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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ive me
w. as one
나는 은희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상체만 일으켰다.
내 몸이 비에 젖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고 무겁다는 걸 나도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았다.
나는 다만 창밖이 보고 싶었다.
“눈이 올 것 같아. 하늘이 뿌옇다.”
은희의 말에 동의했지만 손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하얀 눈송이를 내려 줄 것 같았다.
자비로운 하늘.
늘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내가 한 모든 짓들을 다 용서 받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노력했다.
저 하늘이 내가 한 노력을 알고 있을까,
나를 뜻하지 않게 데려갈 저 하늘이.
“은희야.”
당장 사그라질 듯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도 은희는 기운차게 나를 바라본다.
“혹시라도 그 애가 날 원망하면”
은희의 두 눈이 혼탁해진다. 나를 바라보면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다고 전해줘.”
서서히 굳어지는 은희의 입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었는데, 보였을지 모르겠다.
“알지 은희야?”
은희는 창 밖으로 고개를 휙 돌린다.
“난 아프지 않아.”
“난 아파. 이민하.”
똑 부러지게 말 하는 건 여전하다.
나는 그저 은희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저. 그저 이 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건 활활 타올라 사라져 버렸겠지.
시간이 됐다.
“자야겠어. 은희야. 피곤해.”
곧바로 몸을 돌린 은희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다시 침대로 눕힌다.
이제 보이는 건 새하얀 천장 뿐.
눈을 감자 지긋지긋하게 날 괴롭히던 시계 소리가 들린다. 똑딱똑딱.
시간은 그 날 이후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흘렀다.
거짓말이 아니다.
“잘 자 민하야.”
은희가 병실 문을 닫고 나간다.
“잘 있어. 은희야.”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이제 시간을 향해 똑바로 걸어갈 일만 남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다. 눈을 감으면 끝이다.
이게 얼마나 바랐던 결과였는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비참하지 않게 꿈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
내가 김도음을 만난 건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아니, 되짚어 보자. 벌써 5년이 아니라 눈 깜짝 할 새 지나간 5년이다.
그리 길지도 않았고 그리 짧지도 않았다.
김도음은 내 첫 남자친구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말이다.
5년이나 흐른 지금도 이렇게 김도음을 생각하면 웃음부터 난다. 특이한 애였다.
뭐가 특이했냐고 묻는다면 똑 부러지게 대답할 자신 없다. 그냥, 생각이 특이했고 행동이 특이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장애인이라고 불렀다.
난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장애인은 도대체 무슨 뜻이죠?
시력이 나쁜 사람은 안경을 끼고, 청력이 나쁜 사람은 보청기를 낀다.
묻고 싶다.
그럼 우리가 늙어간다는 증거는 모두 뭐가 되죠?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쁘다. 왜 자꾸 우리 안에 갇혀있는 원숭이들처럼 바라볼까.
덕분에 도음이는 철저히 자신을 우리 안에 가뒀다.
나 역시 내 자신을 우리 안에 가둔 사람이다. 철사로 휘휘 감아놓은 우리 안에 스스로 갇혀 있어서 나가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
도음이를 우리 밖으로 탈출시킨 게 나였다면, 나를 우리 밖으로 탈출시킨 건 도음이다.
도음이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늘 글로 써서 내게 말했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내가 수화를 배웠다.
도음이와 손짓으로 대화를 할 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 대화를 방해할 수 없었으므로 늘 외딴 섬에 우리 둘만 떨어진 기분이었다.
외롭지 않았다.
전혀.
도음이는 나를 안심시키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혹시 그거 아는지 모르겠다. 변하는 건 자신이다. 바로 나.
“요즘 성적이 왜 이렇게 안 오르는 건지 모르겠어. 진짜.”
“야 너 내 성적 보고도 그 소리 나와? 담임이 나 쳐다보는 눈길이 완전.”
“나야말로 가시 박혔어.”
으레 그랬듯이 내가 지나가자 대화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쟤는 대체 왜 걔랑 어울린데?”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한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비웃음과 조롱이 담겨있었지만 나의 표정도, 발걸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몰라? 쟤도 정신병 있대.”
부정 탄다고 호들갑 떨며 지나가는 그 아이들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정정해줄 필요가 없지 않는가.
“민하야. 대학 어디 갈진 생각해 봤니?”
