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불렸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경산부(京山府: 星州)의 예속되었다가 1143년(인종 21)에 현이 되었다. 1181년(명종 12)에 일시 폐현되기도 하였으나 1313년(충선왕 5) 주(州)로 승격하여 옥주(沃州)라 했고 경산부 소속인 이산(伊山)·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을 받아들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하고 관할도를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옥천군이 되었고, 1896년 충청북도 옥천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군면 폐합으로 청산군(靑山郡)을 병합하였고 학산면(鶴山面)·용화면(龍化面)·양산면(陽山面)은 영동군(永同郡)에 이관하였다. 1917년 내남면이 옥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29년에는 이내(伊內)·이남(伊南) 두 면을 합하여 이원면(伊院面)으로 하고 청서(靑西)·청남(靑南) 두 면을 합하여 청성면(靑城面)으로 개편하였으며, 1949년에는 옥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육씨(陸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라 전해지는데,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육씨의 연원(淵源)은 당나라에서 옥천육씨의 시조인 육보(陸普)를 8학사의 일원으로 신라에 파견하였고 그 이후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세보를 보면 육보는 경순왕의 총애를 받아 부마가 되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는데, 이로써 후손들이 관성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에 전하는 관성이 바로 옥천의 옛 지방이다. 옥천육씨는 중간 세계를 실전하여 고려 충렬왕 때 주부(主簿)를 지낸 육인단(陸仁端)을 일세조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분적종 및 분파
3세 육거원(陸巨遠)의 아들 대에서 덕곡공파(德谷公派)·목사공파(牧使公派)·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로 분파되었다.
주요 세거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원흥리
전라북도 장수군 상서면 마하리
충청남도 금사군 재원면 용화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옥천육씨는 6,259가구 총 20,17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