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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불패의 해전기록
웅천의 왜군들
조선 함대의 수뇌진은 웅천의 왜군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유인전을 꾀했다. 하지만 왜군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쾌속선들을 보내서 약을 올리다가 조선 함대가 요격하기 위해 다가가면 곧바로 포구 안으로 도망쳤고, 포구 앞까지 쫓아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좌우 산기슭 진지에서 조총 세례를 퍼부었다.
이런 식의 비생산적인 전투가 일주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 하루가 멀다않고 비가 쏟아졌고 풍랑이 높게 일었다.
왜군들이 숨바꼭질 식의 대응은 조선 함대의 장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바람과 싸워야 하는 해상 생활도 함대의 기동과 전투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이 무렵 조선 함대의 적은 사나운 겨울바다였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3일 ※
퍼붓듯 비가 왔다. 오후 8시에 비가 그쳤다. 적 토벌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들을 불러다가 이야기하였다. 정담수(어란포 만호)가 와서 인사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퍼붓다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그쳤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4일 ※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식후에 3도 군사들을 모아 약속(작전 지시)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전라좌우도 여러 장수들만이 모여서 약속했는데, 다만 우후(전라우도 소속 이정충)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포(해남군)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역시 그러했다. 이 같이 큰 적을 무찌르는 일로 약속하는 마당에 이렇게까지 술들을 함부로 먹으니 그들의 사람됨은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가덕첨사 전응린이 와서 인사하였다.
조만간 20만 왜군이 내려오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데 전라우도 소속의 우후와 일부 장수들은 아침 해장술을 과하게 마시고 술주정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상 생활, 그리고 모진 풍랑과 싸우느라 다들 스트레스가 쌓인 탓이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5일 ※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는 비가 왔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조용하므로 소포(과녁)를 걸고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 권준)과 광양(현감 어영담) 및 사량 만호 이여념, 소비포 권관 이영남, 영등포 만호 우치적 등이 왔다. 이날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사하라’ 는 것이었다. 저녁에 원 평중(원균)이 와서 보았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6일 ※
맑다. 늦은 아침에 큰 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우수사(원균)가 와서 보았다. 밤 10시에 신환과 김대복이 교서 두 장과 부체찰사의 공문을 가져와 전했다. 그들로부터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개성)를 치고 이달 6일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락시킬 것이다” 는 말을 들었다.
벽제관 패전(1593. 1. 25.) 이전의 명군의 모습이다. 조선 수군은 웅천에 나와 있는데 남으로 내려와 함께 싸울 것이라는 명군은 그후 벽제관에서 패하고 이 무렵은 개성으로 퇴각해 있었다.
조선 조정은 개성으로 후퇴한 명군을 원망했으나 3만 5천의 명군으로서는 벽제관전투에서 체험한 조총의 3교대 밀집사격이 두려웠고, 때문에 왜의 10만 대군(명나라 쪽에서는 20만으로 알고 있었음)이 버티고 있는 한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7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토록 동풍이 불었다. 이영남, 허정은, 정담수, 강응표 등이 와서 인사하였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영남수사(원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재촉하여 진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선전표신을 만나 배를 맞아들여 위의 분부를 받들어본즉,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아가 물길을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시 받았다는 단자를 써서 보내니 밤이 벌써 새벽 2시나 되었다.
2월 17일. 원균의 기함에서 세 명의 수사가 작전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의 진영에서 “선전관이 임금의 교지를 가지고 왔다.” 는 전갈이 왔다. 수사들은 서둘러 이순신의 진영으로 이동해서 발병부(發兵符)를 휴대하고 달려온 선전관을 맞았다.
선전관이 받들고 온 교지의 요지는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도록 하라!” 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명령이었다. 벽제관에서 명군이 패한 지가 20일이나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수군에게 돌아가는 전황에 대한 중요 정보를 주지 않고(못하고) 있었다.
이순신 역시 사람들의 동떨어진 현실 인식에 낙담했고, 조만간 쳐내려온다는 명나라 군대도 감감무소식이 되자 난감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거기에다 일기까지 여전히 좋지 않아 조선 함대 장졸들이 겪는 고초는 나날이 심해져 갔다.
아무튼 조정의 허술한 정보를 받은 조선 함대 수뇌진도 그렇게 믿고(조정에서 그렇게 보았기에 현지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신하된 도리이다.) 왜군들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퇴각해 가는 날이 임박했다는 가정 하에 수병들을 독려하고 부산 진출을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명군은 개성 근방에 있었으며, 육군의 김성일 경상순찰사에서는 두 번이나 공문을 보냈지만 신통한 회보가 없었다. 하지만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출동명령을 받고 출항해 온 터였기에 수사들 마음대로 귀항을 결정하기도 난감했다.
지루한 해상에서의 숨바꼭질이 지속되던 어느 날, 웅천 왜성 천수각 안에서는 왜군들이 심각한 낯빛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좌장은 웅천 일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와키자카는 부산포해전 이후 조선 함대의 부산 진출을 봉쇄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해안 기지들의 요새화 작업을 독려해 오면서 조선 함대가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와키자카가 부여받은 중요 임무는 ‘이순신 함대가 부산 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늘어져서 결국 스스로 지쳐 되돌아가게 만들라’ 는 일명 ‘사냥개 곰 몰이 작전’ 의 수행이었다.
이 작전은 구키 요시다카를 비롯, 와키자카 본인과 일본의 수군장수들이 수일간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어 구상한 것이었다.
작전의 내용은 속도가 빠른 쾌속선들로 하여금 조선 함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약을 올리다가 쫓아오면 포구 안으로 숨고, 적이 포구 쪽으로 진입해 오면 육지에서 총포 사격을 가해 적 함대로부터 포구의 왜선단을 보호함은 물론 조선 함대의 경계심을 높여서 부산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웅포의 왜군들뿐 아니라 부산으로 이어지는 주요 해안 기지들에 주둔해 있는 전 왜군 수륙군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서로가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이고 있던 어느 순간, 좌중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왜장 하나가 고함을 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냥개가 되기를 자청했다.
“소장이 나아가 흉악한 적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오겠습니다!”
“……”
좌중은 일순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이 순간에 저토록 단호하고 자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사냥개가 결정되자 그 날의 회합도 종료되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8일 ※
맑다.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세는 여전하다. 사도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 만호, 녹도 가장, 좌우 별도장, 좌우 돌격장, 광양 제2선, 흥양대장, 방답 제2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창원군 웅천면)에 복병하도록 했다. 모든 배들로 하여금 적을 꾀어내게 하니 적선 10여 척이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재빨리 먼저 나가 쫓을 적에 복병선이 뛰어 들어가 둘러싸고 각종 무기를 모조리 쏘고 놓고 하니 왜적들은 부지기수로 많이 죽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어 다시는 나와서 대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어 사화랑(창원군 웅천면)으로 돌아왔다.
2월 18일. 조선 함대는 유인전을 계획하고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삼아 거북선이 포함된 복병선단을 송도에 매복시켰다. 매복 시점은 웅천 왜성에서 송도를 바라볼 때 새벽녘의 어둠과 바다 안개 등으로 조선쪽 매복 과정을 알기 어려운 ‘이른 아침’ 이었다.
날이 밝자 웅포에 당도한 본 함대가 포구 좌우 진지들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면서 복병선단은 유인전에 돌입했다. 육지 쪽 왜군들도 조선 함대를 향해 조총으로 응사해 왔다. 하지만 사정거리를 벗어난 거리였다.
이때 포구 방파제 안에서는 곰 몰이를 자처한 젊은 왜장이 휘하의 선단을 이끌고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왜장에게 맡겨진 임무는 일단 적당한 선에서 교전을 한 후 퇴각하는 것이었다. 적의 화를 돋우는 것, 그리고 부산으로 간다면 결코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장은 상대가 이순신이라는 사실에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대와 형식적이나마 승부를 겨루게 된 사실에 온 몸이 뜨거워지는 묘한 기분도 느꼈고, 그간 이순신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도 했다고 생각했다.
왜장은 1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기지를 빠져나와 곧장 포구 앞바다에 진을 친 조선함대 쪽을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함대는 자신들이 포구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선수를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조선 함대의 유인책이라는 것은 짐작으로 알았지만 조선 함대 쪽에서 이른 새벽에 깔아둔 복병함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곰의 화를 돋우는 선에서의 교전’ 임무를 명령받은 왜장은 곧장 조선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산도에서의 해전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순신은 저렇게 달아나다가 어느 순간 선수를 틀어 자신들을 포위한 후 공격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인근의 섬 어디엔가 복병 함대를 숨겨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속력 면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 징후가 포착되는 즉시 도망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선수를 틀어 포위 공작으로 나올 줄 알았던 조선 함대는 웬일인지 송도를 지나 멀리 외항으로 빠져나갈 듯이 노를 재촉하고 있었다.