교실은 춥지만 교무실은 따뜻하다. 나는 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추위에 취해 빨개진 내 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내 대답에도 아랑곳 않고 선생님은 내 생활기록부를 뒤지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네 성적이라면 스카이도 갈 수 있을 거야.”
그게 뭔지도 몰랐을 뿐더러 점심시간에 홀로 날 기다리고 있을 도음이 생각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간단한 내 성적에 선생님은 다음엔 부모님과 상담하자고 했다.
왔을 때 보다 더 급한 걸음으로 교실로 올라가니 도음이가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음이의 맞은편에 주인을 잃고 있던 의자엔 분홍색 방석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원래대로라면 도음이가 깔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건데.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음이는 늘 나를 웃게 만든다.
도음이는 자신의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에이포 용지에 정갈한 글씨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보통 여자보다 훨씬 예쁜 글씨체이다. 사실, 내가 악필이다.
가끔 내가 쓰는 글을 못 알아보는 도음이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종이를 뒤로 뒤집어 보기도 하고, 거꾸로 들기도 한다.
내가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면 그때서야 다시 종이를 바로 하고 다시 쓴다.
‘전혀 못 알아보겠잖아. 바보야.’
나는 격분하면서 쓴다.
‘바보?! 내가 바보라고?!!!’
느낌표가 끝도 없이 쓰이면 도음이는 취소, 취소. 항복을 외친다.
도음이와의 기억은 대부분 학교에서 시작되고 학교에서 끝난다.
그리고 도음이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항상 떠올리게 된다. 글씨를 쓰느라 항상 고개를 내린 모습만 보게 됐으니까.
도음이도 역시 내 그런 모습만 기억할까? 그랬으면.
고통스럽다.
“언제까지 그런 애랑 어울릴 순 없어.”
기어코 엄마와의 의견 차이는 좁힐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이야. 이제부터 난 내 인생 갈 거라고!”
“1년이면 됐어. 1년 동안 그냥 보기만 했잖아? 그 정도 참아줬으면 이제 네가 굽혀야지!”
“나한테 명령하지 마.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날?”
기어코 마음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나는 무참하게 바닥에 쓰러진 후였다.
나는 그 날 이후 계속 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다.
도음이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소릴 질렀다. 도음이가 있어야 산다고.
당장 내 눈앞에 데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라고.
그 애 만이 날 살아 숨쉬게 만든다고.
그 애 만이, 날, 사랑한다고.
나의 끝없는 외침은 공허한 하얀 병실에 에코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그 티끌 하나 없던 흰색.
도음이가 없어지자 끊임없는 악몽이 날 괴롭혔다.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고, 영양제를 놓으러 오거나, 가끔 미친 듯 발광할 때 진정제를 놓으러 오는 간호사 말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수차례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왜냐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건 진짜 시시하다. 죽으려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살아가는 데에 별 이유가 없듯.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면 별 수 없다. 나는 미치지 않았는데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미쳤다고 치부해 버리는 걸 난 막을 수 없다.
말했듯이 변하는 건 자신이다. 변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이고.
머리를 굴려서 얌전히 굴다가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는 이미 수능도 끝나있었다.
도음이를 맨 처음 만나 끌어안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수척해졌다고, 얼마나 아팠던 거냐고 다정하게 묻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엄마는 결국 나와 도음이를 떨어뜨렸다.
나는 잘 나가는 대학에 입학해야 했고, 도음이는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나와 떨어졌을 때 도음이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도음이는 말은 못하지만 내 말은 잘 알아들었는데.
가끔 도음이는 모든 걸 잊어버린다. 놓아버리고,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땐 도음이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 무서웠다.
도음이는 나를 만나기 전 증세가 심한 자폐아였다.
나는 도음이를 만나기 전 삶의 의욕이 하나도 없는 자살 중독자였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가진 거라곤 돈 밖에 없는 엄마가 위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고 추측만 했을 뿐이지 실은, 정말 진실이 뭔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학 생활은 놀라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몰려와 떼거리를 형성한다.
심지어 대학에선 혼자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대학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났다. 그게 은희다.
그리고 은희를 통해서 또 새로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또 새로운 사람들.
도음이와 나는 일주일을 꼬박 만났었고, 그 후엔 5번으로 줄었고, 또 시간이 흘러선 3번으로 그리고 나중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다.
