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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어둠이 두려운 밤이다.
터덜...터더..ㄹ
무겁게 끌리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한다.
집.....
세상 사람들에겐 참으로 따듯한 그 단어가 나에겐 지옥과 맞먹는 고통임을 나 말고 그 누가 알까.
"아..버지"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문을 연 안방에선 매일 맡아도 속을 울렁이게 하는 술 냄새가 콧속 깊숙이 밀려온다.
그리고 나를 가장 무서움에 떨게 하는 아버지의 소름끼치게 충혈된 살기어린 저 눈.
"어디 가싸가 ㅇ..ㅣ 제 끼지 일려 드러...어늉거하!!!!!!"
바로 앞에 놓여있던 초록색 소주병이 들어 올려졌고 그것은 그대로 내 머리통에 날아왔다.
양팔로 부여잡고 패는 것도 아닌 이정도 쯤이야 사뿐히 피할 수도 있는 내공이 있다고 혼자서 상상했었는데 막상 아버지라는 그자
의 서슬 퍼런 호령과(그래봤자 만취함에 잔뜩 꼬인 혀지만) 피하면 정말이지 죽여버릴듯이 나를 괴롭힐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는
그저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르윽.
진득한 붉은 피가 이마를 넘어 오른쪽 눈의 시야마저 가려버린다.
머리통이 깨질 듯 한 아픔. 이건 비단 비유법이 아니다. 정말 머리통이 깨졌으니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학교가 끝난 후 갈 곳 없는 시간을 흘려 보내주던,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우리 집에서 가
장 먼 놀이터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실에 널브러져있던 수건 하나를 들고 나온 건 그 정신없던 상황에서 정말 잘한 일이었지 싶다. 있는 힘껏 터져 나오는 피를 막으
며 생각했다. 만약 오늘 아버지라는 그 사람이 술에 조금만 덜 취해 걸을 기력이 남아 있을 만큼 이었다면 아마 난 지금 병원에 실
려가있거나 아직까지도 죽을 만큼 맞고 있을 것이라고.
아 이 얼마나 고마운 상황이란 말인가.
놀이터 벤치에 다다르자 온몸에 힘이 빠진다. 간신히 누운 벤치.
숨이 가빠온다. 바로 보이는 하늘이 원망스럽다. 왜 아직 어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었기에
엄마라는 존재도 없이 매일 술에 쩔어 나를 죽일 듯이 때리는 아버지를 내려주었느냐고. 12살. 아직 세상의 아픔과 고통만을 알기
에는 너무 어리고 안타까운 나이 아닌가.
초가을의 문턱을 벌써 넘어선 밤날씨는 나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어주었고 더운 숨이 하얗게 부서지던 입김도 잦아들며 나
는 정신을 잃었다.
"학생!!! 학생 정신차려봐!!!!!!!"
천천히 떠지는 눈으로 어렴풋이 들어오는 사람들의 형상
'아.. 안 죽었구나'
살아있음이 느껴졌으나 다행이다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순찰을 돌던 아파트 경비아저씨에 의해 또 한 번 목숨을 건진 나는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이미 처음이 아닌 나이기에 이 주변에선 나를, 우리아버지를 잘 안다. 경찰이며 아동 보호소며 많이들 들고나갔지만 결국 나를 우
리 아버지라는 작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없다. '친자'라는 그 개 같은 법 따위 때문에.
이미 날은 밝아 해가 중천이니 학교가긴 글렀고 다시금 나를 받아주는 놀이터로 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터널기구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인데 이렇게 혼자 있으면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 힘들다. 내 팔, 다리, 얼굴... 어
려서부터 지금까지 맞으며 생긴 흉터들이 너무나 선명히 자리 잡고 있는 내 몸을 보면서 숨 쉬는 이유가 뭔지 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자문이 들 때에는 너무나 우울하고 슬퍼 정말이지 죽고 싶지만 억울하게 이유도 없이 맞고만 산 12년이 불쌍하고 가엾어서
죽지 못하고 산다라는 자답을 할 때엔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스스로 죽지 못할 바 죽을병이라도 걸려 죽어졌으면. 그래,
죽어졌으면...
"으음.."
또 밤이다. 찬 기운에 잠에서 깨니 다시금 집에 돌아가는 것이 막막하다.
가출이라는 것을 해볼까도 했지만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만큼 그것도 두렵고 겁나 실천해 보진 못했으나 조금만 더 크면 언젠간
가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아픈 머리를 짚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오늘따라 아무소리도 없는 밤의 적막함이 야속하다.
열려있는 방문
이상하리만치 너무 조용하고 매일같이 나던 술내음도 나지 않는다.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한다. 단 한 번도 이랬었던 적이 없음에 대한 이질감.
마치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뭔가 더 큰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에 쿵쾅거리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학교 안갔다며? 어디 갔다 이제 오는거야?"
적막감을 깬 낯선 목소리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아버지 목소리다.
'아.. 우리 아버지 목소리가 저랬었구나'
"벼어..벼..병원...에 있다 오느..라..."
한 문장 말하기가 저럽게 버거웠던가. 온몸이 떨려 간신히 내뱉은 말에 그는
"병원은 왜?"
병원은 왜란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하긴 술에 잔뜩 취한 뇌가 맨 정신인 나에겐 컬러사진처럼 명확히 박히는 그 기억 하나하
나들을 지웠나보다.
"어..제...."
"어제.. 뭐?"
아버지라는 사람과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신기함보다 일단은 화가 난다. 왜 오늘은 술에 취해있지 않느냐는
궁금함보다 그동안 씻겨지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고통을 준게 누군데 지금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식의 천진난만한 표
정으로 묻고 있는 저 표정과 말투가 증오스럽고 울분이 터져 올라 미쳐버릴 것 같다.
증오와 분노는 사람에게 엄청난 용기와 무모함을 주는가보다. 혹은 오늘 바로 지금은 술에 취해있지 않은 아버지라는 사람이 매일
술에 취해 나를 때리던 그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던가.
"어제 뭐냐구요??? 어제 저한테 한 행동 기억나시지 않나봐요? 제가 댁의 아드님인건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궁굼하네요!!!!! 왜
오늘은 술을 안 먹고 이러고 계세요? 네??? 맨날 나를 죽기직전까지 아니 죽일 듯이 때리고 짓밟던 아버지가 아니셔서 제가 다 못
알아 뵙겠네요. 참 좋으시겠어요 기억하지 못하셔서... 그런데 어쩌죠? 저는 다 기억해요. 흉터도 아물고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
지 하지만 어쩜 그리 매일같이 때리시는지 흉터가 아물지도 못하게 새로 생기고 또 새로 생겨서 일일이 새지도 못할 만큼 온몸이
찢기고 마음이 터졌는데 술 한번 안마셨다고 이제 와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 왜라고요????"
분노감에 터져 나온 내 말들은 떨리면서도 그동안 담아왔던 마음속에 말들이 튀어나왔고 두려움과 함께 섞인 분노는 눈물로 떨어
져 나와 쉴 새 없이 내 볼을 적셨다.
너무 오랜만에 정면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얼굴은 그간 도가 넘게 마신 술로 인해 굉장히 검었으며 깊게 파인 주름과 내 부르짖음
에 떨리는 눈동자가 서글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인 심장이 그렇지 않아도 터질듯 쿵쾅거렸으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열 두해 가을.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매일 나는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맞는 것이 당연했고 깨지고 터진 상처들이 당연했던 나였는데 오늘은 반대라면 반대상황이 된 것이
다. 마치 죄를 지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사춘기시절 아무것도 아닌 부모에 대한 말대답이 생애 첫 일탈이 된 나의 불쌍한
인생에 단단한 족쇄일까.
다친 머리에서 시작한 깨질 듯 한 두통에 토악질이 난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떨리는 몸과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마치 이제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칼을 들고서 나를 정말 죽여버릴것 같은 생각과 너무나 화가 난 아버지가 칼을 들고 지금이라
도 나를 찾아 나와 거리를 헤매일것 같은 생각에 정신이 없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양손바닥으로 번갈아가며 내 뺨을 내리치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깊은 호흡을 한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이를 꽉 다물었다.
'그래 언젠가 맞아 죽을 거라면 그게 지금이면 어때? 오히려 빠르면 좋은 거 아냐? 그래.. 근데 왜 오늘은 술을 안먹고있었던 거지?
