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상신 가문/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중흥조, 비운의 심온
심온은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이다. 자는 중옥. 고려조에서 문과하여 조선조가 개국한 이후 간관으로 일했
다. 1408년 딸이 충녕군의 비가 되고 1411년 풍해도 관찰사로 나가 군기를 확립했다. 1414년 형조판서에
이어 호조, 이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
구가 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심온은 신임 영의정으로 예궐하여 국모가 되는 중전 심비를 알현하였다. " 신, 심온 청천부원군 영의정 벼
슬을 받아 사은 숙배드립니다." 44세의 영의정 심온은 24세의 소헌왕후인 딸에게 군신의 예를 갖췄다.
그날 저녁 경연의 자리에서 임금이 "명나라에 사은사를 보내라는 아버님 분부가 계셨는데 누가 적합하겠
소?"라고 물었다. 성석린이 "지금까지 관례로 보아 시임 영의정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아뢰었
다. 이에 모든 대신들도 그것이 합당하다고 하여 영의정 심온으로 결정하였다.
이 때 병조참판 강상인이 "상왕 전하가 계시는 수강궁 경호를 위해 금군을 두 무리로 나누어야 겠습니
다"고 아뢰었다. 이것은 상왕을 위하는 일이라 모두가 당연한 일로서 대스럽지 않게 여기며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새임금을 추종하는 신진 세력을 은근히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왕인 태종을 따르는 구세력이었다.
이들은 상왕에게 "상왕 전하, 금위영 군사들이 수강궁을 경호하러 왔습니다."고 일러바치자 상왕은 "군사권
은 내가 쥐고 있는데 누구 맘대로 금군을 움직이느냐? 경호한답시고 나를 연금시키자는 수작이냐?"고 불
호령이 떨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강상인과 심정이 앞장서서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군사권을 빼
앗으려는 계략을 쓰는 듯하다고 모함했다.
병조에서 상왕을 속인 이들 무리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태종이 수강궁 마당에 친국청을 차리고 그들을
문초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금 자리를 물러서고도 군권만은 쥐고 있는 상왕의 권위에 정면 도전
하는 이들의 무리를 엄벌하려다가 대비 등의 간곡한 만류도 있고 아들 세종의 체면도 고려하여 강상인과
박습만을 사건 주모자로 하여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일단 사건을 매듭 지었다.
그 사건이 끝난 후 심온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거리는 온통 심온 일행 송별 인파로
뒤덮였다. 임금의 장인에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 위세가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요란한 행차가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상왕은 전송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거마의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하게 생각하
고 있는 터에 좌의정 박은과 병조좌랑 안헌오가 상왕을 찾아 뵈웠다. 오래전부터 심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안헌오가 입을 열었다. " 마마, 군사에 대한 명령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고 두 곳에서 나오니 온당치 않다
고 강상인,심정이 박습과 함께 말하는 것을 들었나이다."라고 고자질했다. 이 소리에 상왕은 신경을 날카롭
게 곤두세웠다. 또 이르기를 "심온은 영의정에 임명될 때 영의정보다는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좌의정이 되
고 싶어 했나이다." 이 말을 들은 상왕은 심온 형제가 척신임을 기화로 세력을 잡을까 두려워했다.
상왕은 의금부에 명하여 강상인,박습,심정을 잡아 들였다. 이들은 심문이 시작되자 무릎뼈가 으깨어지는
압슬형을 여러 차례 받았다. 무서운 고문에 못이겨 강상인과 박습은 그들이 유도하는 대로 허위 자백을 하
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린 전이조참판 이관을 잡아왔다. 그는 심온과 친한 죄로 잡혀 온 것이
다.
"심온 형제가 군사에 대한 명령은 두 곳에서 나와서는 안된다 하였던가? 이실직고하라."며 심한 고문을 가
하자 이관 역시 살려 달라며 허위 자백했다. 상왕을 따르는 무리들은 이 사건을 역모로 모는데 성공했
다. " 이 역모를 주도한 것은 심온의 짓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려는 모반행위이오니 심온을 소환하여 처
형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고 역설했다.
그들은 심온이 돌아오면 그 계략이 탄로날까봐 심온이 돌아오기 전에 강상인, 심정, 박습의 처형을 서둘렀
다. 외척이 세도 부리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상왕의 노파심과 신흥세력을 몰아내려는 박은 일파의 합작품
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이들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강상인은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조백관이 지켜보
는 가운데 사지에 밧줄을 매달고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극형에 처했다. 심정과 박습은 목을 쳐
서 죽였다.
