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더프의 생애
1889년 6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
1921년 9월 7일 레지오마리애 창설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대표 참가
1980년 11월 7일 선종
1996년 6월 4일 더블린 대주교 시복 청원
프랭크 더프의 생애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본래 이름: Francis Michael Duff)의 약력과 생전 모습이 교본 20-21쪽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레지오의 산 역사이므로 그의 생애를 알면 교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시복청원 기도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입각한 성모신심을 바탕으로 선교와 봉사를 위한 사랑의 일생이었다. 그의 생애를 가족 사랑,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나누어 소개하려 한다.
1) 가족 사랑
프랭크 더프는 1889년 6월 7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공무원인 존 더프와 수잔 프레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4명과 그는 부모의 따뜻한 가정교육과 사랑을 받았고, 가정이 늘 화목하였다. 저녁에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습관은 프랭크에게 독서와 문학에 대한 취미를 길러주었다. 프랭크는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놀라운 유머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자전거 경주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테니스와 크리켓도 좋아했는데, 불행하게도 크리켓 볼이 귀 뒷부분을 강타한 사고로 인하여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일찍 은퇴하자 그는 학업을 계속하지 않고 18세에 공무원이 되어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중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말을 할 때에는 생기 넘치는 눈으로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였고 재치 있는 설득력으로 상대방을 사로잡았다. 온순하고 친절하고 겸손하였지만 성미가 급한 편이었고, 일단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바꾸기 어려울 정도로 완고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지만 신중하고 포용력 있고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있어서 든든하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므로 늘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모친과의 유대관계는 각별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에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죽고, 어머니마저 별세하였다. 연속된 줄초상으로 말미암은 슬픔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고 사진 촬영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가족을 참으로 사랑하였다.
2) 하느님 사랑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신앙을 유산으로 이어받았고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10세에 첫영성체를 한 후부터 성체는 그에게 신앙생활의 추진력이 되었다. 영적 독서로서 성인전을 즐겨 읽었는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성인들의 사랑은 그에게 개인 성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1913년 10월, 24세가 된 그에게 생애를 바꾸어 놓는 일이 생겼다.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를 터득하고 고통 당하는 신비체에 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2박3일 주말 봉쇄피정에 참가하였다. 그는 피정의 가치를 깨달아 매년 두 차례씩 주말 봉쇄피정을 하였고 예수회 신부를 영적 지도자로 삼아 자주 고해성사를 보았다. 또한 1914년에는 “예수성심 단주회(斷酒會)”에 가입하여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깊게 하였다. 그리고 가정에서 예수성심을 공경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프랭크는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직장 근처의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였다. 그는 1914년 사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던 것이다. 후에 그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기 위해 매일 두 번씩 미사참례를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세상을 하직한 날에도 두 번의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묵주기도를 매일 바칠 정도로 성모신심이 강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지은 「거룩한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을 읽은 후에는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했고, 성모님께의 “봉헌 사열식”(Acies)을 레지오의 연례행사로 확립했다.
1915년에는 가르멜 수도회의 재속회원이 되어서 이후 평생 성무일도를 바쳤다. 프랭크는 하느님 사랑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1915년 10월에 더블린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락 더그(Lough Derg)를 찾아갔다. 그곳은 조그만 섬으로 폐허가 된 옛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2박3일간 참회와 고행을 하였으며, 이후 49년 동안 해마다 그 고행을 하였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예수성심 단주회” 회원의 치유를 돕기 위해 1919년에 처음으로 멜러리 산(Mt. Melleray)의 시토회 수도원을 방문했다.
매년 성령강림대축일 전후에 가지는 한 주간의 휴가 기간을 그곳에서 지내며 수도자들의 좋은 영향을 받았다. 결국 그는 그곳의 모든 수도자를 레지오의 “상급 협조단원”(아듀또리움 단원)으로 만들었다.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한 프랭크 더프의 일생은 개인 성화와 레지오 마리애를 통한 공동 영성으로써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삶이었다.
3) 이웃 사랑
그의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와 성모신심에서 우러나왔다. 빈첸시오회에서 배운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가 그에게 이웃 사랑의 시발점이 되어 알코올 중독자들을 돕도록 했으며 천주교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게 하였다. 프랭크는 프랑스 몽포르 출신인 루도비코 마리아가 지은 「거룩한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을 읽고 성모님에 대한 지식을 쌓으며 성모신심을 더욱 고취할 수 있었으며, 불우한 이웃에게 봉사할 때 성모님의 심정으로 돌아가 성모님의 모성애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웃 사랑에 성모신심을 적용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교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구원의 계획 안에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 맡으신 역할에 대해 참으로 깊이 통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통찰력은 교회의 사명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평신도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이 교본은 이러한 그의 정신과 사상이 온전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교본 20쪽). 프랭크는 병원의 여성 암 병동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그 당시 더블린 대교구 소속으로서 빈첸시오회의 영적 지도자였던 마이클 토허(Michael Toher) 신부와 함께 1921년 9월 7일에 “자비로운 성모회”를 창설하였다.
이 여성 단체가 바로 세계 최초의 쁘레시디움이 된 것이다. 이어서 윤락녀들을 회개시키는 활동과 부랑인들과 미혼모들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여 봉사활동을 하였다. 프랭크에게 가장 큰 이웃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레지오 단원들을 양성하여 아프리카와 남미에도 선교사들을 파견하였고, 공산국가인 소련에 가서도 활동하도록 하였다. 비신자들뿐만 아니라 극도로 냉담한 신자들과 쉬고 있는 신자들도 선교의 대상이었다. 그는 교본 본문의 내용처럼 “1980년 11월 7일(향년 91세)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전 세계에 레지오를 확장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헌신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온 삶을 투신한 그의 삶이 세계교회로부터 인정받아 1965년 9월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으로 초청을 받았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가 시복시성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종 프랭크 더프 시복 청원 기도문”을 꾸준히 바쳐야 할 것이다.ß]
-최경용 베드로 신부-
하느님의 종 프랭크 더프 시복 청원 기도문
저희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프랭크 더프에게
그리스도의 몸인 당신 교회의 신비와
이 신비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는 일을
깊이 바라보는 힘을 불어넣어 주셨나이다.
더프 형제는 이 통찰력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려는 무한한 열망과,
성모님께 대한 극진한 신심을 바탕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하여,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표지가 되고,
모든 자녀들이 성교회의 복음화 사업에
참여하도록 길을 마련하였나이다.
하느님 아버지,
더프 형제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의 용감하고
빛나는 믿음으로 성교회가 받고 있는 무수한
은혜에 감사드리나이다.
굳센 믿음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더프 형제의 전구를 통하여 저희들이 드리는
청원 (..........)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아울러 당신의 뜻과 일치한다면,
더프 형제의 생애가 거룩하였음을 성교회가
인정하여 아버지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