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께 /이해인 수녀로 부터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 던 스님,
시는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그리스도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 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 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 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 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 하시는 물 미역도 많이 드릴 테니까요.
이해인 수녀님께 / 법정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들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 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
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 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 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 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
법정(法頂)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아름다운 편지
종교를 뛰어넘어 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스님 두분.. 암 투병 중에도 늘 자신보다 남을 위해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성과 종교를 초월한 두분의 사랑...
그건 인간에 대한 사랑....조건없는 무한의 사랑이지요.
암과의 싸움에서도 늘 초연하시며 남을 먼저 걱정하시고 계시는스님..
수녀님의 빠른 쾌유 바랍니다.
아직 이승에 생을 접기엔 우리들이 준비가 되어있질 못한 관계로..
이제 곧 꽃들의 향기가 언 들녘을 녹일 텐데 그 들녘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언 마음도 녹였으면 참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무엇보다 수녀님과 스님의 몸 깊숙이 박힌 암(癌) 뿌리조차도 녹아서
마침내 몸속에는 꽃 뿌리만이 가득해서
이 세상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의 꽃과 향기를 나누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희망은 깨어 있네'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