왜장은 갑작스러운 자신들의 대공세에 적들도 순간 크게 당황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이 서자 왜장은 지난날의 수모를 떠올리며 그때의 빚을 조금이나마 되갚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욕심이라고 해봐야 도망치는 적을 약 올리다가 안전하게 되돌아간다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은 천하의 이순신을 쫓고 있으며 이것은 실로 흥분되는 사건이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모종의 계략을 준비했을 수도 있는 이순신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곰의 화를 돋우는 소기의 목적’ 은 달성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왜군들은 총성을 울리면서 조선 함대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선봉에 선 자신들의 대장은 어쩐 일인지 추격을 독려할 뿐 도무지 되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왜장을 좇아 추격에 나선 왜군들은 기함의 움직임에 불안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고, 혹시 어디에선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적의 복병선들에 대해 경계의 끈을 바짝 쥐었다.
이렇듯 경계심을 가지고 송도를 지날 무렵, 걱정했던 대로 조선함대의 복병선들이 군악을 울리며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경상우수영 소속의 선단이 먼저 앞을 가로막자 화들짝 놀란 왜군들은 황급히 배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전라좌우수영 소속 복병선들도 달아나는 왜선단의 퇴로를 차단했고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거북선들도 공격을 시작했다.
사력을 다해 탈출을 시도하던 왜군들은 바다로 떨어지거나 갑판에 나뒹굴었다. 7~8척의 왜선들은 몰살의 위기를 넘기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가 기지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왜장선을 포함해 왜장을 구하기 위해 다가온 3척의 왜선에 타고 있던 왜군들은 사투를 벌이며 끝내 기지로 돌아간 격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탄환에 맞아 죽었다.
※ 《토적장》 1593년 4월 6일 ※
그런데 18일 싸움에 좌별도장 신의 군관 주부 이설,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적선 3척을 끝끝내 쫓아가서 3척에 타고 있던 100여 명의 왜적을 모조리 쏘아 죽였습니다. 그 가운데 금빛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자가 큰 소리로 외치며 노를 재촉하다가 피령전을 맞아 곧 배 안에 엎어졌으며, 거의 그 배를 온전히 잡을 수 있었으나 깊이 들어간 뒤라 더 쫓아가기는 어려웠으며…
간신히 목숨을 건져 기지로 돌아간 왜군들은 살아서 귀환한 것을 하늘에 감사하면서도 같이 도망해 오지 못한 대장의 생사 여부를 놓고 크게 상심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들의 대장선이 2척의 배와 함께 기지로 돌아왔다.
왜장은 포화를 혼자서 얻어맞은 듯 만신창이가 되어 갑판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날카롭고 짧은 편전들이 박혀 있었고 왜장의 주위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대장과 전우들의 죽음을 확인한 왜군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웅천의 왜군들로서는 이번 작전이 이렇게까지 큰 희생을 초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작전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날 사건 이후로 왜군들은 더더욱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19일 ※
맑다. 서풍이 크게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어 그대로 사화랑에 진을 쳤다. 남해원이 와서 보았다. 고여우와 이요가도 와서 보았다.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나빴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0일 ※
맑다. 새벽에 배를 띄우자 동풍이 약간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배들이 서로 맞부딪혀 파손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의 배를 제어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곧 호령하여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전쟁을 중지시켰다. 여러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상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흥양의 1척, 방답의 1척, 순천의 1척, 본영의 1척이 서로 부딪혀 깨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거제군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이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권준)이 한 마리를 잡아 보냈다.
왜적보다 날씨가 더 사나운 형편이었다. 평화시 같으면 수백 년 이어 오면서 쌓아온 포구나 방파제 안으로 대피하겠지만 3백여 척이나 되는 대 선단이라 강풍을 만나도 대피할 포구가 없었다.
웅천읍성과 왜성 사이에 있는 천혜의 피난처는 왜군들이 차지했고, 안골포 등지에도 왜군들이 매복해 있었다. 이에 조선 함대는 모진 비바람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면서 1개월간을 비바람과 싸웠다. 그러나 보니 환자도 많이 생겼고 배들도 많이 상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1일 ※
흐리고 큰 바람이 불었다. 이영남(소비포), 이여념(사량)이 와서 보았다. 우수사 원 영공(원균)과 순천 · 광양 등도 와서 보았다. 저녁에 비가 오더니 자정에야 그쳤다.
하루 종일 강풍이 불고 밤에는 비까지 내렸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2일 ※
바람이 조금 자는 듯하므로 다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렀다. 두 승장과 성 의병을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우도의 여러 배들을 동쪽 해안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할 것처럼 했더니 왜적들이 갈팡지팡 하는 것이었다. 이 때를 타서 전선을 합하여 바로 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을 당하게 되었는데…
2월 22일. 비바람이 잦아지자 조선 함대는 재차 웅천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웅포 서쪽의 제포와 동쪽 기슭으로 상륙전을 가장해서 적의 의표를 찌를 계획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승장 심혜와 의능, 그리고 성응지 등을 제포로 보내어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이억기 휘하의 일부 선단에게도 동쪽 기슭으로 이동해서 역시 상륙할 모양새를 갖추게 했다.
와키자카는 웅천 지역의 모든 섬과 해안을 속속들이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쌓아 올려진 웅천 왜성의 망대에서 이 모든 것을 직접 보았고, 또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일찍이 이순신의 수군이 상륙전을 전개했다는 말을 들은 바 없었던 왜군들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다의 이순신이 육지에서는 또 어떤 계교와 전술로 자신들을 우롱해 올리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걱정부터 앞섰다.
와키자카는 괜하 곰의 성질을 건드려 위기를 자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운이 따라 준다면 이순신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는 되갚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각 기지 대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하면서 자신의 결전 의지를 내비쳤다.
“명령 없이 진을 버리고 물러나는 대장들에게는 죽음뿐이다! 절대 물러서지 말라! 그리고 포구의 배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라! 우리에게는 성이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명령을 받은 왜장들 또한 전의를 다졌지만 막상 좌우 해안으로 상륙한 조선 함대 수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대포를 쏘고 화살을 날리는 등 위협을 가해오자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수십 척의 조선 함대 선단들도 포구 입구까지 진입해 들어와 군악을 울리고 대포를 쏘며 시커먼 화약연기를 토해내자 왜장들은 왜국 무사 특유의 강단으로 전의를 다잡으며 항전을 독려했다.
포구 앞까지 진입해 들어간 조선 함대는 왜선들과 육지의 왜군들을 향해 비격진천뢰와 발화탄 등을 쏘아 포구 안의 왜선단에 큰 피해를 입혔다.
수륙 양공 작전의 성공은 지쳐 있던 조선 함대 수병들에게 다소나마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듯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2일 ※
… 발포의 두 배와 가리포의 두 배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돌입하다가 그만 얕고 좁은 곳에 걸렸다. 배에 오른 적들로부터 습격당하게 된 것은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 이억기 함대를 구원하지 않은 원균
※ 《난중일기》 1593년 2월 22일 ※
곧이어 진도 상선이 또 적에게 둘러 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수사(원균)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수사 때문이다.
발포의 판옥선과 가리포의 판옥선의 충돌했고, 충돌로 인한 사후 수습으로 갑판 위에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왜군 조총수들이 갑판 위의 조선 수병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해 왔다. 또 일단의 왜군 사무라이들은 판옥선 위로 올라가 일본도를 휘둘렀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최소 300명 정도의 조선군이 생사의 기로에 처해졌을 것이므로 개전 이래 조선 수군이 겪은 최대의 피해였고, 사기와 자존심에도 큰 손상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반면, 왜군의 사기는 충천했고 그 같은 사기로 진도의 기함(전라우수영 소속)을 에워싼 채 조총을 쏘았고, 사무라이들은 사방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원균 함대는 위기에 처한 진도 상선(上船)을 보고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끝까지 구원해 내지 않았다. 이순신은 그 어이없음을 통분해 했다. 그래서 급히 우후(이몽구)로 하여금 ‘거북선+학익진 함대’ 를 이끌고 달려가서 산탄 · 피령전 · 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게 하여 진도의 기함을 구해냈다.
아무튼 이날, 조선함대는 처음에는 이겼고, 후반에는 패했으며, 저녁에는 송진포까지 물러나 사상자를 수습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3일 ※
흐리다. 원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최천보가 양화(고양 양화진)로부터 내려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도 전해 왔다.