그리고 언제 다시 맨 정신으로 얼굴볼지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그동안 물어보고싶었던거 다 물어볼까? 내 엄마는 누구인
지.. 왜 그동안 나를 그렇게도 때리고 구박했는지... 그래 내가 집 뛰쳐나온 다음 바로 술을 마셨다고 해도 아직 많이 마시진 못했
을 거야.. 조금이라도 덜 취했을 때 물어볼 거 물어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일 듯이 달려들면 오늘은.... 그래 죽을 듯이 도망치
는 거야.'
두려움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던 말대답이 한번 터지고 나니 두려움도 있지만 한번 부딪혀보자는 마음가짐이 뭉글뭉글 샘솟아 올
랐고 그 마음가짐에 그동안 정말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들까지 똬리를 틀며 나를 부추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만약 아버지가 술을 다시 마시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덜 마셨을 때 그래서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있을 때 묻고 들
어야 된다는 생각에 앉아있던 모래밭을 힘껏 박차고 다시 집으로 뛰었다.
아까보다 더 조용한 집안.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급한 마음에 신발도 벗지 못하고 뛰어 들어간 안방에선 피를 토하며 목을 잡고 괴로워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옆을 뒹굴고 있는 약병들..
그토록 죽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빌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눈앞에 벌어지자 살리긴 해야 되는데 손이 떨리고 머리가 하
얗게 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 풀린 다리로 기어가듯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
"12년 동안 당신한테 피터지게 맞아온 나도 흐윽.. 죽지 않고 이렇게 살..고있는데 내가 한번 큰소리 냈다고 이럴 으흐흑 수 있는
거야? 어떻게 이래!!!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고!!.."
"남....길..ㅏ"
"으윽흑윽 잘못했어요 아부지!! 제가 잘못했어..요 죽지 마세요!! 네? 흑흑...흑"
"..미..아..ㄴ...하다.."
"흐윽윽... 아직 아버지한테 물어보지 못한 것도 많은데 아버지랑 진짜 말은 해본적도 없는데 안 돼요 아버지 정신 차려요!! 윽윽
윽..."
"원..마..ㅇ 많아..ㅆ...지? 죄...없(쿨럭)는 너한...ㅌ..ㅔ.."
"안 돼요 아부지!! 제가 잘못했어요! 죽지 말아요!!! 아악!!!"
"안..방 책상 서랍아..ㄴ 에 펴...ㄴ ㅈ....ㅣ......"
모든 것이 순식간 이었다.
결국 내 품안에서 숨을 거둔 아버지.
한결같이 나에겐 두려움이던 존재가 한줌 재로 변해 강가에 뿌려지는 것은.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인지 모르겠다.
켜켜이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가 그날의 마지막을 회상시켜주듯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 집안 공기를 바꿨다. 차가운 계절의 날선 새벽바람이 불어와 자리한 집안. 너무 쏟아 말라버렸을줄 알
았던 눈물이 한 방울 토옥- 떨그러졌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쓰다듬은 바람에 볼이 아리다.
사람이 어찌나 간사한가.
그토록 죽길 염원하던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 되니 죽지 말라고 소리치던, 잘못한 거 없이 늘상 맞는 게 억울하다고 되뇌이던 입이
잘못했다고 울부짖던 그날의 나를 돌이켜보니 너무 웃겨 헛웃음이 났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가출도 한번 시도해보지 못하고,
죽길 바라던 그의 죽음 앞에선 펑펑 울며 영혼이라도 팔아 그를 다시 살리고 싶어 했었는데... 결국 지지리 복도 없는 나는 12살 가
을. 철저한 혼자가 되었다.
사경을 헤매이도록 맞으면서도 나를 아버지라는 이름 옆에 남게 한 것은 혼자가 되기 싫었던 나의 몸부림이었는데... 허탈했다. 막
막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그래 무서웠다.
거실 깊숙이 들어온 햇살에 잠이 깬 나는 멍하니 눈만 껌뻑이며 시계의 초침소리에 맞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생각
나는 건 아버지.. 술... 폭력.. 피.. 상처.....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귓고랑을 지나 목덜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
그래 아버지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미안하다고... 젠장... 난 맞으면서 수도 없이 내뱉은 그 미안하다는 단어를 나는 단 한번
들은 것뿐인데 마치 내가 그동안 견뎌온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원래는 착하고 날 사랑했던 아버지를 단 한번 실수로
내가 죽여 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발톱 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나를 타 넘어올라 숨이 막힌다. 답답한 가슴으로 그날을 뒤적이던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말이 떠올랐다.
"그래! 편지!"
그 생각이 나자 나는 단숨에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 책상 서랍을 뒤져나갔다
책상 가장 아래 유일하게 잠겨져있지 않은 그 서랍 안에 노란색 빛바랜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낯선 글씨체는 그 편지가 내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남길이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이 애비가 살아생전 한 번도 따듯하게 해주지 못한 이 말을 이렇게 지면으로 하게 됨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주
길 바란다. 그 동안 못난 이 애비 탓에 네가 고생 아닌 고생 많이 한거... 늘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여 내 어찌 모른다고만 하겠니..
어려서부터 심하게 대한 거 정말이지 진심은 아니었다..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도 어린 너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굉장히 조심스럽고 또 미안하구나... 어린 마음에 너는 왜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너를 때리는지 그 이유보
다는 술을 마시고 때리기만 하는 이 아비가 미웠을 것이다. 그렇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지.. 남길아 그동안 아버지가 왜 그렇
게 너를 괴롭혔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 또한... 한 번도 말해준적 없었던 네가 가장 궁금해 할 너의 엄마에 대해서도
말해주려 한다.. 너의 엄마와 나는 스무 살 때 처음만나 첫눈에 반해 5년이 넘도록 사랑했고 결국 너를 임신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아직 어렸고 집안의 반대와 넉넉하지 못한 나의 가정형편덕에 결혼을 미루게 되던 어느 날 너의 엄마와 갑자기 연락이 끊겼고 1년
이 넘게 찾아헤맨 끝에 내가 찾은 너의 엄마는 이미 부잣집에 시집가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단다. 다시 만난 나에게 온갖
모진 말들을 하며 이별을 말하던 그 얼굴..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구나.. 그런 그녀에게 너의 행방을 묻자 지웠다고 하
더구나.. 하지만 그녀의 성품이 생명을 지워버릴만큼 독하지 않다 는걸 아는 나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고아원에 버려진 너를 찾을
수 있었단다. 그 뒤로 너를 키우면서 너를 보면 목숨처럼 사랑했던 그녀와 그녀가 나를 배반한 배신감에 대한 증오 그리고 어찌되
었든 그 사람과 나의 사랑에 결실인 너를 보면서 애증과 우울함 복수심등의 감정이 서로 치밀어 올라 마음이 많이 아팠고 잊고 싶
은 마음에 손을 댄 술에 취해 감추고만 싶었던 애증이란 감정이 쏟아져 나와 너를 많이 아프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맨정
신일때 너에게 편지로나마 내 속뜻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구나. 오늘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본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가 그동안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스스로가 저주스럽구나.. 미안하다 아들아. 나의 죽음은 네가 고통 받았을 12년에 대한 속죄의 의미이며
앞으로도 똑같이 살아갈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낳은 아이를 보며 매일 잊지 못하고 절망과 애증 속에
서 살았던 20여년에 대한 고통을 네가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다면 이 아빌 용서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래본다. 더불어 내가 이
렇게밖에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그리고 널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만 찾아 떠난 네 엄마라는 사람에게 꼭 네가 복수를 해주길 바
란다. 나를 버리고 너를 버린 그 죗값을 부디 네가 그이에게 치르도록 해주길 바래... 떠나면서도 너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죄스럽지만 이것이 이 애비가 떠나가는 길에 마지막 유언이다. 물론 네가 우릴 버린 그녀마저 이해하고 용서하여 앞으로 어
머니로 모시고 싶다면 탓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녀가 너를 받아주고 아들로 인정해줄지 걱정이구나. 네가 다시 상처받지 않았
으면 좋으련만... 어떤 결정을 내리던 아버지는 너의 편에서 응원해 줄 것이니 혼자라고 생각지 말고 열심히 살며 아버지의 유언을
이뤄주길 바란다....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 꼭 다시 부자지간으로 만나자... 그땐 세상에 다시없는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마.. 사
랑한다 아들아.」
투욱_ 투욱..
