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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소개에 이어 논개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각종 문헌을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약간 다른 방법으로 논개를 소개 하고자 한다
이글은 재미있는 역사소설 이려니 하고 읽어보면 진짜로 재미가 있을것이다
우리는 흔히 논개하면 기생으로 오인을 한다 진실은 논개는 분명 기생이 아니다
촉석루 전승연회에 참석하여 적장을 죽이기 위하여 할수없이 신분을 위장한 것 이다.
논개는 누구인가 ?
사람은 누구나 출생이 있으며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 이다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다
태어나서 그 사람이 이생에 얼마나 살았으며 어텋게 살았는가는 저마다 사후 평가는 다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스무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하고 지아비를 위하여 살신성인
순국한 장수 3덕의 인물 주논개님의 일대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성씨만
존재하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별로없다 그러다보니 경주김씨 해주최씨등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문중의 족보에도 여자는 성씨만 기록되고 대신해서 사위 이름을
표기 했을 정도다 누구나 이름은 존재하는 법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름이 없는것이 아니라
이름을 안불렀다는게 맞는 표현일 것 이다 논개가 살았던 조선중엽의 시대에는 사대부들의
편견에 의해 여성을 밖으로 드러내는일이 없었다 시대배경이 그러다보니 구국충절 주논개도
기생으로 취급해서 문헌에는 한줄도 기록되지 않았다 훗날 여러문헌이나 구전으로 논개의
의행이 밝혀지면서 하나둘 논개에 대해서 연구 발표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논개하면 진주목의 관기로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전쟁승리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남강변으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논개는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의 아내였고 진주성이
함락되어 남편이 죽게되자 논개는 기생복장을하고 왜군장수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실천했다
그러나 기생으로 오인해서 임진왜란중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고 오랜세월 동안 목격자와 주변사람들 그리고 진주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알려져오고 매년 조촐하게 추모제가 열려왔었다 이후에 경종1년 (1721) 공식적으로 비변사에서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인정하고 영조16년(1740)년 사당이 의암부근에 세워지어 지금까지
매년 논개의 추모제가 열린다
여기까지의 논개 이야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거의 알고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전 자신의 어머니의 나라를 침략해 강탈한 왜장과 함께 목숨을 던져버린 논개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참고로 논개의 일대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또한
한참동안 우리의 무관심속에서 뭍혀 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관심을 갖길 진심으로 바란다.
주논개의 일대기(태어나서 죽음까지)
1. 1574년(1세)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남
2. 1578년(5세) 부친 사망 그리고 장수현감 최경회와 만남
3. 1579년(6세) 재판후 무죄선고 장수관아 침방 관비가 됨
4. 1590년(17세) 최경회 담양부사로 재직시 부사의 아내가 됨
5. 1593년(20세) 2차 진주성 전투때 진주성에서 순국함
6. 1593년(20세) 주논개 묘소 안장
1. 주논개의 출생
1574년 (음)9월3일 밤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아버지는 주달문 어머니는 함양박씨
작은아버지는 주달무라 한다 아버지 주달문은 한학에 밝았고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선비였다고 한다
따라서 논개는 천한 신분이 아닌 양반가 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개의 출생 연월 일시가 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의 사갑술 이었다
술은 개(戌)띠 이라서 개해에 놓은개(낳은개) 경상도 방언 이라하여 '논개(論介)'라
이름하였다 한다.
