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석량서(衡石量書)
저울(衡)과 추(石)로 서류를 달아 매일 일정량을 결재한다는 뜻으로, 진시황은 신하를 불신하여 이처럼 모든 서류를 자신이 직접 재결하였다는 말이다.
衡 : 저울대 형(行/10)
石 : 돌 석(石/0)
量 : 헤아릴 량(里/5)
書 : 쓸 서(曰/6)
(유의어)
형석정서(衡石程書)
출전 :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돌을 달아 무게를 재듯이 책을 잰다는 말로, 글이나 책의 가치를 지나치게 물질적으로 따지려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비판하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 문학이나 고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글(書)의 가치를 돌(石)처럼 저울로 재려는 것은, 학문의 깊이나 문장의 가치를 단순히 양이나 외형으로 평가하려는 잘못된 태도를 풍자하거나 경계하는 말입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지식이나 문학의 가치를 단순한 수치나 외형으로 재려는 세태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책의 권수, 페이지 수, 판매량, 혹은 글자 수로 내용을 평가하려는 태도를 지적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실제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문맥 속에서 이 표현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使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上, 事無大小, 皆案書奏, 衡石量書, 而後敢去就.
천하의 모든 일이 크든 작든 반드시 상(皇帝)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고,
모든 문서는 반드시 기록되어 보고되며,
그 무게를 달고 분량을 따져 본 뒤에야
비로소 처리하거나 폐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구절에서 형석량서(衡石量書)는 문자 그대로, '돌로 저울질하듯이 문서의 무게를 재다', 즉 '문서의 분량까지 엄격하게 따졌다'는 뜻입니다. 이는 진시황의 극단적으로 형식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통치방식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문서 행정이 철저하고 형식적으로 운영되었음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대목입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단순히 행정의 철저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주의와 과도한 관료주의, 혹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병폐를 비판하는 뉘앙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문학적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 가능합니다:
현대적 비유로 행정 절차 과잉의 풍자입니다. "그들은 한 장의 보고서를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세 번 하고, 종이 무게를 달아 결재했다. 마치 진시황의 형석량서(衡石量書)가 되살아난 듯했다." 이는 행정과 조직에서 절차와 형식에만 집착하고, 실질보다는 외형적 요건에 얽매이는 현대 관료주의를 풍자할 때 쓸 수 있습니다.
또는 콘텐츠의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출판 시장은 이제 형석량서(衡石量書)처럼, 책의 깊이보다 페이지 수와 두께로 가치를 매긴다." 이는 독서나 글쓰기 문화에서 내용보다 양(분량, 베스트셀러 지표 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현상을 비판할 때 적절합니다.
문학적으로 해석하면 의미의 무게보다 종이의 무게를 따지는 시대를 "생각은 가볍고 종이는 무겁다. 누가 진실을 쓰기보다, 돌처럼 무거운 글을 쌓는 데 열중하는가. 형석량서(衡石量書)의 망령은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 있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보의 진정성보다 양적 스펙이 우선되는 세태를 비판하는 시적 해석입니다.
또는 진시황의 통치 아래, 문서조차 숨을 쉬지 못했다는 "말은 글로 묶였고, 글은 저울에 얹혔다. 문장은 무게를 달았고, 뜻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형석량서(衡石量書)의 시대였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시황 시대의 통제를 언어와 기록의 감금으로 표현한 문학적 이미지입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진시황의 통치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둘러싼 다른 해석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행정의 철저함과 기록 중심주의
긍정적 해석으로,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 뒤 행정과 법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사안을 기록하고 검토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객관성과 기록 중심의 행정 문화를 조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현대적 대응으로는 정보화 시대의 문서관리, 디지털 아카이브, 근거 기반 정책 결정을 의미합니다
② 관료제의 병폐와 형식주의
부정적 해석으로, 행정이 지나치게 절차화되고, 형식과 분량에 얽매여 실질적 판단이나 창의성이 억압됩니다. 문서의 무게를 재고 분량을 계산한 뒤 처리한다는 건, 내용보다 외형을 우선시한 과잉 통제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적 대응으로는 과도한 보고문화, 불필요한 행정 절차, KPI에 얽매인 조직 운영을 의미합니다.
