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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내용
1902년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1925년 3월 경성의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1929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지리역사과를 졸업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법제경제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귀국 후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12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했다. 1935년 1월부터 이 그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2월 이재유와 함께 수해이재민 형제로 가장해 경기도 양주에 비밀 생활근거지를 마련했다.
1936년 5월 김희성(金熙星) 등의 콤그룹과 통일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적기(赤旗)』를 발간했다. 그해 12월 이재유가 검거되자, 행상(行商)을 가장하고 피신해 다녔다.
1937년 7월 새로 출옥한 동지들과 함께 그룹 재건을 추진했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후 대전 · 대구 등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면서 계속 활동을 모색했다.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여동생 이순금(李順今),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 · 배포했으며, 기관지 출판 책임자로서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1940년 2월 인천에 편집아지트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張順明)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검거되었다가,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이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위폐사건(朝鮮精版社僞幣事件)’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비평사, 1996)
『남로당연구』(김남식, 돌베개, 1984)
『한국공산주의운동사』5 (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조선연감』(조선통신사, 1947·1948)
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659
-. 손옥희님의 글
79년 만에 내려진 이관술 선생의 무죄 판결은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일대 전환점입니다.
그리고 당시 미군정과 CIC(미 육군 방첩대)에 대한 유죄판결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획한 고도의 정치적 공작이었음을 인정하는 일대 사건입니다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 사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제임스 하우스만과 CIC가 어떻게 깊숙이 개입했는지 다음과 같은 정황을 제시합니다.
1. CIC(미 육군 방첩대)의 주도적 역할
당시 미군정 하에서 CIC는 한국 내 좌익 세력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핵심 정보기관이었습니다.
• 증거 조작 및 고문 유도: 커밍스는 CIC가 조선정판사 직원들을 체포한 뒤,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해 "당의 지령을 받아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고 분석합니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도 피고인들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호소했으나, CIC는 이를 철저히 묵인했습니다.
• 정치적 타이밍: 이 사건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5월에 발표되었습니다. CIC는 공산주의 세력을 부도덕한 경제 사범으로 몰아 대중적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고, 남로당(당시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사건을 활용했습니다.
2.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 정황
하우스만은 당시 미군정의 군사 고문이자 한국군 창설의 실무자로서, CIC와 한국 경찰 수뇌부를 잇는 '연결 고리'였습니다.
• 정보의 유통과 조정: 하우스만은 CIC로부터 정판사 사건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았으며, 이를 이승만과 미군정 수뇌부(하지 장군 등)에게 전달하며 대응책을 논의했습니다.
• 사법 절차의 무력화: 하우스만은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은 전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법원이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을 석방하려 할 때마다, 한국 경찰과 CIC를 독려해 압력을 행사하거나 새로운 혐의를 씌우는 등 사법 절차를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배후 역할을 했습니다.
• 이관술 제거의 명분 축적: 하우스만은 이 사건을 통해 이관술을 '위폐범의 수괴'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고, 이는 훗날 한국전쟁 초기 대전 골령골에서 그를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는 강력한 심리적·정치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3. '악의 평범성'과 관료적 공작
하우스만과 CIC 수뇌부에게 이 사건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였습니다.
• 비루한 목표: 그들은 이관술이라는 한 인간의 삶이나 항일 투쟁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미국식 질서에 방해되는 인물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매장할 것인가"라는 관료적 목적 달성에만 충실했습니다.
• 기록의 오염: 하우스만은 훗날 이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공산당의 파렴치한 범죄"로 규정하며 자신의 개입을 '정의 수호'로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무죄 판결은 그가 79년 동안 지켜온 '조작된 정의'가 얼마나 비루한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요약: CIC와 하우스만이 만든 '덫'
1. CIC: 현장에서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해 '위폐 사건'이라는 가상의 각본을 집행함.
2. 하우스만: 이 각본을 정치적·군사적 전략과 연결하여 이승만 정권의 강화와 좌익 제거의 도구로 완성함.
