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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部同盟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岳友들이 있다. 10대 후반기에 만나 산을 오르고 섬,섬을 찾아 탐방하며 浩然之氣를 일삼던 惡童들이다. 山岳活動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했던 탓인지 각자 건강을 유지하며 지금도 종종 산을 함께 오르는 岳童이다. 일전 함께하지 못한 죄가 있어 어느날 연락이 오자 바로 응답하였다. 날을 잡은 일자를 보니 나의 입장을 고려하여 잡은 일정이라는 것이 명확하였다. 나의 응답은 늘 간단명료했다. 이번에도 - 감사, 참석함_ 으로 카톡으로 반송한 후 손전화기를 내려 놓으려 하자 다시 카톡카톡 울린다. 일정은 알아서 잡으라는 전갈이다. 그래 바로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만들어 즉시 화답하였다. 단풍은 끝물! 그래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대남문에 대서문 사이 흘림골인 북한산성 계곡이 최적임. 모임장소. 5호선 교보빌딩 옆 KT건물 앞 버스정류장 오전10시!
이후 11월 첫 토요일, 2일 아침 일찍 짐을 꾸렸다. 보온쟈겟! 예비용 긴팔 T샤스, 운행중 입을 방풍샤스, 비상용 읜드쟈겟, 압축보온 모자, 보온병과 아메리카 커피물, 생수 한 병, 장갑, 스틱, 손수건, 견과류와 귤, 사탕, 카메라와 여분의 건전지, 헤드렌탄, 비상용 조끼등을 넣은 백펙을 걸머지고 9시20분에 전철에 올랐다. 그리고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참! 오랜만에 걸어보는 북한산성 계곡이다. 여러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항상 짐을 만들며 혼자 부르던 노랫말이 떠올랐다.
하루에 살림살이, 어깨에 걸머지고
산사람 가는 길은 낭만에 세계라오
보아라 저구름을 들어라 산노래를
환희에 파노라마 산으로 또 산으로
젊은날 가기전에 몸과 마음 다받쳐서
산 사람 가는 길은 청춘의 세계라오
보아라 저 산정을 들어라 새소리를
환희에 파노라마 산으로 또 산으로
전철은 어느새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그 때 전화가 울린다. 먹거리 준비하였니? 아니~ 난 피맛골 김밥 집에 있는데 그럼 김밥 준비하마,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포철, 풍산금속에서 오랜시간 근무했던 악우다. 그리고 참여를 약속한 악우들은 전부 도착하였다는 전갈이다. 난 정확하게 10분 전에 도착하였다. 만나 반갑다는 표현은 손을 내밀어 상대의 손을 잡는 일이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북오도청까지 올라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오지 않아 다른 버스를 타고 가다 상명여대 입구에서 갈아탄 후 접근하기로 하였다.구기동 현대빌라 앞에서 하차 후 편의점을 찾았으나 폐업, 등산로 초입에 있는 편의점을 의식하고 부지런히 걸어 도착하였으나 입구에 마포자루를 걸쳐 놓고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것은 상도의가 아니다. 상인과 소비자는 항상 영원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특히 독점으로 하고 있는 상점이라 한다면 그러한 룰은 더욱 더 분별력 있게 지켜야 하는데.. 참 아쉽운 부분이다. 언제가 들렀는데도 이런식이더니... 그렇다면 이젠 출발선에서 정확하게 준비해 갖고 오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 현지는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할수 없어 그 위에 있는 식당으로 가 우리들이 필요한 물건 구매를 청하였더니 사장께서 직접 호쾌하게 응해 주신다. 감사를 표현하고 나누어 각자 짐으로 챙겨 넣었다.
