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소련이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쏘아 올리다.
50년 전인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해 미국에 큰 충격을 주면서 우주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스푸트닉전부터 사람들은 우주여행을 꿈꿔왔다. 1903년 러시아의 로켓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인공위성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보이는데 성공했지만 미국은 이에 특별히 주목하지는 않았다. 로켓 공학은 그 후 수십 년간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우주 비행에 관한 아이디어는 대중의 환상을 사로잡았다.
1952년 국제과학연맹 이사회 (International Council of Scientific Unions)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IGY)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IGY는 1957년 7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18개월로 예정됐는데 그 이유는 이 기간 동안 태양의 활동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에는 많은 과학 연구가 계획되었었고 지구 물리학의 성대한 잔치였다.
IGY의 한 행사로 ICSU는 그 기간 동안 과학 실험을 위한 인공위성을 지구 상공에 띄울 것을 요청했다. 1955년 7월, 백악관은 최초의 인공위성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고 제안서를 공모했으며 그 해 9월에 해군 연구소(Naval Research Lab.)의 뱅가드 위성(Vanguard satellite)이 채택됐다. 소련 또한 IGY 위성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위성 계획은 세르게이 코로레프(Sergei Korolev)에 의해 주도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1966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비밀로 유지 되었다. 코로레프는 1907년 태어나 대학에서 항공 우주 공학을 공부했다. 1930년대에 그는 장거리 미사일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1938년 그는 날조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진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된다. 그중에는 강제 수용소 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곳도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그와 다른 공학자들은 감옥과 같은 수용소로 보내져서 군사용 로켓연구를 설계하는 일에 동원됐다. 전쟁 후 코로레프는 감옥에서 풀려나 장거리 탄도 미사일에 관란 일을 계속했다.
1953년 코로레프는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에 대한 일을 시작해 1957년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그 로켓의 위력은 무게가 1톤이 넘는 위성을 궤도로 쏘아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과학 탐사는 (이는 훗날 스푸트닉 3호가 된다.) 아직 계획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레프는 뱅가드 위성 계획의 소식을 듣고 우주 경쟁에서 미국을 이기기로 마음먹고 과학 기구를 싣지 않는 더 작은 위성을 쏘아 올리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원래 치올코프스키의 탄생 100주년인 9월 17일에 위성을 발사하려 했으나 그 계획보다 몇 주 늦게 첫 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1957년 10월 4일에 발사된 스푸트닉 1호는 비치볼 크기의 반짝이는 알루미늄 합금으로 된 공 모양이었다. 그것의 무게는 184 파운드로 미국이 계획한 뱅가드 위성보다 훨씬 무거웠다. 러시아어로 "여행하는 동반자"라는 뜻을 가진 스푸트닉은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96분에 한 번씩 지구 주위를 돌았다. 그 궤도는 지구와의 최근 거리는 141.7 마일이고 가장 멀리 떨어질 때는 588 마일인 타원궤도였다. 스푸트닉이 보내는 20 MHz와 40 MHz의 신호는 아마추어 무선통신자도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였고 스푸트닉은 1958년 1월까지 지구궤도에 있었다.
이 삑삑대는 작은 공은 위성 발사에 놀란 미국 사회를 공포로 몰기에 충분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그것의 궤도를 추적했고 그 시그널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중계됐다. 이 위성은 지구상에서도 관찰자의 머리 위를 날고 있는 동안에는 쌍망원경으로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소련이 우주로 위성을 발사할 수 있으므로 핵탄두를 싣고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도 발사할 능력이 있다고 두려워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 위성이 미국을 정탐하고 있다고까지 믿었으며 그 의미 없는 삐 소리가 실제로는 어떤 암호라고 믿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의 말은 "상관없다"는 뜻으로 보였고 이는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소련이 우주 경쟁에서 미국을 따돌렸다는 사람들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미국 국방성은 뱅가드 계획에 더하여 또 다른 위성인 익스플로러 계획을 승인했다. 첫 번째 스푸트닉의 발사 두 달 후 미국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서둘러 뱅가드호를 발사하려 했으나 발사대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마침내 1958년 1월 31일, 미국은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익스플로러 1호는 IGY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인 반 알렌 방사선 띠를 발견했고 이 발견은 1958년 3월 26일에 발사된 익스플로러 3호에 의해 다시 확인 되었다. 1958년 3월 17일 뱅가드호가 발사 되었다. 그것의 무게는 3 파운드로 자몽의 크기와 비슷했다.
스푸트닉의 첫 발사 이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소련은 두 번째 스푸트닉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최초의 우주 여행객을 탄생시켰다.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가 첫 승객이었다. 또 1958년 5월 15일 여러 가지 과학 장치를 실은 스푸트닉 3호가 발사 되었다. 더 나아가 소련은 1961년 4월 12일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수천 개의 인공위성이 있다. 스푸트닉 이후 과학 경쟁에서 미국이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미국의 과학 기술 능력을 향상시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미국 정부는 많은 연구비를 과학에 쏟아 부었고 과학 교육은 학교에서 강조 되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 기술 분야로 뛰어 들었다. 올해 10월은 스푸트닉 발사 50주년이 되며 우주 시대를 여는 과학 기술 혁신의 50번째 해가 되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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