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버린 레트로 마을, 충남 서천군 판교마을
요즘 코로나 때문에 가슴 졸이며 1년 가까이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영화 ‘박하사탕’ 설경구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전 국민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이왕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하겠다면 가장 순수했던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까? 아련했던 추억을 끄집어내고 세월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곳이 남 서천군 판교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70년대 영화세트장으로 빛바랜 간판., 다 쓰러져가는 슬래트집, 글씨가 떨어져 나간 통닭집, 허물어질 것 같은 극장 심지어 일제강점기 2층의 적산가옥도 세월과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름뿐인 레트로여행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감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서울 근교 판교신도시는 IT의 산실로 갈수록 빌딩이 높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이곳은 급격히 나이를 먹은 노신
사 같다. 板橋(판교) 즉 나무판자 다리가 있어 우리말로 널다리였던 동네였는데 판교신도시도 같은 이름이다.
같은 널다리 출신이지만 오늘날 삶은 딴판. 남루하지만 정겨운 이 서천의 판교가 훨씬 사랑스럽다. 가장 순수했던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판교면 행정복지센터 그러니까 판교면사무소에 주차하고 스템프 지도를 받으라. 재미삼아 6개 도장을 꾹 누르다보면 마을 전체를 둘러보게 된다.
넉넉잡고 1시간이면 충분한데 다 찍은 스템프 지도를 보여주면 판교마을을 예쁘게 그린 엽서를 기념품으로 받게 된다.
면사무소를 나와 걷다보면 판교중학교가 나온다. 우선 빨간 지붕을 가진 정미소건물이 외지인을 맞이한다. 벼에서 쌀로 바뀌어가는 과정과 판교사람들의 일상을 벽화로 그려 놓았으니 뒷짐쥐고 어슬렁거리며 그림을 감상하라.
동일주조장
다시 메인 골목을 따라가면 동일주조장이 나온다. 글씨를 시멘트로 붙여 놓았는데 명필이 쓴 글씨처럼 정자로 새겨져 있다. 예전 상호 아래 수동전화기 번호인 45번을 달고 있다. 관공서를 제외하고 45번은 제법 높은 번호로 당시 주조장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말해준다.
수동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수가 손으로 잭을 연결해주는데 마을 사람들 전체 번호를 암기해야만 했다. 가끔 다른 집으로 연결되어 애를 먹기도 했다. 바로 앞 지한약방은 29번.
동일주조장은 박성달, 박호성, 박종욱 등 3대가 대를 이어 막걸리를 만들어 판교사람들의 애환을 달랬다. 쌀이 귀했던 시절에는 가정에서 술을 못 담그게 단속하자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 판매했던 적도 있었다. 이곳은 쌀 방앗간과 양조장을 같이 운영했다고 하는데 남편을 위해 아낙들이 술주전자를 들고 북적거리며 수다를 떨었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를 뒤로 한 채 세월의 더께만 잔뜩 이고 있다.
골목으로 살짝 들어가면 잡초로 덮힌 까만 바위가 보이는데 현암. 판암면 현암리의 정식 명칭은 바로 까만 돌 때문이란다.
일본식가옥. 장미사진관
판교마을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을 뽑으라면 2층 적산가옥인 장미사진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살던 집으로 일본인 부호에게 일본어로 ‘천황폐하 만세, 쌀 주세요’를 외쳐야 쌀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억압과 착취가 심했다.
당시 일본인은 11명 뿐이지만 경제권을 쥐고 동면사람들 5,515명을 쥐락펴락했다고 한다. 지금도 1층은 쌀집과 장미사진관 2개의 간판을 달고 있으니 종합상가라 할 수 있겠다. 파란색 슬래이트 지붕을 가진 다락방에 오르면 판교마을 일대를 한눈에 조망이 가능해 감시초소 역살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 집 앞이 현재 판교 5일장으로 해방 후 우리나라 3대 우시장 중에 하나인 판교우시장과 세모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 일본식 가옥은 장꾼들의 숙소로 쓰였다. 코딱지만한 방에 우시장에 온 인부들이 다닥다닥 붙어 고단한 몸을 누였던 현장이다
오늘 판교 장날이라 그나마 시장은 활력이 넘친다. 핑크빛계열 알록달록 몸빼도 늦가을 바람에 춤을 춘다. 1천여마리 소가 거래되었던 우시장은 사라졌지만 벽에는 소시장의 활기찬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소를 끌고, 어루만지고 등등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포토존도 그려놓았다.