3. 수뇌부: '반공'이라는 거대 명분 아래 이 모든 불법적 공작을 승인하고 묵인함.
이번 무죄 판결은 하우스만과 CIC가 구축한 **'공포와 조작의 역사'**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하우스만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CIC의 기밀 보고서들이 더 많이 공개된다면, 정판사 사건의 더 구체적인 조작 기법들이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관술 선생의 무죄는 곧 하우스만식 '비루한 악'에 대한 역사의 최종 유죄 판결과도 같습니다
'정판사 위폐 사건' 재심 '무죄' 선고..."역사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이종호 기자 / 기사승인 : 2025-12-22 11:12:06
서울중앙지법 "증거 능력 없거나 희박...무죄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독립유공자 서훈하고 역사 교과서 바로 잡아야"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심 무죄 선고 뒤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회원들. 배문석 시민기자 |
[울산저널]이종호 기자= 22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502호 법정에서 열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심'(2023재고합12)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현복)는 사건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대전 골령골에서 사살당한 이관술 선생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재심 대상 판결이 피고인에 대한 유죄 증거로 고시한 증거들 중 주요한 것은 증거 능력이 없고 나머지 증거들은 증거 능력이 희박하다"며 "증거 능력이 없거나 증거 가치가 없는 증거들을 유죄 판단 근거로 고시한 재심 대상 판결문의 존재 및 기재 내용만으로는 피고인에 대해서 유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죄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1주일 전 15일 열린 재심 공판에서 검찰은 "판결문과 현존하는 일부 재판기록, 당시 언론 기사와 연구 서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엄격한 증거 법칙에 따랐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회장 손문호)는 22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정판사위폐사건 무죄 선고를 뜨겁게 환영한다"고 밝혔다.
사업회는 "이번 무죄 선고는 단순히 1946년에 발생한 일개 형사 사건 재판을 바로잡은 판결이 아니다"라며 "해방 직후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 아래 행정, 군대, 경찰, 사법 기구를 총동원해 허구의 범죄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79년 만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끼운 역사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오늘의 무죄 선고 판결은 광복 80년의 역사를 맞는 대한민국이 과거의 국가 폭력과 사법적 과오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라며 "정부는 이관술 선생의 항일투쟁과 희생, 감옥 안에서도 이어진 교육과 공동체를 향한 헌신, 그리고 오늘 사업부가 선고한 무죄의 의미를 엄중히 받아들여 이관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정판사 위폐 사건은 국가 폭력과 사법이 결합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 사례"라며 "이 사건의 진실은 역사 교과서에 온전히 기록돼야 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국가 폭력과 사법의 부역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심을 신청한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손옥희 씨는 "그동안 이데올로기 전쟁의 생채기로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어두고 집안은 물론 영혼까지 풍비박산됐지만 오랜 세월을 말 한 마디 못하고 견디어 살아오신 어머니께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었다"며 "사건 발생 80년이 지나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 엄청 기쁘다"고 소회를 밝혔다.
손옥희 씨는 "없는 죄를 만들어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하고 경제파괴범으로 몰아붙여도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었다"며 "바로 정의를 구하고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단체와 개개인의 노력 덕분"이라고 감사를 전하고 "이번 판결이 미군정 기간에 벌어진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대구 10월항쟁 등 관련된 또 다른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등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
정판사위폐사건 재심(2023재고합12) 최종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 보도자료
2.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회장 손문호)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학암 이관술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7월, 위조지폐 주동자로 누명을 쓴 소위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에 맞춰 공식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관술의 외손녀로 재심을 신청한 손옥희가 선고 결과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자 합니다.
3. 학암 이관술은 울산 범서 입암마을이 고향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한 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 1930년 경성학생독립운동에 나선 제자들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33년 경성반제국주의 동맹사건으로 옥고를 겪었고, 1934년 이후 경성트로이카에서 지도부를 맡았고 1939년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해방 직전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4. 이관술은 고문왕 노덕술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불사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해방 후 첫 정치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에 오를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46년 누명을 뒤집어쓴 후 무기형을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법원은 2015년 이관술이 불법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습니다.