첫 번째는 복잡한 감정이 밀어낸 내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 다음은 떨리는 손에서 편지가 떨어진 소리
털썩
힘풀린 다리는 결국 꺾여 나를 무릎 꿇렸고...
"아아악!!!!!!!!!!!!!!!!!!!!!!!!!!!!!!!!!!!!!!!!!!!!!!!!!!"
목구멍이 터져라 내지른 절규에 끝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복잡한 통곡.
한 번도 맘 놓고 불러보지 못해서 더 간절했던, 그리움에 절어 생각만 해도 눈물이 엉기는 '엄마'라는 단어를……. 한순간에 복수
할 대상을 만들어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나와 아버지를 버린 엄마라는 사람이 밉기도 하고 진짜 복수를 해버려야 하는
지 아님 찾아가서 내가 당신이 버린 아들입니다- 라며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울어버려야하는지... 얼굴로 모든 혈류가 솟구치는 느
낌이다. 눈알이 빠져버릴것 처럼 아프다.
평범한 가정은 내게 사치란 말인가.
태어나 지금까지 맞은 기억밖에 없는 어린 시절. 난폭했던 아버지 그리고 자살. 유언으로 남겨진 복수... 그토록 그리워했던 엄
마...
며칠 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은 나의 심신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바깥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몇 시간을 울었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다.
사람들은 알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있을 땐 어느 것을 먼저 골라 생각해야 할지 몰라 멍-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복잡한 심정에 그 멍-함을 감사히 여기며 아무도 없는 정적이 익숙함을 넘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띵동'
"남길아~ 안에 있니?"
적막한 고요함을 깨준 그 한마디가 반갑고 고마워서 또 눈물이 흘렀다.
난 사회복지사님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그나마 남겨놓은 재산을 정리하고 아동보호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장어머니라는 분도 좋으신 분 같고 아이들도 거의 내 또래나 더 어려서 크게 생활이 어렵진 않았다. 떠올리기 싫은 생각을 기억
저편으로 깊숙이 묻어두고 그냥 저냥 소소한 일상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어머니(원장어머니를 말함) 수현이 어디 갔어요?"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원실에 나를 가장 잘 따르던 동생 수현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된 마음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응, 수현이 오늘 친엄마가 오셔서 데려가셨다~ 남길이 너를 못보고 가서 굉장히 아쉬워하더구나... 다음에 꼭 놀러온다고 했으니
까 너무 상심하지 말구"
"네??? 수현이 6살 때 버려진 거 아니었어요?"
"버려진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지 아마? 엄마 되시는 분이 굉장히 찾으셨던 모양이야……. 어찌나 우시던지.. 아무튼 잘된 일이니까
너무 서운해 말구 올라가 씻으렴"
원장어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애써 잊고 묻어두려고만 했던 엄마가 다시 생각난 것이다.
'그래.. 아버지가 오해하신 걸수도있어! 엄마가 날 잃어버리셨을 수도 있고 아님 아버지가 거짓말 하신 것일 수도 있고.... 그래 직
접 확인하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
집에서 떠나올 때 싼 짐들을 풀어헤치며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를 찾았다.
'그래 이 주소'
다음 날.
학교 가는 발걸음이 떨린다. 설레면서 흥분되는 이 감정. 오랜만인 듯싶다.
빨리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가 알려준 이 주소... 엄마가 있는 곳에 가봐야지...
어떻게 수업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난 학교.
마지막 수업이 파함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를 탔다.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혹시 이사 가셨으면 어쩌지?
나를 모른 척 하시면 어쩌지?
새아버지라는 분에게 쫓겨나진 않을까?
괜히 엄마가 곤란해지시면 어쩌지?
등등 하지만 결국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되나보다.
그 많은 생각의 끝은 내가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모습처럼 마무리 되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냐며 이제 부턴 같이 헤어지지 말고 살자며 눈물로 나를 안아주시는 따뜻한 엄마의 모습으로.
난생처음으로 와보는 동네.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지만 보고 싶은 엄마가 계신 동네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친근함과 푸근함이 느껴졌다.
묻고 물어 찾아간 주소는 한눈에 다 들어오기 벅찰 만큼 크고 멋진 집이었다. 일단 아직 이 집에 엄마가 살고 계신지 알아야겠기에
아까 오다가 본 잡화가게에 들어가 물었다.
"저기 혹시 저 집이 김해숙이란 여자분 살고 계신데 맞나요?"
나를 아래위로 한번 훑은 가게 아줌마는 이런 저런 말들을 내뱉는다.
"김해숙?? 아... 창북동 사모님 말씀이구먼~ 거기 사시제"
아직 엄마가 그 주소에 살고 있다는 말에 너무 기뻐 눈에 눈물이 살짝 맺히는 나다.
"저기 혹시 가족이 어떻게 되시는지도 아세요?"
잠깐 찡긋하며 나를 한 번 더 훑어보시는 아줌마
"근데 학생이 그런 건 왜?"
"아... 저 멀리서 올라온 친척인데요 선물을 어떻게 고를까해서요"
"그래? 뭐 선물이라 봤자 큰 돈 안들이겠네 그 집 아들은 어려서 잃어버려서 아직 못찾구 없지 회장님은 사업차 외국 나가 계시고
사모님만 혹시나 잃어버린 아들 찾을까싶어 남아계시니 사모님 꺼만 챙기면 될 끼다"
"잃어버...린.... 아들..이요?"
"뭐라?"
"아뇨, 아녜요 감사합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아들이라... 혹시 내 애긴가? 아님 내가 모르던 또 다른 동생? 어느 쪽이든 심장이 떨리게 설레이는건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대문을 두드리고 엄마를 부르며 여기 내가 왔다고 아들이 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14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
에 대한 그리움보다 문전박대를 당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더 컸기에 일단 먼저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과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누른 전화번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네, 여보세요'
"아. 저..저기..."
'네? 여보세요??'
"저기... 안녕하세요 저.. 여쭤볼것이 있는데요 혹시 아드..님...."
'네?? 누구시죠? 누구세요??!! 우리 환이아세요??'
환....이.......?
"저기 혹시 잃어버리신 아드님이 두 명인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 아들이라곤 우리 환이 한명밖에 없는데'
한명...
"그럼 버린 아들은요?"
'당신 누구야? 누군데 이런 장난전화질이야?? 어?? 잃어버린 우리 아들 환이는 있어도 버린아들같은건 없어!!! 당신 도대체 누구
야!!!'
뚝-
아. 그러셨어요 어머니.
잃어버린 댁의 아드님은 있으시고 우리 아버지 배신하면서 버린 나 같은 아들은 애당초에 없었던 존재였나요? 하..
벌 받은 거예요. 우리 아버지 그리고 나. 두 사람 인생 망가뜨린 거 당신 아들 잃어버린 걸로 먼저 벌 받은 거라고요. 근데... 그게
시작이에요. 내가 당신... 더 망가뜨릴 거니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보았는가?
그것도 나를 태어나게 한 사람에게서.
그래. 어차피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 난 이미 내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다.
감격의 모자상봉이라는 희망이 처참히 전화한통으로 뭉개지고 그동안 품었던 희망과 그리움이 모두 절망과 분노로 바뀌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간 간직했던 감정들이 딱 그만큼만 분노로 변해도 차고 넘칠 판에 참 재미난 사람의 감정은 그 몇 갑
절 이상으로 돌아온다.
서운함과 배신감 그리고 그동안 당해온 고통에 화살이 모두 엄마라는 그녀에게 가서 꽂힌다. 그래 모두 당신 때문이야.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 그 유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그래 내가 복수할 거야.
버린 아들은 없고 잃어버린 아들만 있다는 그 한마디가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데.
.
.
.
.
10년 후.
'한'이라는 것을 품으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아는 것처럼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늘도 이런 내가 불쌍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인지.. 아버지의 먼 친척이라는 분이 보호소에 있는 나를 거둬주셔
서 나름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진 않았다.
복수를 다짐한 그날이후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해선 굳이 따로 말하지 않겠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매달리며 살았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하고 공부하며 어떻게 해야 가장 이상적인 복수를 성공할지 그리며 지내온 시
간들이다.
