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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의 발자취
저자 정정관목사
본문 눅24:1-12
참고사항 금곡침례교회
설교내용
부활절을 앞두고 죽음의 비참함을 명상하기 김해 공동묘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움직이는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허무하고 적막했습니다. 무덤의 비석들은 한결같이 고인의 이름 석자와 임종 년월일을 남긴채 가끔 '아무개 여기 누워있다'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한편 2000년 예수님의 무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묘비명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비석에 새긴 것이 아니요 천사의 입으로 들려진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여기 계시지 않다" '여기'라고 하는 온 인류의 통곡의 현장, 우리 주님께서 그날 새벽에 무덤을 깨뜨려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것입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다시 사셨네!" 이것이 부활절 멧세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활이란 말은 두가지 원어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헬라어 원문은 '아나시스타스'( )로서 "일어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묘지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어느 그리스도인 무덤앞에 돌로 만든 성경이 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25절로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성경대로 먼저 일어나셨고 거기 누워있는 성도 역시 그의 신앙고백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영어로 이스터(Easter)로서 '봄'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엄동설한 겨울내 죽었던 풀뿌리에 봄기운으로 새싹이 돋는것 처럼 죽은 시체가 생명을 얻는 것 입니다. 또한 봄은 '빛'을 의미합니다. 십자가가 얼어붙은 겨울이요 절망의 어둠이라 한다면 부활은 새순이 돋는 봄이요 광명의 빛이라 할 것입니다.
전쟁중 독실한 그리스도인 장군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이러하였습니다. "내 무덤 앞에서 진혼곡을 불지말고 기상 나팔을 불어주시오" 구슬픈 진혼곡이 아니라, 기상나팔 이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5:16). 기상 나팔과 일어남 참으로 절묘한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최근 복음성가 중 몇년째 1위가 '일어나 걸으라'입니다. 성경은 "일어나라"라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고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셨고. 베드로도 성전미문의 앉은뱅이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였습니다. 무덤에서 울고있는 마리아를 등뒤에서 부르셨던 주님, 여러분의 이름이 오늘 아침 불리워지므로 일어나 걸으며 부활증인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새벽시간, 낮시간, 저녁시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님 뒤를 따르다. 여러가지 부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 일어나시며, 의심에서 확신으로 일어나시며,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나시며,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나시며, 두려움에서 평강으로 일어나시는 복된 부활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께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향해 갑니다. 길에서 한숨을 쉬며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에서 돌을 굴려주리요?"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해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무덤을 막았던 돌문이 옆으로 굴려져 있고 천사가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두려워 떨다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큰 기쁨속에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남아 울면서 주님을 찾다가 부활의 주님을 최초로 뵙게 됩니다. 본문속에서 몇가지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인생 최대의 질문과 답변이 들어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향해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던 질문은 죽음앞에 서있는 모든 인류의 공통된 질문인 것 입니다. 과연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 인간은 세대를 거듭해 내려 오면서 이 사망의 가시에 찔려 수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날 봄 아버지와 아들이 차를 몰고 기분좋게 들판을 달렸습니다. 어디선가 왕벌이 차창안으로 날아들어왔고 이에 어린 소년은 심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년은 치명적인 알레르기성을 지녔기 때문에 벌에 쏘인다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공포에 쌓인 아들을 아버지는 손을 뻗어 감싸면서 동시에 벌을 잡아 창밖으로 내 쫓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시 들어 왔는지 소년의 곁에서 웅웅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소년 앞으로, 다시 한번 아버지가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 손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벌의 침이 박혀있었습니다. "보이니?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벌에 쏘였으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만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요!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 앞에 이 흉칙한 돌문이 옮기워진 것입니다. 수직하던 자들은 '무서워 기절'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답변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무서워 말라... 너희가 찾는 예수는 살아 나셨느니라"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죽음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공포에 두려워 떨지만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있기에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썩을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음으로 육체는 희망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여인들은 새벽에 주님께로 갔습니다. 해가 뜬 후에 가도 될 텐데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사랑을 원하십니다. 성경은 그 사랑의 내용을 일관되게 첫 것 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식이든, 시간이든, 물질이든 하나님은 첫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첫 시간을 성부 하나님과 교제한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막1:35). 여러분 앞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요, 그래서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때 식량으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새벽 일찍이 들판에 내렸고 해가 뜨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벽에 일찍 나가지 않으면 결코 일용할 양식을 거둘 수 없습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육간에 생명의 시간 입니다. 요단강을 건널때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한결 같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문제를 해결 하였습니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쓰신 그릇은 모두 새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6-7).
