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바이블빌리버
 
 
 
 

친구 카페

 
  1. Gossi
 
카페 게시글
감동 책 역사 인물 Inspiration 스크랩 성경대로믿는사람들 계보, 스코필드 C.I.Scofield 주석성경저자
kingdom 추천 0 조회 151 17.08.11 1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43~1921


스코필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애를 언급하였습니다.

주석성경, 스터디 성경으로 가장 유명한 Scofield Reference Bible을 1907에 저술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Futurism, 세대주의, 근본주의, 감독교회(Episcopalian), 전천년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1843년 어머니가 스코필드를 낳다가 죽었다. 어?때 세익스피어와 호머를 공부했다.

1862년 남북전쟁에 참전?다.

1866 프랜치 캐톨릭 가족인 Leontine와 결혼했다.

1973 29세때 최연소 켄터키 주지방검사로 임명되다.

1877 술에 찌든 생활을 하며 부인과 법적 별거를 시작하고 1883 법적이혼이 성립되다.

1879 친구를 통해 구원을 받다. (Scofield experienced an evangelical conversion 복음적 회심을 체험하다)

1979 James Hall Brooker가 멘토가 되고 D.L.무디 지원하다.

1882 달라스 회중교회 목사로 임명되다. 

1888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영향을 받아 중남미 사역을 시작하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라는 팜프렛 저자로서 곧 세대적 전천년주의의 리더가 되었다.

1895~1902 메사추세스 이스트 노스필드 회중교회의 목사로 일하다. (무디 초대)

1903 달라스 교회 목사로 돌아와 에너지와 시간을 스코필드주석 성경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1909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하면서 유명해졌다. 

 


Futurism is a Christian eschatological view that interprets portions of the Book of Revelation and the Book of Daniel as future events in a literal, physical, apocalyptic, and global context.

By comparison, other Christian eschatological views interpret these passages as past events in a symbolic, historic context (Preterism and Historicism), or as present-day events in a non-literal and spiritual context (Idealism). Futurist beliefs usually have a close association with Premillennialism and Dispensationalism.


<C.I.Scofield에 관해서 가장 잘 정리된 것 같아서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한때 변호사였던 스코필드(Cyrus I. Scofield)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만들었다. 이 성경은 누구나 쉽게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이고도 유용한 도움을 주고 있다. 첫 출간 이래로 지금까지 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 성경이야말로 그가 구원받은 후 30 년간 열정을 쏟은 역작이었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1843년 8월 미국 미시간 주 뉴클린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레나이 시에서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녀는 아들이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 왔었다. 이러한 그녀의 기도는 후에 그가 주님께 헌신하여 변호사를 그만두고, 달라스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응답받게 된다. 1882년 그가 39세 되던 해였다. 그후 가족과 함께 테네시 주 레바논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성장하게 된다. 

감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어 주었으며, 자발적으로 성경을 읽게끔 도와주었다. 어린 스코필드는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하는 열정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후 남북전쟁의 발발로 남부 학교들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그는 버지니아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던 계획을 접어 두고, 17세의 나이에 남북전쟁에 참전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로버트 리 장군의 휘하에서 18번 이상 전장과 여러 소규모 전쟁에 참전하여 영예의 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종전 후, 스코필드는 법률을 공부하여 1869년에 캔자스 주 변호사 승인을 받았으며, 1872년에는 주 의회 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듬해 그랜트 대통령은 그를 검사로 임명함으써 미국내 최연소 검사가 되었다. 그러나 1879년, 그는 공직을 떠나 세인트 루이스에서 다시 변호사 일을 했는데, 그때부터 술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성경을 읽기는 했지만 연구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역사책으로서 성경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의 생애에서 아주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일이었다.
그는 친구인 탐 맥피터즈(Tom McPheeters)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자네는 왜 그리스도인이 안 되었나?" 
"성경에 주정뱅이도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하던가? 자네도 알듯이 나는 술 없이는 못 산다네." 
"아직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네. 왜 자네는 그리스도인이 안 되었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전부터 감독교인이었어. 하지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네." 

맥피터즈는 그의 대답을 듣고 성경을 펴서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다. 구원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스코필드는 모든 사실을 믿었고, 이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36세의 나이에 비로소 새 생명을 얻은 스코필드의 기적 같은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바로 성경적인 구원이었습니다. 맥피터즈는 낡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나에게 차근차근 말해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3:16; 6:48; 10:28, 사도행전 13:38-39 등을 읽어 주었을 때 나는 빌립보의 간수처럼 '내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었고, 그는 다만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순간 나의 죄의 사슬이 풀리고 다시는 나를 얽어매지 못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순간'이라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온전히 하신 일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후 스코필드는 장로교 목사이자 성경 교사인 제임스 브룩스(James H. Brooks)의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브룩스 목사는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체험을 해석해야지, 결코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스코필드는 또 그의 친구 팍슨(C. E. Paxson)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경 여백에다 어떤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 곧 관련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도록 참고 구절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다. 스코필드는 훗날 <스코필드 주석성경>에 이런 식의 관주를 만들게 된다. 