안정된 외국계회사에서 일하며 각종 사교 모임과 봉사활동에 열중하는 나는 누가 보아도 부러운 사회인이다. 그 동안 어떻게 해야
완벽한 모습에 완벽한 복수를 할까만 생각하던 나는 이제 법학, 의학, 범죄학, 심리학 그 어느 방면도 철저히 꿰찬 완벽한 복수자
일 뿐.
그런데 감정을 지닌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죽어갈 당신을 봐야하는
데 실수하면 안 되니까.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움을 찾아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복수는 당신
이 버린 자식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이미 내가 결정해 놓았거든.
"사...살ㄹ..ㅕ 주세..요..흐윽..."
밝지 않은 지하실.
팔과 다리가 묶여 열십자로 누워있는 20대 후반쯤의 여자가 잔뜩 땀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떨고 있다.
"저기 있잖아 내가 뭐 좀 부탁할게 있는데 들어줄래?"
건조한 목소리가 감흥 없는 얼굴 표정을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다 들어드릴..께...요... 제발 살려..만...주세요"
"에이.. 뭐야 다 들어준다면서 살려만 달라고?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 안 들어 아가씨?"
"왜 이러세요……. 흑흑.. 돈도 드리고 신고도 안 할 테니 살려주세요 제발..."
훗..
"내가 너의 눈을 안가렸다는건... 살려준다는 의미일까? 아님 죽여 버린다는 의미일까??"
"흐으윽윽... 신고안할께요 절대.. 제발요 제발..."
"그럼... 네가 꼭 살아야할 이유 열 가지만 대봐"
"네...네??... 그.... 그러니까.."
"말 못하네? 그럼 됐어"
입에 재갈을 물린 후
"그럼 내가 네가 죽어야할 가장 확실한 이유를 말해줄게... 넌 우리 엄마를 닮았거든"
씨익-
검어지는 눈동자에 입 꼬리만 올라가는 미소를 보인 뒤 나는 따듯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부탁할건 말이지..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연습해야 되는데 영광스럽게도 네가 첫 번째야... 처음이라 서툴러도 이해해달라구"
여자가 묶인 베드 옆 작은 책상위에 삼각플라스크의 마개를 열고 바로 옆에 사무용 커터 칼을 올렸다.
"처음이라 약한 것부터 해볼까해"
"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악!!!!!!!!!!!"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있는 힘껏 그었다. 동맥이란 놈은 생각보다 깊숙이 있으므로 그은 곳을 한 번 더 그었다.
찌릿
얼굴에 피가 튀었다.
진득하니 따스한 온기를 가진 액체가 흐른다.
여자는 미칠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기운을 빼면 남은 실험은 결과가 명확하지 않을 것 같아 짜증이 솟는다.
대충 얼굴에 튄 피를 닦고 마스크를 쓴 뒤 환풍기를 돌렸다.
"아가씨 이번 거는 냄새가 좀 날거야 지금 내손에 있는 게 염산이거든"
치이---익
"아악ㄱㄱㄱ아악아ㅏㅏㅏㅏ으윽...악!!!!"
이런.. 고작 하체 쪽에 염산 조금 부었을 뿐인데 기절하고 말았다.
그래 동맥을 긋는 것보다 염산이 좀 더 아픈가보구나.
"아.. 귀 아파"
목청 좋은 이 아가씨가 내지른 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다음부턴 재갈을 좀더 단단히 물려야겠군'
오늘은 그만해야겠다.
책상위에 있던 커터 칼로 여자의 목을 그은 후 빼낼 수 있는 최대한의 피를 빼내고 태워버렸다.
처음이라 그런지 여자를 태우고 있는 불빛 앞에 앉아있자니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노곤하다.
"누....구...세요?"
오늘은 나이가 조금 있는 여자다. 30대 후반쯤. 이 연습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눈을 가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지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안녕? 아줌마??"
"사..살려주세요!! 원하는 건 다 해드릴 테니... 제바..알...흑"
"아... 뭐야 다들 짰어? 어쩜 하나같이 다 그말부터해?? 그 멘트도 너무 자주 들으니 질린다.. 뭔가 색다른 멘트는 없는 거야?"
오들오들 떠는 몸, 살려달라는 진부한 멘트들. 식상함에 고개를 한번 젖힌 뒤
"정말.... 살려줘?"
진지함이 묻어나는 나의 물음에 여자는 다급하게 대답한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시면 뭐든 다 할게요 흐그윽윽.. 제 아들이 있어요!! 제 자식들 때문에라도 집에 가야해요 흑흑흐윽"
띵-
순간 머리가 울렸다. 잠시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사십여 평생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편히 자랐을 그 자식들을 생각하니 그렇
지 못했던 나의 유년시절이 오버랩 되면서 재수가 없어졌다. 씨발.
"그래 마지막 멘트는 좀 신선했다. 살려줄게. 대신 네가 살아있다면"
그녀의 안대를 풀었다.
심하게 요동치는 눈동자.
"네가 나를 본 이상 몽타주와 대면 할 수 없게 눈이 없어야겠지?"
그녀의 눈을 지졌다. 아.. 타는 냄새에 속이 좀 울렁거린다.
지하실이 떠나가라 지르는 비명
"무엇보다 사건 진술을 못하게 하려면 혀정도는 잘라줘야지?"
갑자기 조용해진 지하실 안.
"뭐야 아줌마... 벌써 기절하면 시시한데"
'아직 귀도 남았고 진술할 수 없이 손가락도 잘라야 하는데 말이야'
또옥.. 똑
뚝...... 똑..
마지막 열 개째 손가락 마디를 자르자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흐른다.
"다했다~.. 죽었어? 살아있음 정말 살려줄 건데 말이야"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에 앞에 누운 여자는 대답이 없다. 그나마 들리던 숨결이 잦아든 지도 이미 오래.
"난.... 살려준 거다.. 당신이 죽은 거지.."
며칠이 흘렀다.
꽤나 더웠던 나날이었다.
늦여름이 기승을 부리는 탓에 연습을 쉰 것도 한 달.
뉴스에선 연일 부녀자 연쇄 실종에 대해 떠든다. 가끔 보면 내가 한 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끼어있는 사건이 두어 건 있는데 뭐
흥미는 없다. 내가 자수하지 않는 한 잡히는 일 따윈 없을 테니까.
날씨가 좀 선선해졌다.
빨리 연습도 마무리를 하고 복수도....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데려온 여자는 나이가 가늠하기 힘들다. 젊어 보이기도 하고 늙어 보이기도 하고... 물론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절한 여자를 베드에 묶기 전 자동차 시동을 끄지 않고 온 것이 생각났다.
아, 젠장.
짜증을 넘기며 여자를 내려다봤다. 뭐.. 금방 깨겠어? 라는 생각과 함께 깨봤자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차시
동을 끄러 밖으로 나갔다.
제법 서늘해짐이 느껴지는 초가을의 밤공기를 마시고 돌아오니 정신이 더 또렷해진 기분이다.
철컥-
파악... 윽..
잠긴 문이 열리자마자 어떻게 풀었는지 그 여자가 나를 밀치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잠시 당황은 했지만 이내 쇠문 가까이에 있던 목(木)망치를 들고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로 따라 나갔다. 뜀박질을 할 필요
따윈 없다. 저 모퉁이 맞은편이 막다른 길임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랄까.
꽤나 묵직한 목망치를 끌며 다다른 길 끝.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싹싹 빌고 있는 꼴이라니... 머리채정도 잡아끌고 가도 되겠
으나 괜히 악지르고 발버둥 칠게 귀찮아
퍼억-
목망치 한방에 추욱 늘어진 여자를 들쳐 업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으..음....."
"이제 정신이 드나봐?"
기다리느라 꽤나 지치고 허기가져 먹고 있던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털어 넣으며 물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흐윽윽ㄱ"
"입에 발린 말은 됐고... 내가 데려온 여자들 중에 유일하게 도망을 친 사람이 너란 거 알아? 그에 합당한 대우를 좀 해줬음 하는데
어때?"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살고 싶어서.... 제발 살려주세요? 네??"
"왜 그렇게 살고 싶은데?"
