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난해한 이야기이지만 신은 과연 ‘만들어진 존재’인지, 아니면 지적설계자인 창조자로서 ‘스스로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마 이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신의 기원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즉 호모사피엔스들의 생존방식이 수렵채취시대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자, 인간과 영혼의 원탁에 앉아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동식물들이 인간의 소유물로 끌어내려진 것이다. 그 당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는 질서에 대해 서로 협의를 했다. 그러나 이제 수렵 채취의 대상이었던 동식물들은 말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자 ‘풍요의 여신’,‘하늘의 신’, ‘의약의 신’과 같은 신들이 무대의 중앙에 등장하게 되었다. 신들의 주된 역할은 사람과 이제 벙어리가 된 동식물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고대신화의 많은 부문은 인간이 동식물과 자연을 지배하는 대가로 신들에게 영원히 헌신 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법적인 계약이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가능한 것은 고대 수렵채취인 사이에서 애니미즘 신앙이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민속신앙의 중재자를 샤먼이라고 부른다. 애니미즘이란 특정한 종교가 아니며, 수천 종이 넘는 종교와 사교와 신앙의 포괄적인 이름이다. 고대수렵 채취인들이 정령신앙 숭배자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 이전의 농업종사자들이 대부분 유신론자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유발 하라리는 주장하고 있다.
모든 것에 정령이 있다는 이러한 애니미즘과 특정한 자연물이나 상징을 종교로 해석하는 토템이즘을 기초로 한 민속신앙이 일본의 神道였고, 이를 모시는 곳이 神社였다. 이와 같이 神道는 자연신숭배와 같은 소박한 것이었으며, 종교로서의 절대적 가치관이나 신의 말씀과 경전도 없었다. 절대적 가치관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른 가치관과 공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길었다는 역설적 논리도 있다. 일본인의 종교는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역사책 고지키(古事記)에는 불교를 국교로 하려는 세력과 神道 세력 간에 유일한 종교전쟁이 벌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승리는 숭불파(崇佛派)였지만 천황가(天皇家)가 최고의 존재라는 이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 神道였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난제를 해결한 사람이 쇼도쿠(聖德)태자였다. 그는 이른바 신불유(神佛儒)절충사상을 제시하였다. 즉 ‘神道를 근간으로 삼고, 불교를 가지로 키우며, 유교의 예절을 북돋워 현실적 번영을 달성한다.’는 이론이다. 종교라는 가장 엄격한 사상체계와 가치관에서조차 좋은 부분을 취하여 융합한다면, 다른 문화와 외래 문물의 수용에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이다. 다른 가치관을 수용하는 이러한 진취적인 생각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역사적 배경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한편 神社와 神道는 2차 대전 이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神道에 대한 내용은 헌법에서 삭제되었고, 神社와 神道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민간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제는 종교라기보다는 국가정신을 수호하고 근본적 도덕률을 함양하며 조상을 숭배하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도착 다음 날, 후지 산(富士山)이 가깝게 보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지산본궁 센겐대사(富士山本宮浅間大社)를 찾아갔다. 神社 앞쪽에는 신이 머무는 구역과 인간이 사는 구역을 나누기 위해 새워두어 일종의 결계(結界)의 역할을 하는 붉은 색의 거대한 토리이(鳥居)가 후지산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시야를 압도하였다. 본전(本殿)은 케이쵸우5년(1600)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神靈들을 위하여 케이쵸우9년(1604)에 본전(本殿)·배전(拜殿)을 시작하여 30여 동에 달하는 장대한 건축을 진행했다고 한다. 본전(本殿)가까이에는 또 하나의 작은 토리이(鳥居)가 있다. 본전 문 양쪽에는 천황과 황후의 글과 노래가 있었다. 오른 쪽에는 천황이 몸소 지은 글인(御製)‘세계의 모든 나라가 함께 일하자’라는 뜻인 ‘만방공화(萬邦共和)’가 씌어져 있어 이는 일본을 중심으로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선언처럼 보였다. 왼쪽에는 황후가 몸소 노래한(御歌)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와,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이 움트고 있다’라는 뜻인 ‘일양래복’(一陽來復)이란 노래가 씌어져 있어 백성들을 위한 황후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천황과 황후의 글과 노래가 있을 정도로 이 신사의 위치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후지산에서 내린 대량의 비와 눈은 곧 산기슭에 흘러내려 용수가 되어 신사 동쪽으로는 아름다운 못, 용옥지(涌玉池, 와쿠다마이케)까지 내려온다. 이 못은 일본의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중세기 이후 후지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우선 이 못에서 미소기(みそぎ, 액운을 씻어내기 위해 몸을 씻는 것)를 행하고 나서 등산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못 표시판에는 ‘후지산(富士山)의 신령한 물을 맞이하는 물의 집 신사’(富士山御靈水 水屋神社)라고 씌어있었다. 연못의 눈 녹은 물은 푸르고 주위의 나무들과 잘 어울리며, 물속에는 황금잉어들이, 물위에는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니고 있는 평화스러운 풍경이었다.
점심은 신사 주변의 맛 집이 연이어 있는 골목에서 볶은 메밀국수를 맛있게 즐겼다. 재미있는 광경은 국수집 옆, 가게처럼 보이는 허름한 작은 공간에 ‘富士宮ゆき(雪)そば學會’라는 간판이다. 일본에는 메밀국수에 관한 학문(?)도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노력이 실용을 중시하는 일본을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자기가 전념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며,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