5. 이번 정판사위폐사건 재심(2023재고합12)은 재심의 피고인 이관술 뿐 아니라 항일혁명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지난 12월 15일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고 재심 재판부(제21형사부)가 무죄를 선고해 확정이 된 것과 같습니다.
“역사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정판사위폐사건 무죄 선고를 뜨겁게 환영한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 벅찬 마음으로 환영하며, 오랜 세월 억눌려 왔던 정의가 마침내 역사 앞에 바로 섰음을 온 국민과 함께 선언한다.
이번 무죄 선고는 단순히 1946년에 발생한 일개 형사 사건 재판을 바로잡은 판결이 아니다. 이는 해방 직후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 아래 행정, 군대, 경찰, 사법 기구를 총동원하여 허구의 범죄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79년 만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끼운 역사적 판결이다.
늦었지만 반드시 내려졌어야 할 정의의 선언이며, 한국 현대사와 사법사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다. 우리는 이번 재심 과정에서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원칙과 법리에 따라 무죄를 구형한 검찰의 판단을 높이 평가한다. 이는 검찰이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역사와 진실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법리적으로 쉽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해 법과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결단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오늘의 판결은 사법부가 과거의 불의에 침묵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역사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오늘 무죄를 선고받은 이관술 선생은 일제강점기, 특히 일제가 민족말살통치와 전시총동원체제를 통해 우리 민족을 가장 가혹하게 탄압하던 1930~40년대에, 국내에서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몇 안 되는 항일혁명가이다.
그는 울산 지역 대지주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서울 및 동경에서 유학한 당대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유복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탄압받는 학생과 착취당하는 노동자, 수탈당하는 농민과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섰으며, 반복되는 체포, 가혹한 고문과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수차례 탈출을 감행하여 일제 경찰을 농락하면서 해방을 맞는 그날까지 전국을 돌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이관술 선생은 해방 직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여운형,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새로 건국될 나라를 이끌 지도자’로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국민적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무런 실체도 없는, 이른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경찰의 불법 구금 및 가혹한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과 판검사의 조작으로 날조된 이 사건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이관술 선생은 아무런 증거도 정당한 절차도 없이 치러진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로서의 명예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고, 국가 경제를 파괴한 파렴치범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이관술 선생은 정판사 위폐 사건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재산을 기부해 반곡초등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해방된 조국으로부터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채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억울함보다 아이들의 교육과 공동체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던 그의 행동은 이관술 선생의 삶이 어떤 가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오늘의 무죄 선고가 단지 법률적 판단을 넘어 도덕적·역사적 평가를 동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이관술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가 권력의 불법적인 처형 명령에 따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이 처형이 불법이었음은 이미 진실화해위원회와 대법원에 의해 확정되었다. 해방된 조국이 독립운동가의 명예와 자유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다. 오늘의 무죄 선고 판결은 광복 80년의 역사를 맞는 대한민국이 과거의 국가 폭력과 사법적 과오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이는 단지 불의한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반성문’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의 토대를 다시 세워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문’이다. 이에 이관술기념사업회는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정부는 이관술 선생의 항일투쟁과 희생, 감옥 안에서도 이어진 교육과 공동체를 향한 헌신, 그리고 오늘 사법부가 선고한 무죄의 의미를 엄중히 받아들여, 이관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와 학계는 오늘의 무죄 선언을 역사 교육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국가 폭력과 사법이 결합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 사례이다. 이 사건의 진실은 역사 교과서에 온전히 기록되어야 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국가 폭력과 사법의 부역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관술 선생의 이름을 되찾는 일은 곧 대한민국이 잃어버린 정의의 한 조각을 되찾는 일이다. 이관술기념사업회는 광복 80주년의 역사적 순간에 내려진 이번 무죄 선고가, 대한민국이 인권을 보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법치 국가’이자 독립운동가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2025년 12월 22일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이관술 유족(재심 신청인) 소회]