③ 사상과 언론의 통제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상과 언론을 억압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단순히 행정 절차를 넘어서, 표현의 자유를 감시하고 규격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의 상징으로도 해석됩니다. 현대적 대응으로는 검열, 빅데이터 감시 사회, AI를 통한 콘텐츠 필터링 논쟁 등을 의미합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진시황의 통치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절차는 중요하지만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록과 절차는 행정의 근간이지만, 목적 없는 형식주의는 생명 없는 조직을 만든다. 실용성과 융통성을 잃으면 조직은 무너진다.
② 형식보다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문서의 무게가 아니라, 문서가 품고 있는 의미와 진실이 중요하다. 형석량서(衡石量書)는 외형적 지표에 집착하는 세태를 경계하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③ 기록은 권력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정보의 독점과 관리, 문서 통제는 권력 유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투명하고 개방된 정보 문화가 없으면, 기록은 감시가 되고 기억은 왜곡된다.
이처럼 형석량서(衡石量書)는 단지 진시황 시대의 행정 절차를 넘어, 권력, 기록, 표현, 형식주의 등에 대한 깊은 통찰과 교훈을 던져줍니다.
형석량서(衡石量書)
이 성어는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시황제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며 함양궁을 짓고, 신하들을 잘 믿지 않으며,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하기 위해 방술사로 하여금 각종 방법을 찾게 하였다.
이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방술사(박사로 분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함께 모의하여 말했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적으로 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자기만 내세우는데다 제후에서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함으로써 예부터 아무도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여기었소. 전적으로 옥리만을 중용하니 옥리는 친애와 총애를 얻고 있소(始皇為人, 天性剛戾自用, 起諸侯, 并天下, 意得欲從, 以為自古莫及己. 專任獄吏, 獄吏得親幸).
그러나 박사는 비록 일흔 명이나 되었지만 인원만 갖췄을 뿐 중용하지 않소. 승상과 모든 대신들은 이미 결정한 일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며 위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고 있소.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삼는데, 천하는 죄를 두려워하며 녹봉에만 연연할 뿐 아무도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소.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으니 날마다 교만해지며, 신하들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엎드려 속이고 기만하여 안락함만을 취하고 있소.
진나라 법에는 한 사람이 두 가지 방법과 기술을 쓸 수 없으며, 효험이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사형이오. 천문을 관측하는 자는 삼백 명으로 모두 훌륭한 선비지만 두려워하고 꺼리며 아첨할 뿐 감히 황제의 과실을 직언하지 않소.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되니 황제가 읽어야 할 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밤낮의 분량을 정해 놓고 그 분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쉴 수도 없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를 위해 선약(仙藥)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오(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上, 上至以衡石量書, 日夜有呈, 不中呈不得休息. 貪於權勢至如此, 未可為求僊藥)."
이에 곧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그들이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버렸다(焚書). 문학과 방술(方術)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요. 방술사들에게 기이한 약을 구하고 만들도록 하였다. 지금 들으니 한중(韓眾)은 떠나더니 소식이 없으며, 서불(徐市) 등은 막대한 돈을 쓰고도 끝내 불사약을 얻지 못하고, 간사한 이익만을 챙긴다는 보고가 날마다 듣고 있다. 노생 등은 내가 존중하고 매우 후하게 대해주었으나, 오늘 나를 비방하면서 내 부덕을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 땅에 있는 여러 유생을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했더니 어떤 놈은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에 어사를 시켜서 여러 유생을 모두 수색하고 조사하자 유생들은 서로 고발하니, 황제가 스스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60여 명에 달하여 모두 함양 땅에 파묻어버리고 천하에 알려서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於是使御史悉案問諸生, 諸生傳相告引,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
史記(사기) 本紀(본기)
권06.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
秦始皇帝(진시황제)
중국의 서쪽 일개 부락에서 발전하여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의 역사는 대부분 진본기(秦本紀)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편에서는 그 중 진시황 이후의 기록을 별도로 연대순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것으로 진시황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실어놓았다. 진나라는 진왕 정(秦王 政:시황제) 때 주변의 여섯 나라를 하나하나 멸망시켜 기원전 221년에 천하 통일을 달성한 후 자신을 진시황제라고 칭하였다.
