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비, 오락가락.
어제 갑자기 보고싶었어요, 외할머니.
어렵던 시절, 외갓집 가면 애틋하게 챙겨주시던.
새벽 먼저 일어나 돌아앉아서 허연 머리를 곱게 빗던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환영인지, 여명 속의 뒷 모습.
은비녀를 꽂고는 조용히 일어나서 부엌을 향하던.
갑자기 보고팠어요.
한만 가득 남기고 떠나신.
풀어야 할 뭔가가 필요했어요,
인터넷 뒤져 은비녀를 구입했어요.
조금 비쌌지만, 내 삶도 머지 않은데 질렀지요.
오늘 도착했어요, 묵직한 게 거문고 술대보다 조금 두꺼워요.
오늘부터 거문고를 타기로 했어요..
은비녀를 술대 삼아 소점을 치며 낮고 느리게 타겠어요.
장작 패는 소리가 아닌, 사락거리는 싸락눈 소리거나 보슬거리는 보슬비 소리로.
폭포 쏟아지는 소리가 아닌, 눈물 방울 톡 지다 무명천에 스미는 소리가 좋겠어요.
내 악기소리가 누구를 울리기엔 너무 늦었어요.
오직 한 사람, 나만 울리기로 했어요.
천하보다 결코 작지 않은 나.
유현에서 내 유년이 노닐면
대현에서 외할머니가 나직이 부르고,
문현에서 여물지 않은 푸른 감이 특특 지다
댓바람 소리가 괘상청을 지나 괘하청에서 맑게 울고는
무현이 청淸, 낮고 무겁게 저음으로 울면, 달빛 닮은 은비녀를 빼야지요.
헝클어진 여섯 줄을 토닥이고, 바람 가득한 뼈다귀로 가벼워진 오동의 몸을 누여야 해요.
악기의 소리란
대상으로 삼은 악기와
인식의 주체로 삼은 귀가 상응하여
마음의 거문고를 울리는 행위라서, 마음에 귀납하지요.
마음의 화폭.
해랑이 배경에 둔 그리움에
연화가 붉고 푸른 꽃을 그리시고
금여가 액자에 넣어 걸어주시니,
내 가슴 밭에서 피는 꽃을
바람이 물고 날아가네요.
꽃은 붉다가 분홍으로, 잎은 푸르다가 연둣빛으로, 아늑한 피곤, 예쁜 슬픔, 아득한 침몰.
다음 주에 가슴에 하얀 칠하고 가려오, 꽃님들의 꽃, 사부랑삽작 올리면 꽃물 고우리다.
(가끔 나는 이렇게 미쳐서 되지 않는 글, 마구 흩날리고.... 퇴근한다오)
첫댓글 그리운 외할머니의 은비녀로 술대 삼아 거문고를 타셔서 암울하던 시대를 살다가신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들의 해원의 곡조가 되어 천도제가 되겠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져 그림이 되고 그림을 펼쪄서 맘껏 풀어내는 달인의 글은 신선하고 신성합니다.
되는 글, 되지 않는 글
다 퍼 내소서. 샘물은 퍼내야 또 솟습니다. 새로워서 즐겁습니다~^^
관념과 실재는 다르더이다.
어젯밤에 은비녀를 술대 삼아 영산회상을 타 보았지요.
좀 두껍지만 손에는 맞더군요. 그러나 누에 머리 닮은 머리가 무거워 무게가 실리지 않는 느낌.
은비녀의 속은 비어있기에 단단하지 않고 약간 부드러운 느낌인데....
한참 타다 보니.....비녀가 굽어지고 우그러지고 갑자기 중고 물품이 되었답니다.
은의 특성이 잘 휘잖아요, 결국 상현도드리부터는 은비녀를 포기했습니다.ㅠ
오늘은 차선책으로 "백동비녀"를 물색해봐야겠습니다.ㅋ
백동은 좀 단단하여 괜찮을 듯 합니다.
즐기는 게 목적인 나로서는 무슨 짓이든 욕이 될 게 없지요.
거문고 낙동칠을 벗겨내고 자리공 열매로 자줏빛 물을 들이고
윤슬공방에서 제작한 나전칠기의 "굿즈"를 매달고
백동 비녀로 줄을 다스리는 재미.
소리는 내 마음으로 듣는 것.
옛 여인의 머릿결로 흘러나오는 거문고 소리.
사대부의 악기라지만 나는 가르마를 탄 가느다란 흰 길의 끝에 쪽을 진 여인의 손가락이 되고싶어요.ㅎ
밤. 빗소리.
희뿌연 백동이
허공을 가르다
현의 가지에 내리면
덩~ 저음으로 울 그녀의 가슴 깊은 소리.
내 소리는 나만 즐기려니 비웃지 마소.
은비녀가 금속이라서 현이 손상을 입을까 걱정했는데... 은비녀가 구부러졌군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