‘음흉’ 하다고 한 것을 보면 원균은 전일 자기 부하들의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아무튼 22일과 23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원균의 문제점에 대해 메모해 놓고 뒷날의 경계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균의 문제점을 장계로 보고하거나 외부로 알린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조 때 와서 《난중일기》와 《임진장초》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면서 원균의 문제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만약 선조 때 세상에 알려졌다면 원균은 탄핵을 받았을 것이다.
‘양화’ 는 한강의 양화진이다. 이순신은 이때 최천보로부터 벽제관 패전 소식을 들었겠지만, 행주대첩 소식을 알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의주를 거쳐서 온 소식이 아닌 곧바로 전해진 소식인 듯한데, 이순신은 명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귀항의 사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
24일. 맑다. 새벽에 온양 아산과 집안에 편지를 써 보냈다. 아침에 떠나서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자 비가 몹시 퍼부어 바로 댈 수 없었다. 때문에 배를 돌려 칠천량(거제군 하청면)으로 돌아왔다.
25일. 맑다. 바람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칠천량에서 머물렀다.
26일. 큰 바람. 종일 머물렀다.
27일. 맑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우수사 이 영공(이억기)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비는 퍼붓고, 강풍은 불고, 날씨가 해전을 그만두고 모심기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이 같은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귀항을 의논했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28일 ※
맑다. 바람도 없다. 새벽에 떠나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나와서 항전할 생각도 못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부산시 강서구 녹산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원균)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던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초저녁에 아들 염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전란을 당하자 인적이 드문 섬에 숨어 살면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백성들이 있었다. 2월 28일자 《난중일기》는 그동안 원균쪽에서 이런 백성들의 목을 베어 왜군의 목을 베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한 것으로 해석되어온 대목이다. 이 같은 문제점도 《이충무공전서》의 출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무튼, 북상했던 왜군 16만이 내려온다기에 조선 수군이 개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던 시점에서 이순신의 눈에 비친 원균의 모습이다.
※ 《난중일기》 1593년 2월 ※
29일. 흐리다. 바람이 염려스러워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이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았다. 영남수사(원균)도 와서 보았다.
30일. 종일 비. 선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는데, 따지고 보면 봄장마 때문에 2월 23일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해전을 치르지 못하고 연일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조선 함대 장졸들이 겪었을 스트레스가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2일 ※
잠깐 맑더니 저녁에 비가 왔다. 방답 첨사(이순신)가 왔다. 순천(권준)은 병으로 오지 못했다.
권준이 병이 난 것도 장마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순신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는데 이때까지도 사천포해전에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2일 ※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 이응화를 불러다가 같이 한참 이야기하다가 순천(권준)의 배로 보내서 병세를 알아보게 했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종일 비가 왔다.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대장들이다. 평소 이순신을 따랐던 이들이 원균의 ‘잘못하는 일’ 을 이순신에게 털어놓았다. ‘잘못하는 일’ 이란 무엇일까?
첫째, 이순신을 모함한 일이 있을 수 있다. 둘째, 해전장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문제점(예컨대 이억기의 병선들이 위험에 처했어도 구원하지 않은 것), 셋째, 군영 관리자로서 잘못하는 것(예컨대 기함에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것) 등 분야별로 세분해서 조명해 볼 수 있겠는데, 아직 체계적으로 세분해서 조명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3일 ※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은 답청절(3월 삼짇날 돋아나는 싹을 밟는 날)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고, 그나마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로 들어온 여부조차 듣지 못하니,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순신은 명군이 벽제관 전투 후 개성으로 물러나 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후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어 답답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4일 ※
비로소 맑아졌다. 소문을 들으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송도(개성)에 이르렀다가 관북(함경도) 쪽으로 간 적들이 설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평안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벽제관 승첩 후 왜군들은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군이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설한령을 넘고 있다!” 는 헛소문을 퍼트렸고, 이 소문을 들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했다.
설한령은 낭림산맥의 한 고개로 압록강 강계 부근에 있다. 이순신은 함경도에서 군관 생활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설한령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또 가토 군 1만여 명이 그 넓은 함경도에 들어감으로써 우선 병력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가토 군이 개마고원→설한령→평양으로 간다는 것은 거리가 멀어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것은 왜군들이 퍼트린 헛소문이라 판단했고, 이 같은 소문에 속은 명군이 평양성으로 퇴각했다기에 통분해 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5일 ※
맑다. 바람이 몹시 사납다. 순천(권준)이 병으로 돌아간다기에 아침에 직접 전송해 보냈다. 탐후선이 왔다. 내일 적을 치자고 약속했다.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이순신은 군영, 권준은 행정을 맡아 오면서 두 사람은 전라좌수영의 ‘합동 군영’ 에 전력해 왔다. 그러나 원균의 행정 군영 파트너 격인 김준민 거제현령은 개전 초부터 거제현의 관아 군영을 외면하고 진주 쪽으로 나아가 싸웠기에 원균 함대는 행정적으로 뒷받침이 취약했다. 이 같은 점도 원균을 여러모로 어렵게 했다.
행정 군영의 명 파트너였던 권준이 돌아간다기에 이순신은 친히 권준을 전송했다. 순천으로 돌아간 권준은 건강을 회복한 후 전라좌수영의 군영을 돕는 행정관리에 매진했을 것이며, 이 같은 경력도 그가 뒷날 경상우수사로 승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6일 ※
맑다. 새벽에 떠나서 웅천에 이르니 적도들은 육지로 도망쳐 산허리에 진을 쳤으므로 군관들이 철환과 편전을 비 퍼붓드 마구 쏘니 죽는 자가 무척 많았다.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천에 사는 여인 한 명을 구해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오랜만에 날이 개었기에 웅천으로 가서 공격했다. 그러나 앞서 《웅천포토적장》에서 보았듯이 적들은 모두 소굴을 만들고 거기에 웅거하고 있었기에 섬멸을 기약할 수 없었다. 웅천 왜성은 해발 180m의 가파른 산꼭대기에 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축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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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상태
이순신은 《웅천포토적장》에서 ‘3월 10일 사량 앞바다로 물러나와 진을 치고 화선(火船)을 준비했다’ 고 했는데, 다음은 그 무렵의 《난중일기》이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7일 ※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초저녁에 출발하여 걸망포(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신전포)에 이르니 날이 새었다.
이억기와 화선 만드는 일을 상의하였는바, 불쏘시게 등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기에 미륵도의 걸망포를 지나 사량도 앞바다까지 와서 작업에 들어갔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8일 ※
맑다.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니 광양 · 낙안 · 방답 등이 왔다.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어영담)은 술과 안주를 준비해 오고 우수사(이억기)도 왔다. 어란(만호 정담수)도 쇠고기로 만든 음식 두어 가지를 보내왔다.
화선 준비 작업은 사량도 앞바다에서 하도록 하고 함대 수뇌부와 전투 선단은 한반도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 무렵은 제승당과 유사한 건물이 있었을 것이기에 비가 내려도 견디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9일 ※
궂은비가 종일 내렸다. 원전(원균의 동생)이 와서 보았다.
비는 여전히 많이 내렸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10일 ※
맑다. 사량으로 가는 낙안 사람이 행재소(의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송도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어 행군하기 어려우므로 날이 개기를 기다려 서울로 들어가기로 했다” 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첨사 이홍명이 와서 인사하였다.
낙안 사람은 조선 함대의 탐색선을 만나 그 배를 타고 한산도까지 와서 이순신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곳에도 비 때문에 명나라 군의 한성 탈환전이 늦어지고 있지만 비가 개면 작전이 개시된다기에 기뻐했다. 한편 《웅천포토적장》을 보면 ‘명나라 군대는 오래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부질없이 적선만 불태우다가는 필시 갈 길 없는 적이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므로…’ 하면서 귀항 길에 오른다고 했다. 즉, 이순신은 명나라 군이 아직 한성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조정에서 명령한 ‘명나라 군과 함께 왜적을 무찌르라’ 는 작전은 시기상조로 보았고, 또 농사철이 되었기에 귀항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
11일. 맑다. 본영 탐후선이 왔다.
12일. 맑다. 아침에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았다. 나대용, 김인문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식후에 우수사(이억기)와 바둑을 두었다.
13일. 비가 몹시 오다가 늦은 아침녘에야 개었다. 이수사(이억기)와 첨사 이홍명이 바둑을 두었다.
왜군, 김성일 군, 명나라 군, 그리고 조정으로부터 어떤 소식이나 움직임도 없다. 그래서 ‘숨고르기’ 는 계속 되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15일 ※
맑다. 여러 배를 출동시켜 배 만들 재목을 실어왔다.
‘숨고르기’ 기간 중이라도 장졸들을 그냥 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병선 건조를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15일 ※
맑다. 우수사와 함께 여러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았는데 우리 여러 장수들이 많이 이겼다. 우수사가 술과 떡을 만들어 왔다.
