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 강론>
(2025. 1. 17. 금)(마르 2,1-12)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3-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이고, 동시에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죄를 용서받다.’는 ‘구원을 받다.’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 사도도 바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고, 여기서도 ‘용서’는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2) 5절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병자 자신이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 외에도 ’간절한 희망’과 ‘회개’와 ‘신앙생활’을 모두 포함합니다.
3) 9절의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즉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하려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중 때문에’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4절),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병자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건강해진 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께 갈 때에는 군중에 막혀서 지붕의 구멍으로 갔는데, 병을 고친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위해서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도, 군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도 자비도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2절).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마음과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그것은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