그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회중 교회와 함께 열렸던 무디의 집회에 참가하여 지역 YMCA 관리자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하이드 파크 회중 교회에서 삼 년 간(1880-1882년) 봉사했다. 1882년 텍사스 주 달라스의 제일 회중교회에서 목회를 제안받았을 때, 자신의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길을 택했다.

드디어 그의 나이 39세 때에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받게 된 것이었다. 그 교회는 한 명의 형제와 열한 명의 자매로 구성된 작은 모임이었지만, 그는 곧 자매들의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는 정규 신학교에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브룩스 목사의 가르침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1883년 10월 17일 목사 안수를받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거듭나지 않은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그가 거듭난 지 2년 만에 이혼함으로써 끝맺게 되었다. 후일 그는 교회 회원 가운데 한 자매와 재혼하게 된다.

한편, 달라스 교회는 만 2년 만에 12명의 작은 교회에서 회원 200명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교회는 많은 성장을 이루어 1,200석을 갖춘 두 개의 선교 교회를 설립했으며, 여러 차례 대규모 부흥집회를 열었다. 설교자로 무디(D. L. Moody)를 두 차례 초빙하였으며, 스코필드 역시 무디의 집회에 설교자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5년 무렵 달라스 교회의 성도는 812명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중 3/4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그의 또 다른 위업은 여기에도 있다. 즉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1888년)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달라스에 중앙 아메리카 선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1890년 11월 14일). 또한 중국 선교사역을 시작하고 지휘했던 허드슨 테일러와의 많은 만남을 통해 중앙 아메리카 선교에 대해 깊은 관심과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는 몇 명의 성도들과 함께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교회 예산보다 더 많은 선교비를 모금하여 이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한편, 성경 통신과정을 시작하였는데, 한 때 7천 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하기도 했다. 이는 1915년 무디 성경신학원에 편입되었다. 

1895년, 무디의 권유로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 있는 회중 교회의 목사로 갔을 때 스코필드의 생애에 또 다른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1902년까지 그 지역 농민들과 100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에게 매주일 설교했으며, 그 동안 196명의 구원받은 사람들과 112명의 회심자들이 교회에 더해졌다. 1899년 그의 친구 무디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직접 장례식을 집전하기도 했다. 

그가 노스필드 협의회에 정규회원이며, 또한 노스필드 성경 훈련학교 학장으로 있을 때, 다른 회원들과 함께 뉴욕 주의 롱아일랜드에 씨 클리프 성경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 첫 회의는 1901년 7월 23-29일에 있었다.

그때 그는 게벨라인(Arno C. Gaebelein)과 함께 주석성경을 만드는 데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주석을 달아 놓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참조 구절, 요약, 개요, 소제목 등을 첨가시키고자 했다. 그는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에 입각한 전천년주의를 지키고자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 있는 이러한 부담이, 그로 하여금 다시 달라스의 교회로 되돌아 가게끔 했다(1902년). 그는 달라스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주석성경을 만드는 데에 그의 모든 것을 헌신하였으며, 이 작업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계속되었다. 스코필드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자 첫발을 내딛기는 했지만 어떻게 공부하는지 기초적인 원칙을 몰랐을 때를 떠올리면서, "그때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석성경은 어떤 것이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이 역작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그는 영국과 유럽을 수없이 오갔으며, 그의 부인도 함께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조력했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이 그에게 도서관 이용을 허가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옥스포드 대학출판부가 그의 주석성경을 출판해 내게 된다. 그는 스위스 몽트로(Montreux)로의 여행을 끝으로 이 위대한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이 과정 가운데서 마귀의 큰 방해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불이 나서 원고가 거의 타버렸고, 또 한 번은 몽트로에서 뉴욕까지 배로 부친 원고가 분실되었다. 이러한 갖가지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07년에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완성했으며, 1909년 1월 15일 드디어 출간되었다. 

그는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만들었으며, 스코필드 성경 통신과정을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예언에 관한 설교>, <성령론>, <신구약성경공부> 등의 주옥 같은 책들을 집필했다. 

또 1907년부터는 성경학부의 교수로 초빙되어 대서양을 오가면서 철저하게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설사 그가 보수주의자들에게 설교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근본주의자의 대열에 끼지는 않았다. 그는 1908년 회중 교회와 결별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장로교가 자유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 시에 재정착하여 통신 학교인 뉴욕 성경 고등학교를 운영하였으며, 1914년에는 루이스 췌이퍼(Lewis S. Chafer), 윌리엄 페팅길(William Pettingill)과 함께 필라델피아 성경신학원(현 필라델피아 성경대학)을 설립하고 1918년까지 학장으로 지냈다. 한편 <스코필드 주석성경>의 개역본은 페팅길의 이름으로 1917년 출간되었다. 

1921년 5월 22일, 그는 생애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두 달 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스코필드는 자신의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두 번 있었다고 회고한다. 첫 번째는 성경에 대해 인간적인 가르침을 그만두고 성경 자체로 돌아갔을 때요,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심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아닌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이다. 

스코필드는 36세 때 비로소 구원받았고, 정규 신학교에서 공부하지도 못했지만, 당대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신학자로서 존경받았다. 무엇보다도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나타난 주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은 얼마나 위대하며, 이 성경을 통해 드러난 그 혁혁한 열매들은 또 얼마나 위대한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