이 장에서는 분서(焚書)가 있은 다음해 진 시황 35년(기원전 212년) 불로장생약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시황제가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들을 체포하여 460여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한 사건을 기록하였다. 진 시황 36년(기원전 211년)에는 진 시황이 죽으리라는 징조와 예언이 나돌기 시작한다.
史記 本紀 秦始皇本紀
盧生說始皇曰: 臣等求芝奇藥僊者常弗遇, 類物有害之者. 方中, 人主時為微行以辟惡鬼, 惡鬼辟, 真人至. 人主所居而人臣知之, 則害於神. 真人者, 入水不濡, 入火不爇, 陵雲氣, 與天地久長. 今上治天下, 未能恬倓. 願上所居宮毋令人知, 然後不死之藥殆可得也.
노생(盧生)이 진 시황에게 유세했다. "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아 다녔으나 줄곧 찾지 못했는데, 마치 무엇인가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황제께서 종종 미행을 나가시어 악귀를 물리치시고, 악귀를 물리치시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거처하시는 궁실을 신하들이 알면 신선에게 방해가 될 것입니다. 진인은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 없고 담백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황제께서 머무시는 궁실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한 뒤에는 어쩌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於是始皇曰: 吾慕真人, 自謂真人, 不稱朕.
이에 진 시황이 말했다. "짐은 진인을 흠모해 왔으니 이제부터 나를 '진인(真人)'이라 부르고 '짐(朕)'이라 하지 않겠다."
乃令咸陽之旁二百里內宮觀二百七十復道甬道相連, 帷帳鐘鼓美人充之, 各案署不移徙. 行所幸, 有言其處者, 罪死. 始皇帝幸梁山宮, 從山上見丞相車騎眾, 弗善也. 中人或告丞相, 丞相後損車騎.
이에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70곳을 구름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는데, 각자 등록된 부서에 있도록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는 곳을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 시황제가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서 승상의 수레와 말이 많은 것을 바라보고 언짢게 여겼다. 궁중의 누군가가 승상에게 알리니 승상이 이후에 수레와 말의 숫자를 줄였다.
始皇怒曰: 此中人泄吾語.
시황이 노하여 말했다.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나의 말을 누설한 것이다."
案問莫服. 當是時, 詔捕諸時在旁者, 皆殺之. 自是後莫知行之所在. 聽事, 群臣受決事, 悉於咸陽宮.
이에 심문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었다. 당시 곁에 있었던 자들을 잡아다가 모두 죽이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 뒤로는 황제가 행차하여 머무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사를 처리하고 신하들이 황제의 결재를 받아야 할 것은 모두 함양궁에서 이루어졌다.
侯生盧生相與謀曰: 始皇為人, 天性剛戾自用, 起諸侯, 并天下, 意得欲從, 以為自古莫及己. 專任獄吏, 獄吏得親幸. 博士雖七十人, 特備員弗用. 丞相諸大臣皆受成事, 倚辨於上. 上樂以刑殺為威, 天下畏罪持祿, 莫敢盡忠. 上不聞過而日驕, 下懾伏謾欺以取容. 秦法, 不得兼方不驗, 輒死. 然候星氣者至三百人, 皆良士, 畏忌諱諛, 不敢端言其過. 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上, 上至以衡石量書, 日夜有呈, 不中呈不得休息. 貪於權勢至如此, 未可為求僊藥. 於是乃亡去.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시황이란 위인은 천성이 고집이 세고 사납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제후로 일어나 천하를 통일했으니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고 예로부터 자신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있다. 오로지 옥리만을 기용하므로 옥리들이 총애를 받는다. 박사가 비록 70명이지만 단지 숫자만 채우고 중용되지 않는다. 승상과 대신들은 다 된 일만 명령을 받고 모든 것을 황제에 의존하여 처리할 뿐이다.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세우기를 즐기니 천하가 죄를 지을까 겁을 내고 녹봉 지키기에 급급하여 감히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황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들으려 하지 않고 날로 교만해지고, 아랫사람은 두려움에 바짝 엎드려 기만하고 비위만 맞추고 있다. 진나라의 법에 둘 이상의 방술을 겸할 수 없고 그 방술에 효험이 없으면 바로 죽음이다. 별의 형상과 구름의 기운을 관측하는 자가 300명에 이르고 모두 뛰어난 자들인데 두러워 해서 꺼리며 아첨만 할 뿐 감히 황제의 잘못에 대해 직언하지 못한다. 천하의 대소사가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되니 황제는 읽어야 할 문서를 저울로 달아 밤낮으로 정해놓은 양이 있어,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하면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다.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선약을 구해주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바로 도망갔다.