장계면 대곡리에 새롭게 조성된 논개 생가지
2. 부친 사망 그리고 장수현감 최경회와 만남
논개가 다섯살 쯔음 해인 1578년 아버지 주달문이 뜻하지 않게 죽게되었다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천하 건달인 숙부(작은아버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돈을받고 어린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김풍헌의 아들은 몸과 정신까지 온전치 않은 장애인 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논개 모녀가 외가인 경상도 함양군 안의면 있는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혼인빙자로 인한 횡령죄로 1579년에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고소장을 접수한다 최경회는 즉시 함양에 있는 논개 모녀를 채포 압송하여 심문을 받게 하였다
이때 논개나이 여섯 살이다 이를 계기로 말마암아 논개는 최경회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3. 무죄 그리고 장수관아 침방 관비가 됨
재판에서 논개모녀는 무죄를 받았다 어린 논개를 돈으로 민며느리로 데려갈 생각 자체만으로도
인륜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처음부터 반인륜적인 목적으로 체결한 것은 원천 무효이다
오히려 김풍헌은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최경회현감이 훌륭하다는것이 이대목에서 알수있다
김풍헌은 이름이 아니다 풍헌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면장 정도의 직책이다 최경회현감의 현명한
판단 부정부패에 결탁하지 않는 심판 이 모든것이 논개를 살리게 된 것이다
무죄로 풀려 났지만 딱히 논개 모녀는 갈곳이 막막하였다 외가로 다시돌아 간다고 하여도 훗날
김풍헌의 보복이 두려웠다 두모녀는 최경회 현감에게 관아에 노비라도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최경회 부인 나주김씨가 이들의 딱한사정을 듣고 비공식으로 관아의 침방이 되었다
김풍헌과 숙부 주달무의 뒷거래 사건으로 말미암아 논개는 최경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4. 최경회 담양부사로 재직시 부사의 아내가 됨
논개모녀는 재판을 받고 침방으로 일한지 얼마되지 않아 1579년 최경회는 무장(지금의고창)
현감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최경회부인 김씨가 최경회에게 논개모녀를 같이 데리고 가자고
권유했다 사실 논개모녀는 착실하고 바느질 솜씨와 부엌살림을 높이샀다 현감은 고민끝에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관아의 침방(針房) 관비(官婢)로 논개모녀를 정식으로 등재 시킨후
정식 수행원으로 삼아 무장으로 데려갔다 논개 어머니는 논개에게 틈만나면 최경회현감의
은혜를 잊지말라고 교육하곤 했다 이후에도 최경회현감은 변방으로만 옮겨 다녔다 그때마다
논개모녀를 잊지않고 데리고 다녔다 최경회는 1583년 영암군수에서 영해부사로 영전했다
영해부사로 근무하고 있던중 1587년 사도시정이란 중앙관직을 임명받았다 사도시정이란
궁중의 미곡과 간장등의 공급과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다 최경회는 어쩔수없이 혼자 서울로
떠날 수 밖에 없었었다 최경회 부인은 지병으로 여러해 동안 고생을 하여 기력이 쇠퇴하여
따라가지 못할 사정이었다 김씨부인은 오래동안 논개를 곁에두고 지켜봤다 품성이 착하고
왠만한 살림은 능히 보살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남편 최경회에게 부인을 대신해서 논개를
데리고 서울로 갈것을 권유했다.
논개의 어머니는 2년전 1585년에 돌아가셨다 논개의 직계 가족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고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다
이때 논개나이 14살 최경회는 56살 이었다 이후 최경회 부인 나주김씨는 지병이 악화되어
논개를 부실로 맞이 할것을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3년여 궁중에 근무하고 1590년 초봄에 최경회는 담양부사로 임명되어 돌아왔다
이때 최경회는 부인의 당부도 있었고 본인도 차츰 논개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최경회와 논개가 인연을 맺은지 11년만에 논개를 부실로 맞이 한 것이다 나이 최경회 쉰아홉
논개 열일곱 이었다 지금시대로 본다면 말도안되는 상황이라지만 그시대적 배경에 이해를 구한다.
