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자신은 심각한데 우리는 씁쓸하다
이 영화는 2015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더 랍스터〉라는 작품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2009년 작품으로 스웨덴 국제영화제 작품상 수상작이다.〈더 랍스터〉가 현대문명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거시적인 담론에서 펼치고 있다면, 이 영화는 한 가족의 기괴하고 잔혹한 코미디를 통해서 현대인의 폭력성을 풍자하고 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펼치는 행위는 아주 심각하고 잔인한데,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눈에는 불편하면서도 희화적이다.
이 영화는‘드라마,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전혀 우습지 않고 오히려 안쓰럽고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바깥에서 살펴보면 그들의 행위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꾸 자신의 모습이 켕기고 우리 자신을 통렬하게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 뒤끝이 개운하지 않고 불편하다. 또한 그들의 어리숙한 사고와 행동을 비웃고 있다가도 그들이 혹시 우리 자신은 아닌가 생각되어‘지금 이곳’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희극을 흔히 블랙 코미디라고 부른다. 이 영화가 바로 그렇다. 실컷 웃다가도, 아니면 그들의 행위에 실소를 보내다가도 문득 우리 자신이 뒤돌아 보게 되는 서늘함을 느끼고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송곳니〉(2009, 93분)는 독재를 통렬하게 은유하는 일종의 우화적 풍자이다. 감독은 오랜 기간 정치적 독재의 좋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과거 그리스의 정치 체제를 풍자하고 있지만, 우리 역시 군부정권의 정치적 독재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과거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은유와 풍자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서사적 틀은 독재가 어떻게 정착하는가에 대한 교과서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행위와 사고의 제한, 외부적 변화의 흐름과 실상에 대한 철저한 통제, 유형적이고 획일적인 주입식 사고를 통한 국민의 우민화 정책, 국가 안보를 내세운 국민의 일체감 형성 등 독재 정권의 술수를 이 영화는 전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제62회 칸국제영화제의‘주목할만한 시선’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제 갓 40대의 문턱에 들어선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카엘 하네케,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 작가주의 감독들의 뒤를 잇는 유럽 영화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젊은 신예 감독이 독재에 대한 이처럼 통렬한 은유의 날선 사회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의심할 정도로 이 영화〈송곳니〉는 상업적 대중극에 빠져 예리한 사회의식이 무디어 가는 우리의 감각을 예리하게 살려내는 한편, 둔감해져 가는 우리의 몽롱한 영혼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각성의 찬물을 끼얹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상업적 유행의 흐름 속에서 날로 예리함을 잃어가는 우리의 영혼을 들쑤시는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가부장적 권위와 횡포를 통한 독재화 과정의 은유
이 영화의 아버지는 독재자의 전형적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도시 근교의 대저택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아내, 그리고 두 명의 딸과 아들을 강제적으로 감금한 채 그들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자신의 획일적인 통제 영역의 감시 체제로 길들이기 시작한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다.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게 송곳니가 다 자라기 전에는 무섭고 위험한 바깥세상 속으로 나갈 수 없다는 엄명을 내린다. 바깥세상을‘무섭고 위험한’것으로 규정한 것은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부성적 애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전제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허위적 규정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우선 독재체제 정착의 수순을 밟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가 국민(가족)의 우민화 전략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사물과 현상에 대한 개념 규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도한다.‘고속도로’와‘소풍’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 어휘의 개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동차들이 빨리 달릴 수 있는‘고속도로’가 아닌 바깥의 바람을 막는 창의 엉뚱한 개념으로 호도하고,‘소풍’역시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한 나들이가 아니라 무거운 물체가 떨어져도 그것을 받쳐낼 수 있는 탄탄한 바닥이라는 뜻으로 왜곡시켜 주입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 결과 아이들은 그들의 저택 위로 날아가는 실제의 비행기와 장난감 비행기 사이의 실제 크기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민화되어 간다. 그래서 일부러 정원의 숲에 떨어뜨려 놓은 장난감 비행기를 아들은 실제 비행기가 떨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다음은 외부 세력에 대한 공포감의 조성이다. 