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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선원 32명과 사라졌던 배, 120년 만에 발견
선원 32명을 태운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120년 만에 발견됐다. 더가디언 등 외신들은 지난 2022년 호주 시드니 해안 인근 해저에 가라앉은 채 발견된 난파선이 1904년 7월 사라진 수송선 'SS 네메시스호'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배의 길이가 73m인 네메시스호는 당시 호주 멜버른에으로 석탄을 운반하던 중 뉴사우스웨일스주 앞바다에서 강력한 폭풍에 휘말려 행방이 묘연했다. 사고 몇주 후 해안가로 일부 선원들의 시신과 물건들이 떠밀려 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됐다가 이번에 배의 잔해가 발견된 것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국가 총 동원령 16세∼60세 출국 금지
2021년 미군 친 이란 민병대 공습
2020냔 이란 성직자 하지호스로샤히 사망
2019년 제2차 북미 정상회담 (-2.28 베트남 하노이) 합의문 도출에 실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했지만 결렬됐다.
두 정상은 이번 회담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겠다는 의지와 기대감을 여러번 내비쳤으나, 비핵화 방안과 대북제재 완화 등 쟁점 사안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헤어졌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 시작.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나 일대일 회담 후 친교만찬. 하고 2월 28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북미정상회담 둘째 날 시작. 단독정상회담 후 확대정상회담 돌입. 애초 확대정상회담 종료 후 업무오찬, 합의문 서명식이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확대정상회담이 예정보다 1시간 30분가량 길어진 끝에 업무오찬과 서명식 돌연 취소. 트럼프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합의문에 서명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며 회담 결렬 선언.
2016년 반공적 민주투사의 상징인 이철승 별세
민주화를 하면서도 우익애국적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이
향년 94세로 2월27일 새벽 별세했다고 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서울평화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이철승 의장에 대해 동아닷컴은 “1922년 서울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 인촌 김성수 등의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해 적극 가담했다.
1954년 민의원으로 국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7선을 지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했다.
1985년 12대 국회의원을 마지막으로 국회를 떠난 뒤에는 한국 정통보수의 어른으로 목소리를 내왔다”고 평했다
2015년 경기도 화성 엽총 난사 사건
2015년2월27일 오전 9시30분쯤 경기 화성시 남양읍의 한 단독주택단지 내 주택에서 전모(75)씨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전씨의 형(86)과 형수 백모(84)씨, 남양파출소장 이강석(43) 경감이 숨졌으며, 범인 전씨는 경찰과 대치 중 자살했다.
총기 난사범 전모(75)씨가 남양파출소에서 자신의 이탈리아제 엽총을 찾아간 것은 27일 오전 8시 23분이었다. 그는 “법정 사냥 기간이 내일(28일) 끝나니까 원래 총을 보관하던 원주경찰서에 맡기겠다”고 했다.
전씨가 총을 찾아간 지 약 1시간 뒤인 오전 9시 34분쯤 전씨 형(86)의 며느리가 “난리가 났다. 작은아버님이 우리 아버님·어머님을 총으로 쐈다”며 112에 신고했다. 전씨의 형과 형수(84)가 사는 집은 파출소에서 약 900m 거리다. 이웃 주민 조모씨는 “아침부터 집 밖에서 그 집 안주인과 시동생이 말다툼하는 걸 봤는데 얼마 뒤 2발의 총소리가 나고 그 집 며느리가 갑자기 2층에서 나와 ‘빨리 신고해달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남양파출소장 이강석(43) 경감은 순경 한 명과 신고 4분 뒤 현장에 도착했다. 이 경감은 현관문을 열고 진입을 시도했으나, 전씨가 경고사격을 하며 “다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일단 물러났다. 이 경감은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을 갖고 다시 진입하려다 전씨가 쏜 총에 어깨를 맞고 사망했다. 범인 전씨는 오전 9시 40분쯤 자살했다. 뒤이어 진입한 경찰은 집 안에서 전씨와 그의 형과 형수, 이 경감의 시신을 확인했다.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변을 면했지만, 척추를 다쳐 수술을 받았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전씨가 유서에서 형에 비해 손해를 많이 봤고 서운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전씨가 자기 몫 유산을 탕진한 뒤 형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범인 전씨가 원래 총기 사용 허가를 받은 곳은 강원도 원주다. 전씨는 원주경찰서에 보관하던 자신의 엽총을 지난 2월 9일 형 집 근처 남양파출소로 옮겼다. 전씨는 이후 범행 때까지 18일간 각각 6차례씩 입출고를 했다. 전씨는 음주 운전·사기 등 전과 6범이었고 그중에 폭력 전과가 두 건이나 있었다. 그런 전과에 70대 중반인 전씨가 짧은 기간 빈번하게 총을 입출고하는데도 경찰은 의심하지 않았다.
