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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관광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해외여행 또는 관광의 경우엔 그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일단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을 벗어났다고 하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닐까?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 고난)’이다. 여행이 고통이나 고난이 아닌 쾌락이나 오락으로 여겨지게 된 건 교통수단이 발달하게 된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예컨대, 1780년만 해도 영국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역마차가 가는 데 4~5일이 걸렸지만, 1880년에 나타난 기차는 그 시간을 5시간으로 줄여 주었다.
비행기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인간은 과거 여기저기 떠도는 유목민(nomad) 시대를 거쳐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이제 21세기를 맞아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외여행은 일상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서구인들의 해외여행은 자본주의 및 세계화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여행은 노동의 피곤에서 벗어나되 노동 의지를 재충전시키는 장치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업자들은 4S(sun, sea, sand, sex)를 제공하기 위한 장소를 세계 도처에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여행 상품을 개발해 냈다. 여기엔 계급적 구별짓기도 가세했다. 특권 계층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들만의 휴양지를 만들었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여행상품엔 다양한 등급이 매겨졌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비평가 수잔 손택은 여행이 무엇인가를 사진에 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노동 윤리가 냉혹한 사람들일수록 사진찍기에 더욱 집착하는데, 그건 그저 일만 몸에 배어버린 사람들은 휴가 중이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여행은 그 어떤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을까? 물론 여행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에 갖게 되는 의문이다.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자면 골프와 ― 특히 성매매특별법 이후 ― 향락을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무슨 목적을 위해 여행을 하건 한국인들의 여행 행태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실적주의’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나 어디 어디 갔다 왔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정신 없이 바쁘게 가능한 한 많은 곳을 구경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쇼핑이다. 『서울신문』 2004년 9월 21일자에 따르면, 어느 관광회사 과장은 “명품 백화점인 영국 헤롯백화점의 하계 세일 기간에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국민은 한국과 일본인밖에 없어요. 심지어 버버리 등의 명품을 싸게 사기 위해 공장까지 찾아가는 관광객은 한국인이 단연 최고입니다. 한마디로 나라 망신이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장까지 찾아가는 관광객은 결코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알뜰 정신’의 발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명품 욕심’과 ‘알뜰 정신’이 어울리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한국의 명품 소비층엔 ‘따라하기’에 목숨 거는 이른바 워너비(wannabe: 추종자)들이 많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행도 그런 ‘명품 정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신동아』 2004년 10월호에 따르면, 명품 잡지 『네이버』 VIP 마케팅 팀장 이기훈은 “여행을 하더라도 부자들은 구별짓기 위해 워너비들도 갈 수 있는 발리보다는 쉽게 가기 어려운 몰디브나 마케도니아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여행은 인간의 독선적 아집을 깬다”는 말은 여행의 장점을 말해 주는 오랜 속설이지만, 전략적인 여행이나 ‘구별짓기’나 ‘따라하기’를 하는 여행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한국인의 독특한 주마간산(走馬看山)격 여행은 혹 낯선 것에 대한 피상적인 편견을 주입시키는 데에 일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그건 사회적 차원의 걱정일 뿐이다. “내가 로마 땅을 밟은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내 삶이 진정으로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한 이 말 이상으로 여행의 위대함을 웅변해 주는 증언이 또 있을까 싶다.
여행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반면, 여행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고미숙이 자신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며 여행에 대해 냉소적이라는 걸 당당하게 밝힌 게 이채롭다. 그가 여행에 대해 냉소적인 이유는 ‘파노라마식 관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노라마란 무엇인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퍼레이드다. 거기에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얼굴과 액션(action)이 지워져 있다. 또, 그때 풍경은 자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생명의 거친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침묵의 소묘’일 따름이다. 이런 구도에선 오직 주체의 나른한 시선만이 특권 지위를 확보한다. 시선이 ‘클로즈 업’되는 순간, 대상은 전적으로 거기에 종속될 뿐. 도시인들이 보는 전원,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서구가 발견한 동양. 사실 이런 건 모두 외부자가 낯선 땅을 ‘흘깃’ 바라보고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허상 아니던가. 그 허상이 막강한 힘을 확보해 한 시대와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면 모두 그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그것을 대상에 위압적으로 덧씌우는 식의 악순환을 얼마나 반복했던지. 내가 아는 한 여행이란 이런 수준을 넘기가 어렵다.”