"살고싶은게 당연하죠!! 그런 당신은 왜 나를 죽이고 싶은 거죠? 당신이 나를 죽일 권리가 있냐고요!! 흑윽.."
꽤나 당돌한 년이다.
두려움과 함께 다른 감정이 서린 눈이 보인다.
"내가 너를 죽이고 싶은 이유를 말하면 네가 알아? 그래 말해주지.. 연습이야. 일종에 연습게임"
"이러지 말아요!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제발 흐읍흑.. 외로워서 그렇죠? 아픔이 있는 거죠? 제가 다 들어드릴께요! 제가... 같이
해결 해봐요 네???"
아... 오지랖이 되게.... 넓은 년이네.
솔직히 말해서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긴 했다.
하지만
"다 들어줘? 같이 해결해??...... 지금이야 천사처럼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듯 하지만 내가 널 풀어주고 뒤돌아서면 내 등에 칼을 꽂
을걸. 아니라곤 하지마"
살짝 웃었다.
이 웃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당신도 힘들잖아요! 이렇게 하고있는거 너무 힘들고 싫잖아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나중에 이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요!!! ㅎ
흐윽"
입에 재갈을 물렸다.
"내 죄까지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괜찮아. 나중에 지옥 불에 떨어져도 내가 떨어져.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정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의 책임을... 내가 지기 때문이야............. 넌 아무래도 특별대우를 해줘야 겠다"
드럼통을 가져와 석유를 붓고 통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에 순위가 있어"
베시시 웃으며 바라보는 나의 얼굴을 애써 피하는 여자가 안쓰럽다.
"1위가 뭐냐면.. 작열통이라고. 들어봤어? 몸이 불에 탈 때의 고통이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놀란 토끼눈을 해서 나를 쳐다보는 여자
"그냥.. 이건 좀 하기 그래서 생각만하고 시도 못해봤는데 너한테는 해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으음음음 윽ㄱㄱ음ㅁ으"
뭐라고 자꾸 들썩거리는 입
"훗.. 아가씨야 이제 그만 마음 편히 먹지 그래. 어차피 죽는 거 내가 조금 앞당겨 주는 건데 너무 억울해 하면 내가 민망하잖아"
발버둥치는 그녀를 통에 넣고 바라보았다.
여전히 살려고 기를 쓰는 그녀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해주었다.
"네가 아까 열린 문으로 나를 밀치고 도망갔을 때... 내가 왜 너를 잡으려 뛰지 않았는지 알아?.... 네가 달려 나간 길의 마지막을 알
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난 느긋할 수 있었지... 너도 너의 마지막이 보일 텐데.. 좀 더 느긋이 받아들이는 건 힘든가봐?"
마지막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불씨 붙은 성냥개비를 통안에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과 익숙한 타는 냄새
그리고 나는 그 날 작열 통이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이 맞음을 보았다. 비록 빨리 끝났지만.
'바스락'
단말마의 비명들을 내지르는 낙엽들이 깔린 거리를 걸으며 이제 슬슬 마지막 연습을 해야 될 때임이 느껴졌다.
그녀와 체격도 나이도 생김새도 비슷한 여자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다.
작열 통은 고통은 심하나 너무 빨리 끝난다는 단점이 있고, 칼로 몇 번 긋는 것도 크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연
습을 끝내면서 내가 느낀 건 어느 방법으로 작업을 해도 닥친 사람에겐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 된다는 것.
그래서 그냥 그때 그 상황에 떠오르는 걸로 하려고 한다. 어차피 이제 사람 목숨 하나 죽이는 것은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단련이 됐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에 붙은 청테이프를 오물거린다.
"저기요 지금부터 내말 잘 들으세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를 참인데 말입니다 당신은 정확히 24년 전 나
를 버린 엄마가 되는 거예요 이유는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낳자마자 핏덩이인 아들을 버리고 5년이
넘게 사랑한 애인도 버립니다. 그 남자는 결국 아들에게 우릴 버린 그 여자에게 복수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며 자살을 하고 온
갖 고생을 하며 자란 아들이 어느 날 당신에게 전화를 해요. 근데 당신은 잃어버린 아들이 있는 상황이야. 힘들게 목소리를 낸 나
에게 당신은 다짜고짜 버린 아들 따윈 없다. 잃어버린 아들만 있다.... 라고 하죠. 존재를 부정당한 아들은 그간의 설움을 덧보태
복수로 갚으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치익-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하악하아악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여자가 말한다.
"오해가.. 있을 거예요... 분명 오해가..."
"오...해......?"
"세상에 어느 애미든 자기 자식 사랑하지 않는 어미는 없어요!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그 통화 말고는 또 다른 얘기는 안
해봤어요?"
아...
"첫 통화에서 이미 없는 아들이 됐는데... 오해는 뭐고.. 사랑은 무슨...."
투욱-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떨어졌다.
10여년 모질게 참아와 이젠 없어진 줄 알았던 그 눈물이
"복수는 복수를 나을 뿐이에요.. 부디 용서하고 이해해 응? 그리고 대화하면서 풀어!! 부모자식간은 천륜인데 못 풀게 뭐가 있겠어
요... 안 그래??"
"용..서하고... 이해....하라고?"
눈빛이 검어짐을 느낀다.
"친어머니 되시는 분도 지금쯤 자네를 많이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이러지 말고 어서 응?"
처억
다시 테이프로 입을 막았다.
"용서.. 이해.... 당신 십년이 넘도록 맞으면서 살아봤어? 이렇게 맞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매일 매일 지옥 같던 시간
들...... 당신이 겪어봤냐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어때? 알 수 있겠어??? 그런 기분 당신이 뭘 안다고
지껄여!!!!!!!!!!!!!!!!"
후우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음을 진정 시켰다.
"다 필요 없고..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당신이 내 엄마라 치자 이거야. 마지막으로 한마디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떤 말을 하겠는지
말해봐"
다시 테이프를 떼었다.
한참을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는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미친 듯이 찔렀다. 온 몸은 피범벅이 됐고 바닥은 흘러넘친 피들로 흥건하다. 더운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댔다. 흔들
리는 마음과 눈동자를 바로잡기 위해서 아니 감추기 위해서 정말이지 미친 듯이 찌른 그 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내 눈앞에 있
다.
기껏해야 살려달라는 말이나 지껄일 줄 알았던 여자는 나에게... 나에게......
난생처음 따뜻한 음성으로 들은 사랑한다는 말... 내 아들이라는 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무릎 꿇고 앉아 매달려 엉엉 울면서 보고 싶었다고 왜 이제야 그 말을 해주느냐고 따지며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이런 상상은 해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진짜 복수를 하는 그 날엔 절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
조용한 올드팝 벨이 울리는 핸드폰을 받자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가계셨던 할머니께서(아버지의 먼 친척뻘이라는, 나를 거둬준) 한
달 이내에 입국하신다고 하신다. 그래. 한 달 안에 모든 걸 끝내야 겠다.
그리고
결국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날이 왔다.
오랜 기다림의 마지막이 될 오늘
나도 모르게 뒤척이며 설친 잠 때문에 두 눈이 꽤나 뻑뻑하다. 복잡스런 내 마음과 기분과는 상관없이 싸늘한 겨울 날씨치곤 꽤나
낭만적인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이다.
모든 준비는 철저하다.
10여년이 넘게 준비한 오늘이다. 실수 따윈 있을 수 없다.
좀 더 단단한 마음을 먹기 위해 내 지난날을 뒤돌아보았다.
"푸흡.."
웃음이 났다.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생활패턴을 조사한 결과 그녀는 분명 오늘 6시 30분쯤 혼자서 성경책을 들고 집을 나와 걸어서 10분 거리의 교회에 수요예
배를 보러갈것이다. 내가 그녀를 모실 지점은 그녀가 집을 나와 걸어 4분후쯤 돌게 되는 모퉁이 구석자리. 방범 카메라의 눈을 피
하면서 인적이 드문 곳이다.
4시. 설레는 듯 두려운 미묘한 감정을 안고 집에서 출발했다.
6시가 채 되기 전 도착한 골목길. 지금 부터는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10년이 넘게도 기다렸는데 고작 30여분이야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
생각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입술이 마르고 눌러 쓴 캡모자를 수도 없이 고쳐 쓴다.
20분이 넘자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안되는 게... 있는가보다.