구기동을 출발하며 우린 대남문을 목적지로 정하였다. 줄곧 계곡을 끼고 걸어야 하는 길이다. 나름 산세와 계곡이 어울려 멋진 산수화를 그려내는 곳이 바로 이 길이다. 북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백운대다. 백운대를 오르는 깃점에 암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의 이름은 위문이다. 만경대와 백은대 자락을 서로 연결하여 세운 암문이다. 북한산성에는 정문과 암문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암문은 비밀리 드나들던 또는 무기 식량등을 몰래 나르던 곳이였기에 暗門(암문)이러 부르는데 세워진 위치가 대부분 험지이고 비밀스런 지세를 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달리 정문은 동서남북을 축으로 세우고 정문 사이마다 문은 세우고 망루나 위용을 떨칠 목적으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고 왕과 신료들, 장군 군사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정문 5개소와 암문이 7개를 연결하여 석축으로 쌓아 올린 것이 바로 북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황토와 석회로 메꾸고 구운 흑벽돌을 쌓는 방식으로올렸지만.. 백운대를 깃점으로 만경대, 병풍암을 지나 주능선 따라 동문인 대동문을 세우고 보국문, 대성문을 세운 후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 계곡길 마루에 대남문을 세운 것이다. 이 문이 바로 북한산성의 정문이다.대남문에서 이어지는 의상능선 상에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동암문을 세웠고 서쪽 방향 정문인 대서문을 비로서 세운다. 그리고 계곡에 수문을 그 위로 시구문을 세운 후 원효 주능이 끝나는 부분에 북문을 세웠다. 의상능선 방향도 험지지만 원효봉 능선 역시 험한 곳이다.
V자 꼭 지점이 대남문이다. 문수봉 옆에 있다하여 문수문이라 불렀던 적도 있었던 문이다. 조선 영조시대 대남문으로 바뀌며 새롭게 누각도 설치되면서 북한산성의 반듯한 정문역활을하게 된다. 국난이 발생하면 왕은 궁을 버리고 피난하기 위하여 만든 행궁이 바로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 내부에 만들어진 행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대남문이다. 대남문까지 동선은 길지만 성문으로만 친다면 가깝다. 사실은 대남문 오른쪽에 있는 대성문이 가장 가깝기 때문에 국왕이 북한산성 시찰을 할 경우에는 주로 대성문을 사용하여 행궁으로 나갔었다.
태평로에 서서 북악산 뒤를 보면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보현봉이다.
우리들이 오르는 방향은 세검정의 풍광을 돕던 물줄기의 시원이였다. 서울이 팽창되면서 계곡의 수량이 70% 이상 줄었지만 이 계곡은 사시사철 물이 넘치던 계곡이었다. 어느곳에 앉던지 물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계곡에 철철넘치는 물은 초목을 푸르게 도왔었다.특히진관사와 갈라지는 계곡은 수량이나 풍광이 뛰어난 곳이라 여름철만 되면 피서객들이 넘쳐났었는데..... 또한 북한산 주능이 보현봉 줄기에서 끝나면서 다시 이어지는 문수봉 부터 의상 주능, 그 주능의 시발점인 문수봉은 부처님을 좌우에서 협시하는 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이름을 빌린 봉이다. 그리고 부처님을 모신 곳이 바로 문수사다. 문수사는 오백나한을 부처님이 거느리는 오래된 절집이고 대웅전 뒤에 석굴에는 질이 좋은 샘이 있다.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보는 일몰의 아름다움은 압권이었는데.. 한강 물줄기 따라 인천 앞바다로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우이동에서 걸음을 시작하여 이곳에 도착하여 저녁노을 보고 길고 긴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구기동에서 세검정까지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기도 하였는데 이 후 복개를하여 그 풍광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며 올랐다. 옛적엔 단숨에 문수봉까지 올랐지만, 지금,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몸이 초반에 빠르게 풀리지 않는 것이 장애다. 인체나 기계나 다 힘이 드는 일을 시작하려면 적응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적응력이 떨어지다 보니 긴 시간을 갖고 적응 커디션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호홉의 적응, 걸음 걸이에 필요한 각관절들의 유연성등의 컨디션을 만들어 나가야 비로서 걷기가 편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은 끊어서 걷다 쉬기를 반복하며 올라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50분 걸은 후 10분 정도 쉬고 다시 걸으며 그러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좋으나 이제는 아니다. 가파른 곳에선 30-40분 걷다 휴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오르면서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방법이 좋다.
우리들은 이러한 방식을 선택하여 올랐다. 다양한 각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천천히 기분좋은 의식을 유지하며 올랐디. 대부분 대화의 중심은 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자식들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요즈음 근황과 옛적 등반과 관련된 추억들이었다. 계곡 안부라는 지형덕분에 아직 끝물의 단풍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듯 문수사와 대남문 갈림길까지 걸어 올랐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애견과 함께 문수사까지 소풍을 다녀 가셨다고 한다. 문수사 요사채 마루방 벽에 그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동행하였던 모신문사 기자가 보내 주었다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옛 기억이 떠올라 문수사를 올려다 보았지만 이젠 이 장소에서 문수사는 보이지 않었다. 그 동안 나무들이 성장하여 가시거리가 가려 버린 것이다.