인도전문가 이옥순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인도’라는 이름의 거울』은 고미숙이 괜한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 준다. 이옥순은 그간 한국에서 출간된 인도 관련 소설과 여행기,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글 등을 분석했다. 그는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구원을 얻기 위해 ‘갑자기’ 인도로 간다”고 말했다. 이옥순은 한국의 필자들이 인도의 요가, 고행, 명상, 정신주의를 예찬하고 심지어 가난까지 예찬하는 이면에 숨어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했다. 즉, 잠시 구경하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갖기 마련인 주마간산격 시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아마도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행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아예 하지 않느냐 하는 걸 가르는 주요 변수는 돈, 시간, 호기심, 부지런함 따위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다른 전략적 이유들이 가세할 것이다.
그 전략적 이유 가운데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직접 경험’의 권위일 것이다. 우선 그 권위는 자기 자신에게 작용한다. 개개인의 ‘보는 눈(seeing eye)’의 입장에서 세계를 생각하는 시각주의(perspectivism) 또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의 원칙에 따라 자신이 본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 확신은 듣는 이에게도 전염된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러네!” 어디 가서 말을 해도 직접 봤다고 하면 속된 말로 ‘말빨’이 선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 같은 곳에서라도 유명한 출연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권위 있는 인물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게다.
사람을 만나건 장소를 구경하건 ‘직접 경험’의 한계와 위험은 분명히 있겠지만, ‘직접 경험’이 아니면 도저히 깨닫기 어려운 걸 알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직접 경험’의 매력과 마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요즘 이른바 ‘체험 마케팅’이 뜨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도 방학만 했다 하면 앞 다투어 해외로 나가는 것일 게다. 그러나 늘 놀자판이라는 게 문제다. 그걸 비판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떼거리’와 ‘국민의 혈세’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기자나 앵커가 보기에도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일 게다. 지방 의원들이 언론으로부터 비판받는 메뉴 가운데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것도 바로 외유(外遊)다.
언론으로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면 아예 그만 두거나 정말로 무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끔 내실 있게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해외여행에 한(恨)이 맺혀 있는 것 같다. 언론도 기자들이 그런 해외여행에 공짜로 따라붙을 경우엔 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 걸 보면 해외여행에 한(恨) 맺힌 사람들의 규모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 어떤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경험’의 장점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정작 놀랍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멀리 있고 우리와 무관한 곳에 대해선 ‘직접 경험’의 기회를 가지려고 애를 쓰지만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에 대해선 ‘직접 경험’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우리의 여행이 교통이라고 하는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여행의 자율성은 교통 시스템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서울에서 전주보다는 서울에서 제주가 더 가깝다. 비행기 때문이다. 영호남 간의 ‘거리’는 영호남에서 서울과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다. 한국의 모든 길은 다 서울로 나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밥그릇을 차지하려고 아웅다웅 싸우는 게 한국형 선거의 본질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는 ‘경로의존’의 종속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은 없거나 매우 드물다. 한비야처럼 희귀하다. 배낭여행에 뛰어든 사람들도 배낭만 맨 관광객이더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다. 어느 나라에 가서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는 외국인들이 있다면 그건 한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인은 개인은 강하지만 집단은 약하다는 말도 괜한 말이다.
물론 탓할 일은 아니다. 이 또한 8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도 해외여행이 엄청난 벼슬처럼 여겨졌던 과거, 높은 해외 의존도, 좁은 땅과 높은 인구 밀도 등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 낸 그 어떤 ‘경로’에 충실한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