겨울이란 계절 덕에 해는 빨리 저물었고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여유롭고 느릿한 발자국 소리와는 정반
대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마른침을 한번 삼켜본다. 치사량이 되지 않을 만큼의 흡입마취제를 뿌린 손수건을 다시 한 번 움켜
쥔 뒤
'그래, 지금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흐른다.
산장으로 달리고 있는 차안. 뒷좌석에는 손발이 묶인 그 사람이 잠들어 있다.
자꾸만 백미러로 시선이 간다. 무덤덤히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란 그간의 예상이 참 가엾게도 빗나가는 시간들이다. 빨리 끝내고 싶다. 빨리.
속력을 내 도착한 산장.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베드에 누워있는 그녀
입과 눈 모두를 가린 그녀는 아직 깨지 않았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감정을 누르기위해 위스키를 한잔 들이켰다.
나를 버렸음에도 꼴에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일렁이는 심장이 불쌍하고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가엾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편지와 나를 부정하던 그 전화통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으음'
뒤척인다.
"일어나셨어요?"
우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대화
정신이 완전히 든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몸부림친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잠잠해지는 그녀
"편지를 하나 읽어드릴께요"
다시 시작된 몸부림
나는 천천히 아주 또박또박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절반이상 읽자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얼어 붙은 것처럼.
편지를 다 읽고 살짝 웃었다.
이제 당신도 내가 누군지 그리고 앞으로 당신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되겠지
"내가 누군지... 알겠지?"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긍정하는 그녀
"그럼 앞으로 당신이 어떻게 될지도... 알지?"
갑자기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다시 몸부림친다.
"죽기는 싫은가봐? 아무튼 나를 안다고 해줘서 고마워 저번엔 모른다고 했잖아"
계속 몸부림치는 그녀
"그만!!!!!!!!!"
안대를 풀었다.
"그만해!!! 억울해?? 억울하냐고??!!!!!! 억울할 것 없어! 사는 게 살아가는 게!! 죽는 거보다 고통이었던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삶에 미련을 남길 자격이 없다고"
잠시 동안의 정적
"원래는 안대도 풀어주지않고 보지도 말하지도 못 하게하며 그냥 내 할 말만 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버린 자
식 이렇게 컸다... 죽지 않고 잘 커서 이렇게 눈앞에 서있다는거 보여주고 싶어서 풀어준거야. 그럼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죄책감
갖고 힘들것같아서말이야. 당신이 버린 자식 얼굴 기억하라고. 살아서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쉴 새 없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웅얼웅얼
뭔가를 계속 말하려 입을 움직이고 얼굴표정이며 온몸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
"말하고 싶어? 근데 어쩌지... 난 들을 말이 없는데.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14년 전 내가 당신한테 처음 전화했을 때 그때 이미 들
었거든. 솔직히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닌데 그게 답이 됐지 뭐야.. 내가 짊어진 모든 문제에"
갑자기 눈물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는 여자다.
"기억도 안 나지?... 혹시 잃어버린 아들이 둘이냐는 내 질문에 그게 무슨소리냐며 당신은 당신 아들이라고는 환이라는 자식 한명
밖에 없다고 누구냐고 했었지.. 그래서 내가 버린 아들은 없냐고 하니까 잃어버린 내 아들 환이는 있어도 버린 자식 같은 건 없다
고 했잖아... 이제 기억나?"
다시 한 번 커지는 두 눈.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더욱 거세게 몸부림치는 그녀다.
"조용히 하지? 아무리 몸부림쳐도 절대 입에 붙인 테이프는 안떼줄꺼야.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데 역겨운 당신 세치 혀에 놀아나고
싶은 생각 전혀 없거든. 그리고 모든 건 이미 정해졌어. 아무리 당신이 애원하고 매달려도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결말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고"
잠시 잠잠해지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녀다.
나는 그녀 눈앞에 놓인 수많은 살인도구들에 손길을 준다.
차가운 은빛메스의 감촉이 오늘따라 더 차다.
도구들을 한 개씩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이 자리에 모셔와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도록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알아? 그 노력을 안다면
아마 표창이라도 하나 받아야 할 거야"
"뉴스에서 수없이 떠든 그 연쇄 살인마가 나거든. 그리고 죽은 여자들은 모두 당신 대타 그러니까 오늘을 위한 연습용이었어. 어때
좀 멋있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 그녀의 눈빛이 공허해졌다.
더 이상의 몸부림도 웅얼거림도 없어졌다. 그저 힘없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마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재빨리 시선을 테이블 쪽으로 떨구었다.
진정 되었던 심장박동이 다시 조금 빨라짐을 느꼈고 얼굴이 화끈거렸으며 몸이 더웠다.
"어떤 걸로 보내줄까?"
빨리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에 도구들을 뒤적였다.
"#$%^@"
등 뒤로 그녀의 낮은 웅얼거림이 들렸다.
뻔하다. 살려달라는 거겠지.
"훗.. 생각해보니 잃어버린 자식 찾지도 못하고 버린 자식한테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꽤나 환타스틱할꺼야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
겠지만 정신적 고통도 만만치 않지? 다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니 너무 원통해하진마"
대답이 없다. 체념한 건가? 아무래도 좋다.
음... 막상 도구를 정하자니 갈등이 생긴다. 이건이래서 저건 저래서.. 좀 더 화려한 마지막을 장식하려니 선뜻 손에 잡히는 도구가
없다. 고민하던 차에 처음 손이 갔었던 그리고 가장 무난한 메스가 손에 들렸다. 선택하고 보니 은색의 무미건조한 색과 느낌이 매
력적이다.
!!!!!!!!!!!!!!!
도구를 선택하고 뒤돌아선 난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며시 내려감은 두 눈과 움직임 없는 몸.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에 서둘러 그녀의 맥을 짚었다.
젠장, 역시나 뛰지 않는다.
혼란스러움과 당황스러움에 서둘러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었다.
주륵-
테이프를 떼자마자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입을 벌리자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온다.
독한 년. 진짜 독한 년...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허탈감과 상실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정말이지 독한 사람이다. 곧 죽어도 내 손에는 죽기 싫었던 건가?
복수 할 기회조차 앗아간 그 녀의 선택이 치가 떨릴 만큼 무섭고 잔인하고 아쉬웠다.
손에 들려있던 메스를 벽에 던져버렸다.
10여년을 벼르던 복수가 이렇게 허무하고 허망하게 끝나버릴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쳐 계산에 넣지 못한 상황이다.
여태까지 내가 연습해온 상황들도 그랬고 모두가 살려고 아등바등 이었지 스스로 먼저 죽음을 택한 이가 없었기에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살이라는 극단의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차라리 입안에 가득 솜뭉치나 재갈을 물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미친 듯이
밀려왔으나 이미 그녀는 숨을 거둔 뒤다.
죽어있는 그녀의 몸에 칼로 난도질이라도 해 분을 풀까도 생각해봤으나 내가 끝내지 못한 상실감과 뭔지 모를 허전함에 덧붙여 나
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는 자기합리화를 더해 그냥 끝내기로 했다.
특별히 아주 특별히 산장 뒤뜰 구석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전과 같이 불에 태워 재를 만들까도 잠시 생각했었지만 그럼 영영 사
라지게 되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뭔가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것이 마음에 걸렸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의 늦은 밤
달도 구름에 가려 별빛만이 비춰주던 그 쓸쓸한 밤에 그렇게 나의 복수는 끝이 났다.
산장으로 들어와 일단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앉는 품이 깊은 안락의자에 몸을 양껏 기대고 위스키를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따뜻한 불의 온기와 만난 술기운이 강하게 올라온다.
일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14년간 품어온 긴장.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주신 과제라 생각했던 복수.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과 술이 만나자 곧 깊은 잠으로 이
어졌다.
'으윽'
지난밤 과하게 마신 위스키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느 덧 해는 중천에 떠있고 고요한 정적에 쌓인 나는 순간 멍- 해지는 정신을 잡으려 머리를 저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푹 잔 느낌이다.
숙취로 인해 머리가 아픈 것만 뺀다면 태어나 처음 백점짜리 아침을 맞이한 건데 말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음물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목젖이 얼어버린듯한 느낌과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더 띵해졌다.