대남문으로 올라 설 수 있는 나무계단 입구다. 이곳에서 대남문까진 약 300m, 가파름으로 중간에 서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두군데 만들어 놓았다. 오르다 힘이 들면 등을 돌려 조망해 보면 주변산세가 한 눈에 찬다. 또한 도시의 빌딩 숲과 그 사이를 흐르는 한강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보현봉과 문수봉의 위용도, 문수사도 볼 수 있다. 지금은 대남문을 수리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정문으로 들어갈 수 는 없고 우회하는 계단을 만들어 놓아 걸음 품을 조금 더 팔아야 북한산성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산성 안으로 들어선 후 양지바른 숲속의 공터를 찾아나갔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누군가 모여 앉으려 만들어 놓은 나무토막과 돌 덩어리가 여러개 있어 그것을 이용하여 돋자리르 깔고 모여 앉았다.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과 반찬(총각김치) 놓고 시장끼를 챙겨주었다. 늦 가을의 느낌이 느껴졌다. 미세한 바람의 흐름만으로도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서로 보온용 쟈겟을 꺼내 입는다. 나는 애시당초 긴팔 티샤스 위에 방풍, 방수용 저고리를 입어 견딜만 하였다. 자금 시기부터 야외 활동 시 껴입을 수 있는 여벌 옷은 꼭 준비해야 한다. 벗고 다시 입는 행위가 번갈아 지속되어야 할 시기다.
식사를 끝낸 후 후식을 나눔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부터는 길고 긴 계곡길 탐방이다. 행궁터를 지나 태고사, 비석거리 산영루를 보며 계속 내려가다 수문 곁을 지나면서 시구문도 먼발치에서 보다보면 대서문 밖 마을을 만나게 된다. 구기동에서 이곳까지 도상거리는 약 13-14km 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구파발까지 나가 전철로 다시 이동하여 안국역에서 내린 후 예정한 식당으로 몰려 가 뒤풀이를 한 후 해산할 계획이다.
아직 가을을 산은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제법 단풍은 살아 있었다.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삼국이 모두 군사요지로 여겨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는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는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뒤 553년 신라가 북한산성을 차지하고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순수비가 세워진 봉우리는 비봉이 되었고 원형은 풍화작용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가므로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현재 서 있는 순수비는 원형에 충실한 모조품이다. 603년 고구려군이, 661년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함께 포위 공격을 했으나 격퇴당했다. 고려시대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1232년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다. 조선시대에는 1711년 숙종 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시켰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두 개의 국란을 겪은 후 도성의 방위를 목적으로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임금이 거처할 수 있는 행궁도 만들었다. 숙종 37년(1711)에서 착수하여 1712년 5월 완공하였다. 전란이 일어 났을 때를 대비하여 왕의 임시피난처로 북한산성내에 행궁설치를 주장한 사람은 김우향이 상소를 올리므로서 촉발된다. 이 상소가 숙종에게 받아드려져 124칸의 행궁이 건축된 것이다.
서울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에는 행궁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양주목 관할이었기때문에 양주행궁이라 불렀다. 강화행궁이나 남한산성 광주행궁은 관아와 같이 있었지만, 양주행궁은 관아건물과 별도로 북한산성내에 유지했던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은 험한 산중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 숙종과 영조가 잠시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행궁에는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 부속건물 등 총 124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행궁의 구성은 가장 안쪽에는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 있고, 임금이 정사를 보던 외전이 지어져 있으며, 외전의 밖으로는 궁궐의 보조공간으로 외대문지역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전은 정면 5칸, 전체 28칸의 정전으로 가운데는 3칸은 대청마루가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좌우에는 구들을 놓은 방이 있다. 외전은 내전의 앞에 있으며, 임금이 정사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정전은 28칸과, 외행각방, 누, 청, 곳간, 대문 등 부속건물이 있다. 외전의 모습도 내전과 같이 정면5칸의 모습이었다.
