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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에 대하여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녀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만 6살 때까지
살았습니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낙동으로, 이후 강원 김성, 경기 부평, 안양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조선인인 첫 신학생
1836년 2월 6일 경기 부평에 살던 15살 최양업은 구산에 기거하시며 사목하시다 한양성 내 배다리부근 사제관
으로 옮기신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습니다. 이후 중국 서만자 출신으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길을 안내했던 서만자와 마카오 사이의 파발꾼
투안 마리아노와 첸 요아킴이 세 신학생을 데리고 6개월의 여정 끝에 마카오까지 갔습니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한 세 신학생에 대한 신부들의 평가는 무척 좋았습니다. 교장 칼르리
신부는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로서 바람직한 덕목인 신심,
겸손, 면학 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곧 닥쳤다. 그해 11월 27일 최방제가
열병으로 숨졌으며. 또 마카오 민란으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과 김대건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습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기해박해(1839년)로 아버지 최경환이 서른다섯의 나이로 순교하였으며. 또 이듬해인 1840년 1월 31일에는
어머니 이성례마저 순교했습니다. 이 사실도 모른 채 최양업은 피난지 롤롬보이에서 아버지에게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냈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 입국로 개척자의 소명
김대건이 1842년 2월 마카오를
떠나고,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르게 됩니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김대건과 함께 신학 교육을 받고 1844년 12월 소팔가자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1808~1853)에게 부제품을 받았으며,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다 1846년 겨울 그해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ㆍ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습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1839년)· 병오년(1846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됐습니다. 그해 7월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4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서해 고군산도 인근에서 난파하는 바람에 상해로 돌아갑니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습니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한국인 최초 해외 선교사 토마스 신부님!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다섯
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습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로, 차쿠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지로 기록됩니다.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 까지입니다.
길 위의 사제로서 소임을 다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최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후.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조선에서의 첫 성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습니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우리말 교리서와 기도서 출간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합니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고.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습니다.
땀의 순교자의 선종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갔습니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습니다. 그의 나이 만 40살. 조선에 들어와 사목 한 지 11년
6개월 만이었습니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에 안장됐습니다.
최 신부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었으며, 베르뇌 주교는 1861년 9월 4일자 서한에서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지금도 신부님은 배론 황사영 토굴 위 산중에
누워 계시며 한국교회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최양업신부의 여덟번째 편지 중 첫 편지.
절골에서 1851년 10월 15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조선에서 신부님께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1850년 5월 10일에 신부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금년 2월에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제 편지를 신부님께서 받으시기를 간절히 희망했는데 이제 신부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배달부들이 매달 신부님들에 대한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 다 줄 날이 언제 즈음이나 올까요? 모든 분들이 지금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이 무사하시고 만사에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가련한 우리 조선 포교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인자로 그럭저럭 잘 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박해에 들볶이지는 아니하고 그런대로 안정을 유지하고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에 추천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내 드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 되겠습니다마는 한마디도 없이 잠자코 있지는 못하겠고 신부님께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년에는 지난해보다 일찍 10월 부 터 공소 순회를 시작하여 저의 관할구역 전체의 순회를 8개월 안에 끝마쳤습니다. 짧은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전교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 열심을 일으키고, 성사를 받고 감격 해하는 모양은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런 천상 보화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습니다.
공소 순회를 하려고 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마터면 공소 순회 여행을 중단할 뻔하였습니다. 어떤 여관집 주인 내와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밉살스러운 자기 남편을 골탕 먹이려는 심보로 그 여관에 12명의 서양 사람들의 유숙하였다고 떠벌렸습니다. 즉시 그 여인과 남편이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서양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비밀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전국적으로 퍼졌고 그래서 저는 공소 순회를 일단 중단하고 조금 안전한 고장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그 허황된 소문은 가라앉았고 지나친 공포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공소순회를 마쳤습니다. 작년에는 사탄이 너무나 큰 소란을 일으켜서 저는 부득이 교우촌을 두 군데나 순회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는 사탄이 저에게 마주쳐 오지 않았습니다. 다블뤼 신부님은 언제나 신병을 앓아서 여러 교우촌을 순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약한 어깨에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소를 급하게 순회하느라고 통상적 성무를 너무 서둘러 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강론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희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을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 식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마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주어야 합니다. 그 반면에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순회의 모든 것을 끝마치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교우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곳에 단지 두 집이 있었는데, 한 집은 가족 중 일부만 신자였고 한 집은 가족 전부가 외교 인이었습니다. 신자는 겨우 3명인데 남자가 한 명이고 여자가 두 명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성사를 받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양반 신분이어서 집 밖에 나가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에 이 두 여교우들은 성사를 받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가야만 했으나 그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하여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한 가지 계책을 궁리해냈습니다. 외교인 집의 남편에게 그럴듯하게 어떤 사업을 제안하고서 얼마 동안 외 출 시켰습니다.
