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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선비족 <북위편> by Tillz
Ⅰ.서론
북방 이민족과 남방 민족의 경계는 일직이 일본의 시라토리가 이와 같이 제창하였다.
남방 민족이라는 것은 중화(中華)라고 자칭하는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을 말하며 북방민족은 중국의 북변에 거주한 제민족(諸民族)을 가리킨다. 즉 지나인이 동이(東夷)라고 부른 만주 삼림지대 주변의 퉁구스민족, 동호민족, 북적(北狄)이라 하여 두려워했던 내외 몽골의 유목민족, 서융(西戎)이라 칭해진 유목반농경의 서장민족 등을 말한다.
이민족 왕조의 통치 기간은 북위 약 150년, 요나라는 200여년, 금나라는 약 1백 20년, 원은 약 1백년, 청나라는 약 2백70년으로, 다섯 왕조 통치 기간은 약 팔백 오십년으로 진한 이후 중국 역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중국의 이민족 왕조는 모두 유목 또는 수렵 반 농경민족이고 문화적으로는 피정복민인 중국인에 비해 열등했다. 또한 중국의 농업사회가 신왕조와 결속관계를 맺을 경우 중국의 역사에서 외정으로 알려진 그 예봉 앞에 유목민족과 수렵 반 농경민족이 부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무력을 결집시켜 하나의 봉건국가를 성립하더라도 한족왕조가 패기에 넘치는 융성기를 만나게 되면 도저히 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민족 왕조는 문화적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중원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이민족에 의한 중국 정복 시기가 주로 한족왕조의 쇠퇴기이거나 중국 농업사회의 동란을 틈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북위의 성립은 후한 말 이후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틈타 이루어졌으며, 원은 중국 대륙이 송, 금, 서하(宋, 金, 西夏)의 삼국 양립 형세를 틈타 하나씩 격파하여 중국 통일을 이루었다. 조사 과정 중, 흥미로운 점은 북위는 적극적 한화정책을 펼쳤는데 반해, 원은 한족문화를 경시하여 자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했다는 점이다. 즉 원은 북위에 비해 치열한 정복 왕조적 성격이 강했다. 같은 민족, 다른 정치적 성향의 대표적 ‘정복왕조’ 북위와 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북위의 통치
1. 북위정권의 성립과 통치
북위는 몽골민족의 선조(先祖)로 여겨지는 선비족(鮮卑族) 중의 탁발부(拓拔部)가 서기 3세기경 만주의 도아하(逃兒河) 유역의 유목지에서 발흥한 후 남하하여 당시 이른바 5호 16국 시대였던 북중국으로 들어와 이들 제국을 평정하고 한족을 복속하여 드디어 태조 도무제(道武帝)이하 11제 약 150년 (386-534)간 북중국과 내몽골을 영유 통치한 북족의 왕조이다. 북위의 창업주인 탁발규는 전진 부견의 대국의 침입으로 횡사한 십익건(什瀷揵)의 손자로 유현이 탁발규(拓拔珪)를 모살하려고 하였기에 규는 외가인 하란부(賀蘭部)로 피난하였다. 그 뒤 386년 평성(坪城, 산서성 대동, 大同)과 성락(盛樂, 내몽고 자치구)의 중간에서 있는 우천(牛川)에서 대왕으로 추대되어 국호를 위(魏),연호를 등국(登國)이라 정하였다.
선비족 중 하나인 탁발(拓跋)은 그후 한동안 만리장성 남부로 이동하여 산서 북부에 과거 중국의 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안문과 대동 지역의 대(代) -유주(幽州) 근처-로 들어가 310년경에는 그곳에 확고하게 정착했다. 끝으로 몽골 선비족의 하나인 모용(慕容)씨는 현재 만주의 남서쪽에 있는 요동과 요서에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였다.