2010년 칠레, 8.8 강진 발생
칠레 서부 태평양 연안에서 2010년 2월 27일(현지 시간) 오전 규모 8.8의 강진이 발생해 쓰나미를 일으켰다. 칠레 내륙에서는 통신과 전력이 끊기고 일부 건물이 무너졌다. 이번에 발생한 지진은 '메가스러스트(Megathrust)'라 불리는 강력하고 파괴적인 형태의 지진으로 하나의 지각판이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면서 오랫동안 응축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분출해 발생한다.
이번 지진으로 3월 1일까지 70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20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칠레 정부는 칠레 연안의 로빈슨 크루소섬으로 긴급구호선을 파견했고, 이스터 거대석상으로 이름난 이스터 섬에도 긴급 대피명령을 내렸다.
이번 지진이 오전 3시 34분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서쪽으로 325㎞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으며, 진앙의 깊이는 59.4㎞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지진에 이어 칠레에는 규모 4.9~6.9 여진이 115차례나 발생했다.
또 인구 20만명으로 칠레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콘셉시온은 진앙으로부터 불과 100km 떨어져 있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상당수 수퍼마켓이 주민들에게 습격당했으며 교도소 수감자들이 지진을 틈타 탈출하는 등 무정부 상태의 치안 혼란이 발생했다.
2009년 전여옥 국회의원, 국회서 집단폭행 당해
한나라당 전여옥(서울 영등포 갑) 의원이 2009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본청 건물 안에서 시국사건 등으로 구속됐거나 복역한 사람들의 가족 모임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소속 회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최근 전 의원이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던 부산 동의대 사건의 재심이 가능하도록 관련 법률개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전 의원을 폭행했다.
전 의원측에 따르면, 전 의원은 이날 낮 12시50분쯤 국회의사당 본청 1층 뒤편 면회실 출입문을 통해 의사당 밖으로 나가다 근처에 있던 민가협 부산지부 대표 이모(여·68)씨 등 5~6명에게 얼굴 등을 폭행당했다. 이씨는 지난 1989년 화염병을 던져 경찰 7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동의대 사건에서 화염병 투척 혐의 등으로 구속된 김모씨의 어머니다.
전 의원은 사건 당시 수행원 없이 의사당 밖으로 혼자 나가려다, 전 의원을 발견하고 달려든 이씨 등 5~6명에게 둘러싸였고 이씨 등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 손과 팔꿈치 등으로 눈 주위 등 얼굴을 가격당했다고 했다. 전 의원은 폭행 장면을 목격한 국회 경위 등이 제지해 간신히 풀려나 국회 내 의무실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서울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했다.
2006년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법안 국회 상임위 전격 통과
국회 환경노동위는 2006년 2월 27일 저녁 전체회의를 열어 민주노동당의 실력저지로 처리가 지연돼 온 비정규직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날 회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시작 30분 만인 오후 9시쯤 ‘기간제 및 단시간제 근로자 보호법’,‘ 파견근로자 보호법 ’,‘ 노동위원회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을 처리했다. 한나라당 소속 이경재 환경노동위원장은 질서유지권을 발동, 국회 경위들로 하여금 민노당 당직자들의 출입을 막게 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노동계는 즉각 총파업을 통한 저지를 선언했다.