‘숨고르기’ 기간 중에 지휘부는 활쏘기 시합을 열었다. 이 같은 시합을 통해서 군심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았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
16일. 늦게 맑아졌다. 여러 장수들이 또 활을 쏘았는데 우리 장수들이 역시 이겼다.
17일. 맑다.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신경황이 와서 임금의 분부를 가져온 선전관(안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선전관은 의주→서해의 바닷길→여수→한산도로 왔는데 이것이 당시의 해로(海路)이다.
※ 《난중일기》 1593년 3월 ※
18일. 맑다. 큰 바람이 종일 불어 사람들이 감히 출입을 하지 못했다. 기 남해가 왔다.
19일. 비.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20일. 맑다. 오후에 들으니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온다고 하였다.
선전관으로부터 명나라 군에 대한 정보도 들었고, 농사철이 되었기에 모심기 문제에 대해서도 의논했을 것이다.
3월 23일부터 4월 말까지는 기록이 없지만, 4월 6일에 올린 《웅천포토적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농사철이 되었기에 교대로 귀향한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두 달 간에 걸친 작전을 종료하고 여수로 돌아왔다.
《웅천포토적장》에서 보았듯이, 이순신은 농사철이 되자 작전을 중지하고 귀향했는데 이 역시 군영 관리의 단면이다. 그 기간 중의 《난중일기》는 군영 관리 일기로서 우후 등의 술주정과 원균의 말썽 등을 기록해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해 갔다.
※ 《통선일척경복후대죄장》 1593년 4월 6일 ※
삼가 아뢰나이다.
신이 외람되이 중책을 맡은 이후로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티끌만한 공로나마 보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과 가을철에 흉한 도적이 독(毒)을 피워 수륙으로 침범함에 다행히 하늘의 도우심으로 여러 번 승첩하였습니다.
그런데 승리한 기세를 탄 부하 군사들은 더욱 교만해져서 앞다투어 돌진할 뿐 서로 뒤쳐질 것을 두려워하므로, 신이 재삼 신칙하기를,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법이라고 하였건마는, 오히려 조심하지 않고 통솔선 1척을 마침내 전복시켜 많은 죽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된 때문인바,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이순신은 자신에게도 엄격한 군영 관리를 적용했고, 이러한 수신 관리는 세계 최강의 수군이 되는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충돌한 다른 한 척은 우수영 관리의 가리포 소속 배였기에 이억기가 장계를 올렸을 것이다.
※ 《주사속읍수령전속수전장》 1593년 4월 6일 ※
삼가 상고할 일로 아뢰나이다.
신의 소속 수군이 다섯 고을과 다섯 포구이온데 흥양 현감 배흥립은 순찰사가 육전으로 데려가고 보성 군수 김득광은 일찍이 두치 복병장으로 파견했다가 다시 수군으로 귀속되었습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은 군량을 가져가는 차사원으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그 나머지 순천, 광양, 낙안, 보성 등 고을의 수령과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등의 진장들로서 모든 책임 장수를 배정했으나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런데 도 안의 왕명을 받고 군사를 지휘하는 신하(원수의 직에 있는 대신)들이 수군이 여러 장수들을 어떤 때는 육전으로 이동시킨다 하고 또 어떤 때는 명령을 들었다고 하면서 전령을 내어 분주히 잡아내고 있는바, 수군과 육군을 갈라서 배정할 뜻이 없을 뿐더러 동서로 분주하여 어디로 따라갈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명령은 이처럼 여러 곳에서 나오므로 호령이 시행되지 못하고 극성스러운 왜적은 제거되지 않았는데 대장의 지휘만 어긋나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이 되옵니다. 앞으로는 수군에 소속된 수령과 변방 장수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수군에 붙여주도록 조정에서는 각별히 본도 감사(권율), 병사(선거이), 방어사(이복남), 조방장에게 신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관내의 다섯 고을 수령들이 육군이나 명나라 군 접대에 차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하고 장계를 올렸다.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위의 장계를 해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소개하지 않아 왔는데, 군영 관리의 시각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장계이다.
다음에서 보는 장계 역시 해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이유로 학자나 작가들로부터 소개되지 않은 기록이다. 그러나 군영 관리나 리더십의 시각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장계의 내용은 5개 고을 중 하나인 광양 현감 어영담 장군의 유임을 건의한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6개월이 멀다하고 갈려 가는 탓에 자기 직무에 격물 · 치지의 도가 닦여지지 않음을 개선하고,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문신 출신의 암행어사가 어영담의 파직을 상소했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올렸다.
결국 어영담은 유임되어 그 후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아무튼 부하 장수 한 사람을 구하려고 대단히 긴 장계를 올렸는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어영담은 이순신의 부하 사랑에 감동했을 것이고 그의 리더십에 더욱 큰 신뢰를 느꼈을 것이다.
※ 《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 1593년 4월 8일 ※
삼가 품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광양에 사는 김두 등 126인의 연명으로 된 호소문에 이르기를, “이 고을 원이 번거롭게 자주 바뀌므로 새로 오는 이를 맞이하고 가는 이를 전송하는 일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장차 버려진 고을이 되게 된 차에 지금 현감(어영담)이 도임하여 민간의 질고를 묻고 행정상 폐단이 되는 점을 개혁하여 무기를 수리하고 나라를 근심하기를 자기 일 같이 하므로 전일 도망갔던 자들도 이 소문을 듣고 돌아와 모이게 되어 온 고을이 편안해졌습니다.
작년 4월에 사변이 영남 접경에서 일어나자 하동, 온양, 남해 등의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거의 다 도망가고 인심이 동요되어 모두 흩어지려고만 하였는데, 이때 만일 침착하고 도량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정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현감은 성품과 도량이 고요하고 무거우며 의심과 미혹됨이 없을뿐더러 성을 지키고 해전을 치르고 방비하는 계책을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두치와 강탄을 파수하는 일들을 한꺼번에 시행하여 적에게 항거하도록 타일렀으며(독려하였으며) 모여오는 이들을 안정시켰습니다.”
‘행정상 폐단이 되는 점을 개혁하여 무기를 수리하고 나라를 근심’, ‘성을 지키고… 자세히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 두치와 임진강 여울(강탄) 수비를 한꺼번에 시행…’ 은 광양 현감 어영담이 행정과 군영 관리에 밝은 인재라는 뜻이다.
※ 《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 1593년 4월 8일 ※
“… 그런데 지난 5월 27일 바다로 내려간 뒤에 독운어사(임발영)가 여러 고을을 순행하여 각 고을 창고를 뒤져 수량을 헤아린 후에 실어가는 것에만 전력하고 굶주린 백성들은 구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 고을에서는 인계 장부에 적힌 회계 수량 이외에 쌀, 콩, 벼 모두 6백여 섬을 평시에 늘 저축해 두고서 혹은 군량에 보태어 쓰기도 하고 또 혹은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는데도 써왔기 때문에 유위장도 그 쌀과 콩, 벼들을 모두 씨 나락과 구제하는 식량으로 쓰고 목록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독운어사가 현감이 없을 때 고을에 와서 곳간을 뒤져 목록 밖에 따로 쌓아둔 원(元) 수량 이외의 곡식을 현감이 사사로이 쓰는 것이라고 지목하여 장계를 올리고 곧 구례 현감을 차원(差員)으로 임명하여 창고를 봉해 놓으니 씨 나락과 구제양식을 모두 바라볼 수 없게(원래 용도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농사철이 얼핏 지나가 논밭이 황폐해지면 금 · 명년에 바칠 곡식은 장만해 낼 길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걱정되옵니다…”
어영담은 살림꾼이다. 평소 근검 관리하여 곡식류를 비자금 형태로 비축해 두고 군량미 · 구휼미 · 종자 등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어영담이 해전에 나와 있는 중에 회계관리에 문제가 있었고, 이 같은 문제가 독운어사에게 지적당하게 되어 창고는 봉쇄되었다. 이렇게 되자 씨 나락과 구제양식이 출고되지 못했고, 이에 ‘광양 사는 김두 등 126인이 호소문’ 을 제출하게 된 것이다.
※ 《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 1593년 4월 8일 ※
“… 또 현감은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 뒤 소용되는 양식을 대기가 어려울 것을 민망히 여겨서 원 수량 이외의 백미 60섬과 다른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배에 실어 올려 보냈으니 그가 사사로이 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여기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부관리 문제로 갈려 가게 되니 온 고을 백성들이 부모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데 순찰사는 멀리 서울 지구에 주재하여 바닷가의 백성들은 달리 호소할 곳이 없으니 속히 이 뜻을 장계하여 군사와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 주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1592년 7월 25일, 정사준이 식량과 물자를 의주 행재소에 가지고 올라갔는데, 어영담은 할당량에 추가해서 ‘백미 60섬과 다른 여러 가지 물건’ 을 올려 보냈다. 그 무렵 곤궁한 행재소 형편으로 보면 백미 60섬 등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 《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 1593년 4월 8일 ※
광양현은 영남에 접경해 있어 사변이 일어나자 인심이 흉흉해져서 모두 달아날 꾀만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영담이 이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온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옛날같이 안정되게 살도록 하였습니다.