조선정판사사건 재심 - 이관술 할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고
저는 조선정판사사건의 피의자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손옥희입니다.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사건 발생 80년이 지나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엄청 기쁘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이데올로기 전쟁의 생채기로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어두고 집안은 물론 영혼까지 풍비박산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을 말 한 마디 못하고 견디어 살아오신 어머니께, 저는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민정부 이후 죄 없는 할아버지의 신원을 밝혀내야 한다고 30여년을 전국으로 다녔습니다.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15년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국제지역대학원에서 “미군정기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박사학위 받으신 임성욱 박사입니다. 저는 그 논문을 읽고 ‘참으로 완전범죄는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군정이 수사기록마저 없애버린 사건을 완벽하게 복원해놓았습니다. 논문 발표 후 10년이 지났지만 학계에서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어 참으로 놀랍고 힘겨운 작업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학계가 인정하는 논문의 내용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먼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서훈을 신청하였지만 역시나 ‘해방 후의 행적’이라는 답변이 날아왔습니다. 제1기 과거사진실화해위원에서도 이렇다 할 답변조차 받지 못하였던 것이라, 제2기 진화위에 ‘조선정판사사건’과 ‘독립운동 건’을 나누어 조사신청을 했으나 2건 모두 ‘조사중지결정’을 통보받았습니다. 국가기관이 힘없는 서민에게 이렇게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서 화가 났습니다. 진화위의 결정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담당조사관과 면담을 해보았으나,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2023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청했던 재심이 진행되어 2년 5개월이 지난 오늘, ‘이관술은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한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던 수많은 선생님들과 지나간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하고 경제파괴범으로 몰아부쳐도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의를 구하고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역사를 근간으로 하는 단체와 개개인의 노력 덕분입니다. 2023년 11월<정판사조작사건>을 출간하시고 고인이 되신 김상구 선생께도 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특히 바쁘신 가운데 쉽지 않은 사건을 흔쾌히 맡아주신 신윤경, 장경욱 변호사님께 존경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재심을 맡으신 재판부와 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미군정 기간 한국의 정치, 경제, 언론, 사법, 행정, 등등에 걸쳐 남긴 뼈아픈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내는 큰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주4.3항쟁, 여순항쟁, 대구10월 항쟁 등 관련된 또 다른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데 등불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별첨 2)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경과
1. 재심을 신청한 이유
1) 독립운동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하여
항일혁명가 이관술은 미군정 기간인 1946년 7월에 정판사위폐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체포됐고, 한국전쟁기간 국군 CIC(특임부대)에 의해 불법처형 당해 자신이 헌신했던 조국으로 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다행히 2004년-2005년 안재성이 쓴 『경성트로이카』와『이관술 평전』이 출판되면서 이관술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졌고, 2015년 임성욱 박사의 학위논문『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와 대중서 발간으로 명예회복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관술의 유족들은 2010년 1차 과거사위원회 신청한 불법처형 진상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법정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이 이관술이 한국전쟁 초기 대전형무소에서 수감 중 끌려 나가 골령골에서 총살당한 것을 불법처형이라고 최종 판결했습니다. 이것이 명예회복을 위한 법정 투쟁의 첫 단추였습니다.
하지만 2019년 보훈부에 신청한 독립운동가 서훈신청은 심사에서 거절 통보를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맞지만 해방 후 행적이 문제라는 답변이었습니다. 따라서 ‘정판사위폐사건’이 검경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판단,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위폐범 누명을 벗기지 못하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재심
보훈부의 독립운동 유공자 심사결과에 실망한 유족은 2020년에 새롭게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두 가지 조사신청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관술의 독립운동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정판사사건의 조작된 재판을 조사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두 가지 모두 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정판사조작사건 조사는 개시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독립운동 조사도 2025년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미결로 마무리했습니다. 2기 출범 초기부터 위원회 위원 선임 등 각종 마찰이 있었던 영향 뿐 아니라 윤석열 정권으로 바뀐 후 진상조사의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받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심을 접수한 것은 2023년 7월 4일이었고, 동화 법무법인의 신윤경 변호사와 장경욱 변호가 신청인 유족 손옥희(이관술의 외손녀)를 대리했습니다.