오씨네 방앗간
판교 떡방앗간은 오늘날에도 사람으로 북적. 지나갈 때 고소한 냄새가 소맷깃을 붙잡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모시장은 주로 새벽에 열리는데 서천. 비인, 한산 홍산, 임천, 부여, 공주 남포의 보부상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장미사진관 옆으로는 오방앗간. 오씨 성을 가진 주인이 운영했는데 명절에는 100명씩 줄을 섰다고 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녹슨 슬래이트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벽면이 회한을 말해주는 듯하다.
베이지색 농협창고 놓치기 아깝다. 농협의 옛 로고는 이제 페인트가 벗겨져 윤곽만 확인할 뿐이다.
판교극장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세워진 극장. ‘공관’으로 불려 졌으며, 부여, 미산, 문산, 비인, 서면 등 홍산 등지에서 이곳까지로 영화를 보러올 정도로 이곳은 중심가였다.
영화는 물론 유명가수들의 쇼 프로공연과 콩쿠르도 열렸다고 한다. 극장 앞에는 건장한 주먹들이 목에 힘을 주며 기도를 했을텐데...지금은 쓸쓸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 당시 매표구도 남아 있다.
월남전 이후 TV가 보급되면서 극장도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90년대 호신술 도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극장입구에는 ‘호신술’,‘차력’, ‘쌍절봉’의 글씨가 적혀 있는데 당시 도장을 운영했던 분이 서천군문화관광해설사라고 한다. 한번 만나 판교의 옛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긴 이 마을 자체가 근사한 영화 세트장인데 굳이 답답한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판교역
장항선이 직선화하면서 오늘날 판교역은 뒤쪽으로 밀려났으며 지금은 작은 역사 조형물만 보인다. 일제 강점기때 식량약탈과 전쟁물자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을 위해 장항선을 개통하면서, 판교장의 이름을 따 판교역이라고 했다.
이곳은 도시로 향하는 길목으로 지긋지긋한 시골생활을 벗어난 탈출구였다. 오늘날 구 역사터에 판특화음식촌을 조성해 옛 우시장 마케팅을 살려 한우를 팔고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은 아닌 것 같다. 지하철 역사처럼 생긴 신 판교역은 도심에서 700미터. 판교를 제대로 보려면 장항선 무궁화열차를 타고 내리면서 시작된다. 기차를 타길 꼭 권한다.
눈에 띄는 것은 구역사 앞의 노송. 1930년대 신봉균과 박동신 씨가 심은 소나무로 심은 사람의 이름까지 알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다.
가지는 옆으로 펼쳐있어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학도병과 위안부들이 이 역사를 통해 빠져나갔고 6.25전쟁 때는 전쟁터로 향했던 출구이기도 하다. 70년대 고향을 등지고 좀 더 나은 삶과 꿈을 안고 무작정 도시로 향했던 수많은 이들의 한과 설움. 이별과 희망을 묵묵히 목격한 나무다.
고석주 선생상
마지막 스템프의 주인공은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상. 하와이에서 독립단체 활동을 했으며 언론인으로도 활약했다. 귀국 후 1919년 군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농촌계봉운동의 선구자다
판교교회의 장로로서 동상 앞에 한쪽 벽면을 가득한 예수상이 그려진 판교교회가 있다.
맛집
판교의 삼성냉면과 수정냉면. 40년 전통으로 타지에서 찾아올 정도로 유명 냉면집이다.삼성냉면은 겨울철 추워서 문을 닫았고 수정냉면은 도토리 가루를 넣은 것이 특징으로 즉석에서 면발을 뽑아낸다. 소고기를 갈아 넣은 것이 특징인데 서울에서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색다른 맛을 낸다.
첫댓글 우와 드로잉 소재들이 뿜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