왜이리 자꾸 정신이 멍- 해지는지 이상하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어차피 휴가에 연차월차를 모두 끌어 모아 한 달은 쉴 수 있으므로 나에게 이제 급한 것은 없다.
자꾸 힘이 빠지고 멍해지는 정신이 야속하지만 24년을 한(悍)과 복수로 버티며 살아온 나에게 어제와 오늘은 영광스런 날임에 분
명하나 그 영광을 이룬 만큼의 상실감이 엄청나다.
두 눈을 몇 번 끔뻑이던 나는 다시금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애써 부정하며 보일러를 양껏 올리고 침실로 들어가 모든 커튼을 치
고 핸드폰을 끈 채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한 이틀 그랬던 것 같다.
눈뜨면 다시 자고 정신이 들 만하면 다시 자고... 잠을 자는 것이 편했다.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꿈속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
었으니까.
내가 다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시각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
새벽은 언제나처럼 너무 무겁다.
무거운 시간이다.
복수를 인생의 목표처럼 살아온 나에게 그것이 이뤄지고 난 다음은 그리 중요치 않았었다. 복수의, 복수에 의한, 복수를 위한 삶을
살아온 나는 그 복수가 이뤄지고 난후 나에게 찾아온 진정한 자유 시간. 이제부터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남은 시간이 굉장히 낯설
게 느껴져 오히려 버겁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미치도록 갈망하고 원하던 것이 이뤄졌다는 성취감과 기쁨보다 이제는 목숨 걸고 할 것이 없다는 상실감과 허탈감이 무섭게 짓누
른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나만의 시간을 계획해야 되는 것이다. 다른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말이다. 감히 말
하지만 앞으로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더 많은 나를 위해 이제 나는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몇 통 와있었는데 모두 할머니였다.
내용인 즉슨 다음 주면 일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다는 뭐 그런.. 그래 이제 할머니와 단 둘이 부모님이라는 이름에 하지 못한 효
도하면서 남은 인생 즐기며 행복하게 살면 된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리라. 나를 이렇게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
퀴에 던져 넣은 하나님조차도.
스스로에게 불행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대갚음한 복수에 있어서 나는 죄가 없다는 면죄부를 날조해 스스
로에게 위안을 삼고 있다. 변명할 거리는 많았다.
이것은 아버지가 부탁한 복수다. 유언을 따랐을 뿐이며 내가 수없이 눈물로 지샌 한스런 세월에 대한 일종의 리액션이라고.
그래 됐다. 이제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하자.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도 된다. 나니까. 지금까지 제대로 내 인생 살아본 적 없는 그래 불쌍하고 가여운 나. 김남길이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할머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여행을 떠났다. 파란 바다도 보고, 넓게 펼쳐진 지평
선도 보고, 등산도 하면서 최대한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들을 찾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아버지를 뿌린 수문강변.
차를 몰고 오면서도 매서운 바람이 느껴졌는데 막상 강변에 서니 모든 것이 고요하다. 잠깐잠깐 지나가는 바람들조차도 왠지 부드
럽게 느껴지는 건 기분탓이겠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이곳에서 아버지를 뿌리면서 참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난다. 가끔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면 찾아와 한없이 목 놓아 울기도 했던 그때의 기억. 복수를 결심했던 그날 이 강변에 똑바로 서서 복수를 성공하
지 못하면 다신 오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렇게 십년이 지나 찾아온 이곳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세월이 빗겨간것
처럼.
"아버지..."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이름. 괜히 울컥 눈물이 맺힌다.
"복수.... 했어요...... 아버지 복수... 그리고 제 복수.... 해버렸다구요..... 저.. 잘한거 맞죠?"
칭찬듣고 싶어요 아버지. 잘했다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고. 이젠 괜찮다고...
아버지가 계신 수문강을 떠나 서울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를 맞을 준비를 했다. 참 고마우신 분이다. 태어나 처음
으로 나의 손을 가장 따듯하게 잡아주신 분... 보고 싶다.
여행을 통해서 많이 비우고 또 많이 채워온 나는 이제 조금은 세상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턴 나도 행복해 지리라.
'띵동'
"할머니~!!!"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그대로셨다. 따뜻한 손길, 미소 그리고 체취까지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가슴깊이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남길이 잘 지내고 있었어? 내 새끼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할머니 짐 푸는걸 도와드리고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같이 먹었다.
혼자서 외로이 밥 먹는 것이 아무리 익숙하다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을 밥을 먹으니 너무 행복했다. 밥 먹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 나를 보시며 할머니께서는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로 보이지 않는 대답을 해주신다.
마음이 따듯해짐이 느껴진다.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와인을 준비하는 나...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말씀드리는 건 아무래도 연로하신 할머니께 큰 충격이 되실 테니 그냥 아버지의 유서나 마찬가지인 편지만 보여드리고 이젠 과거의 일이니 묻어버리고 열심히 살겠다는 말만 전하려던 참이다.
"할머니.. 실은..... 드릴말씀이 있어요.."
어렵게 말문을 연 나는 일단 와인 잔에 담긴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고 숨을 골랐다.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무덤덤한 듯 아버지의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무어냐?"
눈을 찡그리시며 봉투에 초점을 모으시는 할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저한테 남기신 편지예요... 유서같은거.."
잠시 놀란 시선으로 나를 보시던 할머니께서는 이내 그 시선을 거두시며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셨다.
점점 떨리는 손에 의해 위태롭게 흔들거리던 편지지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마...... 복수를... 한 것이냐?"
심하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아뇨. 솔직히 복수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래도 저를 낳아주신 분이시잖아요... 그냥 용서하고 마음 편하게 할머니랑 오래오래
살려고요"
라고 말하며 살며시 웃는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구나..... 남길아... 해줄 말이 있다...."
갑자기 심각해지신 할머니
진실을 말씀드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다시 한 번 여겨졌다.
"이 이야길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구나... 나도 그간 많이 생각했단다. 평생 묻어둘건지 아님... 밝히더라도 내가 죽을 때
쯤.. 그러니까 최대한 늦게 말해줘야될지 말이다..."
무슨 이야기 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거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진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무슨 말씀이신데 그러세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할머니께서는 무겁게 입을 여셨다.
"이야기를 하나 해줄 테니 잘 들어라... 오래전 한 남자아이를 둔 어미가 있었다. 아이는 꽤나 착하고 어미에게 순종하며 잘 자랐
지.... 그런 아이가 다 큰 성인이 된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더니 변하더구나. 정말이지 무서운 집착이었다. 미친것
같았지... 아니 그 여자에게 미쳤었어. 하지만 그 여자도 내 아들의 과도한 애정과 집착이 부담이 됐던지 아들의 감정을 모질게 내
쳤지.... 결국 그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자 아들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단다. 1년이 넘도
록 우울증에 술과 약에 빠져살던 아들은 어느 날 두 돌이 채 넘지 않은 아이를 한명 데리고 왔더랬다. 그 어미는 직감으로 그 아기
가 아들이 사랑했던 여자의 아이임을 알았단다. 당장 돌려보내주라고 울며 매달렸지만 아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분신이라
도 옆에 없으면 정말이지 죽어버릴것 같다며 만약 엄마가 아이를 데려다 주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며 어미를 말렸단다. 1년
동안 아들이 폐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아온 어미로서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았고 무엇보다 아들이 자기가 사랑했던 사
람의 분신을 옆에 둠으로써 마음에 안정이 생겨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단다. 물론 아이를 데려다 줬을 때 아들이 죽어버릴
까봐 걱정이 된 것도 있고 목숨처럼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에 감정을 매몰차게 거절한 그 여자에게 미안함보다 원망이 더 큰 마음
으로 죄인 줄 알면서도 덮기로 했단다. 그렇게 아이는 커갔고 나아질 줄 알았던 아들은 오히려 애증섞인 복잡한 감정에 술을 끊지
못하고 계속 같은 나날을 보내며 자신의 아들로 삼은 아이를 괴롭히며 술의 힘으로 지냈단다"
울컥
갑자기 심장이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기분이다.
그래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이야기 같다.