2.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진행경과
❶ 1차 심문 - 2024.07.05 10:15
재심 결정을 위한 첫 번째 심문이 열린 것은 2024년 7월 5일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서울중앙지법 제21 형사부였고 허경무 판사가 주심이었습니다. 재심 신청 접수 후 1년 만에 열린 첫 심문에는 이관술의 유족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기념단체 대표와 회원들이 다수 방청하며 법정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날 재판장은 심문 취지를 설명하면서 “야만의 시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라는 말로 신문을 시작했다. 청구인인 유족 뿐 아니라 방청한 이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 말이었습니다. 이후 판사는 재심 사유 증명에 대해 추가 자료를 바탕으로 2차 심문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❷ 2차 심문 - 2024.08.13 10:20
2차 심문은 매우 짧게 끝났습니다. 2차 심문의 핵심은 미군정 기간 판결에 대해 재심청구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❸ 3차 심문 - 2024.09.10 10:30
3차 신문에서 재판부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재심을 하려면 과거 공판기록이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데 판결문과 상고기각결정서를 빼면 상세한 공판자료(검찰조서 등)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종결하고 차기 심문일에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❹ 4차 심문 - 2025.08.26 10:00
3차 심문 이후 12월 3일 내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국회 탄핵과 헌법재판소 파면결정 후에도 심문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4차 심문이 11개월 말에 열렸고 이현복 판사를 중심으로 바뀐 재판부는 마지막 심문에서 지난 심문 과정 전체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10월 이전에 재심개시 여부를 확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❺ 재심개시 확정 - 2025.10.13
재심개시는 10월 13일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정문을 송달받기 전 법률신문을 통해 재판부가 재심개시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당시 사법경찰관들이 조선형사령이 정한 사법경찰관의 유치 기간 10일(제13조 제1항)을 초과해 이관술을 38일 동안 불법 구금했고, 다른 공동 피고인들도 각각 60일 이상 불법 구금했다는 범죄사실을 명확히 확인해줬습니다. 그리고 미군정기 판결을 대한민국 법원이 사법 심사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고, 검찰이 주장한 공소시효 말소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❻ 재심 1차 공판 - 2025.11.11 10:40
재심 1차 공판에서 검찰의 이관술의 유죄를 증명할 자료를 단 한 건도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인은 앞선 심문 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자료를 무죄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이후 재판부는 11월 26일에 최종변론 기일로 지정했습니다.
❼ 재심 2차 공판 - 2025.11.16 10:00
재심 2차 공판은 원래 검사 구형과 최후 변론이 진행되어야 했지만 검찰은 자료조사를 위해 한 차례 기일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 재판부는 고심을 전제로 12월 15일을 최종변론 기일로 재 지정하면서 12월 22일 선고기일을 함께 지정했습니다.
❽ 재심 3차 공판 - 2025.12.15 11:00
재심 3차 공판이자 최종 변론 기일에 검찰은 이관술에게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봤지만 이관술의 유죄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은 최종 변론을 통해 형식적인 무죄가 아니라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무죄 선고를 요청했습니다. 아울러 신청인 손옥희는 법정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대로 외할아버지 이관술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유가족이 겪어왔던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정의롭게 역사를 바로 세워주길 바라는 최후진술을 했습니다.
3. 재심 재판부의 12월 22일 최종 선고
정판사위폐사건 재심에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이는 재심개시를 결정한 재판부역시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상 항소 없이 재심 1심에서 끝이 날 것으로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신청인 손옥희를 비롯해 그동안 모든 심문과 공판에 방청했던 이들은 12월 22일 최종선고에서 무죄라는 뜻깊은 결과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1946년 재판 당시에도 검경이 조작한 증거와 불법고문으로 얻은 자백으로 큰 파문이 있었습니다. 이번 재심의 무죄선고는 79년에 벌어진 사법역사의 과오와 함께 해방 후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너무도 중요한 출발이 되었습니다.
학암 이관술 (1902-1950) 선생 연보(年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