북위의 지나 통치가 성공한 것은 한족 특히 호족과 명문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협력케 한 점에 있었다. 이들 호족을 만족시킨 관리 등용법인 중정제도(中正制度)를 널리 시행하고 형살을 엄격히 함으로써 반 왕조 세력의 3족 5족을 붙잡아 들여 주살하는 등 엄격한 형법으로 다스린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촌락통치에 관심을 기울여 삼장제(三長制)를 시행하고 인조직(隣組織)을 확립한 동시에 호구조사를 확실하게 한 것은 비협조적인 무리를 숨기지 못하게 하고 과세를 용이하게 하여 조정의 수입을 증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균전법(均田法)을 시행하여 민심을 수습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한족(漢族) 사인(士人)의 북위 정권 참여는 탁발족의 북방 통일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하북 지역(河北地域)의 통치자 모용 후연(後燕)이 북위에 의해 멸망된 후 모용 정권에 참여했던 한인 사족이 대거 탁발 정권에 참여하게 되면서 북위의 중원 통치 기반을 제공하였다. 당시 한인 사족의 역할은 북위 초창기에 각종 제도를 기초하고 국가 통치 사상을 제시하여 북위로 하여금 북방 통일의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1.1 제도(관료 군사 지방 토지)
5호 16국 시대 색외(塞外)민족의 왕조는 상서 이하 관리가 군현을 통해 정치를 하고 색외 민족은 종래의 부족생활을 계속하게 하는 2중 체제를 취했으나, 북위 도무제(道武帝)는 중국적 정체(政體)로의 일원화를 실시하였다. 도무제는 치안의 공작과 병행하여 중국의 문벌가문을 회유하는 좋은 대책으로서 그들이 가장 환영하는 관리 등용법을 채용했다. 이것이 중정(中正)제도이다. 이는 중국에서 후세에 관리를 학술시험으로 채용하는 과거와 대조적인 명망추천제도였다. 주 ․ 군의 중정이 상신하는 장부에 근거하여 백성으로부터 관리를 등용하는 중정제도의 일반적 이해는, 첫째, 벼슬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행동을 삼가여 국내의 풍교(風敎)가 크게 진보하였다. 둘째, 품제의 결정은 대개 3년마다 행해져서 관리로 있는 사람도 독실해져 국민도덕의 향상에 효과가 있었다. 셋째 관리임용에 관한 정부의 사무가 간소하게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중정에 합당한 인재를 고정하기 곤란하였다. 또한 인물과 재능을 문자로 기록하여 나타내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 결국 중정 대부분 문벌귀족 출신이므로 사사로운 관계에 좌우되는 폐해가 있었다.
북위는 화림(和林, 몽골의 盛樂)을 근거로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선비족으로 이루어져, 그 군사적 사회적 기초는 부족제이였으나, 대동(大同)으로 천도 후 점차 유목제부족의 정착이 이루어져 부족제 유지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부족제를 변형하여 8국제(八國制)로 하고 이로써 선비족의 보호를 꾀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농경민족의 지배자가 되자 종전의 중국 왕조와 똑같이 계절적인 건조에 따라 맹목적으로 매진해 온 유목민족을 대비하기 위하여 무력적 지주인 선비인의 대부분을 내몽골 수비대인 북진(北鎭)으로 파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8국제도 축소, 붕괴하게 되었다.
치안대책으로 효문제(孝文帝)는 태화 10년에 취해진 것이 3장제이다. 이는 주례(周禮)의 옛 법에 따라 세워진 일종의 향당법(鄕黨法)인데 다섯 집을 1린(隣), 5린을 1리(里), 5리를 1당(黨)이라 하여 인장, 이장, 당장을 두고 근면한 향민을 선발하여 이를 맡게하는 일종의 지방제도이다. 당시엔 다수의 호(戶)를 지배 하에 두고 있는 일종의 호족 ; 독호(督護)와 종주(宗主)라는 것이 존재하여, 폐해가 심했다. 3장제는 실로 이러한 폐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북위에서 시행한 농업정책으로서 획기적인 것이 균전법이다. 효문제 485년(太和 9년) 중국 최초로 균전법을 실시했다. 균전법의 사회적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그 골자를 보면 토지의 사유를 통제·제한하여 겸병(兼倂)을 막고, 국가소유의 토지를 분급(分給)하는 형식으로 생산담당자인 농민들의 이탈을 막고 국가가 이를 강력히 지배하려는 것으로서, 유목국가(遊牧國家)였던 북위가 농경정착화(農耕定着化)하는 과정에서 생긴 제도였다.
1) 15세 이상의 남자 1인에게 노전 40무를, 부인에게는 20무를 지급하며 노비도 양민도 양민과똑같이 한다.(노전은 나무가 없는 곡적을 말함)
2) 소 한마리에 대해 밭 30무를 지급하는데 네마리로 제한한다.
3) 이상의 밭은 백성에게 과세하는 연령과 동시에 지급하며 과세를 면제받거나 지망하는 동시에 반환된다. 노비와 밭갈이 소의 몫은 그 유무에 따라 환수된다.
4) 노전은 뽕나무, 느릅나무, 대추나무 등을 심거나 매매를 불허한다.
5) 환수는 매년 정월을 기한으로 하여 행한다.
6) 노전 외에 삼을 재배할 경우 남자에게 10무 부인에게 5무의 비율로 지급한다. 노비도 양민과 똑같이 하며 환수방법은 노전과 같다.