셋째, 여인들의 손에 들리워진 향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여인들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드리는 일을 여러군데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구나"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여기 "기념"이란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막14:3-9). 마리아의 헌신을 주님은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하사 소돔성에서 롯을 구원해주었습니다(창19:29), 하나님은 백부장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행10:4). 이사야는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말며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으시기 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하였습니다. 헌신이 기억되고, 찬송이 기억되고, 기도를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아름답게 기억되므로 선한일에 준비된 그릇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13절 이하에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고 살다가 그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의 꿈이 좌절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등진채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이와 같이 내려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요. 주님은 오늘도 기꺼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내려가는 삶에서 돌이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통쾌한 장면이 나옵니다. 올라가는 삶은?
첫째, 성경을 배우는 삶입니다. 실망하여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고난을 받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고난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때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데,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것이었지만 무슨 뜻 인지 몰랐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는 것을 깨달느냐고 묻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고 겸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내시의 요청하에 빌립은 나란히 앉아 고난에서 부터 시작하여 복음을 전하니 그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고난은 부활과 영생으로 통하는 현관입니다.
호세아 6장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과 자기백성에 대한 예언으로서 이틀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사흘은 부활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한계인 이틀만 보고 낙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삼일을 본다면 승리가 보일 것입니다. 여기 이틀과 제삼일은 시간의 경과를 말함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다 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한 가시면류관을 고난주간에 제단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에는 가시 면류관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치우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가시나무에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절망의 순간에도 바라보아야 할 우리의 희망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가 병이들자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을 급히 오시라 청했습니다.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말씀하시고 일부러 지체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장사지낸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도착한 예수님께 마르다는 이렇게 말했습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주실 줄 믿습니다" 참 놀라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대답 좀 들어 보십시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은 아나이다" 아니 방금 "이제라도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주실 줄 믿습니다" 해놓고 마지막 날 부활은 믿지만 지금은 죽은지 나흘이라 냄새가 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님! 말씀위에 튼튼히 서므로 마지막 부활은 물론이요 지금 여기서도 수 많은 부활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길 바랍니다. 성경공부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했습니다(요8:32)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했습니다(빌3:8). 욥은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했습니다(욥23:12).
둘째, 헌신과 봉사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복하실때 눈이 열렸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 떡을 나누는 것은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한 아이의 오병이어의 헌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사람눈에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사로잡혀 축사하니 기적을 보게 된 것 입니다. 이번에 마른손들이 주님의 부활을 힘입어 활짝 펴지기를 바랍니다.
3.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안식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 사람들이 두렵고, 마귀가 두려웠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어둔밤에 문닫아 걸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도 오셨고 지금도 오셔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첫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날 저녁에 우리로 말하면 저녁 예배에 의심장이 도마는 빠졌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녁(오후)예배의 부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주님을 만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나의 상처에 넣어보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보여주면 믿겠다 했을 때 스펄죤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서 천국을 볼 수 있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날 위해 받으신 구멍난 상처를 통해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에 가까이 가면 갈 수록 천국은 크고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까지 세가지 영적 변화의 단계를 목격합니다. 1) 실패와 좌절, 사망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3)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 '기쁨' '평강'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태어나실때 요셉, 마리아, 엘리사벳, 목자들, 동방박사 모두들 이 단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유사하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탄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곧 그를 믿는 자가 새로운 영적 세계의 실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으며 사람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평강의 빛이 비췬것입니다. 주님은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 같지 않다 하셨습니다"(요14:2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한 큰 뱀이 물 속을 헤엄쳐 가면서 많은 물고기를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큰 물고기를 삼켰습니다. 이 물고기는 뱀의 뱃 속에 들어가자 "이거 깜깜해서 못살겠다. 여기서 나가야겠다" 그래서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하여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왔습니다. 그 뱀을 죽이고 나
오니까 다른 작은 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았습니다. 이 큰 뱀은 바로 죽음이라는 괴물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집어 삼키다. 예수님까지 삼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무덤을 찢고 살아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도 무덤을 헤치고 살아나오게 된 것입니다.
둘째,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허약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숨을 내 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셨습니다. 마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때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것 처럼, 부활에 대한 재 창조의 역사로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예수를 주 라 할 수 없으며,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마침내 기도에 힘쓰던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께서 바람같이 불같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하니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임하니 로마까지 목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이 루터에게 임하니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게 임하니 1885년 4월5일 부활주일 아침,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니 금곡동의 영혼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부활증인 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은사가 넘쳐야 부활을 외칠 수 있습니다. 마라아 처럼 일어나 새벽을 달립시다. 헌신, 성경공부, 저녁예배에 일어납시다. 두려움에서 평강으로 일어나시며, 부활의 기쁜소식을 전하러 일어납시다.
묵상과 기도: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우리의 죄의 결박 푸시고 부활의 소망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므로 헌신과 기도가 기억하신바 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인생 사흘길 하나님의 경륜을 힘써 배우므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성령충만으로 평강의 소식을 전하는 부활 증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