내가 변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변한 건 도음이라고 생각했다.
도음이가 변해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진 거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도음이는 예전과 하나도 변함없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 땐.
‘정말? 은희라는 애, 진짜 착하다.’
바보처럼 웃는 도음이는 자기 앞에 놓인 카페라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글씨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그런 도음이를 보는 둥 마는 둥 핸드폰으로 계속 문자를 했다.
결국 도음이를 만난 지 2시간 만에 나는 바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가볍게 일어났지만, 도음이의 표정은 가볍지 못했다.
웃고 있는데, 울고 있었다.
그런 도음이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은희가 소개시켜준 선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곧, 도음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난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음이랑 나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냥, 친한 친구였을 뿐이야. 라고.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만 기억해야 한다.
내가 도음이에게 주었던 상처, 고통, 모멸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왜 연락이 없어’
‘정말 무슨 일 있어? 아파? 민하야’
‘걱정되잖아. 민하야 연락 좀 해줘.’
하루하루 쌓여가는 도음이의 문자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온통 톡톡 터트릴 비누거품이 가득하고, 향기롭기만 한 꽃으로 가득한 길을. 내 눈앞에 펼쳐질 세상은 그 누구 하나 비난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모든 건 반짝반짝 빛났다.
도음이가 없어도 나는 충분히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놀라운 사실은 나를 도음이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사실대로 말해야겠다.
사실, 나는 철저히 망가지고 있었다.
밤새도록 술집에서 술집을 전전했고, 클럽에서 만난 남자를 스스럼없이 만났다. 그러다가 진지하게 사귀던 남자에게 차인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럼 뭐 어때? 어차피 나를 사랑해 줄 남자는 차고 넘치는데.
매일매일 술에 절어 있어서 내게 기억이란 사치였다.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다른 하루는 잊혀 질 테니까.
“너! 또! 미쳤니? 어? 미쳤어? 이젠 반항하는 방식을 바꾼 거야? 어?!”
“듣기 싫어.”
“이민하!!!”
“다 듣기 싫어.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나는 언니처럼 당하지 않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휘둘려주지 않을 거야!!!”
발악을 했던 것 같다. 씹어 뱉듯 말을 했다.
다신 꺼내고 싶지 않았던 화제를 꺼내면서 나는 바보처럼 주저앉았다.
술김이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건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야. 당신이 죽였어!!!!!!”
어차피 변하지 않을 사실을 말하면서 난 이 모든 현실이 변하길 바랐다.
“뭐?”
“언니가 왜 죽었는데? 자살이라고? 웃기지마. 그건 살인이었어.”
방 안에 목을 매단 언니를 발견한 건 나였다.
내 방에서도 언니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언니는 끝내 견디지 못했다.
우릴 낳아준 친 엄마는 쫓겨나고 이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새엄마가 그렇게 언니를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그날 밤 베개로 귀를 틀어막는 대신 언니 방으로 들어갔더라면.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 그거다.
나는 언니를 구하지 못했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닥치는 대로 옷가지를 가방에 집어 던져 넣고. 집을 나왔는데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도음이가 나를 찾아왔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이미 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어두웠지만 도음이의 눈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화가 났다.
늘 나를 감싸 안고, 걱정해주고, 그러나 정작 자신 하나는 돌보지 못하는 사람.
우리 언니가 생각나서.
언니에게 아무것도 못 해줬던 내가 생각나서.
“이제 더는 못해먹겠어. 너한테 더는 친절하게 못 해줘. 왜냐고? 너는 내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나한테 한 마디도 못 하는 장애인이니까. 알아듣겠어? 그런 네가 나는 이제 지긋지긋해졌거든. 한마디로 귀찮아.”
그 말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말인지 잘 모르겠지.
그건 단순한 말이 아니다. 사람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때리는 것보다 더 심한 말이다.
도음이에게 그 말은, 일평생 들어왔던 말이다.
너는 장애인이니까.
잘 해주는 것도 이젠 귀찮아.
장애인.
평생 도음이에게 상처를 줄 말. 평생을 껴안고 가야 할 상처들.
도음이는 돌아서는 나의 팔을 붙잡았다.
나는 기가 차서 팔을 뿌리쳤다.