이런 행궁은 처음 지어진 후 200년을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홍수로 인하여 한꺼번에 모든 전각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발생하여, 토사가 다 덮어버려, 건물의 자취는 커녕 주춧돌 하나 찾을 수 없는 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1912년 영국교회(성공회)가 대여하여 외국인 휴양소로 사용하던 행궁은 1915년 대홍수때 산사태로 말미암아 소실되고 말았다.
북한산성 행궁에 대한 기록은 북한산성과 주변의 절들에 대하여 기록한 북한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그 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하여 그 위치를 확인하고, 그곳에 지어졌던 건물들의 기단과 초석들이 발굴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1925년 대홍수가 얼마나 컸던지, 북한산성내 여러개 있었던 절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북한산성내에 있던 건물들을 순차적으로 복원하여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구파발 방향에서 북한산성으로 접근하면 만나게 되는 문이 대서문이다. 즉 서쪽방향 성문이라 뜻이다. 서문에서 계곡따라 오르다
보면 산성 안에 중간문 역활을 하는 중성문이 또 있다. 중성문을 곁에 두고 보면서 오르다 보면 계곡 안쪽으로 아름다운 루각이
보인다.지금 서 있는 것은 최근 들어 복원한 루각이지만, 이 사진은 멸실되기 전 찍어 놓은 옛 산영루 사진이다.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아름다운 이름이다. 山影樓 아래 계곡에는 밑으로 깊게 뿌리를 박고 너럭바위 형태로 퍼져 있는 곳에 潭이 있는데 이 담수면 위로 부근 산 풍경이 반영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다. 이 모습이 루의 이름을 산영루라 부르게 된 원인이다. 또한 산영루 옆으로 길이 있고 길 옆으로 비탈진 암반이 있다. 그 암반 곳곳에는 북한산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공덕비와 숙종이
북한산성을 방문하여 시를 써서 내린 것을 시의 비로 만들어 비각을 세웠었다. 그리고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축성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군 우두머리 선발과 관련된 승려들이 만든 금석문도 있다.
정조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도세지 능과 자신의 능도 그 곁에 만들면서 융릉과 건릉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능을 수호하는 절을 세우면서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 용주사에 머물던 승려들의 권세는 나날이 대단하게 변모해 간다. 북한산성을 쌓고 관리하고 경비하던 승군들이 많고 절또한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산사 곳곳에 승려들이 가득하여 이들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승도의 대표라 부르던 총섭은 북한산성내 승도들 가운데 선임되어야 하나 정조를 등에 업고 유세를 떨던 용주사 스님이 낙하산 인사로 총섭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생겨 이를 반발하여 산사를 닫고 떠나는 승도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후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되어 철종 때 이르러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동 김능내가 북한산성 승도들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한 결의로 북한 승도 절목이란 이름으로 글을 짓고 금석문을 새긴 것이다.
좌측에 있는 있는 정자가 山影樓의 모습이고 우측 비석거리에 서 있는 碑閣이 바로 숙종이 쓴 시비 세운 비각이다.
이 사진이 북한 승도절목(北漢 僧徒節目)을 새겨 놓은 암반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영루 앞에 있는,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僧營寺刹) 지휘자인 도총섭을 뽑을 때 적용할 규칙 3가지를 기록한 금석문이다. 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 승도 절목(北漢僧徒節目)
북한 산성은 국가 안위의 중지(重地)이니 사찰을 창건하고 승도를 모집함이 어찌 쓸 모 없어 그러한 것 이겠는가? 그것은 본디 산성을 수호하고자 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 거 늘, 근자에 승도는 흩어지고 사찰은 피폐해져 아침에 저녁의 일을 보장하지 못할 듯하니 대체 어찌 된 까닭인가?