5. 2차 진주성 전투때 진주성에서 순국함
1592년(임진년)에 역사상 980여회 외침중에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최경회는 모친상 중이어서 화순에 3년상을 하고 있을때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었다 조국수호 의지로 불타는 청년들이 속속 모여들어
훈련을 시키어 정예원 800명을 선발하였다 조정으로부터 정식 공인된 부대명칭은
골(鶻)자부대였다 “鶻”자가 찍힌 깃발도 만들었다 골자부대는 최경회가 만든 이름이다
골입아군(鶻入鴉郡) 즉 송골매가 날아들면 갈까마귀 떼가 놀라 흩어진다는 뜻이다.
1592년 중순 최경회 골자부대는 첫 번째 무주 전투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왜적들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 한다 1차 진주성전투를 외각에서 왜군들 보급차단 및 부대이동의
길목을 차단하여 진주성전투를 승리하는데 현격히 공헌한 인물이 된 것 이다
1차 진주성 전투이후 최경회는 조정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원래 최경회는 문관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스로 자원하여 무관인
의병장이 된 것 이다 조정에서 최경회의 공로를 인정하여 충분한 상훈을 내려
진급과 함께 보직 이동을 하려했다 그때 국가의 많은 충신들이 선조임금께 아뢰기를
최경회는 무신은 아니지만 리더쉽 강한 훌륭한 장수로 명성이 자자 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이번 사변이 안정 될 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 할수있도록
진주성 책임자로 보낼것을 간곡히 간청했다 선조임금은 충신들의 뜻을 받들어 최경회를
1593년 4월21일 경사우병사에 임명하게 되었다.
논개는 최경회가 의병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은혜 은총 고마움과 존경에 촛점을 맞추고 살았다면
의병활동을 옆에서 지켜본 이후에는 자신도 나라를 위하여 뭔가 해야한다는 강렬한 충동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우병사로 임명된 최경회는 우병영 소재지인 창원에서 줄곳 기거하게
되었다 왜군의 2차 진주성 총공결설이 난무하던 어느날 충청병사 황진이 병영으로 찿아왔다
황진은 뜻밖에도 논개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논개는 최경회 의병활동중에
장수에서 거주하면서 최경회와 골자부대를 열심히 지원했다 그러던중 왜놈들이 부산에 집결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아비가 경상우병사인데 큰 걱정 이었다
장수에 가만히 앉아 무작정 전쟁을 끝나기만 기다릴수 없었다 만약 최경회가 경상우병사만
아니더라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기다릴수 있겠지만 어느것 하나도 돌이킬수 없는 지경에 이르렇고 어쩌면 지금의 이별이 영영 이별이 될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최경회를 만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어찌보면 논개는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논개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최경회가
머무는 창원을 향해 결연한 의지로 출발한 것이다 논개가 육십령을 넘을때 덕유산 산자락에
원추리 꽃이 풀숲에 숨어서 논개의 위험한 여행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별다른 사고없이
가다가 산청군 오부면에서 왜군 척후병에게 붙들렸다 왜적들은 논개를 함안쪽으로 압송했다
왜군의 포로가된 논개는 함안 양곡을 지날때 일이다 마침 충청병사 황진이 최경회와 진주성
방어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황진의 군사들은 왜적을 발견하고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간단히 소탕했다 그 과정에서 남자로 변장한 논개를 발견한 것이다
논개는 최경회와 관계를 말하고 최공을 만나로 가는길이라 했다 황진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반신반의 일단 최경회에게 데려간 것 이다 깜짝놀란 최경회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논개를 더 이상
떼어놓지 못하고 논개를 남장시켜 1593년 6월15일(음력) 진주성으로 함께 들어간 것이다.