이날 통과된 3개 법안에 따르면 기간제(계약직) 및 파견직 근로자가 2년 이상 일을 한 뒤, 별도의 해고 통보를 받지 않으면 정규직으로 간주된다. 또 불법 파견이 적발될 경우, 사용자는 파견 근로자를 정식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는 “2년 계약 뒤 기업이 고용을 안하면 합법적 해고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들 법안에선 임금 외의 다른 근로조건에서 비정규직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면 이를 ‘차별 처우’로 규정해 법적인 제재를 하도록 했다. 근로자가 차별에 대해 법적 시정을 요구할 경우, 차별 여부에 대한 입증책임은 사용자가 져야 한다. 차별시정 명령을 어긴 사용자는 최고 1억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이들 법안은 또 단시간(파트타임) 근로자는 초과 근로시간이 1주일에 12시간을 넘기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단시간 근로자를 채용해 싼 임금으로 정규직 근로자처럼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법안은 300인 이상 사업장과 정부·공기업은 2007년부터, 100~300인 사업장은 2008년부터, 100인 이하 사업장은 2009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되며, 4인 이하 사업장은 적용을 받지 않는다. 비정규직 관련 법안들은 2004년 11월 발의됐지만 민노당이 수차례에 걸쳐 회의 진행을 막아 15개월 동안 처리되지 못했었다.
2006년 제20회 토리노 동계올림픽 폐막식
이탈리아 토리노는 17일간 펼쳐졌던 눈과 얼음의 잔치 제20회 동계올림픽 폐막의 아쉬움을 축제의 기쁨으로 풀었다. 2006년 2월 27일(한국시각)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린 폐회식은 이탈리아의 영화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딴 광대와 서커스, 퍼레이드로 시작해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무대로 끝났다. 개막식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특유의 역사와 문화가 화려한 색과 빛, 의상, 연기로 잘 어우러진,‘ 시각의 향연’이었다.
자크 로게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진정으로 대단한”이라는 표현으로 토리노 올림픽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폐막식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안전이 잘 지켜졌으며, 경기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라고 말했다. 차기 대회인 2010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 캐나다 밴쿠버의 샘 설리번 시장은 토리노의 세르지오 치암파리노 시장으로부터 올림픽기를 건네받았다. 설리번 시장은 19세 때 스키를 타다 목뼈를 다친 척수장애인. 손으로 올림픽기를 쥐고 흔들 수 없어 전동 휠체어에 기를 꽂은 뒤, 휠체어를 회전시켜 기를 펄럭였다.
이어 이탈리아의 시각 장애 가수인 안드레아 보첼리가 ‘우리가 믿기 때문에’를 열창하는 가운데 398명의 신부(新婦)들이 희망의 빛을 밝혔고, 성화의 불길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2006년 창원지법, 화이트칼라 처벌기준 첫 공개
‘뇌물수수액 1000만원 이상이면 실형(實刑), 업무상 횡령·배임죄는 회복되지 않은 피해액이 1억원이면 징역 1년 내외, 5억원이면 징역 3년 내외, 25억원이면 징역 5년 내외 선고.’
창원지방법원(법원장 김종대)은 2006년 2월 27일 본·지원 판사 70여명이 참석한 전체 판사회의를 열고 공무원·기업인 등 화이트칼라(사무직 종사자) 범죄에 대한 양형(量刑) 기준을 마련, 공개했다. 범죄별 양형 기준을 공개한 것은 창원지법이 처음이다. 다른 일선 법원도 창원지법과 비슷한 양형기준을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준에 따를 경우 과거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피고인들에게 실형이 선고될 전망이다.
이에 앞서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은 “1억원 절도범에 대해서는 실형을 선고하면서 200억~300억원 횡령한 기업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창원지법이 확정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은 뇌물죄의 경우 공무원이 적극적으로 요구한 경우에는 금액과 관계없이 실형을 선고키로 했다. 공무원이요구하지 않았더라도 뇌물수수액이 1000만원 이상이면 실형을 선고하고, 공무원 신분이 유지되는 선고유예 판결은 지양키로 했다. 뇌물을 준 경우도 강한 로비력으로 공무원이 거절할 수 없게 하거나, 공무원의 약점을 이용해 청탁하고 뇌물을 줬으면 실형 선고를 원칙으로 했다.