始皇聞亡, 乃大怒曰: 吾前收天下書不中用者盡去之. 悉召文學方術士甚眾, 欲以興太平, 方士欲練以求奇藥. 今聞韓眾去不報, 徐市等費以巨萬計, 終不得藥, 徒姦利相告日聞. 盧生等吾尊賜之甚厚, 今乃誹謗我, 以重吾不德也. 諸生在咸陽者, 吾使人廉問, 或為訞言以亂黔首.
시황이 그들이 도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했다. 학자와 방술사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한 것은 태평한 시대를 이루려 한 것이고 방사들을 부른 것은 제련법을 익혀 선약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 듣자하니 한중(韓衆)은 떠나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徐市) 등은 거금을 쓰고도 끝내 선약을 구하지 못한 채 온갖 간사한 이익을 챙긴다며 서로 고발하는 이야기만 들린다. 노생 등을 내가 존중해서 후한 상을 내렸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하며 나의 부덕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함양에 있는 유생들을 사람을 시켜 조사하여 물었더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 백성을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於是使御史悉案問諸生, 諸生傳相告引,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
이에 어사(御史)에게 이런 자들을 모두 심문하게 하니 유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끌고 들어가 고발했다. 이렇게 법을 어긴 자들 460여 명을 명부에서 삭제하여 모두 함양에서 생매장하고 천하에 이를 알려서 후세에 경계(警戒)로 삼게 했다. 또 유배된 자들을 더 징발해서 변경으로 옮겼다.
始皇長子扶蘇諫曰: 天下初定, 遠方黔首未集,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唯上察之.
진 시황의 맏아들 부소(扶蘇)가 간언했다.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아직 다 따르지 않고 유생들은 모두 시서를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는 사람들인데, 지금 주상께서 엄한 법으로 그들을 제재하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해질까 두렵습니다. 황제께서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始皇怒, 使扶蘇北監蒙恬於上郡.
시황이 노하여 부소(扶蘇)에게 북쪽 상군(上郡)의 몽염(蒙恬)을 감독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熒惑守心. 有墜星下東郡, 至地為石, 黔首或刻其石曰; 始皇帝死而地分. 始皇聞之, 遣御史逐問, 莫服, 盡取石旁居人誅之, 因燔銷其石. 始皇不樂, 使博士為僊真人詩, 及行所游天下, 傳令樂人歌弦之.
진 시황 36년(기원전 211년), 화성(火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했다. 유성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백성들 중 누군가가 그 돌에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라고 새겨 놓았다. 시황이 이를 듣고 어사를 보내 차례로 심문하게 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자 돌을 주운 곳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돌을 불태워 없앴다. 진 시황이 기분이 좋지 않아 박사에게 '선진인시(仙眞人詩)'를 짓게 하여 천하를 순시하며 가는 곳마다 전령과 악사들에게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秋, 使者從關東夜過華陰平舒道, 有人持璧遮使者曰: 為吾遺滈池君.
이해 가을, 사신이 관동에서 밤중에 화음(華陰)의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벽옥을 쥔 누군가가 사신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에게 갖다 주시오"라고 했다.
因言曰: 今年祖龍死.
이어서 말하기를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오"라고 했다.
使者問其故, 因忽不見, 置其璧去. 使者奉璧具以聞.
사신이 그 까닭을 묻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그 벽옥을 남겨 놓고 가버렸다. 사신이 벽옥을 받들고 와서 그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始皇默然良久, 曰: 山鬼固不過知一歲事也.