한편 왜놈들은 20만명의 병력을 부산에 집결 시킨후 최종 목적지 진주성을 치기위해서
김해,창원,함안을 차례로 공격하면서 모든 촛점을 진주성 공략에 두었다
그만큼 진주성은 왜군들한데 중요한 요새지라 판단한 것이다 많은 역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2차 진주성전투는 1차때와 달리 이미 예견된 패배였다고 전한다 적군이 오기도전에 아군끼리
긴밀한 협조도 안되고 특히 원조국인 명나라 협조도 안되고 그야말로 오합지졸 이었다 한다
진주성안의 아군 군사는 겨우 3천명의 혼합군인 반면에 왜군은 9만7천명의 병력이 있고
후방에 10만여명의 병력을 대기 시킨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군대라도 힘든 상황 이었다
진주성은 외곽으로 지원만 받으면 아무리 많은 적군이라도 해볼만하는 천혜의 자연적인
요새지라 한다 그러나 1차때는 긴밀한 협조가 잘되었는데 2차때는 협조는 커녕 강건너
불구경만 했다는 것이다.
밤낮없이 쉬지않고 전투는 벌어졌다 때마침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억수같이 쏱아졌다
왜적들 희생 못지않게 아군 피해도 늘어만 갔다 진주성 외곽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이다
난공불락이라 일컷는 진주성은 서서히 장마비와 함께 쓸려 내려가는것을 감지했다
논개는 젊은 부녀자들을 모아 물을 끊이고 돌을 나르는등 최경회장군의 보필에 최선을 다했다
날이 갈수록 시체는 쌓이고 보관된 군량미 마져 떨어졌다 정신적으로 버틴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살기위해 성안으로 몰려들어 왔던 수많은 피난민들도 살기위해 다시 성밖으로 탈출을 했다
더불어 진주목사 서계원까지 도망쳐 버린 것이다 사기마져 땅으로 곤두박질 한 것 이다
돌이킬수없는 날이 돌아왔다 성안의 피난민들은 살기위해 적의 포위망을 피해 사방으로 도망칠때 논개도 썰물처럼 무서운 기세로 밀려나가는 피난민 대열에 떠밀려서 성밖으로 나온 것이다
최경회 장군은 현실을 파악했다 피난민중 우선으로 어린이와 아녀자들은 살리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왜군들을 한쪽으로 유인하여 피난민들의 도피하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최경회는 아직 꽃다운 나이인 논개도 살아남기를 간곡히 원했던 것이다 최경회의 뜻을 받들어
논개도 피난민에 섞여서 탈출 한 것이다 마침내 진주성은 함락 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셋이서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기로 한다
장마에 불어난 시뻘건 황토물 핏물이 범벅이는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진주성 2차는 피비린내 풍기면 철저히 짓밟였다.
우여곡절 살아난 논개는 진주성밖 작은암자에 숨어서 있었다 성 함락후 최경회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염없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슬픔은 가슴에 뭍어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때마침 왜군들이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하여 진주 관기들을 소집한다는 소문을 듣게된다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기생으로 위장하기로 마음 먹는다 전승축하연 자리에 조선인은 기생
이외는 출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촉석루 축하연 자리에 가려면 이길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논개를 기생이라 하는것은 여기에서 전해지는 잘못된 것이다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서 자결을 선택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주성싸움에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과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자결한 지아비 최경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라도
왜놈의 대장을 죽이고 나도 같이 죽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과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적장을 껴안고 꽃다운 스무살 나이에 남강 푸른물에 몸바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논개가 껴안고 죽은 적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라는 일본군 장수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죽음은 뜻밖에도 큰파장을 몰고왔다 왜군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겨냥하여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죽을힘을 다해서 빼앗은 것이다 다익은밥에 코빠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1차목적을 달성하고 호남의 진격을 위해 다짐하는 승리의 축하연 자리에서 그들의 용맹한
장수를 잃었으니 아마도 천군만마를 잃은 것이다 필자는 결과적으로 논개 순국으로 인하여
피흘리지 않고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게 된 요인중의 하나가 된 것이라 자신있게 말할수있다.
스스로가 창기(娼妓)로서 받아야할 수모와 모멸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반외세 조국 전쟁의
신성한 목적에 복무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을 실천한 근대적
혁명적인 그 여인 아름다운 그 여인 !! 우리는 그 여인을 “논개”라 부른다.