2001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1년2월26일 밤 10시 서울공항을 통해 방한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은 27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간 화해·협력 및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양국이 공동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 7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했으며, 우리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했다고 의견을 모았다.
김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개혁·개방에 러시아가 적극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푸틴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1972년 체결된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ABM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해, NMD (국가미사일방어) 체제를 추진하기 위해 ABM조약 개정을 원하는 미국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두 정상은 또 미사일과 미사일 기술의 확산을 규제하는 양자 및 다자적 차원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 내에서의 미사일 개발·수출·배치에 관한 문제가 관련국간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해, 북한의 미사일 문제 가 북·미간 대화를 통해 해결될 것을 촉구했다.
두 정상은 또 남북관계의 진전을 활용해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사업,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사업 등 한·러 양국과 북한간 3각 경제협력을 적극 모색하고, 사할린 등의 석유·가스개발 사업에 한국측이 참여하는 문제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 양국은 한·러 극동시베리아 개발위원회를 설치, 나홋카 한국 전용공단을 조속히 조성하고, 동북아지역에서의 물동량 증대에 대비하여 ‘교통협력위원회’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1997년 콜롬비아 엘 페스카토르 호텔 폭탄테러
1996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북한 신포지역을 경수로 건설부지로 최종 선정
1995년 한국-안도라 국교 수립
1992년 영어학자 새뮤얼 이치예 하야카와 사망
1991년 미국 등 다국적군 쿠웨이트시 탈환
1991년 서해안고속도로(인천~목포) 기공
1990년 울진 원전2호기 준공
1990년 소련최고회의, 고르비에 막강권력 부여 미국식 대통령제 승인
1989년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로렌츠 사망
1989년 부시 미국대통령 방한
1982년 중국, 헌법개정작업 추진
1980년 환율, 유동제로 변동실시
1980년 로디지아 총선, 애국전선 압승
1979년 남북탁구협회, 평양세계탁구대회 단일팀구성협의차 판문점에서 협의
1974년 남북조절위 4차 부위원장회의 개최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유신체제하인 1973년 2월 27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의 비상사태 특별선언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되었으며 해산된 국회기능을 대신할 비상국무회의가 설치됐다. 비상국무회의는 유신헌법안을 동년 12월 27일 공포했다. 이 헌법 부칙에 의해 국회의원선거법을 1972년 12월 30일 제정-공포했다. 이 선거법에 의해 이날 투표율 72.9%의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
선거결과 219석 가운데 정당별 의석 현황을 살펴보면 민주공화당 73석 신민당 52석 무소속 19석 민주통일당 2석이었다. 또 유신헌법에 따라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가 새로이 구성됐다. 국회의원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의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후보자를 대상으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했다.
1973년 노벨생리의학상 콘라트 로렌츠 사망
1968년 브라질 리우축제 개막
1968년 한국일보 사옥 전소(7명 소사)
1964년 주은래 중국 수상, 미국과 화해용의 표명
1963년 정치지도자, 각군책임자 2.18성명 지지 정국수습 공동성명
1962년 호주 요트 크레텔 첫선
1959년 대법원 진보당사건 판결, 조봉암, 양명산에 사형 선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된 죽산 조봉암에게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진보당 사건은 1956년 11월에 결성된 진보당이 북한의 간첩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1958년 1월에 조봉암, 박기출, 윤길중 등 당간부 전원이 검거되고 2월에는 정당 등록이 취소된 사건이다.
조봉암은 일제 때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중도통합노선을 걸었다. 제헌의원을 지냈고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돼 이승만을 보조하기도 했다. 당시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역설해 왔기 때문에 농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이승만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이후에도 조봉암은 1952년 발췌개헌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이승만에 협조했지만 한 달 뒤 치러진 대통령 선거때부터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반공산, 반자본주의를 내세워 216만 표를 얻은 조봉암은 504만 표의 이승만에게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되자 이승만은 형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반공청년들이 담당판사를 용공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상황은 안좋았다. 결국 사형이 선고된 2심결과가 대법원에까지 유지됐고, 5개월 뒤의 재심청구도 대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결국 조봉암은 그해 7월 31일 사형됐다.