시황은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산의 귀신은 본래 한 해의 일만 알 뿐이다"라고 했다.
退言曰: 祖龍者, 人之先也.
조정을 물러나면서 말했다. "조룡(祖龍)은 사람의 선조일 뿐이니 나와 관계없다."
使御府視璧, 乃二十八年行渡江所沈璧也. 於是始皇卜之, 卦得游徙吉. 遷北河榆中三萬家. 拜爵一級.
어부(御府)에 명해 벽옥을 조사하게 하니 시황 28년에 순시하다가 장강을 건너면서 빠뜨린 그 벽옥이었다. 이에 시황은 이를 점을 치게 했는데 옮겨가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북하와 유중 지역에 3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가구마다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기밀과 거짓말의 악취
진시황은 자객과 모반을 극히 두려워했다. 그의 위치 정보는 자객을 부르는 신호이므로, 그 발설자는 목이 잘렸다. 그가 양산궁이란 곳에 행차했을 때, 승상 이사를 따르는 수레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언짢아했다. 누가 이사에게 이 말을 전해주자, 이사는 수레의 수를 줄였다. 이를 본 진시황은 "이건 누군가가 내 말을 옮긴 것이라"며 한 사람씩 심문했다. 발설자를 못 찾은 진시황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궁인들을 모두 처형했다.
진시황은 관리들과 주고받는 문서를 모두 기밀 처리해 알사탕만한 진흙으로 봉한 뒤 책임자의 도장을 찍어 올리도록 했다. 이 진흙 도장을 봉니(封泥)라고 한다. 황제 집무실인 장대가 있던 시안 류자이촌에서는 황제의 것을 포함해 수천개의 봉니가 나왔다. 진시황은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기밀로 만들고 손수 처리했기 때문에, 하루에 결재할 문서의 양을 저울로 달아서 올리게 했다. 이를 형석량서(衡石量書)라고 한다.
진시황은 지방 순찰 도중 객사했다. 승상 이사와 조고는 모반이 두려워 그의 죽음을 기밀에 부치고, 마치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매일 음식과 보고를 올렸다. 함양으로 돌아가는 수레에서 주검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자 말린 어물 한 가마니를 함께 실어 생선 냄새와 헷갈리도록 했다. 고대의 빅브러더는 기밀과 거짓말이 섞인 악취에 휩싸여 황천길을 갔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 국가안보국이 각국 정상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지난해 한해에만 기밀문서를 1억건 생산했다. 특급기밀 접근권을 가진 사람만도 140만명이나 된다. 현대판 형석량서(衡石量書)다. 일본 정부는 최근 기밀 누설 처벌 강화와 기밀 기한 무제한 연기 등이 뼈대인 '특정비밀보호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정권의 기밀문서 공작으로 일년 동안 정치가 표류하고 있다. 지난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츠와니에서 채택된 '국가 안보와 정보 접근권에 관한 국제 원칙(츠와니 원칙)'은 기밀 연한과 해제 수단을 법률로 정하고, 독립된 감시기관과 언론의 접근권을 보장할 것 등을 기밀 지정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주 사회에 이 정도 원칙도 없다면, 진시황 시대와 다를 게 무엇인가.