또 여러 번 경상 · 전라도의 변방 장수로 있으면서 물길의 형세를 익숙히 알았고 계교와 사려가 남보다 뛰어나므로 신이 중부장으로 정하여 함께 전략을 의논하였으며, 여러 번 적을 토벌할 때 어영담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큰 승첩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호남 한 쪽이 아직도 완전히 보존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이 한 몫을 담당한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제 독운어사의 장계로 본직이 갈린다 하니, 곳간 곡식의 더하고 덜한 것은 신이 잘 알 수 없는 일이오나, 대개 어영담은 지난 2월 6일, 신이 바다로 내려갈 때에 거느리고 나가 거제, 웅천 등지에서 진을 쳤으므로 독운어사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각종 곡식을 창고에서 감사할 때의 모든 안건은 그 고을 유위장이 모두 맡아서 써 바친 것이옵니다.
비록 곡식 수량에 가감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어영담이 범한 잘못이 아니요, 설령 조금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어려운 고비에 의기 있는 장수 한 사람을 읽게 되는 것은 적을 방어함에 방해가 되옵니다.
어영담은 왜란 초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서도 고을 관리를 잘해서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해전에서는 여러 차례 중부장으로 참전해 큰 승첩을 세웠다. 이순신은 그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유위장이 장부 정리를 부실하게 하여 생긴 실무적 잘못을 어영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고 건의했다.
※ 《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 1593년 4월 8일 ※
더구나 해전은 사람마다 능한 것이 아니옵니다. 이런 기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또한 군사상 좋은 계책이 못 되는 것이며 백성들의 인심도 이러하니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는 그대로 그 자리에 눌러 두어 한편으로는 바다의 적을 막고 또 한편으로는 잔약(孱弱)한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도록 조정에서는 참작하여 처리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 일은 신이 품해 올릴 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찰사와 도사가 각각 먼 곳에 있고 도망가는 적군 대부대의 길을 끊어 섬멸하는 것이 오늘의 급한 일이기도 한데다가, 잔약한 백성들이 울며 부르짖는 호소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참월(월권)의 죄를 무릅쓰고 감히 품의 올리는 바입니다.
※ 《반한일족물침지명장》 1593년 4월 10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전날에도 일족(一族)에게 미치는 폐단 때문에 난리가 평정되기까지 대충 징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때 간략히 이해되는 점을 들어서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그 회답을 받은 뒤에 연유를 낱낱이 장계하였습니다.
대개 수군은 육군에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1호구 4장정 중에 도망간 자가 절반이 넘기 때문에 분부대로 백성들을 편안케 해 주자면 수자리 나갈 사람이 없게 되고, 종전대로 변방을 굳게 지키자면 백성들이 몹시 괴롭게 될 터인데, 이 두 가지 사의에서 편의(便宜)할 도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찾기 어려워서 부득이 일족 중에서 대충 징발하여 방비를 충실히 하였던 것은 이미 전부터 그렇게 해오던 일입니다.
그래서 각 고을에 죽어서 자손이 끊어진 호구에는 일절 침해(징발)하지 말고, 당자나 일가 이웃이 이것을 미끼로 삼아 기피한 자는 우선은 전례대로 명부에 올려 보내도록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독운어사 임발영이 내려온 뒤에는 일체 군무에 관한 일 및 대충 징발에 관한 일을 전혀 분부대로만 하므로, 각 고을에서는 거기에 의거하여 방비에 교대 지원하는 군사를 보낼 뜻이 없으며, 각 고을 군사와 아전들도 이에 의거하여 은폐시켜 교묘히 기피할 꾀만 내면서 있는 사람을 도망갔다,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니, 군령이 크게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군사 수효가 날로 줄어도 뽑아낼 길이 없어 연해안의 주요지대가 일시에 비게 되고, 대장이 있는 큰 진에도 문 지킬 군사가 없게 되니, 방비의 허술함이 난리가 난 곳보다 심한 편이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평시에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인진대 하물며 이 같은 큰 변란을 당한 때이오리까. 극성스러운 적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서로 겨루고 있는데, 대 부대로 도망치는 적을 무슨 힘으로 막아 죽이며, 수성(守城)을 뒷받침하는 일은 또 무슨 힘으로 조처하오리까.
일에는 경중(輕重)이 있고 시기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니 진실로 한 때의 폐단 때문에 길이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사오니 이것은 이미 지난날 경험한 바입니다.
호남 한 쪽이 오늘까지 오전한 것은 전적으로 수군에 힘 입은 바이며, 대세를 회복할 시기도 또한 이때에 있사오니, 대충 징발하는 폐단을 없게 하는 일은 난리를 평정한 뒤에 하더라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이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망령되이 아뢰오니,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는 전후 장계를 참작하시어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둘 다 편의(便宜)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충청도 함대는 강화도 막아서기 작전과 행주성 전투에 참전해 있었다. 그런데 이 작전들은 종료되었고, 반면 북상한 왜군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이순신은 충청도 함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하자고 아래와 같이 건의했다. 이순신의 이 같은 구상은 3도 수군통제영(水軍統制營) 설치로 이어진다.
※ 《호서주사계원장》 1593년 5월 10일 ※
삼가 아뢰나이다.
신은 전라좌우도 수군을 거느리고 그 전 수효대로 5월 견내량에 이르러 적의 형세를 탐색해 보았더니 웅천의 적들이 여전히 웅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산 바다 어귀를 끊으려 가려면 웅천이 길목이 되는지라, 부산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적군이 앞뒤에 있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수군만으로는 적을 끌어낼 길이 없으므로 부득이 육군과 합공하여 쫓아내어 수륙에서 섬멸하여 길목에 있는 적을 먼저 없애야 하겠다는 뜻을 체찰사(유성룡)와 순찰사(권율)에게 급히 보고하였사오니, 조정에서도 각별히 신칙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경상도는 분탕질을 당한데다가 또 명나라 군사들이 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어 격군을 채울 길도 없거니와 또 있는 사부와 격군들도 굶주리고 파리해져서 노를 저어 배를 부리기에 감당키 어려운 형편입니다.
도망가는 대 부대의 적을 섬멸해야 할 이 때 병력이 극히 외롭고 약하니 참으로 딱하고 걱정되는 바이기도 하며, 또한 적들이 도망쳐 돌아가는 것이 더딜지 빠를지도 예측하기 어렵사오니, 엎디어 청하건대, 충청도 수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은 치욕을 씻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간 충청 수군은 경기 수군과 함께 강화도를 지키면서 한성의 왜군이 한강 하류로 나와서 평양의 고니시 군 쪽으로 가는 것, 의주의 조정을 공격하는 것, 요동반도와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 서해를 따라 내려와서 전라도를 공격하는 것 등을 방지해 왔다.
1593년 1월 25일, 벽제관에서 이여송 군을 격파한 후 명군을 개성으로 밀어낸 한성의 왜군들은 2월이 되자 드디어 눈앞의 적, 권율 군을 향해 창끝을 겨누었다.
이때 권율의 군사들은 남하해 오는 조 · 명 연합군과 합세해 한성수복에 참여할 계획으로 한성에서 불과 8km 떨어진 행주산성에 주둔해 있었다.
권율은 1만의 병력 중에서 수원 독성산성에 일부의 병력을 남기고 3천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나머지 병력은 양천(서울 양천구의 안양천)과 금천(시흥) 부근에 주둔시켜 놓았는데, 이 병력은 왜군의 행주산성 공격시 왜군을 견제할 외곽 응원부대였다.
권율 군은 행주로 이동해 오자마자 성을 수축하고 산 중턱에 2중 3중으로 목책을 세우는 등 수성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또 1차 진주성 전투 이후 수성전 승전의 교범이 된 화약무기의 비축에도 만전을 기했다.
행주산성은 산성이라고 하기에는 지대가 낮은, 한강을 끼고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다. 때문에 수성전을 펴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남북을 잇는 군사 요충지로 각광받던 곳이다.
권율이 위험을 무릅쓰고 행주성에 진을 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남해를 전라수군이 차지함으로써 왜군들의 발목을 묶어 버렸듯이, 한강은 충청 · 경기 수군의 무대였던 것이다.