서울을 떠난지 두 달이 가까워 오는 어느날 심온 일행은 임무를 마치고 우리 나라 제일 북쪽인 안동 땅에
이르렀다. 이들이 막 강을 건너려고 나룻배에 타려는데 한 여인이 길을 막았다. 중전을 모시는 강상궁이었
다.
강상궁은 변장을 하고 영상을 살려내기 위해 자진해서 의주로 달려왔다. 고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상왕이 오해가 풀릴 때까지 명나라로 돌아가 피신하기를 권하였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왕명을
받은 의금부 금군에게 체포될 것입니다. 어서 피하십시요." 이 말을 들은 심온은 " 그것은 당치 않은 말이
요. 강상궁의 말은 고맙기는 하나 신하의 목숨은 임금에게 있으니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임금의 뜻을
거역한단 말이요."라며 완강히 강상궁의 권유를 뿌리치고 배를 젓게 하여 의주로 향했다.
강상궁은 심온 일행을 눈물로 하직하고 그 배가 멀어져 형체가 보이지 않자 고국을 향해 절을 올리고 강물
에 뛰어 들어 가엾게 죽었다.
배가 의주에 닿자 말자 의금부 진무 이욱이 거느리는 금군들이 배안에 뛰어 들었다. "어명이요. 역모를 한
심온은 오라를 받으시요."라고 외치며 현장에서 체포했다.
심온은 의금부로 압송되고 국문을 받은 뒤 수원으로 귀양을 갔다. 상왕은 심온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목숨
을 끊으라는 영을 내렸다. 이것은 말이 자진이지 사사나 마찬가지의 참혹한 죽음이었다.
심온이 1418년 이처럼 억울하게 죽었다. 뒤에 태종과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세종은 관직을 복위 시켰으며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심온은 작게는 박은에 대해 천추의 한을 안았지만 크게는 조선조 왕권 수호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 보
통 이런 사건이 무고이든 사실이든 간에 역모에 걸리면 모든 가문이 몰락을 면치 못하는 것이 대세다. 심온
은 앞뒤 사정이 남과 많이 달랐다.
첮째, 심온의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심온 자신은 딸을 키워서 태조의 손자 세
종의 아내가 되게 했으니 하나는 조선조의 창업주요, 또하나는 우리 나라 역사에 최고의 임금으로 추앙받
는 성군이다. 전주이씨 왕실의 위대한 두 영웅과 청송심씨의 두 호걸이 겹사돈이 됐으니 조선조 역사상에
왕실과 혼인하여 이처럼 화려한 집을 어디서 또 볼 수 있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누리는 영광 중에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둘째, 생전 영광이나 사후 영광이 인신으로는 조선 최고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가 오늘의 수상인
고려조의 문하시중이요, 조선 개국을 맞아 역시 오늘의 수상격인 문하좌정승이요, 본인이 세종 시대의 영
의정으로 살아서 누린 영광이 지극했다. 죽은 뒤도 딸인 소헌왕후 내외의 지성스런 명복 기원에 힘입어 그
아들이 발복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심회의 증손 연원이 또 영의정에 오르니 본인도 인물이려니와 5대조부 심온의 음덕을 어찌 입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연원의 증손 열이 또 영의정에 오르고 수현, 환지, 순택이 또 영의정을 지내니 명종국구 심
강 가문 직계에 상신이 위로 4명 아래로 4명이 나와 도합 8명의 영의정이 배출되었다.
청송심씨 심강 직계 가문이 영의정을 8명 냈고 안동김씨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이 8명을 내서 두 가문이
함께 조선조 단일 가문으로 영의정 최다 배출 기록 공동 1위를 이룩하였다.
청송심씨 심강 직계 가문은 상신이 됐다 하면 모두 영의정이다. 우의정으로 끝난 사람도 없고 우의정이 되
서 좌의정으로 끝낸 사람도 없다. 중도에 그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상신에 오르면 하나 같이 정상에 올랐
다. 이 것이 이 가문의 특징이다.
이것은 영의정에 오르자 말자 그 영광을 채 누리기도 전에 억울하게 죽은 선조 심온의 영혼을 달래려는 후
손들의 지극한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심온이 죽었다 하랴! 심온은 살아서 자손에게 내린 음덕보다 죽어 내린 음덕이 더 큰 데에 선조로서
심온의 걸출함이 있는 것이다. 심온은 약 600년 전에 40대 중반을 채 못넘긴 나이로 처절하게 죽었지만 심
씨 가문의 위대한 중흥조로 부활하여 그 후손들의 가슴 속에 지금도 뜨겁게 살아 있다.
[출처] 靑松沈門(청송심문) 700년 명가의 중흥조, 비운의 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