▶️ 衡(저울대 형, 가로 횡)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다닐 행(行; 다니다, 길의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𩵋(어; 魚의 약자, 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일설에는 角(각; 뿔)과 大(대; 크다)를 합(合)하여, 큰 뿔의 뜻을 나타내며 동시(同時)에 가로의 뜻(橫/횡)을 나타내기 위한 行(행)으로 이루어졌다. 소뿔에 잡아맨 뿔 나무의 뜻이 전(轉)하여 '천칭의 가로대, 저울, 균형(均衡)'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衡자는 ‘저울질하다’나 ‘준칙’, ‘고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衡자는 行(다닐 행)자와 角(뿔 각)자, 大(큰 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角자와 大자는 뿔이 달린 소를 표현한 것이다. 衡자의 금문을 보면 사거리에 뿔이 달린 소가 그려져 있었다. 衡자는 본래 길을 갈 때 소가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뿔에 긴 나무를 묶어 놓았다는 뜻으로 만든 글자였다. 그래서 이전에는 衡자가 ‘뿔막이 나무’나 ‘쇠코뚜레’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뿔에 매달은 평평한 나무가 저울을 닮았다 하여 ‘저울’이나 ‘평평하다’나 ‘고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衡(형, 횡)은 ①저울대, 저울 ②수레의 가로장 ③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④뿔막이나무, 쇠코뚜레 ⑤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⑥권병(權柄; 권력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힘) ⑦준칙(準則) ⑧패옥(佩玉; 허리띠에 차는 옥) ⑨난간(欄干) ⑩눈두덩, 눈썹 ⑪옥형(玉衡; 옥으로 만든 천문 관측기) ⑫별의 이름 ⑬벼슬의 이름 ⑭강(江)의 이름 ⑮산(山)의 이름 ⑯풀의 이름 ⑰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⑱무게를 달다 ⑲저울질하다 ⑳평평하다, 고르다, 그리고 ⓐ가로(횡) ⓑ연횡(連衡)(횡) ⓒ횡역(橫逆; 당연한 도리에서 벗어남)(횡) ⓓ가로지르다(횡)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균형이 잡혀 있는 일을 형평(衡平),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판정하는 기준을 형준(衡準), 저울과 자를 형도(衡度), 도량 형기로 물건의 무게를 다는 기구를 형기(衡器), 치우침이 없이 고름을 균형(均衡), 인물의 됨됨이나 재능을 시험하여 뽑음을 전형(銓衡), 사물의 가볍고 무거움을 고르게 함을 권형(權衡), 엿보고 헤아림을 규형(窺衡), 제사에 쓸 희생을 다는 데 쓰는 저울을 복형(福衡), 사물의 좋고 나쁨을 비추어 보는 거울과 물건의 가볍고 무거움을 달아 보는 저울을 감형(鑑衡), 서로 지지 않으려고 다툼을 쟁형(爭衡), 서로 지지 않고 대항함을 항형(抗衡), 형평을 이루는 성질을 형평성(衡平性), 균형이 잡히지 않고 어느 편으로 치우쳐서 고르지 못함을 불균형(不均衡), 여러 방면으로 마음을 쓰고 생각을 짜냄으로 골똘히 생각함을 곤심횡려(困心衡慮) 등에 쓰인다.
▶️ 石(돌 석)은 ❶상형문자로 언덕 아래 뒹굴고 있는 돌의 모양을 나타내며 돌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石자는 ‘돌’이나 ‘용량 단위’로 쓰이는 글자이다. 石자의 갑골문을 보면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돌덩이가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벼랑 아래로 돌이 굴러떨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石자이다. 그래서 石자의 좌측 부분은 벼랑이나 산기슭을 뜻하는 厂(산기슭 엄)자가 변한 것이고 그 아래로는 떨어져 있는 돌덩어리가 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돌이 무게의 단위나 악기의 재료로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石자에는 ‘용량 단위’나 ‘돌 악기’라는 뜻이 남아있다. 그러나 石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돌의 종류’나 ‘돌의 상태’, ‘돌의 성질’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石(석)은 (1)어떤 명사 다음에 쓰이어 섬(부피의 단위)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2)경쇠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돌 ②섬(10말. 용량 단위) ③돌바늘 ④돌비석 ⑤돌팔매 ⑥숫돌(연장을 갈아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⑦무게의 단위 ⑧돌로 만든 악기(樂器) ⑨저울 ⑩녹봉(祿俸) ⑪쓸모 없음을 나타내는 말 ⑫굳다 ⑬돌을 내던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구슬 옥(玉), 쇠 철(鐵)이다. 용례로는 석유(石油), 석탄(石炭), 석류나무의 열매를 석류(石榴), 석회석을 석회(石灰), 돌로 쌓은 탑을 석탑(石塔), 돌로 만든 부처를 석불(石佛), 건축 재료로 쓰이는 돌을 석재(石材), 바위에 뚫린 굴을 석굴(石窟),돌이 마주 부딪칠 때에 불이 반짝이는 것과 같이 빠른 세월을 이르는 석화광음(石火光陰), 자갈밭을 가는 소란 뜻의 석전경우(石田耕牛), 옥과 돌이 함께 뒤섞여 있다는 옥석혼효(玉石混淆), 돌에 박힌 화살촉이라는 중석몰족(中石沒鏃),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수석침류(漱石枕流),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괸다는 상하탱석(上下撑石),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떨어 뜨린다는 낙정하석(落穽下石), 나무 인형에 돌 같은 마음이라는 목인석심(木人石心), 돌을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돌에 화살이 꽂혔다는 사석위호(射石爲虎) 등에 쓰인다.