충청 수군은 경기 수군과 함께 강화도를 지키면서 한성의 왜군들이 한강 하류로 나와서 평양의 고니시 군에게로 가는 것, 의주의 조정을 공격하는 것, 요동반도와 명나라로 진출하는 것, 서해를 따라 내려와서 전라도를 공격하는 등 일체의 도발 행위를 차단했다.
권율의 뒤에는 왜군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던 조선 수군이 있었고, 권율은 이들 선단으로부터 화약무기 · 명사수 · 군수물자 · 전략 전술 등 많은 것을 지원받고 있었다.
벽제관에서 조 · 명 연합군을 격파하며 가뭄에 단비 같은 승리를 맛본 왜군들은 평양성과 독성산성 패전의 후유증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또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군을 제외하고는 북상했던 10만여 선봉대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기세 또한 드높았다.
표면상으로는 욱일승천하던 개전 초의 분위기를 되찾은 듯했다. 전의의 불씨가 되살아난 데 심기일전한 한성의 왜군 수뇌진은 여세를 몰아 전라 육군에게 철퇴를 가할 시점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수원의 권율 군이 한성 서쪽 강변에 위치한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 첩보에는 “권율군의 움직임과 때를 같이 하여 일단의 조선군 부대들이 금천 · 강화 · 통진(김포) 등에 포진했는데 이 모두가 명군의 한성 진출에 대비하여 아군을 교란시키려는 사전 시위로 보인다” 는 분석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한성의 수뇌진은 일제히 분노를 터트렸다.
이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첩보를 받은 즉시 각 군의 사령관들을 소집하여 행주산성 공격을 위한 회합을 주재했다. 회합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요시나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대영주급 사령관들을 포함하여 영주급 부장 20여 명이 참석했다. 조선 출정 후 한성 사령부에서 주재한 작전회의로서는 최고위급 회합이었다.
우키타의 모두(冒頭) 발언을 대신해서 이시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우키타 님께서 급히 우리들을 모이게 한 것은 전라도 군대가 코앞에까지 다가와 명군의 공격을 재차 유도한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별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명군이 발을 들여놓기 전에 저들로써 좋은 본보기를 삼는다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니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적을 소탕하기 위한 방침을 결정짓고자 합니다.”
일찍이 수원 독성산성에서 권율에게 패한 우키타가 직접 권율 군을 치자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우키타를 대신해서 회합의 목적을 설명하는 게 회의의 모양새나 총사령관의 민망함을 덜어주는데 있어서나 여러 모로 바람직하다는 게 이시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해 보였다. 승패를 떠나서 겨울 기동은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고, 대승을 거둔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다수의 대장들은 무모한 소모전에 얽매이기보다는 따뜻한 남쪽 땅, 부산으로의 철수를 희망했다. 또 몇몇 대장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간곡한 우회 화법을 써가며 표명하고 나섰다.
잠시 말문을 닫고 있던 이시다는 이 같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간단명료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들이 누구요? 바로 이순신과는 한 통속이나 다름없는 전라도 군대란 말이오! 오늘날 우리가 왜 이 같은 곤경에 처했겠소? 해전에서 잘못된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권율은 일찍이 금산 이치에서 고바야카와 님의 정병에 해를 가한 자요! 그때 우리 군이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갔다면 이순신의 무리는 벌써 섬멸되었을 것이오!”
영리한 이시다가 조선에 출병한 사령관들 중 최고령(61세)의 대영주이자 히데요시, 도쿠가와와 더불어 전국(戰國)을 호령한 바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직접적으로 물고 늘어지자 고바야카와 본인은 물론 공격을 반겨하지 않던 대장들은 모두 ‘저 교활한 이시다에게 영락없이 걸려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전에 놈들이 수원에 진을 쳤을 때, 우키타 님은 전라 육군이 올라왔다는 말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원까지 달려가 싸웠소! 왜 그랬겠소? 전라도 군대였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번에는 놈들이 코앞에까지 다가와 진을 쳤소! 하늘이 준 설욕의 기회입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자 참석자 모두는 과감하게 미련을 버렸다. 이시다가 은연중에 내세운 설욕에 대한 명분을 거스를 수도 없었거니와, 모두에게는 전라도 군에 대한 적개심이 응어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다는 모두의 가슴 속에 공통분모로 들어 있는 분노의 뇌관을 특유의 언변으로 자극하면서 결국 우키타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끌어 냈는데, 무려 7명의 대영주급 사령관이 참여하는 3만 명의 ‘초호화 공격군’ 을 편성하게 된다.
제1대 : 고니시 유키나가 |
당시 한강을 점령한 충청 · 경기 수군에는 강화도에 피난 와 있던 수백 척의 어선, 상선, 화물선단도 합류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배에 방패를 세우고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왜군들로서는 한강으로의 접근은 위험한 일이었다.
왜군의 이동을 포착한 권율은 외곽 부대들에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왜군들의 공격이 예상되는 산성 서북쪽에 화약무기들을 집중 배치했다.
권율 군이 준비하고 있던 화약무기들은 각종 대포, 발화탄과 비격진천뢰 등 투척용 무기에서부터 화차와 석포 등 새로 개발된 신무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왜군들은 성 내의 조선군의 수가 많아봐야 3천 명 정도라는 점과 행주산성이 험준한 산악 지대에 웅거한 요새가 아닌 점을 감안하여 병력 수가 10:1 규모인 3만 명이면 반나절 안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독선상선 패전을 통해 경험했듯이 전라 육군이 강력한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하나의 공격 지점을 집중 공격한다면 의외로 싱거운 싸움이 될 것도 같았다.
왜군들의 이 같은 예상은 결과적으로는 크게 빗나갔지만, 행주에 도착해서 현장을 확인한 왜장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볼 품 없는 야산진지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주특기인 돌격전과 백병전을 벌이기에도 나쁘지 않은 지형조건이었다.
특히 이번 공격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크게 강조해 온 우키타와 이시다의 눈에 비친 행주산성의 외관은 비록 동 트기 전의 명확하지 않은 실체였다고는 해도 3만이라는 병력 동원은 조금은 과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우키타는 단 몇 차례의 돌격전만으로 성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니시의 선봉부대만으로도 승부를 가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왜장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추위에 떨며 기다릴 필요 없이 신속하게 공격해서 승부를 결정짓고자 했다.
왜군들은 성을 겹겹이 포위한 채 총사령관 우키타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선봉의 고니시 군을 비롯한 각 군에서 ‘공격 준비 완료!’ 를 우키타에게 보고해 왔다.
그 순간 우키타의 귓가에는 이미 승전고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전 패배에 대한 설욕, 전라도 군대에 대한 앙갚음, 추후 명과의 강화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게 해 줄 업적, 히데요시로부터 부산으로의 철수를 재가받기 위한 명분 등,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현재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여러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었다.
말없이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우키타는 ‘쌩!’ 하는 새벽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천추의 한이 될 사건의 시작을 포효하듯 열어 제켰다.
“제1대 돌격!”
선두에 선 고니시 군이 장창과 일본도를 뽑아들고 목책이 세워진 외곽 진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조선군도 일제히 화살과 대포, 각종 화약무기로 맞섰다.
지축이 흔들릴 만큼 강력한 폭발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조선군의 강력한 응전에 질려버린 고니시 군은 목책을 돌파하지 못하고 얼마되지 않아 후퇴해 내려왔다.
단 한 차례의 돌격전으로 고니시 군 진영에는 사령관 고니시가 부상을 당하는 등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상 외의 결과에 왜군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2대 돌격!”
이번에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제2대가 돌격해 들어갔다. 이시다는 돌격용 방패를 더욱 촘촘히 세우게 해서 돌격전을 지휘했지만 방패로는 조선군의 가공할 화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비격진천뢰를 포함한 각종 투척용 화약무기들은 왜군 진영 전방은 물론 후미와 중간 어디든 가리지 않고 폭발했고 견고해 보이던 왜군 진형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이시다 군 역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 내려왔다.
왜군들의 돌격전은 날이 밝자 보다 조직화되어 더욱 거세게 이어졌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날 때까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목책도 돌파하지 못했다.
약이 오른 우키타는 각 대장들에게 보다 대담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 차례가 오자 모범을 보이려는 듯 최선봉에 서서 돌격을 이끌었다. 그러나 어깨 부위에 부상을 입고 또 다시 후퇴해 내려와야 했다.