7) 처음에 밭을 받은 남자에게 뽕밭을 20무를 추가로 주고 여기에다 뽕나무 50그루, 대추나무 5그루, 느릅나무 4그루를 심게 한다. 뽕나무를 심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지라면 1무를 지급하여 느릅나무를 재배하게 한다. 노비도 마찬가지임
8) 뽕밭은 세습재산이며 관에 반환하지 않는다. 다만 1집의 식구수를 대조하여 잉여가 있으면 새로 지급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지급하지 않는다. 또한 매각을 허락한다
9) 지역적으로 땅이 넓고 백성이 드문 곳, 또는 거꾸로 인구가 너무 많은 곳 등 차이에 따라 이상의 할당은 다소 신축 있게 조절한다.
10) 공황지로 옮기려는 자는 이를 허용한다. 그러나 노동을 피하여 숨는 것은 불허한다. 또한 땅이 충분한 데도 까닭 없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불허한다.
11) 지방관에게는 그 지방의 공전(公田)을 지급한다. 자사 15경, 태수 10경, 치중과 별과에게 각기 8경, 현령과 군승에게 6경을 지급하지만 매각을 불허하며 범법자는 법률에 따라 처형한다.
2. 북위의 쇠망
고조 효문제는 태화 18년(494)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중국화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하기에 이른다. 효 문제의 낙양 천도는 위나라가 영유하게 된 황하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보전하는데 편리하다는 실질적 이유를 따랐으나 직적접인 동기는 오히려 이상하리 만큼 중국문화의 애호자였던 효문제의 개인적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청나라 사가 조익은 그의 《22사차기》에서 효문제의 낙양 천도를 북위가 쇠망하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란 북위가 쇠망하는 진정한 원인은 천도 그 자체가 아니라 낙양의 천도를 계기로 강행된 북위의 동화정책이라 할 것이다. 첫째 선비인의 남북분리 대인(代人)을 하남으로 옮기고 이후 이들을 모두 낙양 사람이라 하고, 북으로 돌아감을 불허하였다. 둘째 호복과 호어의 금지 셋째 태화 20년 조칙을 내려 부족으로서 대에서 온 사람의 성을 중국풍으로 고치고 제실의 성인 탁발을 원씨로 고쳤다. 다섯째 황제는 호한(胡漢)의 통혼을 장려하여 위나라의 종실은 후궁 방면에서 급속히 중국화하여 혈액상 점차 중국화에 이르렀다. 효문제의 철저한 동화 정책은 이외에 교육, 작위, 관제 등 사회 전반에 미친 결과 선비족 고유의 질박한 기질을 잃어버리고 사치와 문약의 풍조가 점차 농후해져 북위 멸망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동화정책이 가져다 준 최악의 폐해는 실로 탁발 북인의 민족의식의 소멸, 선비 민족의 결속이 해체된 것이었다.
원은 다음 편에..
1) 시라토리 쿠리키치 (白鳥倉吉 1865∼1942)
2) Karl August Wittfogel(비트포겔). 정복 왕조(dynasty of conquest)
중국 대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지배한 요(遼)·금(金)·원(元)·청(淸) 등의 왕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중국 사회에 동화·흡수된 전대의 침투왕조와는 달리, 치열한 민족의식을 보였으며 수·당 이후에 나타났다.
3) 탁발규(拓拔珪)
탁발의 종족적인 배경과 관련해서 그들이 선비의 일원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선비가 투르크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또한 선비는 대개 동호(東胡)에 속하고 투르크계가 아니라몽골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서병국(1991).『이민족 중국 통치사』,(대륙연구소), p.33.
5) 동부대인 유고인의 아들
6) 삭평(朔平)
7) Ren'e Grousset著 김호동·유원수·정재훈 譯(199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 p.110.
8) 모용의 후연은 탁발씨의 북위에 의해 둘로 나뉘어진다. 북연은 영평의 북동부와 그 곳으로부터 오늘날의 조양 근처 용성을 중심으로 열하와 과거 만주국의 경계까지 지배하였으며, 436년까지 존속하였고, 남연은 산동을 중심으로 청주 근처 광고에서 398년부터 410년까지 존속하였다.
9) 추교순, 「북위(北魏)(北魏)초기(北魏前期)의 한인사족(漢人士族)에 대한 정책(招納政策)」, 충북대학교 사학회, 충북 사학 2008, 200~201쪽.
10) (塞外)변방 민족
11) 선비인은 황성 주위의 8구에 배치되었는데, 이를 8국이라 하여 대사(大師) , 소사(小師)가 두어졌다. 이라하며 선비인은 대사 , 소사의 손에 벼슬을 할 수 있었다.
12) 서병국(1991).『이민족 중국 통치사』,(대륙연구소), p.42.
첫댓글 그럼 이웃이였던 오환족은 사실 서라벌을 세운 사람들(삼국지 종종 나오지요)
신라 문화의 기원이 북방 문화라는 설이 있긴하지만 그것이 정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ㅍ+
사실 따지고 보면 몽고, 여진, 거란, 선비, 말갈, 일본, 한국 다 같은 민족 아닌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