"할머니 그만요... 안 들을래요 됐어요"
서둘러 할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남길아 들어야해! 지금이 너에게 이 말을 해줄 때인 것 같다. 결국 그렇게 힘들게 지내는 아들 보기가 제살을 도려내듯 안쓰
러웠던 어미는 결국 일을 핑계로 멀리 떠나버렸고 어느 날 아들에게서 편지가 온 거야.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도저히 못살겠다
고... 그 여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만약 복수가 성공하지 못하면 도와달라며 그 어린 아이를 부탁하
더구나. 마지막까지 편히 가지 못한 아들이 불쌍했지만 그 아이에게 그런 짐을 지워줄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 짐을 싸서 돌아왔고
처음엔 아이를 후원만 해주었으나 자기 아들에 계획을 아는 어미는 언제라도 그 아이가 어떤 일을 어떻게 벌일지 몰라 전전긍긍하
며 자기가 데리고 살기로 한단다. 일종의 감시이면서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한 속죄라고나 할까... 그런 아이가 잘 커주
었고 하늘이 도우셨는지 아이는 용서를 배웠구나.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친부모님을 찾아간다면 내가 도와주마"
온몸에 감각이 모두 치솟은 느낌이다.
지금 내가 들은 이 삼류 쓰레기 같은 소설 이야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지금. 그 어미는 할머니 당신이고 아들은 내 아버지고 내가.... 그 아이란 거야? 그럼 내 친부모이름이 김해숙, 이정길......
이겠네?"
"친부모를 알고있었던거니????"
그렇게 놀란 듯이 묻지 마... 10년이 넘도록 가슴에 품고 어떻게 복수하고 어떻게 죽일까만 연구한 사람들이거든.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지
"그럼 아버지가 나한테 남긴 이 유서내용은 다 거짓말인거네? 할머니도 내 할머니가 아니고 아버지도 내 아버지가 아닌 거잖
아!!!!!!!!!!!!!!!!!!!!!!!!!"
덤덤히 옛일을 말씀하시던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아니 이젠 그녀
"미안하다 남길아! 진작 너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제자리에 돌려보내줬어야 하는데.... 흑흑.."
"미안.... 하다고??"
"그래, 나도 미안한 게 하나 있는데 나도 진실을 하나 말하자면 용서를 배우지 못했어. 하늘이 도우셨다고? 아니. 하늘은 돕지 않았
어. 조금만... 조금만 일찍... 말해주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보며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핸드폰이 울린다. 배터리를 분리해 아무 곳에나 던져버렸다.
아무생각없이 차를 몰아 수문강으로 향했다. 그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사방이 어두운 강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서자 오랜만에 느끼는 새벽 내음이 짙게 들어온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메아리가 강줄기를 휘감아 돈다.
"아아흐흑으윽극아학....."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이 눈물을 마구 밀어낸다.
주체할 수 없다는 표현을 그래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한참을 울고나니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다.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훗... 아하하하
아버지라는 세글자에 웃음이 난다. 그래 이제 아버지가 아니지
"미친 새끼.......... 당신 정말 미친놈이야!!!! 우리 부모님 인생!! 내 인생 그리고 당신 인생까지... 모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그래야했냐고!!!!! 어떻게 이래... 나한테 어떻게... 어떻게!!!!! 난... 그저 당신이 계획한 복수에 도구일 뿐이였던거네... 너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 안 들어? 당신 복수 성공했으니 저승에서라도 속이 시원하냐고!!!!!!"
"그래 이제 어떡해야되? 그 똑똑한 머리로 계획한 복수극 끝나고 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거냐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낳은 나까
지 괴로워하며 끝나는 게 당신 복수에 끝인거야?"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했던 모든 구박이 증오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계획이었어? 당신의 자살, 유서까지.. 그래?? 자신이
낳은 자식... 잃어버린 줄 알고 있던 자식한테 죽임을 당하게 하는.... 그런 잔인한 짓거리가 어디 있냐고!!!!!!!!!!!!!!!!!!!!!!"
"미친놈... 미친.. 놈........."
이십년이 넘게 아버지로 살아온 사람이 한순간에 유괴범에 나와는 다른 남남에 거기다 잔혹한 복수자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상상
을 넘어선 충격 그 이상이었다.
온몸이 망치로 짓이겨진 느낌이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뭉개진 기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다시는 갈일 없다고 생각했던 산장으로 차를 몰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길 반복했지만 떨리는 몸은 잦아들 줄 몰랐고 산장이
가까워올수록 떨림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없는 정신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새 산장에 도착해 있었고 해는 이미 그 얼굴을 하늘높이 띄운 지 오래다.
잠긴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 술장을 열어 손에 잡히는 술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구나 싶어 또 괜스레 눈물이 났다.
거실에 주저앉아 생각을 해보았다. 회피하고 싶어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써 무시하고 눌러놓았던 생
각들을.
허무했다. 24년 살아온 내 인생은 그저 내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 인정 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하고 화
가 났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내 스스로가 가엾고 불쌍해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난다.
스스로에 대한 게슈탈트붕괴 현상은 꽤나 지독한 혼란과 우울을 만들어냈다.
다시 한 번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후 그 날을 회상해보았다.
그 날. 모든 것이 이제 끝이라고만 생각했던 바보 같았던 그날.
순간 문득 어머니가 스스로 자살한 것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내가 그 편지를 모두 읽었을 때 이미 이 모든 것을 알았으리라.
'그럼..... 어머니의 자살은... 혹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직접 어머니를 죽이지 않은 것이니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 받게 해주시려던...... 그럼 그 날 등 뒤에서 들렸던 마지막 웅얼거림은...(순간 마지막 모의고사라고 생각하며 죽였던 여자가 떠
올랐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을 때 그 여자의 대답이 오버랩 된다)'
"아아악!!!!!!!!!!!!!!!!!!!!!!!!!!!!!!!!!!!"
다시금 터져 나온 눈물이 잠잠해지기까지 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몸을 다해 울어 기력이 없다.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정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의 책임을... 내가 지기 때문이야'
그래 책임. 책임을 져야겠다.
지친 몸을 간신히 세워 앉아 편지 아닌 편지를 썼다.
특별히 받는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편지다.
편지의 내용은 그동안의 이야기다.
죄를 덥고 살자니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 뵙자니 염치는 물론이거니와 자신도 없었다. 경찰에 자수를 할
까 생각해 봤으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형벌이 가볍진 않겠지만 내가 원하는 형벌은 죽음뿐이니 자수를 하되 스스로 죗값을 치러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분노하거나 도망치는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그간 버려져 혼자라는 두려움을 이
기기 위해 분노하였고 지금은 내가 한 모든 것들에 이 상황이 두려워 죽음으로 도망치려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내가 죽어
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당연한 듯 생각되어진다.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편지를 끝마쳤다.
다 쓰고 보니 꽤나 장편이 되었다.
그리곤 꺼져있던 핸드폰을 찾아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연쇄살인범의 용의자이자 또 한명의 피해자가 지금 주천 산장에 있으니 와
서 잡아가라고.
뚝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찾았다.
이미 죽어있는 어머니지만 차마 어머니가 있는 뒤뜰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이의 유서봉투를 찾아 들고 용기를 내 뒤뜰로 갔다.
"어...머니.... 엄마!!!!"
그토록 지워내고 잊어내려 했던 단어였건만 언제나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단어가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저왔어요 어머니... 남ㄱ.. 아니 환이가 왔다고요!!!......죄송해요 어머니.... 못난 아들.. 이렇게 돼서 너무 죄송해요 어머니... 흑흑
흑.."
어머니를 묻은 곳 앞에서 그 사람이 남긴 편지를 태웠다.
빨간 불길을 내며 타오르는 편지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지옥 불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도 같다.
이제 정말 자유롭고 싶다. 복수도 그리움도 다 모르고 그냥...그냥.....
세상에 욕심내 바란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저 평범한 가정 그래 가족을 원한 것뿐인데 나에겐 그것이 욕심이었나
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평범함이 아닐까.
이제 지옥이든 천국이든 떠나야 될 때가 된 것 같다.
죽는다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죽어서 만나게 될 어머니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될지가 걱정될 뿐
푸욱, 주윽-
"읍"
왼쪽 복부 깊숙이 칼날을 밀어넣었다.
온몸으로 전파되는 굉장히 날카롭고 짜릿한 이 느낌.
푸학
입에서 더운 피를 뿜으며 내 생에 마지막으로 지는 석양을 마주보며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세상과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다행이다.
붉은 석양이 따듯하다.
복수子
끝.
첫댓글 무섭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