총사령관이 부상을 당하자 각 대장들은 저돌적인 파상공세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키카와 히로이에 등이 추가로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쉴 새 없이 돌격전을 감행한 끝에 오후 4시경부터는 성 외곽에 쳐 놓은 목책선 일부를 돌파할 수 있었고, 왜군들은 그 틈을 비집고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시작했다. 이즈음 화살과 화약무기가 바닥난 조선군도 백병전과 투석전으로 사투를 벌였다. 부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 우키타는 전세가 유리해지자 즉시 전군에 총공격령을 내리면서 “포로는 필요 없으니 모조리 죽여 버려라!” 며 권율 군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총공세로 나선 왜군들은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살려 승부를 결판낼 듯한 기세로 조선군을 몰아붙이며 성 앞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성이라고 해봐야 공성용 기구가 필요 없는 토담과 목책 형태로 쌓여진 높지 않은 성이었지만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왜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왜군들의 머리 위로 느닷없이 다연발의 신기전과 산탄, 그리고 편전 등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또다시 왜군들에게 떼죽음을 안겼다. 위기의 순간, 충청수사 정걸이 배편으로 화살과 화약무기를 싣고 응원해 왔던 것이다.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왜장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한성으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우키타, 이시다, 고니시 등 사령관들이 부상을 당한데다가 2만 명이 넘는 초유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왜군 진영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한강을 뒤덮고 있는 수백 척의 조선 선단과 이 일대 어디엔가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조선군의 움직임도 왜장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오후 6시경, 왜군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 불을 놓고는 부랴부랴 철수를 시작했다.
행주산성전투 후, 권율 군은 충청 · 경기 수군의 병선으로 한강 하구에서 임진강으로 올라가 파주로 이동했다. 왜군들은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긴 권율 군을 재차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권율 군이 행주산성에서처럼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 두려웠고, 임진강 역시 화약무기로 중무장한 조선 수군의 선단들이 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율 군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고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조선은 한성 이북의 실지(失地)들을 모두 수복하게 되었다. 반면 한성의 왜장들은 속절없이 속만 끊여야 했다. 한성의 왜군들에게는 예전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의 점령지는 모두가 꿈에 본 땅이 되어버렸다. 전라도에 대한 공격도 모두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또 조선 수군이 강화도를 근거지로 삼아 한강과 임진강을 막아선 지가 근 1년이나 되었기에 식탁에서 해산물을 구경한 지도 아득하기만 했다. 이제는 소금이 없어 밥을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으며, 그나마 군량미도 4월 말이면 바닥이 날 상황이었다.
한성 사령부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급히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남해안으로의 퇴각을 명령했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추구하는 전격작전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공(神功)황후의 한반도 군영을 이어받으려던 히데요시의 꿈이 무산되었음을 뜻했다.
히데요시의 전격적인 퇴각령으로 위기를 맞은 것은 당시 한산도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함대였다. 이에 이순신은 사태를 직시하고 강화도 막아서기 작전을 끝낸 충청 수군의 한산도 합류를 조정에 주청했다. 이로써 3도수군통제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 견내량 봉쇄
현대그룹의 고 아산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건설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쉬운 듯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요소들을 안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의 풍신수길은 성 쌓는 일을 맡아 아주 빨리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윗사람의 눈에 띄어 출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건설업이란 종합적인 여러 가지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성 쌓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이면 다른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발탁되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20세기 건설 달인(達人)에 의한 16세기 건설 달인에 대한 평가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전국 전란 때에 3, 4천 명 정도의 병력이 수비하고 있는 성에 10~20배의 병력으로 공격해서 성을 조기에 함락시키곤 했는데, 오늘날 일본의 전사 연구가들은 이를 ‘히데요시의 전격작전’ 이라고 부른다.
개전 초 고니시 군 1만 8천 명, 가토 군 2만 8백 명, 구로다 군 1만 2천 명이 한양을 향해 경쟁하듯 북상했는데, 이들 선봉군의 병력을 합산해 보면 약 6만 명이다.
이 같은 대병력이 북상을 하자 1~2천 명이 수비하고 있던 조선의 읍성과 산성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는데, 이 역시 히데요시가 단행한 전격작전의 결과였다.
행주대첩 이후 왜군들의 남하 역시 전격전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남해안에 16만이라는 대병력이 집결되자 히데요시는 일부의 병력으로는 진주→하동→전라도를 침공케 하고, 다른 일부는 견내량→여수→전라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 역시 전격작전의 개념이다.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공을 위해 이미 임진년 가을과 겨울 몇 차례에 걸쳐 작전을 지시한 바 있었다. 그리고 계사년 봄이 되자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 부산에서 김해-웅천-창원을 경유하여 진주에 이르는 보급로가 차단되지 않도록 중간기지형 성을 쌓을 것.
2. 전날 진주성 공격의 실패를 거울삼아 진주성 공격시 공성용 자재와 토성 쌓을 준비를 철저히 할 것.
3. 진주성 공격시 아군의 희생은 최소화 하되 조선 쪽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도륙할 것.
4. 진주성 공략 후 해안에 성을 쌓든지 아니면 성을 쌓기 전이라도 신속히 전라도를 평정할 것.
5. 부산, 웅천 등지에 약 20개의 성(본성 및 지성)과 토치카 구축을 신속히 완료하고 각처마다 철포, 화약, 소금, 간장, 부식용 창고와 1만 섬 규모의 양곡용 창고를 추가로 건축할 것.
6. 병력이 집결되면 공격과 축성을 신속히 추진할 것. 만약 이를 지연시킨다면 내가 직접 건너가서 책임을 물을 것이니, 절대 속이는 일이 없게 할 것.
7. 이번 작전의 성패는 수군의 활약 여하에 따라 결정될 것인바, 반드시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전라도 및 서부 해안에 대한 거점 기지를 확보할 것.
8. 전라도 공격과 성 축성에 관한 사항은 그때그때 보고할 것. 내가 그 순서와 완급을 결정할 것임.
9. 조선에 있는 모든 선박은 이곳으로 보낼 것. 식량과 병력을 보낼 것임.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남해안으로 왜의 수륙군 16만이 구름처럼 모여 들고 있을 때, 명나라 군은 이여송의 3만 5천 군 외에는 대부분이 사령관과 선발대만 도착해 있었고, 그나마도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중된 왜군의 전력과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남해안에 집결한 왜군들이 진주성 공격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명나라 부총병 유정은 선발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대구에 왔다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다음과 같은 엄포성 항의로 진주성에 대한 공격 철회를 요구했다.
“조선 8도는 전란의 참회가 참혹한데 무슨 원수가 졌기로 작은 진주성을 치려는가! 작은 일에 구애되어 어찌 중국에게 죄를 지으려 하는가! 이제라도 생각을 바꾸어 본토로 돌아간다면 나는 병력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이는 왜국에게 신뢰를 잃지 않는 바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100만 대군을 전함에 싣고 와서 연해안의 양도를 끊어 너희를 굶어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또 이여송의 유격장 심유경도 강화회담 차 부산에 머물고 있던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진주성 공격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진주성 공격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오. 이 일은 가토가 다이코 님에게 강력히 건의해서 결정된 것이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소. 그러니 진주성을 비워 놓고 싸우지 않는 것이 피차 좋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심유경은 고니시의 말을 조선 조정에 전해 주고는 그 후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진주성을 빼앗기면 그 다음에는 전라도를, 또 그 다음에는 조선을 빼앗기는 것이었기에 결코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육군 쪽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한성의 왜군들은 퇴각할 때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선산→의령 등 낙동강 연안을 따라 내려왔다. 조선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도원수 김명원도 왜군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약 1만 군을 이끌고 선산까지 뒤따라 내려왔다. 이때 경상감사 한효순은 의령에 먼저 진을 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6월 6일 김명원을 해임하고 전라감사 권율을 도원수로 삼았는데, 권율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그 후 30여 일이 지난 후였다. 권율과 전라병마사 선거이가 이끄는 전라 육군 5천, 그 외에 경상감사 한효순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충청병마사 황진, 경기병마사 고언백 등이 거느린 3~4천의 육군은 창원과 함안 등지에 있다가 6월 16일 왜의 대군이 몰려오자 크게 당황했다. 이에 곽재우의 의병들은 북쪽으로 퇴각했고 권율 군은 전라도 쪽으로 물러났다.
※ 《축왜선장》 1593년 7월 1일 ※
삼가 아뢰나이다.
신이 지난 5월 7일에 바다로 내려서서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도 우수사 원균 등의 수군과 합세하여 거제 땅 흉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명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육군이 창원, 웅천으로 들어가 쳐서 그곳에 웅거해 있는 적을 바다로 몰아낸 다음, 수륙으로 함께 쳐서 먼저 이 길목을 잡고 있는 적을 제거한 뒤에 부산으로 진격하여 퇴군해서 바다를 건너가려는 적들을 섬멸하는 일로 약속을 거듭한 지 이제 두 달이 되었습니다.
