa) 출생
응가타 [Ngata, Apirana Turupa, 1874.7.3~1950.7.14]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정치적·문화적 지도자.
20세기초 마오리족에 대한 정부정책의 향상을 가져오게 한 주요배후인물이었다. 1897년 법학학위를 취득한 응가타는 뉴질랜드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마오리인이었으며 그후 잠시동안 변호사 일을 했다. 그후 그는 민족주의적인 청년마오리당에서 일했고, 1905년부터 39년간 동부 마오리 선거구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의회에서 활동했다. 1927년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928~34년 토착민장관을 지냈다. 1931년에 응가타는 마오리 토지개발계획을 실시했는데 이 계획은 마오리인들의 농업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경지면적을 확장시켰다. 마오리인들의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그는 학교설립 자금과 '마오리 자율기금'을 설립했다. 마오리 문화의 보존에 깊이 관여한 응가타는 마오리 민속연구위원회의 창립을 도왔으며, 1928~34년 그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9년간 폴리네시아 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다양한 마오리족 노래와 영창 모음집인 〈Nga Moteatea〉(1929)를 펴내는 등 폴리네시아 인류학 발전에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1870 - 캐나다의 정치가 베넷(Bennett, Richard Bedford) 출생
베넷 [Bennett, Richard Bedford, 1870.7.3~1947.6.27]
대공황 당시 총리(1930~35)를 지낸 캐나다의 정치가.
베넷은 1893년에 변호사가 되어 고향인 뉴브런즈윅에서 개업했으며 1897년 서부로 이주하여 노스웨스트 준주와 앨버타 주의 하원의원으로 일하면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1911년 그는 앨버타 주의 캘거리 대표로 캐나다 하원에 들어갔고, 나중에 전국병역국국장(1916)과 법무장관(1921)이 되었다.
베넷은 1927년 보수당 지도자가 되었으며, 1930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에게 대공황과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하여 승리를 거둔 뒤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베넷은 대공황이 그토록 심각하게 오랫동안 지속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온나라에 만연한 실업과 맞서 싸우기 위해 그가 내놓은 조치는 관세를 약간 강화하고 몇 가지 실업구제책을 강구한 것뿐이었다. 캐나다 경제가 4년 동안 계속 쇠퇴하자, 그는 1935년 1월에 대담한 입법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법률안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시한 뉴딜 정책과 비슷했다. 그러나 베넷의 개혁조치는 자신의 당에서조차 불신을 받았고 대중의 열의를 되살리지도, 그때까지 그가 취했던 자유방임적인 정책에 대한 국민의 원성을 달래지도 못했다. 결국 1935년 10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그는 W.L.매켄지 킹이 이끄는 자유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1938년까지 야당 지도자로 남아 있다가 1939년에 영국으로 은퇴하여 1941년에 자작작위를 받았다(독신으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귀족의 지위는 소멸되었음). /브리태니커
1854 -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Jancček Leoš) 출생
야나체크 [Jancček Leoš, 1854.7.3~1928.8.12]
체코의 작곡가.
폴란드 국경 근처의 후크발디 출생. 브르노·라이프치히·페테르부르크·빈 등지에서 지휘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한 뒤 1876년 브르노필하모니협회의 지휘자가 되고, 1881년 브르노오르간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1888년까지 근무하였다. 작곡가로서는 1916년 오페라 《예누 파 Jenu fa》가 프라하에서 공연되면서 이름을 떨치던 그는 체코가 독립된 뒤 24년에는 프라하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품은 민족적 소재를 근대적 음악어법으로 처리한 점이 특징이며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적 수법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작품 가운데 특히 《타라스 불바 Taras Bulba》 《심포니에타》 등이 널리 알려졌다. /네이버
- John Singleton Copley and Sketch
- 'Elizabeth Clarke Copley' - 'Nativity'
- 'The Death of Major Peirson'
1738 - 미국의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Copley, John Singleton) 출생
코플리 [Copley, John Singleton, 1738.7.3~1815.9.9]
미국의 화가.