“못 알아들어? 꺼지라고! 너랑 나는 달라! 이제 너 싫어. 귀찮아! 몰랐어? 이젠 구질구질하게 수화하는 것도 싫고, 쓰는 건 더더욱 싫어. 난 나한테 말해주는 사람이 좋아.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위로도 해주는 그런 사람이 좋아! 고등학교 1년 동안 잘해 줬으면, 그만하면 됐잖아? 뭘 더 바래?”
도음이는 수화로 내게 말했다.
‘미안해.’
그 때 그 시간으로 가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입 밖으로 내뱉었던 그 말들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그 날 이후로 나는내 자신을 지독하게, 경멸하게 됐다.
그 이후의 내 삶에 대해 기억하자면,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나는 모든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점점 더 끝을 알 수 없는 나락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도음이의 연락은 그 날 이후로 완전히 끊겼다.
밤마다 잠들 수 없었다.
언니의 모습이 자꾸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하루하루 죽을 것만 같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약을 했다. 마약 말이다.
그런 나를 끌어낸 건 은희였다.
은희가 나의 모든 생활을 다시 설립했다.
여전히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은 멈추지 않았다.
은희는 내가 새엄마와 화해하길 바랐다.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새엄마가 병에 걸려 하루가 급해지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 남아있던 양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새엄마를 보내고 난 후, 난 결국 집에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아빠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도음이가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때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아마 도음이를 산산조각 냈을 거라는 걸.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살인이라면, 살인이니까. 내가 도음이를 죽인 것이다.
곧이어 이어진 내 삶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방탕하게 놀아났던 나는 결국 처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했다.
암이라니? 그것도 말기라서, 수술도 할 수 없다니?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도음이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서 용서를 구해야 하니까.
그 때 도음이에게 했던 말들을 모두 주워 담아야 하니까.
적어도 내 진심을 말해줘야 했다.
도음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도음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
나로 인해 받았을 상처, 대체 내가 어떻게 만회를 한단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서웠다. 나를 비난하는 도음이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도음이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다.
화재였다.
불타오르는 집 안에서 도음이를 빼낸 아빠는 자신의 아내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영영 나오지 못했다.
도음이는 열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도음이가 일어났을 땐 이미 부모님을 화장하고 난 후였다.
부모님을 죽인 건 자신이라고 생각한 도음이는 말도 잃고, 자신의 본 모습도 잃었다.
도음이를 찾아간 곳에서 들은 이야기다.
도음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길러졌지만 이제 그 두 분은 도음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음이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더 이상 연로하신 두 분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나는 어렴풋이 도음이가 내게서 연락을 끊은 이후로 심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설에 맡겨진 도음이를 나는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도음이는 하릴 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방에 들어가면 또 하릴 없이 벽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하루는 무언가에 열중하는 걸 보았다.
도음이는 끊임없이 어떤 단어를 쓰고 있었다.
‘미안해.’ 라고.
나는 그 단어를 본 순간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억눌린 울음을 뱉었다.
바보처럼 착한 도음이는, 아직 날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도음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구해야 할 용서를.
도음이가 빌고 있었다.
도음이 앞에 나타나서 나는 무릎을 꿇고 도음이를 안아 주었다. 아주 세게.
다신 놓지 않을 것처럼.
도음이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계속, 계속 말을 걸었다.
‘도음아, 나 왔어. 나 민하야.’
‘오늘 날씨 정말 좋다. 봄이야 도음아. 너 봄 좋아했어. 벚꽃이 휘날리면 눈 같다고 좋아했잖아 기억나?’
내 몸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 나는 도음이의 곁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제발 한 번만 나를 봐줘.
내가 잘못했어. 진심이 아니었어. 도음아, 정말 널 사랑해.
너 만이 날 살아 숨 쉬게 만들어. 네가 있어야 해. 네가 곁에 있어야만 해. 도음아 날 좀 봐줘.
너로 인해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도음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이번엔 정말 영영 널 떠날지도 몰라. 다신 널 볼 수 없을 거라고 도음아. 제발...
쓰러진 나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바로 이 순간, 홀로 남겨질 도음이가 걱정돼서 눈을 감을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도음이가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혹은 죽기 직전에라도, 영원히 날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도음이의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지.
다음 생에선 대신 내가 목소리를 잃어야겠어.
나는 다음 생에선,
네 목소리만 들을 거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