그 외교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제가 그 여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신자들이 손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외교인 집의 여자들에게 하루 동안만 집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비어 있는 그 외교인집을 임시 공소집으로 차리고 밤중에 외교인들이 잠든 동안에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았습니다.이처럼 우리가 할 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 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비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거짓말로 폐를 끼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그 자리에서 모두가 순교로 끌려 가고 야 맙니다. 신부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실 때 우리의 성사 집행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배교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전혀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고 있으므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비신자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가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씨라는 매우 지체 높은 양반이 입교한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그때에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충청북도 보은 지방의)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양반이 신자들이 사는 근처 골짜기에 살고 싶어서 집을 지으려고 그곳에 왔습니다. 그때 마침 우연히 신자 마을이 몽땅 화재로 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조씨는 즉시 그 마을에 가서 화재를 당한 신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보기에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마음이 동요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서도 신자들이 평온한 낯으로 태연하게 있는 것을 본 조씨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탄복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왜 그러 한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물었더니 신자들은 (양반이 질문한 까닭에 평민이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말로 대답은 하였으나 신앙에 대한 것만큼은 털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답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조씨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들이 무슨 도를 믿는구나 하고 눈치 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야 화재를 당하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꼬치꼬치 캐어물었습니다. 그때서야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씨가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여 곧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고,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며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넘어야할 태산이 너무나 험준했고, 깨뜨려야 할 장벽이 너무나 두터웠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위패를 많이 모시고 있었고 친척들과 친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최후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선 온 집안 식구들을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대어 여러 곳에 분산시키고나서 자기는 산골에 지은 그 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몇몇 신자들을 데리고 자기가 전에 살던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믿게끔 꾸미고 그 집과 우상들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씨는 마치 실성한 것처럼 꾸미고 사회 생활을 떠나 친척들과 친구들 과의 교제를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게 되었으니 여러분도 모두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주시요." 하고 선언하였습니다.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 지웠습니다.
조씨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학자요,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갈 희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씨는 동생을 신앙의 첫번째 동참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를 신자들에게 인도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자기의 세속적 지식만을 과신하고서, 진정한 지혜를 듣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또 비록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갖 오류와 기만의 궤변으로 천주교 교리를 뒤엎으려고 기를 썼고, 오로지 자기 형 바오로를 배교 시 킬 일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법도에 따라 동생들은 맏형을 아버지 대신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바오로는 형이기 때문에 동생은 형에게 난폭한 행동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더 음흉하고 강력한 압력을 썼습니다. 동생은 자리에 누운 후 "나는 형님이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맹세를 하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사지도 않겠습니다." 하고 굶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식한지 8일이 지나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바오로가 다급히 달려가서 동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왜 이 다 지도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내가 멍에목에 가지 않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냐? 그럼 내가 그리로 안 갈 터이니 안심하여라. 어서 일어나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목숨을 회복하여라."고 타일렀습니다.
사악한 동생은 되살아 나기는 했으나 자기의 먼젓번 계략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서 자기 형을 입교시킨 신자들에게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악으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나는 포졸들을 불러 너희를 몽땅 잡아 결박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고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애써 시작하였던 농사일을 팽개쳐 버리고 공소집을 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참혹한 궁핍 속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변변치 않은 사소한 원인이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큰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비신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더 잘 소상히 듣고 알며 신자들을 더욱 쉽게 의심합니다. 그들은 모함과 악의에 찬 중상의 소문만 들을 뿐이고 진실은 한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끝 -.
참고 -최양업 신부의 초기 주요 사목지는 충남 보령과 부여 경계에 있는 도앙골과 충북에선 진천 백곡, 배티, 동골, 절골이었다. 신부님의 귀국시기는 1849년이 기울어 가는 12월 하순경이다. 귀국 즉시 6개월동안 쉬지 않고 성사를 경기, 강원,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5개도를 다니며 베풀었다. 1850년 기준으로 185개소 공소가 있었는데 전체 교우촌 중에 70%에 해당하는 127개소가 바로 신부님의 담당 교우촌이었다. 실례로 1850년의 전반기인 6월 까지 20,000km를 걸어 사목에 심혈을 기우렸다. 피곤에 지친 신부님은 7월 한 달동안 부여 도양골에 머물며 휴식기를 갖고 10월 1일 귀국 후 스승이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이신 로그레즈신 신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곳을 1850년 국내 첫 사목의 중심지로 삼었다.
봄이 오면 복사꽃이 지천을 이루는 곳이라하여 도화골 즉 도양골은 주변에 삽티, 내대, 서짓골, 거칠 등이 산재해 있고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으로서 사목 여정에 필요한 중심지 였다. 1850년 후반부터 신부님은 1851년 전반기 까지 장장 8개월 기간 동안 3620명에게 고해성사를 2753명에게 성성체성사를 거행하신다. 성인 197명과 유아 54명에게도 세례성사를 주시고 비신자인 죽어가는 아이에게도 대세를 준다. 이어서 장마가 시작되는 7월에 들어 사목 여정을 마감하고 상주, 보은을 거쳐 진천 절골로 돌아 와 힘들고 고단한 짐을 내려 놓고 쉬며 스승 신부님에게 위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절골은 진천에 있는 신부님의 거처은 확실하지만 최양업 신부님의 연구에 가장 권위를 갖고 계신 차기진박사는 진천 용덕리 용진 마을 절골이라 하고( 그 이유는 절골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로 느릅실 동골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전주대 서종태교수는 백곡면 양백리 절골이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배티에서 제일 가깝고 용덕리 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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