지난 6월 15일 창원에 있던 왜적이 함안으로 돌입한 뒤 16일에 적선 무려 80여 척이 부산, 김해로부터 웅천, 제포, 안골포 등지로 옮겨와 정박하였고 그 밖에도 왕래하는 배들이 부지기수인데, 적이 이렇게 수륙으로 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서쪽을 침범할 뜻이 분명합니다.
이억기, 원균 등과 함께 온갖 방책을 의논한 끝에 적의 길목인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를 가로막아 진을 벌렸습니다.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를 가로막아 진을 벌렸다’ 고 하였는바, 16만 명의 왜군과 나고야의 예비군 10만 명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웅천 · 안골포에 대한 공격에서 견내량을 막아서는 수비전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조선 수군은 2만 명인데 왜군은 16만~25만 명이었으니, 개전 이래 조선 수군이 맞닥뜨린 최대의 위기였다.
※ 《축왜선장》 1593년 7월 1일 ※
6월 23일 밤에 웅천 제포에 나누어 정박했던 적선들이 전부 거제 땅 영등포, 송진포, 하청, 가이 등지로 옮겨서 정박하여 바다에 가득 깔렸는데 동쪽으로는 부산에서부터 서쪽으로는 거제에까지 후원선이 연락부절하니(끊이지 않으니) 참으로 통분한 일입니다.
지난 6월 26일 선봉 적선 10여 척이 곧장 견내량으로 향하여 오다가 신 등의 복병선에게 쫓겨 간 후로는 다시 나오지 않으니, 오느라 피로해진 적을 기다렸다가 먼저 선봉을 깨뜨리면 비록 백만의 적병이 와도 기운을 잃고 혼이 꺾여서 도망하기에 바쁠 것입니다. 더구나 한산 바다는 작년에 적의 대부대가 섬멸 당한 곳이라 이곳에 진치고 있으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마음을 합하여 협공할 것을 죽기로써 맹세하였습니다.
6월 16일이 되자 웅천, 제포, 안골포의 왜선단은 무려 8백여 척에 달했으며 그 외에 부산에서 웅포 근해를 왕래하는 왜선단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었다.
6월 23일, 거제도의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진치고 있는 견내량으로 다가와 공격을 시도하다가 곧 물러갔다.
이순신과 조선 함대 수뇌진은 이를 유인계로 보고 뒤쫓지 않았다. 만약 쫓아가서 가덕도 앞바다로 나간다면 왜군들에게 포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 함대가 견내량을 비운 사이 왜군들이 역으로 견내량을 막아선다면 퇴로가 차단될 뿐만 아니라 나무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을 수도 없으며, 정박하고 밤을 지낼 곳도 없는 사태가 초래될 수 있었다.
조선 함대가 그렇게 시달리고 있을 때 왜군들이 여기저기에서 달려들어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면 조선 함대는 영락없이 ‘사냥개 곰몰이 작전’ 에 걸려들게 되고, 왜선에 비해 속력이 느린 판옥선은 ‘여러 마리의 개에게 농락당하는 곰’ 이 되고 만다. 정유재란 때 원균 통제사는 이 같은 계략에 말려들어 파탄을 맞았다.
※ 《진왜정장》 1593년 8월 10일 ※
삼가 왜의 정세에 대한 일로 아뢰나이다.
흉한 무리들이 화친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부터 신은 분통이 쌓임을 이기지 못하여 비록 경략(명군 최고사령관)의 ‘적을 치지 말라’ 는 패문이 있을망정 전함을 정비하여 적의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고 적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 7일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일제히 출발하여 경상도 거제 땅 견내량에 이르러 9일 동 도(경상도) 우수사 원균과도 만나 군사를 합하여 거제현 앞바다에서 머물렀는데, 충청수사 정걸도 6월 1일에 와서 같이 합세하였습니다.
한성의 왜군들이 남해안으로 철수(4월 11일)하기 전, 한성에서는 명 · 왜 간의 강회회담이 있었다. 내용은 ‘조 · 명은 남으로 퇴각하는 왜군의 뒤를 쫓지 않으며, 또 향후 왜국으로 강화 사절단을 보내기로 약속한다’ 는 것이었다.
때문에 명군 최고사령관인 경략 송응창은 협상 직후 조선수륙의 장수들에게 전쟁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선조는 수륙의 장수들에게 총진군령을 내렸기 때문에 조선의 장수들은 극과 극의 명령을 받고 매우 난감해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출동했으며, 이순신은 충청수사 정걸도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합류해 왔음을 조정에 보고했다.
※ 《진왜정장》 1593년 8월 10일 ※
적의 정세를 탐색해 보니 다만 웅천의 적들이 여전히 웅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8도에 깔렸던 흉악한 놈들이 한 곳에 모두 모여 아직도 바다를 건너가지는 않고 동으로는 부산에서부터 서로는 웅천에까지 바라보이는 1백여 리에 진지를 쌓고 성채를 얽어 벌떼 같이 개미떼 같이 모여들어 있으니, 참으로 통분한 일이옵니다.
육군의 여러 장수들에게 먼저 소굴 속에 있는 적을 쳐서 바다로 내어 몰고 합공하여 섬멸한 다음에 부산으로 전진하자고 서로 공문을 보내고 거사할 날을 고대하였는데, 지난 6월 14일 육지에서는 창원에 있는 왜적들이 곧장 함안으로 돌입하자 함안에 머물고 있던 각 도 여러 장수들이 의령 등지로 퇴각하였습니다.
15일 바다에서는 적선 대 · 중 · 소 아울러 무려 7, 8백여 척이 부산 · 양산 · 김해로부터 웅천 · 제포 · 안골포 등지로 옮겨 정박하고 연일 잇대어 오는 것이, 수륙으로 갈라서 침범할 모양임이 분명합니다.
당시 함안 지역에 있던 조선군은 권율 등이 이끄는 조선 육군의 주력과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을 합해서 약 1만 명 규모였다. 이들은 16만의 왜군이 전라도로의 서진을 위해 서부 경남 일대로 모여들자 함안→의령→진주 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왜군들의 대규모 움직임은 바다에서도 감지되었다. 7~8백여 척의 왜선들이 부산→안골포→견내량→전라도로의 진출의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히데요시의 전격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 《진왜정장》 1593년 8월 10일 ※
우리 수군들이 만약 거제도 바다 안쪽에 진을 친다면 바다 바깥쪽의 적을 미쳐 달려가 막지 못할 것이고, 바깥쪽에 진을 친다면 바다 안쪽의 적을 미처 섬멸하지 못하겠기에 거제 땅 안팎 바다로 갈라진 요충과 작년에 크게 승첩한 견내량 한산도 등지에 진을 합하여 길을 막고 겸하여 안팎의 사변에 대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달 23일 밤에 웅포 등지에 진치고 있던 수많은 적선들이 거제 땅 영등포, 송진포, 장문포, 하청, 가리 등지로 옮겨 정박했는데 일렬로 늘어서 머리와 꼬리가 맞닿았으나 우리 수군이 한산도 등지를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않으므로 적들이 일찍이 우리 수군의 위엄을 겁내어 감히 침범해 오지 못하고 육로로 견내량 해변에 이르러 진을 치고 위세를 뽐냈는데, 우리 수군들이 그 앞으로 곧장 쳐들어가 비 퍼붓듯 활을 쏘고 우박같이 대포를 놓으니 적들은 도망치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라도 공격을 앞두고 왜군들은 거제도와 고성반도 등 전라도와 인접한 해안 지대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함대가 주둔해 있던 한산도는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는 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들은 한산도를 집어 삼킬 어떠한 방책도 찾아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해협을 막아서서 일시집중타법으로 사격과 장탄을 교대하는 시스템적 사격을 가하면 왜군 함대의 선봉은 조선 함대의 화공으로 초전에 불타게 되고 해협은 막히게 된다.
설혹 상당수의 왜군 함대가 통과해서 한산도 앞바다로 나온다 하더라도 와키자카 함대가 임진년에 겪었던 패전을 되풀이해서 겪게 될 것이기에 왜군 측은 “전라도로 진격하라!” 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순신이 펼친 ‘환상의 방어진’ 에 대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야심차게 뽑아든 히데요시의 진격작전은 또 다시 좌초 일보직전에 몰리게 된다.
이순신의 ‘환상적인 방어진의 신비’ 를 해독해 낸 것은 그로부터 300년 후인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수군에 의해서였으니, 임진란 때의 왜군들로서는 상상 밖의 해전법이었다. 그래서 왜군들은 한산도를 10:1로 포위하고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끝끝내 견내량을 돌파하지 못했다.
남쪽 바다를 돌아 한산도로 진입해 가자니 그 쪽에도 ‘거북선+판옥선단’ 이 지키고 있었고, 그곳에서 요격되어 무인도로 올라갔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