1953년 정부, 독도영유권 성명
1939년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 사망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가 1939년 2월 27일 눈을 감았다. 남편 레닌이 세상을 뜬지 15년 뒤였다. 구소련의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레닌이 세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마다 그의 병상을 지킨 이가 다름아닌 바로 그녀였다. 레닌은 혁명가답게 사랑에 있어서도 시원시원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여자 전문학교 재학 중에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한다. 그후 성인의 야간 일요학교에서 노동자 교육활동에 종사하다가 1896년 체포돼 레닌과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된 후 유형지에서 식을 올렸다. 유배와 망명생활 끝에 1917년 러시아로 돌아온 그녀는 11월혁명 이후 교육인민위원부에서 소련 교육정책의 기초를 마련,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교육의 이론화와 실천에 힘썼다.
그러던 1922년 5월 레닌이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다. 그의 첫번째 건강에의 적신호였다. 그녀는 기꺼이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과 한 마디씩 끊어서 또렷하게 발음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결국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레닌은 제4회 코민테른 회의장에 나타나 무사히 연설을 마친다. 레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번째 뇌졸중이 발작을 일으키기 며칠 전, 그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나의 부인을 모욕한 것에 대해 즉시 사과하지 않으면 당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1936년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 사망
1936년 조건반사 개념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 사망
1933년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발생
1933년 2월 27일 밤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난 시각은 밤 9시. 화재는 소방차 100대가 출동하고도 자정이 지나서야 진화됐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24세의 네덜란드 출신 공산당원 반 데르 루베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지만, 한편에선 나치스가 3월 실시될 총선거에서 반대세력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방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었다. 한달전인 1월 30일에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선동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해 독일에는 제3제국이라 불리게 될 나치스 체제가 막 출범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방화사건 발생 다음날 이 사건을 독일공산당의 계획적 범행이라고 공표하고 `국민과 국가를 방위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포해 언제라도 공산당원을 추방-처형할 수 있게 했다.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유재산과 우편통신의 비밀, 그리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 보장이 일시 중지됐고 공산주위자들의 신문은 선거 때까지 폐간됐으며 의심스런 공산주위자들의 회합장소는 폐쇄됐다. 결국 이 법령에 의해 공산당원 4천여명이 체포됐으며 공산당 의원 81명 전원도 체포되거나 추방됐다.
그 결과 히틀러는 3월 5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다시 93석을 추가해 44%의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목표였던 과반수에는 못 미쳤기 때문에 우파인 국가인민당과의 연립으로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키며 일당 체제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나치 이외의 모든 정당은 해체되고 연방정부는 폐지됐다. 비판적인 인사들은 추방되거나 체포돼 8월까지 약 4만 5,0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됐다. 방화범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안이 방화사건 이후에 통과돼 방화범의 처형은 불법이었지만 루베는 1934년 1월 10일 처형됐다.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나치스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설과 소영웅주의자 루베의 단독범행이라는 설이 여전히 팽팽하다.
1932년 미국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생
1926년 조선도량형령 공포(미터법 적용)
1913년 우리나라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출생
1902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출생
1899년 여성교육자 김활란 출생
1894년 한성신문 창간
1888년 독일 소프라노 가수 레만 출생
188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성립
1873년 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 출생
유명한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가 1873년 2월 27일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인 카루소가 그나마 노래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곳은 나폴리 성당의 소년 성가대였다.
여기서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굴리엘모 베르기네였다. 그의 도움으로 카루소는 1894년 11월 모렐리의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할 수 있었고 1900년 마침내 스칼라 무대를 밟았다. 그는 무대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명성은 유럽전역을 열광시켰다.
결국 카루소 붐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전해져 메트는 카루소와 1902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해서 계약을 경신했다. 이 기간 동안 무려 607차례의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카루소 신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20년 12월 24일로 늑막염이 심해 더이상 노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1921년 8월 2일 그의 고향 나폴리에서 48세로 사망했다.
1869년 한국 신소설 대표작가 이해조 출생
1863년 도미니카공화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44년 미국의 금융업자 니콜라스 비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