대개 승도들이 척박한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들의 바라는 바가 오직 총섭(總攝) 한 자리에 있어서 그러한 것임에도, 매번 교체될 때 마다 성 밖 승려들이 자리를 노리는 폐단이 빈번하게 있었다. 이로 인해 승도들이 굳건한 뜻이 없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니 이는 일의 형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총섭의 교체시기를 맞이하여 만약 그 규정을 분명히 밝혀 영구히 이어지도록 하지 못한다면 어찌 승도들을 위무하여 수호의 책임을 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군왕의 승인을 받은 규정은 정중하게 받들어 시행하는데 그 도리가 있으니 어찌 감히 소흘히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절목을 만들어서 바위에 새기니, 이에 따라 시행하여 송사가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번, 총섭의 자리가 비어 후임자를 세울 때는 이번의 예에 따라 먼저 향통(투표함)을 받고 권점(기표)을 행한 후에 거두어들여 점수가 많은 이에게 후임자리를 주어 공평 무사한 뜻을 알게 하며
이번의 이 정식은 진실로 승도들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총섭은 이렇게 절실한 마음을 헤아려 사찰의 폐단을 바로잡고, 공적인 것을 받드는 일을 극진히 노력하여 앞으로 실질적인 실효가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을묘년(1885) 5월일. 사동 김 등내( 寺洞 金 等 內)
이 사진은 노적봉 아래에 있던 태고사와 중흥 사의 부근 모습이다. 산림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당시의 숲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노적봉 뒤로 보이는 산이 만경대고 만경대 좌측 상단으로 보이는 작은 암봉이 바로 백운대가 살짝 보인다. 그리고 사하촌 성격의 초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북한산 숲의 황폐한 모습은 꼭 조선 말기 쓰러져 가는 국운과 피폐한 사회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 진다. 유교에 눌려 기를 피지 못한 불교는 도시 선교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산사로 숨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억불 정책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난에 어려울 때 과감하게 병기와 죽창을 들고 전쟁에 나선 사람들은 승병들이 많았었다. 남한산성의 북쪽 성벽 축성은 거의 승병들이 하였고 이 후 관리에도 적그 참여하게 된다. 남한산성 곳곳에 절이 세워지게 된 동기다. 이와 같이 북한산성에 있던산사는 엄청났다. 서암사, 중흥사, 태고사, 상운사, 진국사, 봉성암, 국녕사, 용암사, 원각사, 원효암, 보광사, 보국사, 부왕사 총 13개의 사찰이 북산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모여 있던 승도들의 책임자 도총섭을 뽑는 것을 북한산성내에 거처하는 승도들 중에서 뽑아야 하는데 외부에서 내려 온 낙하산 인사에 승도들이 물러서지 않고 송사를 함으로써 많은 불편이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며 궐기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승도 절목이란 금석문인 것이다. 행궁, 사찰 13개, 군창 3곳, 우물 99개를 책임지는 북한산성내 승영사찰 지휘자인 대총섭을 뽑을 때 지켜야 할 규칙 3가지에 대하여 화강암에 가로 226.5cm, 세로 107.5cm의 규격으로 새겨 놓았다.
비석거리에 세워져 있는 것들은 대부분 숙종의 소실된 비를 제외하고는 현존하고 있는 비의 숫자는 총 26기로 이 중에 옥개석을 모두 갖춘 것은 몇 기 되지 않으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비문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본 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이다.
조선시대 숙종 1711에 고려시대 중흥산성 행궁을 기반으로 축성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문에서 용암문까지, 원효능선은 훈련도감에서, 용암문에서 대남문까지 산성 주능선은 금위영, 대남문에서 수문까지 의상능선은 어영청에서 책임지고 축성하였지만 노역에 참석한 인원은 승도들이 많았다. 축성의 길이는 11,600 미터이며 내부면적은 494,516 평방미터다.
북한산성 축성과 관련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첫댓글 호연지기의 북부동맹군의 산행 일기 넘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안 ~샘 이 글을 제 메일에 한장 보내 주실 수 있나요 북한산의 역사와 개요를 알 수 있겠습니다
지난번 삼각산행도 넘 유익한 정보가 많습니다~~~~
서울 근교 산과 경기도 산을 중심으로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합니다. 북한산이 끝나면 도봉산, 다음은 수락산, 그 다음은 불암산과 아차산, 그리고 남한산, 앵자산, 관악산, 청계산, 운악산, 명지산, 마니산, 등으로 옮겨 나가려 합니다.
ㅎㅎ 핸드폰에서 직접 열 수 있으니
멜로 안받아도 되겠습니다
잠간 머리가 회전이 안됐었네요~~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러하시군요. 손 전화기로 ~~~~ 더 더욱 열심히 글을 올리라는 준엄하신 격려로 알고 노력을 더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든든하신 독자를 확보하니 든든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