▶️ 量(헤아릴 량/양)은 ❶상형문자로 곡물을 넣는 주머니 위에 깔때기를 댄 모양을 본떠 '분량을 되다'의 뜻을 나타낸다. 되는 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이다. ❷회의문자로 量자는 ‘헤아리다’나 ‘재다’, ‘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量자에서 말하는 ‘재다’나 ‘달다’라는 것을 무게를 측정한다는 뜻이다. 量자는 旦(아침 단)자와 里(마을 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量자의 갑골문을 보면 東(동녘 동)자 위로 네모난 모형이 그려져 있었다. 東자는 곡식의 씨앗이든 봇짐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곡식이 들어있는 봇짐을 그린 東자 위에 口자가 있는 것은 깔때기가 꽂혀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量자는 봇짐에 곡식을 담으며 양을 헤아린다는 의미에서 ‘헤아리다’나 ‘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量(량/양)은 ①헤아리다 ②추측하다(미루어 생각하여 헤아리다) ③달다 ④재다 ⑤되질하다(되로 되어 헤아리다) ⑥가득 차다 ⑦양(量) ⑧분량(分量) ⑨용기(用器) ⑩용적(容積) ⑪기량(技倆) ⑫성격(性格) ⑬재능(才能) ⑭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헤아릴 감(勘), 헤아릴 탁(度), 헤아릴 촌(忖), 헤아릴 규(揆), 헤아릴 측(測), 헤아릴 료/요(料)이다. 용례로는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양산(量産), 형벌의 양을 정함을 양형(量刑), 양으로 따지는 모양을 양적(量的), 도량이 매우 좁음을 양협(量狹), 헤아려 정함을 양정(量定), 물건의 양을 헤아리는 데 쓰는 기구를 양기(量器), 필요한 수량을 잘 헤아려서 남겨 둠을 양류(量留), 측량에 관한 사무를 양무(量務), 기름이나 술 따위를 되는 데 쓰는 병을 양병(量瓶), 인재의 재능을 헤아려서 그에 알맞게 벼슬을 줌을 양서(量敍), 셈을 잘 헤아려서 알맞게 덞을 양쇄(量殺), 수량을 대강 어림쳐서 나타내는 말을 가량(假量), 어떤 일을 감당하여 해낼 수 있는 힘을 역량(力量),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도량(度量), 낱낱으로 갈라서 셀 수 있는 물건들의 많고 적은 정도를 분량(分量),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함을 재량(裁量), 사람의 덕량과 재능을 기량(器量),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 분량을 함량(含量), 용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을 용량(容量), 앞일에 대하여 잘 생각하여 헤아림을 요량(料量), 너그럽고 깊은 도량을 아량(雅量), 몸에 맞게 옷을 고친다는 뜻으로 일의 처한 형편에 따라 적합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양체재의(量體裁衣), 짐을 실을 수 있는 정량을 일컫는 말을 적재정량(積載定量), 사람의 기량은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을 기욕난량(器欲難量),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사량침주(捨量沈舟), 수레에 싣고 말斗로 될 수 있을 정도라는 뜻으로 인재나 물건이 아주 많음을 비유함을 일컫는 말을 거재두량(車載斗量), 그지없도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느낌을 일컫는 말을 감개무량(感慨無量), 되로써 섬 곡식을 된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이승양석(以升量石)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❶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書자는 ‘글’이나 ‘글씨’, ‘글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書자는 聿(붓 율)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말씀’을 뜻하는 曰자가 더해진 書자는 말을 글로 적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曰자가 먹물이 담긴 벼루를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서신왕래(書信往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