평생동안 불행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그시대 사회에서 제일 천시받던 기생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하여 여인의 몸으로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조국을 구하고자 자신을 버려 순국한 논개가
공인으로 인정받는데 15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현재까지도 또라이 같은 매국 친일단체가
버젓히 활개치고 있다 전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민족이다 자기 목숨과 맞바꿔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훌륭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은 이 나라 사람들을 농락하고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려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너무나도 많다 대표적인것이 역사왜곡이다
지하에 계신 논개님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잔재해 있는 논개님의 흔적을 말끔히
청산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한 엉터리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당장 주변에
진실을 알리어 우리가 나서서 해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역사왜곡으로 일본인들의
잘못된 논개님에 대한 인식을 다음편에 자세하게 서술 하고자 한다.
6. 1593년(20세) 주논개 묘소 안장
최경회의 골자부대 의병들 800명이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해서 다죽고 겨우 80여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들은 주로 화순, 능주, 장수인들로 최경회장군과 각별한 사이였다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이다 성 함락후 살아남은 골자부대 의병들은
인근에 숨어지내다가 논개에 의하여 왜군의 장수가 죽고나서 왜군들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틈을 타서 골자부대 의병들은 서둘러 진주남강 기슭을 따라 내려가면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찿기 시작했다 시신은 한참이나 흘러내려 문산의 지수목이라는 곳에서 여름 장마로
인해서 물에 불어트고 기온이 습해서 부패가 심하여 어렵게 찿았다.
의병들은 마을사람들 도움을 받아 관2개를 짰다 일단 장수까지 운구하자는 의견을 모아
서둘러서 관을메고 장수를 향하여 꼬박 이틀을 걸었다 경상도 안의면까지 온 것이다
잠도 안자고 온 이유는 전쟁중이라 혹시모를 적군을 피해서 급히 뛰다시피 온 것이다
한숨 돌리고 조금은 안전하다 판단하여 여기서 묘소문제를 의논했다
최경회의 시신을 떠메고 화순까지 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그리하여 우선 논개와 함께
장수에 안장 하였다가 전쟁이 끝난후 화순으로 이장을 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러자 논개 묘지도 문제가 되었다 장수에 묘지를 돌봐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의논 끝에 논개 묘지로 최종 결론이 난 곳은 논개의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도 친척들이
살고있는 함양 서상면 방지 부근에 안장 하기로 했다 안의에서 서상까지 16㎞의 거리다
의병들은 논개와 최경회를 안장하기 위해 안의에서 서상면까지 와서 방지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양지쪽 산비탈에다 두 사람의 묘지를 만들었다
앞쪽이 논개묘이고 뒷쪽이 최경회의 묘이다 전쟁이 끝나면 이장하기로 하고 임시 안장한
두분의 시신은 420년동안 이곳에서 편히 쉬고 계신다
전북 장수군의 의암사적 보존회에서 십수 년 동안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현장탐문 조사와
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및 향토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친 끝에 1976년에 논개묘를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후 10여년이 흐른 1980년대 후반 함양군에서 논개묘 성역화사업으로
봉분을 다시 만들고 비석을 세우며 주위를 정화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새로이 단장된 주논개 묘지
논개(論介)의 애인(愛人)이 되야서 그의 묘(廟)에 /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러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朝鮮)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詩人)으로 그대의 애인(愛人)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너뇨 죽지 안한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마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 바람은
귀신(鬼神) 나라의 꽃 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얏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설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이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야 얼골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힌 강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銘)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 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랴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여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랴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容恕)하여요 논개여 !
금석(金石)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贖罪)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遺言)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골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것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질거우며 얼마나 슬프것는가
나의 웃음이 제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제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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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장수인은 논개를 절대로 잊고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다 뭘까 ?
고민은 각자의 몫이다 정신이 황폐화 되어가는 요즘세상에 한번쯤 논개님의 얼 받듣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