1738년 미국 메사추세츠주(州)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초상화가이자 판화가인 의붓아버지 피터 펠럼에게 미술에 대한 지식과 직업의식을 배웠다. 그 후 영국인 초상화가 조지프 블랙번으로부터 미술의 여러 가지 기법과 색채 사용법을 익혔다. 1766년 런던의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작품 《다람쥐와 소년(헨리 펠럼)》(1765)을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벤저민 웨스트, 조슈아 레이놀즈 등의 권유로 177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779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존 싱글턴 코플리는 10대에 이미 초상화가로서 이름을 알렸으며, 20대에는 미국의 어떤 화가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당시 보스턴에 새롭게 부상한 신흥 사회 계층을 주로 그렸는데, 그의 초상화는 인물이 가진 부와 취향이 고스란히 나타나면서 내면에 깃든 정신까지 드러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셔츠 차림의 그의 친구를 그린 《폴 리비어 Paul Revere》에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노동하는 모습이 그려져 큰 이슈가 되었다. 또한 인물을 그의 삶과 밀접한 도구들과 함께 그리는 방식은 18세기 미국 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함을 표현했다.
코플리는 특히 사실을 재현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대부분 실제 사건에서 착안한 것을 주제로 삼았으며, 작품의 주인공을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해 극적인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그는 런던에서 《왓슨과 상어》(1778)라는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가장 고귀한 미술 장르로 간주되었던 역사화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역사화의 규범을 일상적인 주제에 적용해 19세기 초 프랑스 근대 화가들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영국 낭만주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1423 -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Louis XI) 출생
루이 11세 [Louis XI, 1423.7.3~1483.8.30]
프랑스 발루아왕조의 왕(재위 1461~1483).
부르주 출생. 샤를 7세의 아들이다. 15세 때 남프랑스 귀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1440년 부왕 샤를 7세에 반대하는 제후의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 도피네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사부아공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부왕의 총희 아녜스 소렐과의 불화로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1456년 부르고뉴공에게로 도망하여 부왕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지냈다. 1461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부왕의 측근을 일소하고 제후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부르고뉴공 샤를 호담공(豪膽公)이 영도하는 불평귀족들의 ‘공익동맹(公益同盟)’의 반란이 일어나 1465년 콩플랑 및 상모르양 조약으로 왕제(王弟) 샤를 드 프랑스에게 노르망디 양도 등 갖가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묘한 공작과 과단성 있는 조치에 행운까지 겹쳐 주요 적대세력을 제압하게 되었다. 1477년 샤를 호담공이 사망하자 그 영지를 획득하고, 그 밖에 앙주 ·프로방스 ·루시용 ·세르다뉴 등을 얻었으며, 브르타뉴 병합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프랑스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권력의지의 화신처럼 냉혹하였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정치감각은 기민하고 현실주의적이어서 국토개발에 진력하였다. /네이버
987 - 위그 카페(Huges Capet)가 프랑스 왕으로 선출
Huges Capet (939-996) was elected King of France on the 3rd of July 987 which started the largest and the oldest Europe royal house, the house of Capet.
The second stamp is rather impressive. I really find it beautiful. It is dedicated to Philippe Auguste (1165-1223), also known as Philip II of France who was king of France from 118à until his death.
http://my-philately.blogspot.com/2011/05/history-of-france-ii.html
위그카페 [Hugues Capet, 938 ?~996]
프랑스 왕이며 카페왕조 시조(재위 987∼996).
대(大)위그의 첫째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롤링거왕조의 가장 실력 있는 호족으로 부상하였다. 랑스의 대주교 아달베론과 그의 측근 제르베르(뒤에 로마교황 실베스테르 2세)의 공작에 힘입어, 987년 루이 5세가 죽자 왕위계승권자들을 물리치고 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것이 카롤링거왕조 종말이며 카페왕조 시초이다. 왕위에 오른 뒤 여러 반란세력을 물리치면서 국기(國基)를 다져 갔다. 재위기간 동안 권력이 전영토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그 뒤 카페왕조(987~1328)가 300년 이상 계속된 것은 그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재위시에 후왕(後王)을 결정하고 대관식을 거행한다는 관례를 남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위한 해에 아들 로베르의 대관식을 가졌으며, 이 관례가 루이 7세까지 계속되어 왕조 혈통이 원활하게 계승되었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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