아들이 정원을 거닐고 있는 고양이를 전지가위로 잔인하게 죽이자, 아버지는 고양이는 바깥세상의 아주 위험한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양이를 막기 위해서는 가족 모두가 개처럼 짖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가족 모두가 무릎을 꿇고 개 흉내를 내며 짖는 장면은 정말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희화적인 장면은 바깥세상으로 뛰쳐나간 것으로 알고 큰딸의 행방을 찾다가 가족 모두가 개 흉내를 내며 짖어대는 라스트 씬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지금까지의 견고한 독제 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회사 경비인 크리스티나에게 돈을 주고 집으로 데려와 아들의 방에 들여보내는 일을 한다. 그런데 큰딸은 크리스티나가 외부에서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를 보고나서부터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이상한 가역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즉, 비디오 속의 가상적 현실과 자신의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여동생에게 자신을 비디오테이프 속의 인물인‘부르스’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 아버지의 생일 파티 때 큰딸은 히스테리칼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녀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등 이상한 변화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전제적인 독재의 지배체제는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큰딸은 엄청난 모험적 시도를 한 다음 외부세계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영화적 상상력에 붕괴되는 독재 권력
큰딸은 크리스티나가 가져온 영화테이프를 보고 난 다음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의 큰딸은 참여 지식인의 표상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큰딸은 허구적 상상력의 세계가 보여주는 현실을 통해‘지금 이곳’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각성하기 시작한다. 큰딸은 자기 자신이 마치 비디오테이프 속의 인물로 착각하고 그들이 쓰는 말을 자신의 일상어로 전용하여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허구적 상상력의 세계가 끔찍한 현실의 모습을 바로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큰딸은 변화의 첫 시도로 동생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남동생의 무릎을 무거운 무쇠 아령으로 짓이겨 박살낸 것이다. 남동생은 부모에게 통증을 호소하며 누나를 가해자로 지적하지만, 큰딸은 외부에서 고양이가 칩입해 동생의 무릎을 박살냈다고 얼버무리며 위기를 모면한다. 그렇다면 큰딸은 왜 남동생의 무릎을 박살낸 것일까? 아버지의 지배체제로 영혼을 잠식당한 채 독재에 길들여지고 있는 남동생에게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시도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도 남동생은 누나의 그러한 진정한 의도를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 독재체제에 안주하려고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딸의 그러한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아주 함축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즉, 큰딸에 의해 독체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어머니는 아기를 다시 낳겠다고 한다. 쌍둥이와 더불어 개새끼까지 낳겠다고 한다. 여기서의 쌍둥이와 개새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어머니의 황당한 대화속에는 독재체제로 길들일 수 있는 국민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겠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큰딸은 최후의 엄청난 시도를 하게 된다. 외부로 나갈 목적에 쇠 아령으로 자신의 이빨을 짓이겨 의도적으로 송곳니를 부러뜨린 것이다. 그리고는 정문 가까이 세워져 있는 아버지의 차 뒤 트렁크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 영화는 큰딸이 외부로 행방을 감춘 것으로 알게 된 아버지가 바깥 숲속을 뒤지고, 나머지 가족들은 개 흉내를 내며 짖어대는 라스트 씬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딸이 외부로 탈출했는지 아니면 트렁크 속에서 질식사했는지, 카메라는 한동안 자동차 트렁크를 클로즈업시키면서 영화는 끝난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유형의 고도의 함축적 의미로 정치체제를 통렬하게 비웃고 풍자하는 지적인 영화의 전통은 없는 것일까 한동안 생각해 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그리스 영화〈송곳니〉는 우리들에게 지적인 흥분과 함께 우리의 자유를 옥죄는 어떤 지배체제에도 굴하지 않는 참여 지식인의 진정한 용기를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주고 있다.
첫댓글 영화과 권력을 담아내는 방법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 영화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은데, 좋은 글로 접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송곳니> 관심이 갑니다.
늘 사유의 세계를 확장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곳니>
제목에 모든 상징의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독재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라 관심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